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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의 임진왜란사

영월문화원의 고종경 창의비에 대한 문의에 답을 드립니다.

 

영월문화원의 고종경 창의비에 대한 문의에 답을 드립니다.

 

高 柱 浩

감사합니다.
우선 이렇게 현대의 시기에 의병장 발굴의 역사는 쉽지 않을 것이란 점에서 이번 영월 문화원의 창의비 제막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아래의 적 사항과 호구록을 접하며 본인이 생각하는 일반론을 피력하겠습니다.

 

柳永吉(유영길) 215代 선조22(1589) 1538~1601 江原道 觀察使 *임란 연대와는 상이함
임란 당시인 1592년 당시 강원 감찰사는 유영길이 아니라 申 點(신 점) 218代 선조25(1592) 1530~ ? 江春道 觀察使이라야 맞을 것이다.
여기에서 호구록에는 8/19일자 일기에 두번 道伯이란 서술이 있지만 고유명사는 붙이지 아니하였다.
아마 옛날엔 (2~30년 전)에는 인터넷 발달이 미약해 자료 검색이 힘들고 정확치 못한점에 기인한듯 합니다)

영월문화원   2019.08.29 10:55          

영월문화원 사무국장 나명길입니다.
먼저, 저희 영월문화원의 사업에 깊은 관심과 조언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확인을 요하는 부분을 말씀드리자면,"柳永吉(유영길) 215代 선조22(1589) 1538~1601 江原道 觀察使 *임란 연대와는 상이함. 임란 당시인 1592년 당시 강원 감찰사는 유영길이 아니라 申 點(신 점) 218代 선조25(1592) 1530~ ? 江春道 觀察使이라야 맞을 것이다."라는 부분입니다.

<강원감영 500년>(역대 강원도 관찰사 인물고), 원주문화원, 2017년. 530, 531쪽에 의하면,
申 點(신 점)의 재임기간은 1591.4.4~1591.7.23이었고,
柳永吉(유영길)의 임기는 1591.7.~1592.9.29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확인 부탁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

 

호구록에서의 문제제기

「호구일록」은 임란당시 이를 체험하신 남천 권두문 평창군수의 일기체 형식의 기록으로 남천 문집에 수록된바 권두문 평창군수 직계 13세손 고, 권태하 님이 해석 번역하시고 블로그에 게시되었으며 후일 평창에서 번역본이 출간 되었습니다.  야기에 본인이 수록한 호구록 인용문은 블로그에서의 글이며 후일 출간되는 책에서는 이해를 위한 점보다 원문에 더욱 치중한듯 합니다. 그리고 권태하님은 약 6년전 작고하시고(명동성당 장로) 후일 블로그는 일년전쯤 폐쇄되어 확인은 불가능 합니다.

 

본인은 게시글을 그대로 인용하였던바, 강원감사 유영길은 임란 당시가 아닌 오류인듯 합니다.

권태하님의 블로그에 게시한 글로 제7장이란 분류별 큰 의미도 아닌 인테넷에 게시시 한번에 3일동안의 일기를 묶어서 1장, 2장등의 게시 회차로 분류한 것으로 총 13장으로 게시했기에 이 분류로 13장이라 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고종경 어른을 평창으로 압송해서 하는등 본인의 인용글은 철자 한 자도 수정을 가하지 않은 상태이나 이후 평창에서 출간된 후구록에는 다소 차이를 보입니다.

 

그리고 평창의 평창강은 서강이나 동강으로 표시하며 왜구들이 대굴령을 넘었다는 등의 오류가 있습니다.

 

◆  원문중에 강원감사 유영길이란 게시글은 번역시 오류인 합니다.

 평창에서 출간된 호구록 책자에는 강원도백으로만 표시되어 있다. 호구록 원문에는 이름의 고유명사나 일반의 당시로서는 원춘도(강원)이라는 지역적 표현도 생략된 도백(道伯)이라는 표현으로 두번 기록되고 있습니다.

 

<두 곳의 수정 예시>

① 일부 도망친  군사들 대신하여 강원 감사 유영길은   군사들의 문제를 지적하며 강원도백(관찰사)은 사정은 가상하지만 군율을 어겼다고 해서 사형을 집행할 것을 명하였다.

②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한 강원감사 유영길은  강원도백(관찰사)은 고종경을 사면한다고 하였으나 이미 사형이 집행된 후였다.

 

위 1번역문 두 곳에 도백의 이름을 뺀 상태가 호구록 원문 번연에 적확할듯 하며 필요하다면

*주) 당시의 강원 관찰사는 申 點(신 점)으로 재임기간은 1591.4.4~1591.7.23로 주석으로 표시하는 방안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고종경을 평창으로 압송하여 형행하였다 또는 권 군수는 평창과 영월군의 업무를 수행하며 영월서 처형하였다 하는 두 문장의 차이에서 호구록 원문에서는 형행장소가 평창 아니면 영월에서인지 그러한 기록은 없어 어디서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호구록에서는 권 군수는 겸직을 하고 있어 하는 표현을 기록하고 있는데 무엇을 어떻게 겸직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한단어는 영월군도 업무를 일시적으로 담당하였슬 것이란 추정가능치

 

(기록인용)

당시 영월군수로는 이인원(李仁元)으로  신묘년(辛卯年, 1591년 선조 24) 10월 20일에 부임하여,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 6월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인사이동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0월 초 일에 다시 순찰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음관(蔭官)으로 적을 토벌하기가 불가하다는 장계가 올라와 다시 인사 이동되었다

 

 영월의 이러한 기록을 보면서 일반적으로 영월군수가 임란시 부재상황을 도망갔다고들 표현하고 있지만 위 기록을 보면 당시 이인원 군수는 모친 상으로 시묘살이에 공석이 되는것으로 보이며 또한 모친상의 시묘살이의 중일텐데 순찰사직은 아마도 변칙운용인것으로 음관이란 표현의 장계가 올려진듯 합니다.

이렇게 당시 영월군수의 분석적 이해로 보면 강원도백은 고종경 형행시건등을 평창군수에게 위임하며 권 군수에게 하명으로 영월군수가 궐위중이니 영월도 잘 보살피라는 등의 언질은 있었슬 것이다.

 

 

호구록에서는 그 형행장소가 영월인지 평창인지 정확한 가름은 할 수 없다.

러기에 기천록에서의 상황에 이 점도 면밀히 관찰해볼 대상임, 또 한가지는 이 부분에 영향을 주는 문장으로 이때 평창에 피난 온 완산군(完山君) 이축(李軸), 전부사(前俯使), 윤면(尹勉), 선전관(宣傳官) 신경징(申卿澄) 교관(敎官) 홍식(洪湜)등이 창의(倡義)인재임을 들어 사죄성공케 하려고 힘썼으며 하는 문장에서 이들이 평창 아니면 영월 어느곳으로 피난온 것인가 하는 사료가 나온다면 이 점의 문제 해결에 가능한 지점이다.

 

 

 참고로 임란시 강원 임진왜란 전사

 

왜구는 정명가도가 아닌 각 도영의 감사자리를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부터 배당받고 왜군은 총 9번대 16만명이 선으로 건너옵니다. 이때 강원지역은 요시모리나리의 4번대 14,000명의 병력이 문경새재를 넘어 서울 목전에서 강원도로 대회전하여 강원감영( 원춘도 감영으로 현 원주) 공략하기에 강원도 대 회전을 합니다.

 

서울 입구에서 김화로 접어들며 일부는 춘천으로도 제압군을 보내지만 고성,간성- 강릉- 백봉령- 정선- 평창- 영월- 신림- 원주

로 주변을 제거하며 중앙으로 진격하는 작전법으로 강원도를 대회전합니다.

여기서 왜구는 백봉령을 넘으며 강원도를 대 회전하여 원춘도(강원도) 감영을 접수코져 정선- 평창- 영월- 신림- 원주 영원성(치악산)으로 출정하는 길목에 위치하기에 그들이 지나치며 약탈과 만행을 자행합니다.

 

그러기에 백봉령을 넘어 정선에 당도하니 정선군수 정사읍은 중과부적의 숫자에 할 수 없이 항복하지만 평창의 권두문 군수는왜의 서신을 들고온 자의 목을 베고 항전에 이르지만 당시로 각 군현의 군사는 속오군 110명 정도는 현지 주둔군이 아니기에 약 20여명의 군사를 가지는바 각 군의 군사들은 문걍새재의 신립장군에게 차출되었으며 ( 조정은 문경새재에서 방어를 명 하지만 신립장군은 보병이 아닌 기병 출신이기에 대패의 문제를 가집니다)

최소한 영원산성 전투는 3~4천명 선으로 기록하는바 평창과 영월을 넘는 왜군은 약 4천명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춘천 조방장(지역 방위 사령관)은 왜구가 출현했다는 소식에 김화로 달려 가지만 매복작전의 함정에 빠져 전사되며 그의 목을 베어 장대에 걸어 놓는 왜구 악질의 모습을 보입니다. 이러한 이유는 아래와 같습니다.

 

모리요시나리는 현 고쿠엔쯤의 출신으로 도쿠가와의 가신으로 자기 병력 2천명과 일본 최남단의 시마즈 가문의 병력 12,000명으로 강원 감사의 자리를 확약하고 출정하였던 것입니다.

12,000명의 병력으로도 4번대장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는 이유로는 규수의 사스마현(현 가고시마)의 "시마즈 가문"은 센코쿠(전국시대) 말기 큐수의 다른 다이묘들을 거의 제압하여 수의 통일의 목전에 도요토미의 중재를 거부하자 토요토미는 20만의 대 병력을 보내 큐수를 정복합니다. 큐수는 싸우기 전에 항복하고, 토요토미에게 복종을 맹세하는 대신 사스마번을 보장받게 된다. 이렇게 목숨만 면한정도라 그들은 도요토미에게 충성심을 나타내야 목숨이 살아 연명하기에 이들은 후일 정유재란에서 전라도 지방을 담당하며 코와 귀를 베에 본국으로 보내는등 충성심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악랄성이 호구록에서 영월을 강점후 영원성(치악산)에서 원주시장 김제갑 옹 부자의 목을 베어 상부로 보내는등, 신림에 접어들자 여럿의 목을 베어 장대에 걸려져 있는 등 그 악날한 수법을 나타내고 있다.

 

◆ 고씨 동굴에서 연못에 투신자결을한 조씨부인은 시대를 넘어서는 또한, 언제나 잊어서는 안되는 도덕적, 성의 모럴의 귀감입니다. 성 춘향은 가공의 인물이지만 임란 당시 평창의 권두문 군수 부인 강소사(강절부 추증)는 왜구로부터 더렵혀짐에 앞서 응암굴의 천인절벽에 투신하여 자결을 하여 절개를 지키며 또한 영월 고씨동굴에서 왜구로부터 절개를 지키려 투신 자결을 하는 조씨부인은  우리 산 역사에 귀감이 되는 性적 모럴의 아름다운 도덕성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러한 자결을 430여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 역사를 알았기에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이 시대 영월인들은 조씨부인의 진혼제도 마련했으면 좋으리란 생각입니다. 아마 영월문화원에서도 이 점에 많은 사료를 연구하시는듯 합니다.

 

◆ 영월은 의병활동으로는 갑오 농민 2차 봉기에 해월 최시형의 영월 운둔과 당시 일제 강권에 목숨의 보장이 안되지만 이를 받아주는 영월인들에서부터 많은 의병을 찾을 수 있는 점 입니다. 갑오 농민 2차 봉기는 이후 을미의병으로 이어지지만 1910년 일제 강점에 의해 만주 등지로 독립군의 모체가 되기에 더욱 중요한 점 입니다.

 

◆강원도백이 고종경에게 찾아와 의병 오백병과 관군 500명의 일천명으로 흥원진을 방어하라는 명을 내립니다.

그런데. 장비등이 왜군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에 지리를 잘 알고 있기에 영춘서 홍천사이의 산간으로 치고 빠지는 쿠테타식 의병에 가담하고자 했지만 왜구 본대가 도강하여 강원감영을 쳐들어올것이란 판단에 흥원진에서 왜구의 본대를 천명으로 막으란 명령에 이의 실행은 등잔아래 초파리 목숨같았는지 분열이 생겨 이를 추포하여 해당 기일까지 전원의 병력이 흥원진에 도착하지 못하자 도백은 의병도 군사를 일으킨 점에 군법으로 다스려서 형횡을 명 합니다.

 

이후 잘못이 없으니 방면하라는 명이 전달되지만 권 군수는 차일 피일 미루다 할 수 없이 형행한 다음이었기에 더욱 애석한 죽음을 맞이 한 것입니다.

 

그리고 기구한 운명인지 권 군수와 고종원 두 형제는 원주 감영에서 만나고 권 군수의 아들 주등의 노력으로 비오는 날 새벽에 담장을 헐고 탈출합니다.

 어찌보면 영원한 액소더스인듯한 역사로서도 감명의 스토리가 전개됩니다

 

흥원진이란...

 조선시대에는 한강 수계는 수운의 뱃길로 원춘도의 도영 원주의 관문으로 남한강과 태기산에서 발원한 섬강이 합수하는 지점인 원주시 부론면 홍호리에 위치해 있는 남한강 뱃길에 원주, 횡성, 평창, 정선등의 조세미를 거두어  보관하던 창고가 잇던 나루로 여기서 내륙으로 가기 위해서는 섬강으로 10km올라가 문막의 배나루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해운이 아닌 수운으로 조세미를 나르는 5개의 조창(조세창고)중 예성강과 북한강은 소양창, 남한강은 흥원창, 목계나루의 충주창이 있었으며 조세 창고는 소양강과 한강의 흥원진 나루의 흥원창의 조창과 목계나루의 충주일대의 충청, 경북 일ㅈ부 지역의 조세미를 관장하던 가홍창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 공은 판운수운이었다 합니다. 이 판운 수운은 종 5품직으로 수운의 조창 관리직을 말하며, 이러한 수운창은 200석 싵는 배가 20척, 21척 있으며 수운창의  기능은 조세미를 보관하여 다음해 2~5월까지 마포나루의 용산창으로 실어 나르며 또한 소금등의 해산물을 실어 오르며 아마 가홍창에서 영월나루로 운반되었으며 이외의 소금은 백봉령넘어까지 삼척에서 선질꾼에 의해 날라왔습니다.

 

 흥원진이 중요한 강원도 관문이며 기능상으로도 조세미와 소금배급의 중요한 기능을 하는 곳입니다.

 이효석의 봉평을 무대로 하는 소설 「산협」에는 공제도가 소에 소금을 실으러 문막창으로 가는 모습부터 소설이 시작됩니다.

 

이로서,

영월은 禮를 중시 여기는 충절의 고장이고 또한, 구국의 길에서는 목숨을 아끼지 않고 국난을 극복하는, 이러한 시대를 넘어서서 영원히 존경 받아야 할 아름다운 역사를 간직한 고장입니다.

또한, 임란당시의 고종원 3형제의 의병의 노력과 고종경의 의병장의 모습을 비록 오늘에서야 알았지만 이로 인하여 고씨 동굴의 내력도 바꿔서 서술해야 할 듯 합니다.

 

고씨동굴은 임란시 고씨 일가가 피난하였다는 피상적 내용을 탈피하고, 고종경이 의병장으로 처형되는 사건속에 의병장의 집안이기에 왜구들 모르게 강 건너의 동굴에 숨어야 했던 역사에서 이러한 내용이 스토리텔링화 되는 안내판으로 다시 서술되어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역사에 공감속에 동굴 견학이 이루어 졌으면 합니다. 

 

유럽인들의 여행속에서도 역사사 뭍어나는 이야기의 스토리 텔링속에 문화 역사 유적을 여행하듯이 지금까지의 영월문화 여행에 고씨굴은 새로운 역사로 업그레이드 되고 의병장이란 새로운 아이콘으로 태어나길 기다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