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월정사에 대한 나의 이해

6) 월정사 8각9층석탑의 諸 문제 (본론 5)

(2) 고려문화의 배경인 송나라 문화사

여기서 잠시 인터넷 검색에도 별로 없는 송나라에 대하여 이해의 해보면...

송나라는 월나라를 재패하고 중국 중원을 차지하여  서기 1.000 년경에서 약 200년간 중국 역대 가장 돈  시인, 묵객이 많은 중국 역사상 최고의 르네상스 시기를 구가하였다.

송나라는  실크로드로 서역에 금, 은, 비단을 수출였다고 검색되나 어쩌다 한번 철(鐵)을 생산하여  많이 만들었는데 전쟁에는 약했다고 검색이 되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상세한 이해를 해 보면 송나의 실체를 바로 알 수있슬 것 같다.

송나라가 금, 은 비단을 실크로드를 타고 서역으로 수출하여도 서민은 배 부를 수 없다. 요즘 석유 부국들처럼 앉아서 돈 버는게 아니라 서민은 일을해야 풍요를 가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송나라는 철기 생산의 부국이었다.

역사상 철기시대는 바그다드의 힛타이트족이 철의 재련법을 발명하여 청동기시대보다 빨리 왔으나 화목

 땔감으로 철을 녹이기 힘들어서 련법은 까다로우나 용이하게 녹일 수있는 청동기시대가 왔고 이후 실크로드를 타고 중국으로  유입된  제련법으로 송나라에서 주철을 생산하였다.

 

당시 송나라는 계의 주철(주물로 녹이는 철)의 3/4를 생산하게 되었다. 이는 인터넷 검색에 어쩌다 석탄으로 녹였다하나 중국 중원 일대엔 석탄이 생산되지 않고 서방에도 석 있었지 않았겠는가??

 

당시 서구사회는 철의 원석을 찢고 원심분리하여 철 알갱이를 모아 불에 달구어 두두려서 철을 생산하는 법으로 철기생산이 미약하였으나  송나라는 풍로의 발명과 숯을 이용하여 화목보다  약 200도 온도를 있어 주철을 생산하였던 것이다. (이때 중원일때의 나무를 전부 벌채하여 숯을 만들어  히말라야는 퓐바람(고온다습)에 오늘날 황사현상을 가중시키는 것이 되었다)

 

어떤 사이트엔 송나라는 무기를 만들어 팔았는데 군사력이 약해서 북방민족이 처들어오면 막대한 돈을어 돌려보내곤 하였는데 무기를 수출하며 무기를 많이 갖고있는 송나라가 조그만 북방 민족에게 군사력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아이러니가 아니다.

송나라는 수출에 많은 부분이 무기여서 이를 상품으로 취급하여 철을 부어 무기를 생산한 것이지 호사럽고 사치스런 나라로 군사력은 미약하여 결국 200년만에 남송으로 천도하여 150년의 역사를 더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송나라는 주철을 부어 무기를 생산하여 수출에 힘 입은바 경제대국이 되었고 그로서 송나라 200년인, 묵객이 제일많고 동양화에 실경산수화법의 북송화나 남송화, 그리고 남송시대 주희의 주역중국 역대에 가장 르네상스시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송나라가 풍로하나 발명으로 중국 역사상 가장 부국이 되었고 그들의 문물은 아직도 전래되어 지금까우리에게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것을 알게 모르게 많은 것이다.

나의 블로그에 "옥황상제"란 단어가 있다. 이것은 어느 종교에서 사용하던 단어가 아니라 송나라때 하늘 을 일컷던 말로 세종때 우리 고유의 별자리 "천상열차 분야지도"에 북극성쯤의 천궁 자미궁에 임님을 황상제라 하였다.

 

이 글의 본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 철의 역사를 쓰는것은 송나라 역사와 문화의 개요를 쓰지 않으면 탑을 북방이나 고구려 계승이라며 이형의 문화라 치부해 버리기는데 옛것의 복고적의 한계를 넘어 진문화의 차입으로 문화는 모방뿐 아니라 창조와 지속 발전 되는 것이다.

                           

 

 

< 위의 사진은 개보사 탑이다 >

개보사탑은 송나라 수도 카이펑(開封)의  철탑공원에 접인전(接引殿)이란  불교사원의 탑으로 55.63m팔각 전탑이다. 이 탑은 송 태조가 석가모니 사리를 항저우에서 동경(東京:개봉)의 자복전(滋福殿)동시켜 개보사(開寶)를 지어 경성지관(城京之冠)이라 불리던 13층 목탑에 석가모니 사리를 관하였는데, 이 탑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개보사탑(寶寺塔)이다.이 탑이 건설한지 55년만에 낙뢰를 맞아 불타자, 1049 송나라 인종이 탑의 자리를 옮겨 유리벽돌로 꾸어 탑을 다시 지은 것이 지금의 철탑이다.

 

개보사 탑은 송나라 초기에 8각 13층 으로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신 유리전탑이다.

이 시대에 이후의 월정사탑도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신 8각13층(문헌상) 화강석 석탑이다. 어쩜 월정탑은 중국의 개보사탑을 모델로 하였슬까?? 이를 단정적으로 말할순 없다 하여도 월정사탑의 팔각이 구려 풍의 복고적 탑이라고 하기에도 그 한계가 있다. 4각이 8각으로 변하였고 다층일 뿐이지 탑의 각 부분의 전문적 양식에서는수법을 우리의 전통양식인 통일신라의 4각3층석탑의 수법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그러면서 월정사탑이 9층이든 13층이었던 그 배경은 송의 선진문물의 차입이었던 것이다.

 

팔각탑의 팔각을 어떤이들은 불교의 8정도에서 그 의미를 찾기는하나 정확한 근거는 없는듯하다.

또한 남송의 "주희"는 주역에서 팔괘를 다시 정리하였는데  팔괘는 음,양의 이치로 하나의 세계관을 형

하는것으로 송나라 초기부터 널리퍼진 팔각도형으로 풀이되며,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탑파도 신심의 하나의 이상세계를표현하는 것으로 그 이상세계를 도형을 8각으로 나타내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또한 월정사 팔각탑의 상륜부의 금동의 철재장식으로 표현된 용차의 수레바퀴같은 금동 철재조각을 본다면 우리의 탑중 이렇게 상륜부를 세분화하여 아름답게 표현한 탑은 없다.

이전의 탑들에서 철기를 사용한것은 좀 미약하며 감은사탑의 철간정도라면 월정사탑의 상륜부의 하나 통일되고 완성된 철재장은 이전에 탑파에서는미약하던 철기 문화로 송나라시대의 주철 문화에 힘입은 바 크다 할 것이다.

 

그러면 이 월정사 탑의 조성연대는 10세기 설과 지난해 조계종 발국조사단의 탑의 주변 아래층에서 11세기 동전출토로 동 탑의 제작 년대를 12세기 초 이후로 잡는다고 공식 발표하였는데...

송나라는 9세기 말에 개국하여 그들의 철기재 생산으로 인한 르네상스적 부흥은 11세기에 꽃을 피웠다면 10세기는 아직 철을 녹여붙는 주철의 시기가 아니기에 10세기 설은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본제와 관계없는 잡다분한듯 하지만 이로서 송나라 문화와 그의 영향등을 대강이나마 이해하면 과연 동 월정사탑이 북방이니 고구려 계통만은 아닌 또한 신라말 귀족적이 아닌 모든 사람들이 평등한 선종의 불교로 대승불교를 이룸에 송나라의 선진문화의 이입이란 점을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더욱 송나라 개보사탑의 석가모니 진신사리 모심이나 월정사탑의 진신사리는 똑같이 불자의 공양이 영원세계향하는 불자의 마음인 것이다.

이를 비교하지 않아도 월정사탑과 동 지역의 신복사지 탑의 두곳에서만 나타나는 약왕보살(석조여래좌상) 의 조각적 수법으 볼때 이 지역이나 또는 이 불탑에 관계하는 스님중에라도 이미 중국으로 구도의 길을 다녀왔던가 당시 중국과 교류가 있었슴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화는 복고적인 것은 그 한계가 있으며 동시 선진문화의 수용이란 양면성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

다. 그리고 보면 월정사 탑은 신라에 바탕을 두고 고려적인 수법에 복고적과 선진화의 문물을 다 수용면서 계승 발전해 가는 독창적인 창조의 탑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