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추석 고향 나들이가 즐거웠고 좀 바쁜듯하였다.
그리움 속의 아득한 고향의 추억과 시간이 흐른 지금, 친구 한 사람 만나지 못한 고향 나들이라 좀 씁쓸하지만,
그래도 평창의 여정은 즐거웠다.
정원대님의 시집 < 평창강> 씨리즈 감상
그 중 정원대님 시집을 한 권을 받아 들고서는 밤에 깊도록 들춰보며 잠들기도 하였지만,
평창강을 소재로 한 일련의 詩는 우리에게 낯익은 단어들의 배합에 어쩌면 추억어린 서정의 감동을 자아내지만
또한 일련의 평창강 씨리즈의 詩作의 구성에서 평창강과 그 구성 소재들의 오브제를 통하여 인간과의 유기적인
이야기를 담고있다.
일상적이고 단순한 詩語들의 배열 같지만, 그 속엔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투명한 감정을 드리우고 있다.
마치 복잡한 일상을 한 겹 벗겨 버린듯한 詩語 속엔 나옹화상의 달관하는듯한 詩를 연상케 하는 듯, 또한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詩. 박목월의 "구름에 달 가듯 가는 나그네"처럼 오늘도 유유히 흐르는 평창강의 詩感 속에 흐르는
인생 여정의 무상함을 자아 내는듯, 그의 詩"미루나무"에서 "사라진 자갈밭이 모래성을 만들고" 아마도 아득한
시간을 고요히 돌아드는 평창강, 그 속에 " 내 사랑은 변하지 않고 흐르는 강물과 함께 나의 꿈이 하늘에 닿을
수 있슬까??"
또한 이 시인의 詩 <평창강 8>에서 "나는 다시 강가 나무의자에 앉자 강물을 보내고 또 만난다"
우리도 유기체적인 자연의 한 점이기에 서정적 감흥을 넘어서 자연에 순응하여, 어쩜 평창강처럼
나도 흐르고 있는 일상의 무상함 속에 평창강 4연작 詩들의 오브제는 나의 가슴에 강한 인상을 심어 놓는다.
평창강을 물끄러미 들여다볼라치면, 그곳에 비춰지는 우리네 이야기들,,,
그리운 시간을 마련하는 듯 합니다.
그리고 또한 평창강은??
지금의 평창강은 사천강이란 이름의 옛 정취는 찾을 길 없다.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제방보호란 개념에 종부 보의 종부 터널식 이전의 영향으로, 남산 정자 아래의 소나무들엔
학이 날으고, 푸른물의 정취는 사람들이 개발이란 이름으로 훼손시켰다.
하지만 뱃터거리의 백사장에 검정고무신 접어 기차놀이하던 옛 추억은 살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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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시 평창 항전사
정원대님과의 첫 만남에서 평창의 제1의 기상은 420여년전 임진왜란당시 평창의 항전사란 이야기에, 평창사람들은
왜군이 대관령을 넘어 평창읍에는 이르는 것으로 생각하나 그것은 잘못 추정의 생각이고, 왜군은 규수지방의 시마즈
가문의 4번대로 강원도를 할당받아 1번대의 고니시 유키나가의 함경도 점령시 조령을 넘어 한양에서 함경도로 향할때
이를 따르던 모리 요시나리의 4번대는 김화로 우회전하여 강원도로 들어오며 김화에서 왜구가 나타났다는 보고에
춘천의 조방장 원호가 김화로 출정할때, 매복하였다가 그의 목을 베고 고성, 강릉, 삼척을 지나며 휩쓸고 백봉령을
넘어 정선의 항복을 받고 평창에 이르러 그들은 평창지역에서 처음으로 항전의 도전을 받았던 것이다.
그들은 강원도를 한 바퀴 돌아 강원도영 원주로 공격해 들어갈 때까지 비록 중과부적이긴 하나 평창의 항전 이외엔
거침이 없었다. 모든 군과 현은 굴복했으나, 평창은 모리 대장이 항복문서를 보낸 사신의 목을 베고 강원도에서는
유일하게 항전을 하기에 이른다.
이하, 임란 당시인 1592년 8월7일부터 11일까지의 평창 임란사는 응암지와 호구록에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응암지는 아마 80년대에 한글로 번역되었으며, 호구록이란 호랑이 굴에서 빠져 나오다란 뜻으로 당시 평창군수였던
남천 권두문이 원주감영을 탈출하며 쓴 임란일기이다.
이 "호구록"은 권두문 13대 후손 권태하씨에 의해 집안 한학자의 번역으로 몇해 전 알려지게 되었는데, 응암지보다는
더욱 날짜별로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현 평창문화원장인 이욱환 선배님의 "평창 임란사의 소고"라는 역사 규명의 평창임란사 연구가 어떤 경연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한 연구서라는데 아직 나는 그 자료를 접하지는 못해 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관군은 하나도 없었고,
200여명의 의병을 통해서 왜구(일본군이라 표현하시는데 그들은 왜구라 표현해야) 100여 명을 사살하는 듯 성과도 올렸다는
그의 어떤 시사저널에 육성 증언은 아마도 우리 일반과는 사뭇 틀린 견해인듯 하다.
호구록 1장에는 권 군수가 3월에 평창에 부임하고 4월에 임란이 일어나자 전봉사 지사함을 대장으로 하고 그를 따르는
심복부하 100여 명을 사병으로 삼아 외대에(*주; 현 응암굴의 정동굴) 울타리를 만들어 방패로 하고(*주; 엄패등,,) 군기와
석차를 방비토록 했다(*주:석차는 돌을 실은 수레로 이 무기는 당시 행주산성 전투에서도 사용하였는데 아마도 이 돌을
사용하는 포(包)의 설계도는 당시 권율 도원수가 해주 등에 부자들에게 돌리어 만들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는 어느 박사의
논문이 있다. 그래서 평창에도 화포가 아닌 석포가 제작되었다고 이해해야,,,)
여기서 해석적 이해는 평창엔 현지 모집까지의 약 100여 명의 군졸을 보유하였다. 그러나 이 기록은 평창의 임란날자인
8월 7일 이전으로, 그 후 조정의 명에 의해 신립장군의 탄금대 전투에 치루게 되었는데 그 날자와 잔여 병력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또한, 호구록의 1장의 아래의 기록엔 <8월 7일 밤에 왜병은 정선에서 평창으로 선발대가 들어오자 급히 배를 띠워 강녀와
주, 고언영외 노비 4~5명을 급히 굴에 들게하고 지사함과 품관인 지대성, 우웅민, 대명, 이인서, 이대충등,,,
그리고 백성 수백명이 미리 준비해둔 굴로 들어갔다>
왜구들은 미탄에서 들어오며 약 4일동안 4,000명의 대 부대가 들어와 영월로 빠져나가 주천으로 첩경이 아닌 제천쪽으로
돌아 원주로 향한다.
그리고 영원성(치악산성)에서 결전을 준비한 원주시장 김제갑 옹 부자의 목을 베며 영원산성 전투는 패하고 강원도는 왜구들의
수중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저는 앞으로 응암지와 호구록의 번역본을 구하여 첨부 할 것이고, 호구록에 번역자인 권태하 님의 설명의 오류도 바로 잡고
또한 권두문 군수의 글 중에 추정치인 가상적 글의 오류도 바로 잡아 이해도 있는 해석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응암굴을 外垈와 月垈라 하는데, 외대란 100여명이 들어갈 수 있는 아랫굴이고 월대의 달월 자는 비밀스런
윗굴을 지칭하는 뜻인듯하며, 이것은 임란 이후의 지명 표시인듯 하다.
요즘 말로는 위의 5-6명이 들어가는 굴을 관굴, 아래를 민굴이라 쉽게 이야기하지만 호구록에서는 아랫굴을 下險굴로
표기하고 있다.
또한 호구록에서 동촌이란 지명이 나오는데 이곳은 어디일까??
권두문 군수의 고향 영주와 연락도 쉽고, 가깝다고 하는 설명도 따르는데 당시 동면은 지금의 정선군 신동읍으로 조선시대엔
평창군 동면이었으며, 아마 동촌으로 지칭하는 것으로 파악 된다.
그리고 이욱환 선배님은 평창문화원장으로서 명품 평창문화 만들기에 노력하시며, 그 일환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평창아라리(아리랑)의 체계적 논지를 구축하는 사업도 추진, 전개하실 것이라는데 이는 상당히 고무적인 이야기로
평창아라리는 민속자료로서 여흥을 넘어서는 이 고장 선인들의 삶의 표출이며, 얼굴인 것이다.
물론 평창아리랑 보존회도 있다 하지만 활성화가 미약한듯 하며, 형평성없는 정선아라리에 묻히는 평창아라리의 독창적
체계를 추구함도 이 땅의 후손으로서 마땅히 해야할 사명감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아리랑에 대한 나의 견해는 우리나라 아리랑의 왈가왈분한 대부분의 이론들과는 상이한 생각이다.
아리랑의 대부분 이론들은 비 학자들의 주장하는 검증이 되지 못하는 학설이 아닌 이야기들로 이들을 역순으로 보면
모순을 가지는, 특히 <도원가곡>이라는 정선아라리의 시원도, 정선 교육청의 아리랑 학습자료도 어거지 이론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거론하지 않으면 안될 이유는 이미 이러한 불 공정한 이론이 평창인들에게도 편파적인 관념을 심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평창아라리가 정선 아라리에 묻힐 것이 아니라 정선 아라리의 차 상위급 레벨임을 견지해야 하는 것이다.
암튼 문화원장인의 각고하신 평창문화 여러 사업 추진에 진심으로 공감합니다.
*참고문헌-- 아이디 "나무귀인"님의 블로그에서 <호구록>의 한글 번역본 원본의 기록입니다.
http://blog.daum.net/selamatdatang/13182958
*http://blog.naver.com/arari63/50021024931 오늘의 정선 아리랑의 발전적 모습의 공로자인 "진용선'의 정선 아라리 관련
블로그 중에서,, 조선시대 평창군수 임명의 왕의 교지
임금님은 도장을 안찍어도 효력이 발생되는듯,,,
이번 추석에 오대산 가는 길에 들려본 월정사에 대한 감상은 2부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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