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월정사탑의 조형양식과 사회적 배경
1) 고려불교의 역사적 이해
우리나라의 탑들은 인도나 중국엔 전탑이나 모전석탑이 전래되며 처음엔 목탑을 조성하였는데 화재나 견고성등의 이유로 석탑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그래서 석재로 목재탑의 효과를 나타내려 하였던 바 모든 탑의 탑신부에는 아직도 목재의 효과를 나타내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지형적 특수성으로 견고한 화강암으로 불탑을 조성하게 된다.
그래서 석탑은 우리의 고유양식으로 자리하며 약 천여기가 조성되어 있다 한다.
그 중 통일신라의 전통적인 3층 석탑은 하나의 정형의 완성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었으나 고려로 넘어오며 고려의 석탑들에서도 신라의 양식은 계승되지만, 고려 사회기반의 향상과 불국토로서의 국권에 힘입은 불교는 신라의 귀족적 편애에서 보편적 禪사상의 확산되며 서민적 지향을 가져오며 천편일률적이던 신라 3층 석탑의 양식에서 더 다양한 문화흡수와 저변확대로 탑파 양식에서도 다양성을 나타내고 있다.
삼국시대 불교가 전래된 이후 신라에서는 원효의 해동종이 신라 불교의 모태가 되지만 통일 신라 말기
로 갈수록 불교는 골두품의 귀족계급의 종교로 성장하였으며, 중국 선종의 달마 이후 6조의 혜능의 선(禪)사상이 수입되자 이들은 이단으로 서라벌에서 먼 변방으로 쫒겨나 설악산, 금강산으로 이땅의 불교는 마침내 산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신라말 5교9선을 보면 귀족의 교종은 서라벌 근방에 9선의 선종은 깊은 산속에 있슴을 알 수있다)
이후 고려가 개국되자 개국이념에 불국토로서 대각국사 의천은 "교주선종"을 주창하지만 이에 평민사상의 선종은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돈오점수" "정혜쌍수"가 주창되며 화엄의 선(禪)사상의 대중지배시대의 대승불교로서 모든이의 불국토의 정토신앙으로 자리매김 하게 되었다.
이로서 불교 문화양식도 교종의 귀족문화에서 선종의 평민사상으로 변하게 되며 이에따라 탑의 양식도 교종사찰들의 신라 4각3층 양식의 전통은 무너지며 새로이 선종사찰들은 서민들의 평등이며 대상체는 전국적이라 각 지역적 문제와 욕구의 표출로 자연 다변화의 욕구에 맞게 탑의 형태도 변모해 갔다. 신라의 "정형탑" 이후 탑이 쇠퇴되어 신라말에는 축소된 "일반탑"이 만들어 졌으며 고려초에도 선종의 많은 사찰에 작은 이 일반탑이 세워지게 되었으며 고려 탑들은 신라 정형탑에서 간략히 변형을 보여주고 있으나 또 한편에서는 신라말 귀족계급에 반감을 가지는 지방세력들의 신앙심의 표출일텐데 이 탑들은 고구려 복고적인 8각 다층탑들을 건립한다.
그러나 그 세부적 미의 표출엔 신라양식에서 시대감각적으로 변화를 가져온것 뿐이다.
위의 인용글은 정영호 ( 한국교원대학교 명예교수)의 "한국미술사상 월정사 8각9층 석탑의 의의"의 3장에 고려시대석탑의 글을 다시한번 인용하면,,
"토착세력의 참여로 지방적인 특색이 현저하게 나타나게 되었을 때 신라의 옛 땅에서는 신라석탑의 계통
들의 신라 4각3층 양식의 전통은 무너지며 새로이 선종사찰들은 서민들의 평등이며 대상체는 전국적이라 각 지역적 문제와 욕구의 표출로 자연 다변화의 욕구에 맞게 탑의 형태도 변모해 갔다.
신라의 "정형탑"이후 탑이 쇠퇴되어 신라말에는 축소된 "일반탑"이 만들어 졌으며 고려초에도 선종의 많은 사찰에 작은 이 일반탑이 세워지게 되었으며 고려 탑들은 신라 정형탑에서 간략히 변형을 보여주고 있으나 또 한편에서는 신라말 귀족계급에 반감을 가지는 지방세력들의 신앙심의 표출일텐데 이 탑들은 고구려 복고적인 8각 다층탑들을 건립한다.
그러나 그 세부적 미의 표출엔 신라양식에서 시대감각적으로 변화를 가져온것 뿐이다.
위의 인용글은 정영호 ( 한국교원대학교 명예교수)의 "한국미술사상 월정사 8각9층 석탑의 의의"의 3장에 고려시대석탑의 글을 다시한번 인용하면,,
"신라석탑은 지역적으로 볼 때 대체로 경주 부근에 밀집되어 있으며 그밖에 것도 대략 옛 영토인 영남지역에 편재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고구려나 백제의 옛 땅에도 약간의 遺例가 있으나 소수에 불과한 형편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이르러는 數적으로는 개경 부근이 우세하나 그 유례는 전국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첫째, 고려시대의 석탑은 지방적인 특색을 현저하게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고려시대의 석탑은 前代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각양각색의 새로운 특수한 형식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위 인용글에 보면 고려석탑은 신라 전통양식의 기반 위에 지방적 특색의 변화를 가져오고 전국적이라는 것은
신라의 귀족적 교종에 반발하여 고려의 불교는 선종으로 대중적 기반 위에 지방 호족세력의 지원으로 각 지방의
특색을 나타내게 되어갔다.
이로서 평민사상의 선종은 중생은 평등이라는 개념하에 전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불자의 신앙심을 갖게 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는 신라의 귀족, 엘리트적 사회가 고려에선 "돈오점수"의 "모든 중생은 깨우치고 닦아라" 어찌보면 대중 교화적인 사상으로 이는 오늘날 까지도 약 천년간 우리나라 불교의 지배적인 대중적, 서민적인 불교로 지향하며 각 지방의 특색과 시대성을 반영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월정사는 지금은 평창땅이지만 고려시대의 평창은 충주부 관할이었지만 진부, 봉평은 강릉부 땅이었기에
월정사는 강릉 지방세력의 사찰로 의미는 더 깊다.
월정사 탑 앞의 석왕보살은 강릉 신복사지탑 앞에 공양을 드리는 보살과 비슷하며 우리나라 탑파 중 이
두 탑만 석가모니 사리를 보관하는 탑 앞에서의 공양을 드리는 석조보살은 강릉지방의 지역적 특색이고 이는 밀교적 라마불교의 영향이라 한다.
이렇듯 고려의 불탑은 그 양식이 백제의 탑에 기원을 두고 신라의 탑파들이 이루어 놓은 양식을 기조로 각 지역 즉 신라, 백제, 고구려의 복고적 美를 추구하며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에 강릉지방은 예맥이었으며 이들의 문화엔 고구려 풍의 웅장한 맛을 특색으로 하고있다. 이것은 음악
적 이해가 쉽기에여 메나토리권 음계를 형성하며 이러한 아라리들은 전통적으로 굵은 톤의 웅장한 맛의 장르를 가진다.
이렇게 고려의 불교는 전국적이고 평민적이라 각 지역적 복고이 나타남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시대가변화하고 발달되며 복고주의는 한계를 드러내며 선진문화의 유입에 힘입은 문화차입이지만 이를 토대로한 창조성의 나타냄이다.
서양의 예를 들어보면 피렌체에서 일어난 인문의 옛 복고주의는 급속도로 전 유럽에 퍼지며 르네상스를 맞이하며 자연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큐비즘에 이르는 새로운 도전의 새 사조로 이어지는 계기를 낳게된다.
이렇듯 고려의 시대는 종교적으로 귀족적인 통일신라 말기의 교종에 반감하여 선종으로 평민적 수평적
종교로 지방 호족의 세력이 팽배해지며 그 문화권이 각 지방의 옛 복고적으로 나타나는 반면 선진 송나라의 문화적인 유행도 따라 발전적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그럼 아래 5부에서는 송나라의 르네상스와 그 문화의 차입을 그려 보이겠습니다
'월정사에 대한 나의 이해 ' 카테고리의 다른 글
Re, 1) 월정사 8각9층석탑의 諸 문제 (서론)의 댓글에 대한 답 (0) | 2014.08.16 |
---|---|
Re:월정사탑에 대한 나의 미학과 예견 - 답글 감사합니다. (0) | 2014.07.20 |
월정사탑에 대한 나의 미학과 예견 (0) | 2014.07.15 |
6) 월정사 8각9층석탑의 諸 문제 (본론 5) (0) | 2013.06.12 |
4) 월정사 8각9층석탑의 諸문제 (본론 3) (0) | 2013.06.12 |
3) 월정사 8각9층석탑의 諸 문제 (본론 2) (0) | 2013.06.12 |
2) 월정사 8각9층석탑의 諸 문제 (본론 1) (0) | 2013.06.12 |
1) 월정사 8각9층석탑의 諸 문제 (서론) (0) | 2013.06.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