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월정사에 대한 나의 이해

2) 월정사 8각9층석탑의 諸 문제 (본론 1)

             ( 본   론 )                                                                                                           

국보 48호인 월정사 8각9층 석탑의 원형은 8각13층 석탑이었다 점의 기록을 찾아 역사적 사실의 진위의 당위성과 동 탑의 설계기법의 논리적 모순을 통해서 동 탑이 9층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문제점을 지적하며, 가칭"탑파의 생명선"으로 보월정사탑이 9층보다는 13층 탑이라야 더욱 세련되고 완성적 원형이라는 야기를 전개하여 본다.

 

(1) 월정사 탑이 8각 13층 석탑이라는 역사기록 고찰

 

1) 1970년 월정사 8각8층 석탑을 해체 복원공사의 책임자 정양호 선생의 월정사 리포트 글을 인용한다.

 

德 田 의 문 화 일 기      http://blog.daum.net/kkks1/203

 

◈  한국미술사상 월정사 八角九層石塔의 의의.

                                                                      정 영 호 (한국교원대학교 명예교수)(본문 내용중 발췌)

1970년 10월 3일에 착수하여 8일까지 6일간 소요되었는데 해체와 실측을 동시에 시행하였다. 이때  책임은 필자가 담당하였고 실측은 홍사준씨(전 부여국립박물관장)가 진행하였는데 이호영씨(전단국

물관 연구원)가 함께 하였으며 작업은 장한건설회사(대표 정복영)가 맡았었다 -- 이하중략

 

문양들은 파손된 부분이 많았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보아 동북방으로 약간 기울어졌고 오랜세월 風磨되어 풍화작용이 극심하였다. 특히 옥개석 부분에서는 각층을볼때 완전한 층이 적고 파손된 층이 았으 각층 옥개석의 8귀 전각에 달렸던 풍탁이 거의 半이상이 결실되어 있었다.

 

이러한 모든 점에서 이 석탑을 전면 해체 복원하는 사업이 결정되어 1970년 10월3일에 해체 작업이 

던 것이다.--- 이하 중략

月精寺 창건과 그후 중창에 관해서는 월정사에 남아있는 기록에 의하여 잘알 수 있는바 그 내용을 간

점만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① 新羅善德女王十四年乙巳  慈藏律師入此山  奉安佛頂骨于中臺寂滅寶宮 因創月精寺 建八角十三層

佛舍 利三十七粒……

즉 신라 善德女王14년(645)에 자장율사가 창건하고 동시에 8각13층 석탑에 佛舍利 37粒을 봉안하

데, 기의 13층석탑은 기단부를 탑신의 층으로 잘못 적은 것으로 생각된다. 

 

통일신라시대에는 聖王이 월정사를 중수하였으며 고려시대에 이르러는 太祖6년(923)에 信孝居士가 건하고 제25대 忠王2년(1276)에 信義禪師가 三創하였 조선시대에는 太祖元年(1392)에 有緣大師가 四創하였고 제2대 定宗2년(1400)에는 太祖가 幸行하여  連谷縣의 土地二十結을 특사하여 上院寺에 속한 寂滅寶宮의 香火資를 만들는 것이다 ---이하 생략

 

2) 鮮佛敎通史(조선불교통사)는 1918년 李能和(이능화) 거사가 저작하고 육당 최남선이 감수하였는 부처님 舍利塔(사리탑)이 있는 곳을 기록하여 두었다는 그곳에서 월정사탑이 13층이란 글을 인용해본다.
http://blog.daum.net/kkks1/192

 

1,達城郡八公山所在桐華寺金堂塔奉安世尊舍利
달성군의 팔공산에 있는 동화사의 금당탑에 세존님의 사리가 봉안되어 있다
2,梁山郡鷲樓山所在通度寺金剛戒壇奉安世尊舍利
양산군의 취루산에 있는 통도사의 금강 戒壇(계단)에 세존님의 사리가 봉안되어 있다
3,達城郡毘瑟山所在龍淵寺浮圖奉安世尊舍利
달성군의 비슬산에 있는 용연사에 浮圖(부도)와 세존님의 사리가 봉안되어 있다
4,平昌郡五臺山所在月精寺十三層塔奉安世尊舍利
평창군의 오대
산에 있는 월정사의 13층탑에 세존님의 사리가 봉안되어 --- 이하 생략.

 

의 두 기록에서 월정사탑은 9층이 아닌 13층 석탑이라 표시하고 있다.

 

1)항의 글에서 월정사에  비취되어있는 중창기록에서 월정사 창건당시 8각13층 석탑의 기록은 마치 경사지 4각13층 탑처럼 현 8각 9층석탑과는 다른 양식이었슬까??

 

월정사 창건당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보존하기 위한  떠한 라도  분명 있었어야 할 것임엔 틀없는 사실이라면 라시대의 정혜사지탑 같은 소규모의 13층탑을 월정사에 조성하고 감실에 사리를  이것이 창건 당시의 13층 탑의 기록 아닌가 가상적으로 추정해 보고 이후 고려시에  중창당시 현재의 8각9층 석탑을 만들었슬까?? 

 

이래야 역사의 기록이 맞는 논리일까?? 그러나 그런 기록은 발견하지도 했지만 지금 무엇이라 단정하 어렵다.  그 이유중 하나는 1918년 이능화 거사의 "조선불교통사"에서도 월정사 탑이 13층이라 하였기에 현 9층탑 1918년 당시엔 13층 탑이었기에위의 가은 인정치 못한다.

 

또한 이능화 거사가 1918년에 쓴 "조선불교통사"에서도 월정사 탑을 13층탑이라 했는데  그가 직접 보지, 同 문헌을 참고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집필 당시까지는 9층이 아니었기에 13층으로 저술한 주된다.

 

이 두 문헌이 동일 문헌인지는 알 수 없어도 문헌상에 월정사 탑은 8각13층 탑이라 기술하고 있다.

그럼 여기서 두 문헌의 가상적 한계를 그려보면 신라때 13층탑이 사실이라면 현재의 탑은 12세기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또한 이후 한번에 쓰여진 일괄적 기록이라면 그 사실도 다시 증거를 세

야 할 것이다.

 

1918년 간행된 이능화 거사의 "한국불교총람"에서 동탑이 13층이라면 이것이 신라의 문헌을 그

 옮겼다 할지라도 이 책의 감수는 육당 최남선이 하였다 한다.  아마 이때 감수를 도와주는 실무담당은  전문적인 스님이 하지 않았슬까 생각한다면  이때까지 13층의 석탑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이 4개층을 뗀 기록이 아예 없던가 아니면 6,25 한국전쟁당시 월정사 7불전및 당우까지 22채 모두

전소될때 그 기록도 함께 화마에 휩쓸렸슬까??

(그러나 이런  내용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다만 가능성의 추정치 입니다)

 

또한 위의 13층 탑의 기록이 창건당시에 쓴 기록이 아닌 (제23대 純祖32년 (1832)에 泳潭·仁坡·師가 七創 하였다는 것이다)기록이 있은 후 일괄적으로 쓰여졌다면 그리고 또한 오류가 있었던 생각한다.

문제의 결론은 알 윗 글중에 정양호 선생이 지적하신 기단부 바닥면까지와 2층 기단의 이굽도리두 합하여13층 기록할 사람은 없슬듯 하다. 그럼 이 기록의 진위에 신중을 기해야 할 듯하다.

 

기단부를 탑신의 층으로 잘못 적은 것으로 생각된다는 말보다  차라리 알수 없는 기록이다라고 하였다면

그 의미의 또 달랐슬 것이나 권위있는 학자의 단정적 말에 이 탑이 9층이 아닌 13층의 기록을

으면서도 의문의 없이 지금껏 당연 원작이 9층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동 탑이 9층이든 13층이든 이전에 권위있는 역사가가 역사에 이러한 글은 오점을 남기는 愚를

 것 아닐까 한다. 왜냐면 이로서 동 탑의 13층 기록은 사실이든 아니든 진위도 못 가리고 권위에 눌려

필요 휴지조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70년 해체,보수공사시의 위의 "월정사 8각9층 석탑의 의의"의 내용속에 철로된 찰주는 4,3m로 9층 탑석을 관통하여 8층 옥개석 상단에 철편으로 고착시켰다는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천년세월에 위 상륜부 금동

철재장식들의 무게와 화재와  풍압에 못이겨 균열을 아마 조선시대에도 이것에 수 많은 보수공사를 시행

했듯 월정사탑은 13층이었는데 이후 해방 이전 제 강점기 어느 시기에 탑신과 옥개석 4개층을 떼어내는 보수공사를 또한번 하지 않았슬까 하고 추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 나는 그 기록을 유추하여 아래에서 동탑의 기술적 문제를 거론함에 앞으로 학계에서는 나의

물음에 명 답이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동 탑이 시대사적으로 10세기가 아니라 12세기라야 맞는 이유를 쓰겠습니다.

아래에서 다시 8각과 4각의 탑의 문화사적인, 시대적 조형상에서 다시 논하기로 한다.

 

*주 ; 상현거사 이능화(1869~1943)

조선 고종 6년에 충청 괴산생.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으며, 법무협판이었던 아버지 이원긍李源競를 따라 서울에 와서 신학문을

배웠다.

영어·불어·중국어·일어의 4개 국어에 능통했다는 그는 처음에 농상공부에 주사로 취임하였으며, 

      립한성외국어학교 학감을 역임하였다. 1910년 한일병합 후에는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으며, 사료의

수집과 종교 및 민속 방면의 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1915년 3월에 『불교진흥회월보』를 발행하였으며, 그 이듬해 4월에 『조선불교계』를 발행하였고,

다시 그 이듬해 3월에는 『조선불교총보』를 발행하였다.

이처럼 이능화는 재가불자로서 불교문화활동에 헌신한 독실한 거사였다.

그 무렵(1918년)에 그는 불후의 역저 『조선불교통사』를 간행했다. 

『조선사회사』, 『조선유교급유학사상사朝鮮儒敎及儒學思想史』, 『조선의약발달사朝鮮醫藥發達

史』, 『조선십란록朝鮮十亂錄』, 『조선잡고朝鮮雜考』 등의 많은 책을 썼는데, 문헌학적인 측면에

서 각 분야를 개척한 공이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