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월정사에 대한 나의 이해

나의 학문적 고집과 오기(월정사편)

 

이 밤에 지금까지 월정사 8각9층 석탑에 대한 검색을 수 없이 해봤다.
지식백과는 물론 한국 미술사학회에 월간 "美術史學硏究 1971년판 홍사준의 월정사 편'까지 인터넷에서 사서

보았다.

아예, 몇삼년 걸리더라도 그들이 이야기하는 월정사 8각9층탑의 8각이 고구려 양식이고 이방형이라 하는데
월정사 8각9층 석탑에 관계하신 모든 학자들은 동일한 생각인데 이것이 일그러진 것이란 점에 대하여 끝까지

파헤쳐 그에 인식력부터 타파하고 새로운 학설, 누가 보아도 타당성과 당위성을 내포하는 이론을 정립할 것이다.


모든 역사서나 자료들엔 월정사 8각9층탑에 지성의 최고학자들은 저마다 고구려라 하지만 나의 양식으로서는

이에 반하기에 그들의 자료 모두를 추적하여 끝까지 나의 생각으로 바른 이론의 글을 쓸 것이다.
이는 역사나 고고학에 문외한인 조그만 후세백작이란 인간이 우기는 것은 아니고 나의 글이 발표되면 나의 글에

반박을 가할 수 없도록 아주 쉽게, 그리고 당시의 역사나 주변국, 정치사까지 모두들 종합하여 이해가 쉽도록 쓸

것이다.

 

오늘 검색에서 더한 웃기는 점은 몇년째 동 탑의 연구조사중인 모양인데 동 탑 지반 아래서 송대의 주화 두점이

출토되어 이 탑은 아마  조선시대에 이곳에 이전하지 않았슬까 하는 추정도..

아직 이점에 결론은 없다. 지난 2-3년 전쯤 이 송나라 화폐가 동탑 지반의 옆에서 출토되어 동 탑의 제작연대에

많은 문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아마 동 탑의 지반 다지기 작업시 인부의 주머니에서 떨어진것은 아닌지??

이에 대한 추정의 생각은 다음으로 미루고 우선 후세백작의 기존의 학설의 모든 학자들과 궤를 같이 할수 없는

나의 미 오픈 글들의 생각은 무엇인가 간략히 소개하면,,,

 

월정사 탑에 대한 후세의 생각은??

사람들은 평창의 월정사탑과 강릉의 신복사지 탑은 지역적 같은 지방색이란 수식어를 붙이는데...이의 오판은

이 두곳은 지리, 위치적으로 하나이고 하나의 세력권이 배경의 산물이란 점이다.

월정사 탑을 조성하는 고려 전기이후 어느 시간대에 월정사는 평창이 아닌 명주(강릉) 관할의 땅이었고 대부분은

강릉 호족인 강릉 김씨나 강릉 최씨등의 사대부들의 농토였던 점이다.

 

여기에 이야기 하나는 강릉 김씨의 시조 김주원은 선덕여왕 사후에 왕족출신으론 단 한사람이기에 왕의 권좌에

오를 수 있었는데, 왕 선출 회의에 참석을 하려는데 홍수로 알천(경주천)을 건너지 못하자 그에게 왕의 운이 아니라

다른사람이 선출되고 그는 아마도 인간들이 싫어졌는지 서라벌(경주)에서 아주 먼 강릉으로 이주하였다.

 

그러자 왕은 그에게 "명주군왕"의; 명칭을 하사여 강릉, 삼척, 양양, 속초등 관동지방을 떼 주어 다스리게 하였고,

경주김씨 골품의 강릉출신의 범일국사는 신라 말 당나라를 수학 후 강릉에서 그의 선풍을 일으키는데 이를

"사굴산파"하며  보조국사 지눌 스님도 이 후예이다.

 

고려 개국에 그들은 호족출신으로 신라말 화엄의 교종으로 귀족의 통치세력을 삼으며 향락에 빠지고 이에 평민사상의

선종으로 서민들이 대립하던 사상적 배경위에 ㅈ귀족도 아닌 지방 호족출신의 왕건이 왕에 오르며 그들의 통치이념은

선종이란 점이나 이 선종으로 통치 이념을 잡을수 없는 사상이란 점 때문에 대각국사 의천의 선종적 교종의 천태종으로

개국이념을 바탕 삼게 되었다. 이는 귀족정치가 아니라 사대부 정치란 점이다.

 

이러한 종교의 배경과 월정사늬 지방적 특색이란 도무지, 역사학자들 조차도 무언지 이해들 못하시는데,  바로 위에

설명에 이어 송나라도 같은 시기에 개국되었는데 당나라의 분열과 5호 10국시대의 갈등,,,여기에 송태조는 근위대 출신의

무인으로 당나라 패망의 자충수를 두운 무인통치의 싹을 자르고 문인정치, 사대부들의 시민정치를 하게 되고 세계 최초로

지폐도 발행하는,,,

신안 앞 바다에 도자기선엔 송나라 주화가 2-3천점이나...이렇게 송나라는 세계의 기축통화처럼 많은 화페를 발행했다면

그들의 경제력과 이에 방전된 그들의 문화는  중국의 로마이란 점이다.

이러한 서술의 이야기는 어느 역사서에도 없지만 이를 읽으면서 누구도 나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부정하진 못하리라.

 

송나라의 선진문화사상도 이러한 문치주의의 시민정치와 맥을 상통하는 고려초의 호족의 통치란,,

 그러나 국가 기강을 잡기위한 중앙집권화 시기를 지나며 지방 호족들의 팽배로 지장화 시대의 문화가 표출되는 점에서

이 월정사 8각9층 석탑은 강릉을 배경으로하는 또한 그들의 종교적, 사상적 이념의 사굴산파의 선종이 보조국사 지눌이

 종정으로 추대되어 불교 산실로서 지방색의 표출이란 점이다.

 아마도 그의 종정추대에 자극되고 힘이 실리어 강릉 토후세력들의 불교사상이 팽배되어 월정사 보시에 성황을 이루었슬

것이란 점이다.

이렇게 중앙정부에 반하는 자체 능력의 충만하다는 지점에서 지방화의 특색이 표출되는 점이리라.

 

긴 이야기는 다음 나의 월정시 이해에서 약 5만자에서 10만의 글로 표현할 것이다.

요즘 쓴 아마 세계 지각변동의 정치적인 글들은 작게는 5천자에서 8천자쯤이다.

물론 이를 천자 내외로 쓸 수는 잇으나 그러면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설명부족에 따라 나의 지향하는 의도를 자기 주관적

해석을 가미하여 와전되기에 긴 글로 표현하는 것이다.

 

동 탑에 대한 자료를 모조리 수집중이다.

에스대 출신의 울 나라 탑의 대부인 70년 동 탑의 해체복원 감독인 정영호 사학자나 ( 어떤 사람들은 이때도 교수란 존칭을

붙이는데 이 자체가 권위주의이다. 교수는 그의 직함이지 그가 사학자라야 공사감독에 맞는 직함이 아니겠는가??

우리사회는 이렇게 교수면 다고 박사면 전지전능한것 같은 생각과 표현은 참으로 주체의식이 없는 생각들이다)

 

그의 '70년 동탑 해체, 복원의 레포트의 모순점과 또한 당시 기술자문에 문화재 전문위원인 홍사준 역사가의 동탑 복원에

따른 보고서의 미비...

구체적으로 홍사준의 보고서엔 동탑이 신라시대에 13층탑의 역사에( 기단까지 잘못 파악)이란 자기의 주관을 못 박았고

신라의 선종계통에 탑으로 8각이란 모양새때문에 이형이고 고구려형으로 둔갑된 점.

 

여기서 이형이라하면 신라 4각3층석탑은 정형이라 하는데 그 의미는 무엇일까??

아마도 사학자들은 미술사적인 이즘(ism)의 개념은 이해를 못하시는듯,,,

 

 한 시대를 지나며 다른 시대에도 옛 시대를 그대로 모방할 수는 없다.

만약 동일한 문화양식이라면 그들의 통치이념을 따라가는 동일국가란 지적이 된다.

역사에 국가의 존폐에 문화와 모든 생각은 옛것을 바탕으로 진일보되며 문화는 앞으로 발전되고사회는 변모해가는 것이다.

또한 그 보고서엔 탑의 재원이 자세한 듯 하나 그것은 원래 탑의 재원이 마련되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래야 국보 지정시엔

그런 재원도 없었는지?? 그의 이러한 노력의 기록은 이미 준비되 있었어야 하고, 그 공사의 목적인 훼손및 파손된 상태등과

그 바꿈의 자세한 기록이 주일 것이다.

바로 그점에 내가 알고 싶었던 것은 9층 옥개석을 뒤잡아 보았을때의 설명이다. 그런데 그건것은 근처도 가지 못하는 레포트다.

 

이렇듯 통일신라시대의 정형탑이라는 4각 3층 석탑의 완벽한 완성형을 고려시대에도 답습할 것인가...

세월은 변모하고 선진문화의 송나라엔 주자학의 8괘의 만연된 사상, 송의 50m급의 개보사탑등 송나라가 고려의 롤 모델이란

점에서 볼때 고려문화 양식도 이러한 8이란 개념을 따르는 팔각 방형의 석탑의 탄생이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 8이란 숫자는 고려 목탑에도 있었지만 신라 모든 부도의 옥개석은 8각모양이다.

그런데 고려 8각탑을 고구려 양식이라 하는 어패,,,

고구려 불교는 문헌도, 지금으로선 모든걸 잘 알 수가 없고 또한 강릉이었던 월정사 기반세력은 강릉의 호족들로 그들

스스로가 울 나라의 종정도 만들고 불교의 주류를 이루는 신라말기의 선종의 후예들이고 중국 마조선문의 후학들인데

8각이 같다는 이유로 고구려 양식이란 뚱딴지같은 소리는,.,,( 물론 대 사학자들의 월정사 연구보고서에서 그려져 있는

이런 표현은 이해하기 힘든 의미일 뿐이다. 그들은 역사에 통찰력이 없는 역사학자들인가?? 아니면 고구려와 월정사가

연계되는 단 한줄의 이야기라도 답을 구해야 이해가 될 여건일텐데...)

 

사조(ism)란 하나의 계통적 문화양식의 전이로 이해한다면 다른 표현으론 경향이라..

신라의 4각 3층 석탑이 고려시대엔 8각 9층 석탑으로 그 양식의 변모를 가져왔다고 이를 흐름의 경향으로 이해하지 않고

절단하여 이단이라 한다면 그 표현자들은 신라 4각석탑의 국수주의 자들이리라.

4각 3층이고 8각 9층이고 그 양식의 기법의 숫자 차이이지 여기엔 신라탑의 양식에 좀 다른 각도의 표현이지 크나큰

이질적 요소는 무엇이길래 이방이라 해야 하는가??

이렇게 순서적으로 발전하고 표현되어가는 미술을 연작이라 그러며 씨리즈물이라 그러는데 씨리즈물이란 새로운 창의적이

아닌 표현기법의 양상일 뿐이란 점이다. 그런데 사학자들은 이를 이단이라 한다면 곤혹스러운것 아닌가 생각한다.

 

다음 이의 글에서 4각 3층탑의 느낌과 8각9층 석탑의 비교 느낌에서 이 부분도 일목요연하게 설명하리라.

사각탑의 정형인 감은사 탑, 뭉론 기법의 통일을 가져왔다지만 여기서 이야기는 그 4각의 단순하고 무사적인 도도한 느낌,

고선사지탑의 4각 3층의 균형미있는 분할과 신라 정형탑의 아카데미적 느낌과 월정사 8각9층 석탑의 느낌의 차이란??

 

난 여기서 울나라의 권위잇는 사학자들이 울 역사의 미학적 측면에서 한 부분의 역사를 왜곡, 굴절시켰다는 느낌과

이의 느낌의 의미를 다시금 새롭게 부여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교수이고 박사이고 이러한 수식어는 그의 직함의 ,,, 이 논문엔 필요없는 허상의 직함을 내미는 권위이니라...

이보다는 나의 앞으로 글의 요구는 이러한 모순과 괴리로 원작자들의 의도가 굴절된 모습을 복원해줄  것이 사학자들의

몫이라 생각하며 이러한 서막의 글을 쓸 것이다.

 

 오늘 주문한 석탑의 책들 다 읽자면 서너달....

 정영호 선생의 제자 단국대 역사선생인 제작의 책까지 모조리,, 그 의미는 동일 개념이지만,,,그래도 끝까지 전부 검색하며

월정사 예찬론을 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