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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에 대한 나의 이해

Re, 1) 월정사 8각9층석탑의 諸 문제 (서론)의 댓글에 대한 답

 

1) 월정사 8각9층석탑의 諸 문제 (서론) view 발행 배경음악 첨부
| 월정사에 대한 나의 이해 

 

  [ 월정사 8각9층 석탑의 원형을 찾아서...]               2013, 05, 18   高   柱   浩

 

  아래의 글은 이 글에 아이디 "과객"이란 분의 댓글에 대한 답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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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객
  • 2014.08.14 22:50
  • 삼국유사의 "대산월정사오류성중"조를 보면 이미 "구층석탑"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  

  • 후세백작

  • 2014.08.15 11:13
  •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저는 약 20여년 전쯤 삼국유사책 두 권을 구입하여 특히 월정사 부분은 몇번 읽어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아인슈타인책은 수학적 공식이 아니라 그의 철학적 사유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책 한권을 한 열번쯤은

    넘김 적도 있으며 손석우의 "터"라는 책은 한 닷번 읽었다.

    만약 그 지관이 아직 살아 있다면 그에게 메일 한통을,,,이 책속에 오류 열 곳을 발표함 해볼까요??  이런 메일을

    저자에게...이렇듯 책 한권을 골똘하게 읽는 습관이 있습니다.

     

    삼국유사에서 九層石塔皆聖跡也란 문구는 아홉 성현의 자취란 뜻이죠.
    월정사는 자장율사가 중국 청량산의 오대에서 문수보살을 친견 후 귀국하여 오대산 월정사를 창건하고 효명,

    보천태자와 '신효대사를 거치는 역사적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후 월정사는 화마에 약한듯 1307년 고려 충렬왕 때 "이일"이 다시 중창을 하였고, 조선 순조때 또 화재와 6,25

    동란을 거치며 초대 주한 미군사령관 워커 중장의 월정사 소각명령에 의하여 동 사찰의 화강암이 재료인 8각9층

    제외한 21채의 당우 모두 전소 되었습니다.

    워커 장군이 월정사를 불태우라는 명령의 의도는 무엇일까 하는 내용은 다음으로 미루고..

    우선 이 월정사 현 8각9층석탑은 신라시대의 탑파의 양식은 아닙니다. 신라시대의 9층탑의 기록은 삼국유사에 

    조금 언급되나 그 탑이 9층이란 주격도 아닌 설명어만 있슬 뿐이며, 또한 팔각탑이란 해설은 없으며 현재의

    1,5m 옆에 탑을 축조한 지반의 주춧돌 지반석이 있다는 어느 보고서의 기록은 남아있다.

     

    만약 신라시대의 9층 양식이 현 8각의 9층 양식과 동일하리라고는 전혀 이해 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면 문화양식이란 시대의 흐름속에 각 시대의 양식적 흐름을 나타내는 것이기에 이것이 역사에 뒤 섞일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 8각9층탑은 10세기초에 축조된 탑으로 보는 입장이나 최근 동 탑 주변의 지반에서 동 탑의 지반석보다 아랫에서

    12세기초의 동전을 수거하여 동 탑의 10세기 축조설을 12세기 이후로 수정하여야 한다.
    아마 동 탑은 1307년 화마로 손실된 월정사 재건시 다시 축조되지 않았슬까 하는 개인적인 의문을 가진다.

     
    나의 월정사탑 이야기들중엔 송나라 문화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하였다. 만약 고려시대에 동탑을 다시 재건한다고 

    신라시대의 4각탑으로 똑같은 탑을 재 축조할 수 있슬까??
    고려시대의 문화는 신라시대를 충분히 이행하는 복고풍인가?? 그렇치는 않다.

    문화란 시대사조이다. 즉, 한 시대의 문화는 당 시대 최고의 문화적인 요소와 풍토를 배경으로 이룩된다.

    신라시대는 당나라와 조우하였지만 고려 중기에는 송나라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우리 역사가들은 중원의 조그만 송나라 문화에 잘 모르는 듯 하지만, 고려시대 이후 우리의 문화는 송나라 문물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고 지금 우리의 생활속에도 송대의 문화가 저변에 흐르고 있다.

    이렇듯이 월정사 8각탑은 문화사적인 면에서 송나라의 영향아래 놓여있고, 이 송나라 문화의 영향을 모르는 우리의

    역사가들 덕에 지금까지도 월정사 8각9층 석탑은 그 미학적 평에서 홀대를 받는다.

     

    이 홀대의 평에 가장 많은 책임을 ㅈ져야할 곳은 월정사 8각9층 석탑의 '70년 해체,복원의 보수공사"때 감독관인

    정양호 선생의 리포트 글 "한국미술사상 월정사 八角九層石塔의 의의"에서 정양호 선생은 중요한 자료를 우리에게

    선사하지만 또한 역사적으로 무뢰한 점을 간과하지 않을 수 없다.
    http://blog.daum.net/kkks1/203

    이 리포트 초입에 동탑이 13층이라는 1920년대 이능화 상현거사가 집필하고 육당 최남선이 감수한 "조선불교통사"의

    책에서 동 탑이 13층탑으로 37과의 사리를 봉안하고라는 집필된 글에서 정양호 선생은 13층이란 9층석탑의 기단석까지

    잘못 읽어 13층이지 않았슬까 하는 설명은 다른 분의 학설을 크게 훼손하는 오류를 범하는 경솔한 처사이고, 만약

    그것이 기단석까지 세어 넣는 상현거사의 오류였다면, 상현거사는 신라 삼층석탑들을 기단석까지 세어모든 3층

    석탑을 5층 석탑으로 이야기 했어야 되지 않을까 하는 무리한 추정도 가능하다는 뜻된다.

     

    정양호 선생은 역사의 정립의 글에서 이러한 부정확한 글을 쓰면서 그 글의 역의 진부분의 파장을 고려치 못한 점들이

    이 레포트 글중에 몇군데 있다는 점이다.

    이 점들은 앞으로 나의 글에서 조목조목 나열할 것이지만 그 레포트 글중에서 가장 큰 피해를 주는 의미의 글은 동(同)탑이

    고구려 양식이고 북방형이란 논평이다.

    그럼 북방형이란 탑은 없는데 그곳은 어디를 말함인가??

    물론 고구려는 가장 비중을 두는 북방일텐데 이는 우리문화가 아닌듯 미학적 평에서 소외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는  "한국미술사상 월정사 八角九層石塔의 의의"라는 글이 단서가 되어 동 탑의 아름다움은 북방계라는 이단으로 

    먼 국외의 이방인의 나그네처럼 괄세를 받으며, 기실 북방은 고구려를 뜻하는듯 하지만 윗 글에서 정양호 선생

    자신없이 뭉개 표현 하였는데, 후일 사가들은 그를 대가처럼 섬기며 그의 정확치 않은 점도 르며, 더 나가

    어떤자는 더 무식하게 동탑은 괴기하고 원나라의 영향이라 그런다.

    역사에 지식도,상식도 없는 작은 소견의 자기 마음대로 편린하는 참말로 한심스러운 자들이다.

     

    역사란 정확하고 신중을 기해 이야기하여야 하지, 자기가 잘 모르면서 의중으로 이야기하여 동탑의 아름다움은

    묻히고 이단자가 됨을 탄하며 이에 동탑의 미학을 바로 세우려는 것의 나의 월정사편 글들을 쓰는 동기이다.

    나의 주장은 동탑이 신라시대의 불교적 사상과 고려시대의 초기가 아닌 중기(1,300년경)의 불교는 다른사상이며

    또한 문화적 배경도 틀리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신라때는 9층 탑이라 하여도 고려 중기시대에 재건시에 불교적 문화가 틀리는 신라 불교관점에서 재건하여야

    할까??  한 시대의 문화적 배경의 이상향을 나타내기 위하여 꼭 9층을 고수하지 않고 당 시대 국외 선진문물의 유행을

    통한 13층탑의 재 조성도 가능한 것이다.

    송나라를 역사적으로 보면 당시(1,300년경)은 남송시대로 중원의조그마한 송나라 200년후 50년간의 남송시대를

    통하여 이 짧은 역사와 대륙 중국에서 작은 국가로 존재하였던 송나라는 중국 역대이래 가장 부유한 국가로 수 많은

    문인이 배출되었고 우리 문화에 유입된 중국문화라면 으례 당나라 시대를 가장 꼽을 수 있으나 송의 문물이 우리 주변에

    가장 많이 와 닿아있다.

    이렇듯 천년간 동양사상을 지배해온 성리학중 주자학과 주희의 팔괘는 이 시대의 지배적 영향을 미치는 학문으로 그러한

    배경을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고려 중기에 탑이 고구려 복고적이라는 편견보다 이러한 신 문화사상의 문화적 차입이란 점이다. 지금 말로 이해다면

    그것이 유행이고 신 사조(ism)이란 점이다.

    이러한 거석탑을 조성함에 국가적 야망도 걸려있고 또한 조각승들의 미적 완성도를 보면 신문화 수용이란 점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야기의 나의 주장은 다음편으로 미루겠으나 우선 송나라의 개보사 전탑과 묘향산 8각 13층 탑과 월정사 8각9층

    (현존분)을 비교해 보며 묘향산 8각13층 탑은 전탑의 방식을 벗어나지 못한점으로 이는 아마 월정사 탑보다 먼저 제작된

    하며 월정사 8각탑은 이와 같은 개보사 탑에서 묘향산 보현사의 8각탑으로 이어지는 문화의 소산으로 13층 탑으로

    축조되었으며 이 탑들과 또한 모든 탑들과 비교해 보면 월정사탑이 9층탑으로는 무엇인가 결여점을 다음글에서

    상세하게 지적하겠다.

     

    PC혁명으로 이제는 모든 문서들이 그래픽 파일로 만들어지는데 위 국보문화재들도 그러한 작업이 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각 구청에서는 모든 주택의  건축도면도 캐드화로 변경시키는 작업등을 하였지만 국보이라도도면 한장

    없슬듯 하다. 아니 국보로 지정될때 그런 양식문서 않 갖추었슬까??

     

    그런 그래픽이 있다면 한눈으로 캐드의 수치로만 보아도 월정사 8각탑은 9층으로는 미완성이란 점을 파악할 수 있슬텐데.. 

    완성이라면 어떠한 점인가 하는 이해의 글과 고려역사와 불교의 위치등도 고려해야 되는 것을 설명하겠다.

     

    월정사 8각석탑의 조성에는 우리나라 1,200여기의 탑중에 가장 무게있고 중후한 아름다움의 美로 불교의 이상세계를

    추구하고자 하였던 당시 석공들의 시공을 넘는 이상향은 어느 역사선생들의 무례함으로 북방형이란 단어에 괴기한

    탑이라는등 지금것 세인들은 그들의 조각으로 빚는 그 이상향을 간파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런 미학적 평을 한 자들의 책임 또한 무거우리라.
    나는 이점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으로 우리나나라 탑파들 중 가장 온후한 자비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고자 한 동 탑의 美를

    추구하며 또한 동 탑이 13층 탑이 주장을 한다.

    지금 9층탑으로서는어설픈미완성 탑이고 석공들은 이러한 오차를 허용치 않았슬 것이다.(다음장에서 충분히 이해도 있게

    설명 할것이다) 

    다음 장에서 나의 이러한 주장에...
    동 탑이 지금 9층탑으로 볼때 탑파 양식에 미달되는 제 요소들을 나열하며 그러한 점들이 9층탑이 아니였슬 것이란

    양식적 결함의 이야기들과 묘향산 보현사 8각13층 탑과의 비교를 논하며 다시금 동 탑은 9층이 아니라 13층이라완성품이란

    점을 상세 서술하겠다.

    아이디 "과객"님의 댓글을 감사히 생각하며 지난 저의 월정사편 글들중 탑파양식에 설계기준등과 역사, 문화사적 배경과

    앞으로의 글들 지켜 봐 주시기 바랍니다. 

    과연 월정사 8각탑이 9층이었슬까요?

    아니면 저의 설명대로 13층을 수긍할 수 있는지요??

    다음장에서 만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