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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에 대한 나의 이해

나의 학술탐구(월정사2)

13:32 new

 

월정사 8각9층 석탑에 대한 학계의 견해는 분명 수정 되어야 합니다.
울 나라 고유의 석조탑 탑파 양식에 헌신한 고유섭, 황수영, 그리고 탑파 양식의 집대성했다는 정영호 학자들 외에

이하 부류적으로 홍대한, 김희경

이 모든 월정사탑에 관계한 학자들의 공통점은 도형의 비교일뿐 그 조성시기의 사회상, 선진문화의 수입,

또한 불교론과 그 조성의 경제적 기반등의 여건과 상황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집트 피라밋이나 잉카의 제단은 모두 사각도형이라 하나의 문화계열이란 말입니까??
(물론 저의 지론으론 이 모든 인류사 창조물들이 하나의 계통적 문화란점을 역설하며 언제 그를 쓸까 하였는데 미뤄지지만,,,)

13:38 new

가령 예를들어 동 탑을 제 3창하면서 처음의 선덕왕 당시의 13층 탑은 그 내용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70년 해체 북원당시 감독관인 정영호나 문화재 위원인 실측담당의 홍사준의 이 공사 리포트의 논문엔 13층 탑은

기단까지 잘못 세어 그렇다고 단정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들 논문중엔 스스로 동탑엔 고려를 넘는 신라의 물증은 없다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2중기단의 고려탑(현재 우리가 보는 탑)을 보며 신라시대 탑 조성당시 기단까지 잘못 헤아린 것이라 말함이죠.
그들이 본것은 양식적으로 분명 고려탑입니다.
그 또한 모순적 얘기라 웃기는 학자들이죠.

신라 창건당시 13층 탑이란 기록에 그는 기단까지 잘못 헤아리다니...
신라 정형탑들은 2중 기단이 아닌데도,,, 당시의 신라탑이라면 상, 하의 이중기단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 셀 이유가 없는데...

정말 그들 스스로 멍청한...

 

13:44 new

이러한 글을 공사완료 리포트의 논문이라 쓰며 울 나라 사학계의 대가들이라 자칭하며 그 문하생들,,,
저하고 한판 논쟁을 붙어도 불사하겠습니다.
대체 월정사탑의 조성을 고려 초기라 하는데..
당시엔 고려 국가 중흥을 위해 교종의 사찰을 조성하는데 고려 중앙에서 보면 산꼴자기의 선종사찰에...
무의미한 곳에 돈을 투자하고 탑을 건립하였다는 발상, 이것은 이해 불가능한 지점입니다.
그것도 창건당시 신라 불교이고 고구려 불교의 경전은 전수되지도 않는데 석탑의 옥개석이 팔각도형이라고 고구려 양식이라

둔갑하는 학자들,,


이 월정사 조성 배경엔 강릉 토후세력들의 경제력을 중앙집권화에 反하는 선종사상의 지방화 체제란 점입니다.
그리고 이 조성은 사굴산파의 보조국사 지눌이

 

13:52 new

조계산 송광사에서 교단 종정에 추대되며 주창한 정혜상수와 돈오점수 설에 의해 중앙의 교종을 밀고 토후세력의 사대부들이

자기들 스스로의 평민사상의 종파를 이룩하고 선 사상의 조계종의 지금까지 천년 이어져 내려오는 기념비적인 사건이후

 

강릉지방 토후세력, 사대부들의 헌액이 있어야 조성이 가능한 점이라면 동 탑은 당시 선진문화 송의 문물과 정이, 주희의 유교의

정주학의 팽배시 팔괘 유행과 그외 여건등 모든 상황으로 비춰볼때 3창인 고려 충렬왕때(1276년) 신효거사의 중창사업에서

조성되었슬 것이라는 나의 추정입니다.

기존 고려초라는 학설과는 100여년 후라는 점 입니다.

고려초 천태종의 교종 중창으로 고려 건국의 이념화를 삼는 마당에 변방의 산꼴짜기 선종의 월정사에 그도 대웅전도 아닌 탑을

조성하리라는 경제적 여건도 이치에 맞지 않는듯 하죠.

이 모든 면들을 비춰볼때 고려 불교가 교종에서 선종으로 밀려가는 보조국사 지눌이후 강릉 토후세력들의

그들 스스로 선진문화와 접하는(석탑앞 석왕보살의 특징) 지방화 색체를 농후하게 비춰 보이는 것이 월정사 3창시의 ...

분명한것은 이 3창은 울 나라 불교가 선종이 팽배되는 시기와 맞 물리는 점 입니다.

이 또한 2년전 동 탑의 지반 아래층에서

송대의 주화 두개가 출토되었다는 논리도 성립시키는 것이며...

신라의 선종의 사상이 자다말고 고구려 양식이라 뚱땅거리는 학자들,,,,,
저는 이 모든 생각을 질서있고 신중하게 써 내려 갈 것입니다.
역사의

13:55 new

역사에 증명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고 별별 추정이나 다른 곳으로 몰고가는 학자들,,,
그들은 이 탑 조성자들의 불교관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아상향적 미의 탐구에 먹칠을 하는 학자란 점입니다.
저는 분명 먼후일에도 누가보아도 타당한 당위성을 내포하는 울 나라 탑파 양식중 최고의 미라는 미학적 찬사까지 남길 것입니다.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후일에도 전할 정중한 글로 가다듬겠습니다.

 

기다려 주십시요.

윗글 그냥 어제 새벽에 썼는데 이해가 어려운지 모두들 관심이 많은듯 하길래 이해의 글을 조금 더 썼습니다.

이것이 저의 두고온 고향, 평창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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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보 ( DS2 RNE) 19:53 new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선배님
덕분에 역사공부 배 터지도록합니다
잘계시죠!

 

후세백작 23;15

 예... 감사합니다.

어젠 일욜이라 오후에 전철로 양평까지...자전거 라이딩 40km후 심심하게 요즘 생각하는 월정사 이야기를 스케치

하엿는데 관심들이,, 그래서 오늘 좀 구체성있는 이야기를 하면서 미쳐 못다한 이야기들은 다음 정말 형식을 갖춘

월정사 이야기 진편에서 하나하나 정확하게들 하겠습니다.

에를들어 우리 역사서들엔 중국의 가장 발달한 문명의 송나라 역사는 찾아보기 힘들고, 그러한 역사책은 아예

없다고 해야...그래서 이 부분의 이야기들도 부제로 하는..그러한 월정사 이야기들,,,

 

뜨거운 여름, 땀으로 더욱 덥고 시원하게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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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8

숙대 강사의 홍대한의 "월정사탑 8각9층석탑의 조탑배경과 건립시기의 연구"라는 최근 논문집에선
동 탑 지반에서 송대 주화가 나왔길래 어쩌면 조선시대에 다시 이전이나 조성하였슬 것이라는 들고치고 메치고하는,,,
그의 논문은 선행 논문들의 답습이고 확인밖에 않되는 재 고증방식이다.

2년전쯤 현장 연구에서 동탑 1-2m 옆 탑 지반의 아래깊이에서 송나라 주화가 출토되었다면 당연 그 이후에
조성하든 이전되었슬 문제는 당연한데...그러고도 건립시기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이라...

그들의 10세기 초에 조성되었다는 설은 이 문제의 걸림돌을 헤쳐 나갈 수 없습니다.
저의 주장은 간결하게 말하면

 

11:46
고려 충렬왕때 3창당시 새로이 조성된 탑이라는 주장을 성립시킬 것입니다.
만약 동 탑이 고려탑이라면 월정사 중창의 제2창인 왕건시와 3창,,
동탑을 건립하고도 중창의 역사기록에서 배제되었다면 중창의 기록은 가치가 없는 것 아닙니까??
또 하나는 우리 역사에선 송나라 문화의 기록이 너무나 미약하고 황수영도 요나라, 금나라까지 잠시 언급하였지만...
요나라는 양즈강 이북의 송과 대치되던 문화양식이 별로 없는 나라였고
송대의 문화는 중국 문명의 모체가 될 만큼 방대하며 지금 우리의 생활에도 많이 스며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역사서적엔 그 기술들을 모르는듯,,
월정사는 강릉 김씨. 최씨등 사대부들이 고려

 

11:52
화엄에서 천태종으로 넘어가 중앙집권 강화에 이용하며 귀족적 정치의 신라 재현에 각 지방화 문화를 이루며
월정사는 강릉 토후세력, 사대부들의 경제기반을 바탕으로 범일선사의 후계자들의 사굴산파의 남돈선의
국내 불교의 가장 큰 맥을 이루는데 힘입은 강릉 사대부들의 신앙심의 발로로 지방화 경향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불교사상사까지 모두 인용하는 대략 10만자의 글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