[
평창 제1의 기상,,, 제 33회 노성제에서 임진왜란시 항일전 연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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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3회 노성제 임진왜란 항일전 씨나리오
엄기종 2010.08.24. 17:33
장 소 : 평창종합운동장 일 시 : 2010. 9. . 주 최 : 평창J.C.회 동 원 인 력 : 육군 제 부대 100명. 여자 3인 씨나리오‧ 연출 : 평창향토문화전문위원 玄空 嚴基宗 1, 임진왜란 항일전 재현 목적 재현목적은 5천여명의 왜적과 100명도 되지 않은 우리 군사들과의 수적이나, 무기로 보나 도저히 전투 불가한 정황에도 치열했던 당시의 전황을 기록에 의거 리얼하게 재현함으로써, 유비무환이 국가안위를 지켜준다는경고와, 목숨을 버리고 용감무쌍히 향토방위 활동을 실제로 보이신 조상님들의 희생적인 호국정신과, 조선의 여인으로서 왜적의 욕구를 거부하기 위하여 투신으로 지킨 절부의 절의를 가르친다. 2, 임진왜란 항일전 재현 개요 올해(2010)로부터 418년 전인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을 당하였으며, 평창군은 그 해 8월 7일에 왜군의 주력부대인 제4번대 모리길성(모니요시나리)이 이끄는 왜적이 침투하여 8월 11일에 5,000여명의 왜적과 100명도 안되는 우리 민군과 왜적의 조총이나 병력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음에도 방어적 지형인 응암굴을 택하여 장열하게 교전을 하였으나 패하였음. 3, 평창군의 임진왜란 항일전 기록문 강원도 내에는 임진왜란의 기록이 유일하게 평창에만 남아 있으며, 하나는 남천 권두문군수의 문집 2권 속에 있는 호구일록(虎口日錄) 목판본이고, 또 하나는 필사본의 응암지(鷹岩誌)이다. 평창문화원 발행 魯城의 脈 제13집(1998년)의 鷹岩誌(응암지) 원문과 鷹岩誌(응암지) 譯文과 南川 權斗文의 虎口錄(호구록, 南川日記)과 강원일보사 발행(1986.8.1) 金永琪著 江原文化叢書 太白抗戰史 중 ‘平昌의 魯山城(壬辰魯城戰蹟碑 세우다)’과 평창인(현거주 인천 주안동) 李龍均의 鷹巖誌 번역문 기록에 의거 1592년 8월 7일부터 8월 11일 간의 전투장면을 재현한다. 4, 응암굴 주변 지형지세 평창읍에서 6km 남쪽 지점에 평창강이 경계를 이루며 깎아지른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 절벽 중앙에 상ㆍ하로 굴이있다. 상굴에는 10여명, 하굴에는 100여명이 거주할 수 있으며, 그 굴 의 상류 400여 미터에 있는 골자기로 10여보 들어가 사다리로 오르면 100여명이 앉을 자리가 있어 여기가 외대(外臺)이다. 외대에서 10여보 서쪽으로 더 들어가서 사다리를 오르면 하굴로 연결된다. 상굴과 하굴의 거리는 30m 정도이며, 상굴엔 관인과 그 가족 10여명이 들고, 하굴은 100여명의 피난민이 들었고, 외대엔 100여명의 군사들이 진을 쳤으며, 외대에는 입구에 목책울타리를 만들어 방비를 하고, 무기와 돌을 실어 나르는 石車(나무로 만든 수레)를 두어 방어준비를 하였고,외대의 양편 좁은 골짜기에도 같은 방비를 하였다. 골짜기에는 물(澗水)이 있어 굴 중에 양식을 쌓아놓고 식사를 할 수 있는 지역이다. 5, 왜적 침입상황 ▶ 8월 7 -적 선봉이 정선으로 부터 우리군 경계로 넘었다는 보고가 오른다. -강소사, 아들 권주, 고언영, 노비4~5명, 지사함, 품관 지대성, 우응민, 지대용, 이인서, 이대충, 충주피난인 최업, 우윤선, 관속과 촌민 수백명이 응암굴에 입굴 ▶ 8월 8일 - 적이 군내의 침입을 아룀(상호장 이응수, 공방 이난수) - 지사함, 지대성, 우응민, 우윤선, 고언영 등을 왜진에 잠복. - 藥水를 지나 別崖峙(별애재)로 부터 陵洞(하평 능골로 짐작) 栢林口(柏田 또는 栢田山으로 기재 되어 군수는 부임한지 1달 밖에 않되어 한문 기재에 착오로 보이며, 白德山 기슭으로 사료됨)에 밤이 깊어 복병으로 활로 공격하고 퇴각하니, 潮波驛의 왜적을 우리 민군의 복병으로 오인하여왜적들끼리 교전하여 사상자가 많았음. - 나수천은 전투에서 왜군 조총 한 자루를 뺏어 관군으로 승격 ▶ 8월 9일 - 왜적은 潮波에 매복을 하고, 항복하라고 서신을 보냄(사신을 참수함) - 삼방산 아래 진을 친 왜적과 교전, 앞 뒤 좌우 화살 공격. - 매복장 김춘영은 패했어도 적군의 사상이 많아 속죄함. - 전쟁상황은 노성의 맥(응암지 163,~ 168페이지 참조) ▶ 8월 10일 - 뱃재쪽과, 미탄쪽으로 두 곳에서 왜적이 집결을 마침. - 12시경 약수와 천동에 왜군 집결(5,000여명) - 응암굴 거처가 적 2명에게 발각됨, 30명이 달려와 고함쳤으나 날이 저물었음. ▶ 8월 11일 - 해가 뜨기 전에 왜적이 사천강 건너 진을 침. - 북을 치며 사다리를 놓고 침범. - 왜적은 외대 점령. (지사함 ‧ 우응민 ‧ 이인서 ‧ 지대충 창과 총탄에 사망) 점령. * 전쟁 후 지사함은 병조판서로 추존 - 한나절이 되어 하굴은 점령 당하여 모두 포박됨 - 상굴도 점령 - 권두문군수의 처 강소사(31세)는 절벽에서 몸을 날려 자결함. - 언이, 임손, 지대성은 붙잡혔다가 도중에 도망 - 13일 손수천, 이응수, 이순희, 이붕, 관노 명천, 몽현이 포로로 잡힘. 6, 준비사항 제 33회 노성제 임진왜란 항일전 씨나리오(수정1)
별첨 : 1 (전쟁의 각오와 다짐) 권두문공은 ‘한 번 죽고 사는 것은 사람마다 있는 법, 죽기를 당해서 구차하게 사는 것은 우리의 소원이 아니다.’ 라며, 닭과 개의 피를 먼저 찍어 바르면서 ‘천백 사람이 한 마음이 되고서야 왜적을 막아 낼 것이라’ 하고 군민이 다 언약을 다짐하였다. 그 후 노산성의 양지 편에 단을 모으고, 장순 등 26명의 장수의 전쟁고혼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내고 방울을 흔들며 사수천 남쪽에서 훈련을 하면서 ‘군기를 누설하거나, 군 표식을 잃거나, 주장의 명령을 어긴 자는 목을 베이고, 적에게 항복하는 자는 그 가정을 몰수하는 것이니 이것이 군법의 엄함이다. 각자 깃발이나, 호각, 방울 같은 것을 두는 것은 군령을 지휘하는데 쓰는 것이다.’ 하면서 각오와 마음다짐을 훈시 하였다. 별첨 : 2(부서별 명단) 도총 4개 부대 여단장으로 봉사 지사함(智士涵)에게 군사를 위임하고, 선두사령 제1대장에 우응민(禹應民)으로, 김성경(金成慶)으로 왼편 부대 제1대장, 우윤선(禹胤善)으로 우부 대장, 최 업(崔 業)과 김춘영(金춘영)으로 후부 대장, 손수천(孫壽千), 손수업(孫守業), 이득춘(李得春), 박취영(朴取影), 김성모(金聲模), 이 신(李 信), 이 붕(李 鵬)으로 각 부대 지휘관(軍伍長)으로 삼고, 이응수(李應壽), 이난수(李蘭秀), 이순희(李順希)로 척후로 삼고, 관노‧ 관속 30여 명을 군대의 사이에 끼우고, 이인서(李仁恕), 지대명(智大明)을 謀士로 전략을 세우고, 지대성(智大成), 지대충(智大忠), 라수천(羅壽千), 라사언(羅士彦)으로 양식 운반책으로, 지대용(智大用), 이경조(李敬祖), 이개충(李蓋忠)으로 군무의 연락을 맞게 하여 부서별 책임을 결정하였다.(55명) *******&&&&&&&&UUUUUUUUUUUUU&&&&&&&&************ << 임진왜란 당시 항일전 씨나리오 연출장면>> 사진:평창포토뉴스 < 관악대를 선두로 노성제 입장식은 시작된다> < 노성단에 올라 권두문 군수이하 관군과 주민들이 모여 왜적의 침입에 대하여 항전의 결의를 다지고 제를 지낸다> < 보아라 평창인의 용맹스런 기상을 !!> 관군 50여명과 주민 50여명의 합 100여명이 죽음를 담보로 4천명의 왜구에 대항하여 나아가 싸우자는 결전, 그 함성의 메아리는 420년의 시공을 넘어서 지금 나의 귓전에도 울려퍼지는 듯 하도다. 조국의 부름에 기꺼이 목숨을 걸고 나아가 싸우자는 전사들의 충정의 용기와 기백, 또한 솔선수범으로 앞장을 서는 권두문 군수의 목민관으로서의 자세는 시대를 넘어 지금과 또한 먼 후일까지도 울려 퍼지는 평창의 최대의 자랑이요, 귀감인 것이다. 이것이 평창역사의 귀감인 것이다. 이하 평창의 임란 전투 재연 장면은 < 평창 포토 뉴스>에서 보실수 있으며 싸이트 주소는 아래에 첨부 합니다 < 평창 포토 뉴스 > http://blog.daum.net/happy700photo/192 &&&&&&&&&&&&!!!!!!!!!!!!!!!666666!!!!!!!!!!!&&&&&&&& [ 임진왜란당시 평창의 항일전에 관한 후세백작의 생각은?? ] <이 항일전이 평창 제1의 역사인 이유書> 약 420년전의 임진왜란 당시 평창의 노성전투(가칭)은 투철한 국가관과 기백이 진주성전투, 행주산성 전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용기에 저는 평창의 후인으로서 찬사를 보내며 이 글을 씁니다. 임진왜란 당시의 평창의 노성전투의 가두 연출장면을 평창사람들은 매년 노성제 때마다 보아서 아마 식상했슬 수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전후의 설명보완이 없이는, 가두연출로는 정확히 알수 없고 또한 이제는 그저 그런것쯤으로 여길 수 있지만 노성전투는 비록 5-60명의 세의 열세로 4천의 왜군에 대항하여 죽음을 담보로 나가 싸우는 그 기상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임진왜란은 1592년 4월에 왜군이 부산포를 상륙하여 문경새제의 관문을 통과하여 한양으로 진격중 탄금대에서 신립장군은 왜군의 주력부대의 고니시 유키나카(소서행장)군에 패전하고 한양은 함락되고 의주로 피난간 선조를 잡으러 주력군은 평양으로 가고 함경도로 도망간 왕세자를 잡으러 1만의 군대가 함경도까지 올라가 왕세자를 체포, 한양으로 압송하며 약 4,000명의 왜구가 원주의 강원 감영을 접수하러 태백산맥으로 내려오다 평창을 함락 시키는 전투장면이다. 우리 평창으로선 조정의 명에의해 관군 70여명을 조정을 사수하는 신립장군의 부대에 파견보내고 약 50여명의 관군으로 모오리 요시나리(森吉成)가 이끄는 4,000병력의 대군과 어찌 대적할 생각을 했슬까?? 위의 씨나리오를 보면 8월 9일 적의 항복권유문서를 가지고온 조선인의 목을 베고 권두문 군수는 노산성의 단에 올라 항전의 제를 지낸다. " 한번 죽고 사는 것은 사람마다 있는법,죽기를 당해서 구차하게 사는 것은 우리의 소원이 아니다" 라며 명령을 어긴자나 항복을 한자는 목을 베고 그 가족들을 몰수하는 군법의 엄함으로 항전의 각오를 다짐하였다'' 이리하여 군,관, 민이 하나된 마음으로 항전하나 그 세의 열세로 노성산에서 배수의 절벽을 내려 배로 응암굴로 이동, 천연의 요새를 이용하여 왜적에 대항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아군의 열세에 응암굴은 쉽게 함악되고 군수이하 모두들 무장해제되고 포박당하여 압송될때 군수의 소실부인 강여(康女)는 왜인들에게 끌려가 당할 수모를 생각하여 천인 절벽에 투신 자결하였다. 왜구들도 모든 일을 중단하고 왜의 정중한 예로 사절(死節)을 찬미하고 화장의 예로서 장례를 지낸후 다시 진격 하였다 한다. 권 군수는 아들 주와 함께 영월을 거쳐 원주 감영으로 이송되었고 호랑이 굴을 탈출하자는 아들 주의 노력에 힘입어 영월의 고종원 형제 까지도 데리고 탈출하였다. 이미 정선은 왜구에 항복하였지만 이것은 임금의 신하로서 국가를 유린하는 반역행위이고 종전 후에라도 사약이 내려져야 하고 그 가족들은 노비로 삼아야 될 군율을 어긴 것이다. 우리 평창군은 권 군수의 부임 한달만에 왜구의 침입을 맞아권 군수의 이하 모두들 하나가 되어 공격에 대항하여 항전하였다. 특히 당시 편재로서 영월군은 평창군수가 겸임하는 지라 당시 영월의 고종원 형제의 의병모집에 강원도백이 흥원진까지 나아가 줄 것을 명령하였는데 이를 이행하지 못해 고종경 어른이 평창으로 압송 행형(行刑)하라는 강원도백의 명에 백방으로 탄원하였으나 상부의 명이 없기에 권군수는 그의 사형을 집행하고서 갈라지는 민심속에서도 군과 민을 결속 화합하여 수적인 열세속에 목숨을 담보로 대항 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영월 고씨굴 이야기의 고종원 형제의 셋째 종경어른은 평창에서 군율에 의하여 형행되었기에 미완의 의병장으로 기억되어야 하는 것이다.그리하여 미완의 의병장 고종경 어른은 이 후세백작의 13대 직계 조임을 알립니다) 이러한 노성전투의 기상은 당시 임란에서도 진주성 전투, 행주산성전투에 버금가는 기상이다. 국가의 존폐의 위기에 목숨을 담보로 대항하는 용감성은 후대인으로 하여금 그 기상을 찬양해 마지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인 것이다. 우리 평창 역사에 이보다 더한 자랑은 없다. 여기에 강소사 부인의 투신 자결한이야기는 광해군 4년에 경상감사의 상소로 절부(節婦)로 추승 정려되어 그의 고향인 영주시 구성공원내에 정려각이 세워졌다. 평창 응암굴의 이 역사의 현장에는 강 절부님의 시대를 넘어서는 성 모럴적 이야기도 지금 우리에게 들려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엔 지역사회의 뜻있는 분들이 천동리에서 강 절부님의 진혼제를 드리고 그 이야기를 아름답게 가꾸었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우리 평창의 후대인에게까지 자랑하여도 떠떳할 제일의 이야기 입니다. <또한 우리는 강 소사라는 본명보다 임금님으로 부터 절부라는 칭호로 정려되어 높임말의 강절부님으로 부름도 예의가 아닐까 생각 합니다.> #################################################### "" 강절부(節婦) 님이시여....'" 후세백작 님은 꽃다운 청춘에.... 못다핀 꽃 한송이련가?? 낙화암보다 더 푸른물에 한줄기 연꽃으로 피어남을 후대인들은 뉘라서 그 꽃의 아름다움을 모르리요. 님의 연닢은... 절개산 아래 감아도는 사천강에서 언제라도 다시 맺을 꽃 봉우리를 우리는 기다리고 있답니다. ( 후기) 당시 체제로는 평창엔 군수가 상임하며 영월군의 군수까지 겸한 듯 하다. 그래서 영월의 의병장 고 종경이는 강원도백의 명에 으하여 차 상급 부대인 평창군으로 압송되고 강원도백의 명을 평창군수가 주관하여 그 형장의 이슬로 행형 하였다 또한 응암전투에서 군수는 체포되어 원주로 압송된 것이 아니라 영월로 압송하여 가고 다시 원주로 갈때 모리의 군대 3,000명은 영원성(치악산)의 원주 목사 김제갑옹의 머리를 베고 원주를 정복한이후 원주 감영으로 갔다. 그렇다면 강원도백이 그 이전에 의병장 고종경에게 흥원진(흥업면 앞강쯤) 에서 왜구를 막으라는 명은 후일 맞지 않는 사례로 남아야 한다. 그것은 왜구의 본대가 서울의 관문 , 문경새제의 빗장을 풀고 청주의 탄금벌 전투에서 승리하고 한양으로 진격할수 있는 순탄한 길은 충주-목계- 앙성(용포)- 장호원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이때 강원도백 유영길은 용포에서 남한강을 건너 원주로 진격할 왜구를 막자는 뜻이었으나 배를 만들고 강을 건넌다는 위험이라면 차라리 목계에서 귀래로 넘어서 원주로 들어오는 길이 더 안전할텐데,,,, 또한 모든 역사서에 왜구는 신식 무기 조총 때문에 승리한다는 식의 표현에 저 개인적으로는 불만이다. 조총은 유효사거리 50m이고 활은 아마 100 m 도 가능할것이다.백병전식이 아니라면 조총은 무용지물 되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승리의 저변엔 바다에서 조총에 비해 불화살, 포등이 우세했고 그럼 육지에서는 권율 광주 목사의 행주대첩의 승리에서도 조총을 무용화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행주대첩의 왜군 3만에 2만명을 섬멸시키고 승리하는 관군은 그 수가 고작 2,600명이었습니다) 이 자세한 이야기는 저의 글 "" 양말 선생님의 배수지진이란"" 글에서 이해하셨으면 합니다 평창의 전투에선 왜구에 일당 백으로 대항하여 이기기 힘들었지만 원주의 영원성(치악산) 전투에서는 관군 4천명이 왜군 3천명에 패하였다는데 이것은 우리의 무기가 빈약하였던 것이다. 우리의 무기라 하여봐야 화살과 석포( 새총을 크레모어식으로 역어만든,,, 당시 행주대첩에 그 도면들을 양반들에게 나누어 주어 만들게 했다는) 이러한 준비만 있었어도 치악산 가파른 성 윗쪽에서 방어를 하면 쉬 공략 당하지 않았슬 것이란 점이다) 이성계가 왜구들의 출현에 여섯번이나 승리하며 그의 손 끝을 떠난 활의 시위는 왜구들의 눈만 정확히 맞추는 .. 그래서 여섯번째 출격엔 적장의 왼눈에 활을 꽂아 돌아갔다는 이야기는 이 임란은 서인들에 의한 당파싸움만 있었지 우리의 준비가 전혀 없었단 생각입니다 그것이 오늘 임란을 바라보는 반성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 호구록은 권두문 군수님의 직계 12대 종손의 아디 "나무귀인" 작가님이 번역하신 호구록 입니다.이 호구록이란 임란당시 평창군수 권두문이 약 한달간 쓴 일기로 호랑이 굴에서 살아나왔다는 뜻 입니다. http://blog.daum.net/selamatdatang/13173800호구일록(虎口日錄) 평창시내엔 북측에 노성산이 자리하며 둘레엔 사천강이 태극을 그리며 굽어 감돈다. 노성산은 背水之陣의 물을 등지고 진을 칠수있는 마치 행주산성보다 더한 요새를 지니고 있다. 임란당시엔 북측의 7~80도 절벽을 로프등을 이용하여 내려와 배로 천연요새인 응암굴로 방어진을 물러섰다. 정제산(솥뚜껑 형상)의 산 이었으나 강 절부님의 곧은 절개의 투신으로 절개산으로 불리워 진다. 절개산 아래의 이 절벽의 전경사진이며, 강물의 깊이는 수심 3~7m까지에 이른다. ---------------- 終------- 4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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