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탑의 제작기법의 생명선(앙각)과 월정사탑에 적용
신라 3층 석탑이든 고려 다층 석탑이든 각 층별의 탑신과 옥개석의 길이의 분할은 어떻게 하였슬까??
탑신의 1,2,3층의 비율이 1;2;3이 아닐테고, √ 를 도입할 것도 아닌데 어떤식으로 분할하였는지 자못 궁금하다.
아래의 사진은 신라의 대표적인 두 탑 감은사 탑과 고선사지 탑의 이 두 탑을 비교 분석해 보기로 한다.만약, 새로 탑을 하나 축조한다면 그 설계도에서 맨 처음 할일은 무엇일까??
그리고 1,2,3층 탑신과 옥개석의 높이를 얼마큼씩 잡을까??
각 층의 옥개석 크기의 그 비례들을 알 수 없고 임의대로 대강 주무른듯 하지만 그 값은 질서를 가지는 듯 하다. 기존의 모든 탑들에서 가장 공통된 점은 각 층의 옥개석 위의 전각의 코너를 위, 아래층을 사선으로 이으면 탑의 중심축에 비교해서 보이지 않는 임의의 사선(앙각)을 만들 수 있다.
이 앙각의 임의의 사선이 일직선이며 옥개석의 경사도 기울기를 가지는 탑의 생명선이다. 모든 탑들의 이 임의의 사선의 기울기 값의 앙각이 대략 90˚ - (7~15도)를 뺀 83~75˚이다다만, 이 사선이 전각이 닿지 않거나 넘어서는 탑은 그 모양새가 떨어지는 정교한 탑이 아니기에 본 논제의 대상에서 제외된다.그러기에 전각 코너점이 앙각에 일직선으로 정렬될때 가장 안정적이고 표준적인 탑이 됨을 볼 수 있다.
그러면, 하나의 탑을 만들고자 할때 그림에 제일 아래에 1층의 탑신과 옥개석의 모양을 만들고, 이 임의의 사선을 긋고 이 사선에 2, 3, 4, 5층들의 꼭지점을 따면 되는 것이다.대부분 빼어난 조형의 석탑들은 이 꼭지점들의 사선이 앙각의 일직선상에 있으나 좀 어둔하고 떨어지는 탑들은 (탑신 길이 비례와 옥개석의 크기를 못 맞춘 탑들은) 그 꼭지점이 임의의 사선에 들쭉날쭉 거린다.
(위 사진의 해석)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두 탑을 비교하여 분석해 본다. 그 하나는 감은사 탐이며 나의 느낌으로는 언제나, 어떤 사진을 보아도 감은사 탑은 도도함을 느낀다.
상륜부는 모두 생략해 버리고 약 5m의 철간을 꼽아서 탑을 더욱 단순화 하였으며 여기에 경사도 값도 그런 도도함의 분위기를 맞추려고 10도의 급경사도 값을 가지며 이로서 이 탑은 어디를 더 보태거나 뺄 값이 없는 탑으로 나에게 가오는 느낌은 어떤 도도함의 위압감마져 느낄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오른편엔 고선사 폐사지에 남아있는 탑이다. 이렇듯 목조건축의 고선사는 없어지고 스님들은 간데 없지만 그러나 화강암의 돌로 된 탑은 천년이 넘게 혼자 남아서 우리에게 언제보아도 친근한 균형의 미로 통일신라 정형의 빼어난 미를 자랑하고 있다.이 탑은 탑신의 길이에 옥개석 넓이까지도 가장 안정적 균형의 길이를 가진 일반율의 아카데미적인 탑이다. 여기에 각층의 임의의 사선의 값을 완만한 경사도로 15도의 경사값을 가진다.
이렇듯 이 임의의 경사값(앙각)은 탑의 특징을 자아내고 있는 숨어있는 비밀의 생명선인 것이다.
그리고 또한 위 사진의 오른쪽 노란 선들의 값은 1층의 탑신과 옥개석을 100으로 기준 잡았슬때 2층,3층의 값이다. 각층의 탑신과 옥개석의 합의 거리 감소비례의 체감률과 더블어 층별 탑신과 옥개석간의 상호간 거리감소비례의 상수가 있는것인지 아니면, 마치 과학에서 실험 물리학자의 의뢰로 천재소년 맥스웰이 전자파동 방정식을 만들었듯이 탑신과 옥개석의 층별 축소비례에 어떤 새로운 수학적 함수의 새로운 공식을 창출할지도 알 수 없는 기묘한 비례로 이 연구는 과제로 남기겠다.( 단, 위 사진은 사진을 통해서 보는 투시도적인 값으로 실제 거리보다 투시도의 거리값은 작게 나타나는 것임을 공지한다)
이렇게 분석하여 볼때 월정사 8각 9층탑은 다층의 탑이기에 임의의 사선의 값이 현저히 줄어들어 7도의 경사 값을 가지기에 앙각(仰角)은 73도이다.
일반적으로 3층 탑일 경우는 옥개석 기울기 값이 13~15˚를 나타내지만 5층및 다층탑의 경우에는 7~9˚의 경사도 값 분포를 나타낸다. 이것은 즉 3층석탑의 경우 일반적인 앙각은 77~75도이며 5층및 다층석탑의 경우에는 83~81도의 앙각을 가짐을 알 수 있다.
(아래사진 ; 가끔 화마에 의하거나 폐사가 된 절에 화강암으로 된 탑만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대산 월정사의 경우에는 6,25때 중공군 개에 후퇴하며 워커 한국주둔 미8군 사령관의 명에 의해 월정사는 전소시키며 칠불전 및 당우 22채 모두가 전소 되었지만 유일하게 탑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6,25때 월정사는 전부 전소되고 8각9층탑만 남은 사진)
(6,25전의 월정사 칠불보전 전경사진)
오른쪽 사진은 한국전쟁당시 9,28 수복후 북진하는 국군에 밀려 올라가는 공산군이 오대산 월정사로 퇴각, 오대산 전투의 치열한 공반전이 있은 후 중공군 개입으로 1,4후퇴시 워커 미 8군 사령관의 명령으로 김백일 군단장의 지시로 월정사 소각명령이 하달되고 찬, 반의 씨름끝에 공산당 치하에 떨어질 것을 염두에 두고 민간인 3이 월정사롤 전소시켰다.( 이 당시에는 월정사 부근의 관대거리에 산판 노역자들의 민간인이 지금보다도 훨씬 많은 260여호 있었다 한다)
물론 군인이 야속하다고 생각할지는 모르겠으나 6,25 일년전인 49년에는 빨치산 유격대의 이호재의 오대산 제 1병단의 무장공비들이 판을 치고 있었으며 , 인천상륙작전후 인천 시내 복판의 해광사란 절은 인민군의 본부로 사용되는 등 이러한 페단에 전국 사찰의 전소 명령은 내려진다.
전쟁이란 정론이고 보호차원이 아니다. 독,소 전쟁시 스탈린은 진격하는 독일군들이 추위에 얼어 죽도록 반경 69km이내의 가옥은 모두 불테웟으며 시민들은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공역도 없게 작전을 펼쳤다.
그러기에 월정사 전소는 지금의 생각이 아닌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이로서 칠분전을 포함한 당우까지 22채 모두 전소되었고 성보문화재등 모든 기록이 불타고 화강암으로 된 월정사 탑만 남게 되었다. 탑은 그 견고함으로 역사의 격랑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외부에서 비 바람을 견디며 천년을 넘게 존재하는 그 영원성에서도 감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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