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평창의 임진왜란사

임진왜란시 평창전사(戰史)

 
 

  [임진왜란시 평창전사(戰史)]

 

 

 

 후세백작 2014.10.02 01:50

 

 평창 임진왜란사의 개괄적 언급을 하면, 1592임진란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명령으로 조선 정벌군은 9번대까지의 본대와 예비대, 그리고 기타 부대를 합해 28만 명이나 되었다. 일본군의 편제를 아래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정명가도가 아니란 점은 아래에 평창군수 권두문이 체포되는 이야기에서 체포되어 포승줄에 묶인 권 군수에게 왜 항복을 안 하는가 하며 왜장이 나 "모리나리"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강원 감영의 관찰사의 품신을 내정받고 온 자이다라고 말한것은 임진왜란이 정명가도가 아니라 조선침략이고 아래의 글에 보면 조선의 물자, 군사들을 징발하여 추후 명을 치겠다는 의도를 명확히 가진 것이다.

 

(본대)

 

1번대 : 고니시 유키나가 18,7000명.... 평안도 장악 계획.
2번대 : 가토 기요마사 22,800명   .....  함경도      〃
3번대 : 구로다 나가마사 11,000명 ....  평안도      〃
4번대 : 모리 요시나리 14,000명 ,,,,강원도     〃
5번대 : 후쿠시마 마사노리 12,400명,,, 충청도       〃
6번대 : 하치스카 이에마사 12,700명.... 전라도      〃
7번대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15,700명..경상도
8번대 : 모리 데루모토 30,000명    ,,,,,,,경기도
9번대 : 우키다 히데이에 10,000명,,,,,,, 경상도     〃

 (예비대)
10번대 : 난쵸 모토키요 17,500명
11번대 : 아사노 나가요시 24,960명
12번대 : 마에다 도시이에 10,000명
13번대 : 오카모토 시게야마 6,490명

14번대 : 하시바 히데카츠 13,750명
15번대 : 히데노 다카아키 4,100명
16번대 : 도쿠카와 이에야스 (+다테 마사무네) 12,050명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전략계획에 따라 총 1632백여명이 조선을 쳐들어온다.

1

  조선을 점령후 조선에서 병력을 끌어 모으고 예비대를 합쳐 중국을 쳐 들어가 북영은 천왕에게 주고 강남쪽의 닝보는 도꾸까와 자신이 통치하려는 (대륙경략 계획 25)를 작성해 놓기도 하였는데, 이는 도요토미는 세계정세에도 어두웠고 자기나라는 비워 두고라도 예비대까지 25만여 명의 병력으로 중국을 전부 말아 먹겠다는 야망은 조조의 백만대군의 삼국지도 못 읽어 본 사람 아닐까?? 일본과 달리 한국과 중국은 중심이 되는 성을 함락한다고 전쟁이 끊나지 않는데, 이는 도요토미의 망상이었으며, 당시 중국에서는 이미 일본이 명나라를 치기 위해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5917월에 조선은 성절사로 김응남을 파견했지만, 조선이 알려주기도 전에 복건성의 무역상 진신이 장사차 오키나와에 들렀다가 전쟁 계획을 전해듣고는 즉시 복건성 순무 조참로에게 알렸고 그것은 바로 명 조정으로 들어갔다.

 

  당시, 오키나와에 왕세자 상령은 아예 명의 조정에 일본의 은밀히 계획을 알렸고, 오키나와에 끌려와 한약방을 하고 있던 강서성 출신 허의후도 주균왕이라는 사람을 보내 알렸지요.(오키나와는 히데요시의 병력 모집에 응하지 않았음)

 

  재미있는 것은 조선 조정은 일본이 조선이 아니라 명나라를 치겠다는 것을 알려야 하느냐, 마느냐의 논쟁으로 시간을 끌었고 이 때문에 오히려 명나라는 조선이 일본과 손을 잡고 명나라를 치려하는게 아니냐는 의심을 짙게 하고 있었다

.

  우리나라 대신들은 역으로 이런 생각도 못하는 주제들에 니라의 존폐의 위기에 별거로 시간을 다 끄는,,, 뒤에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할 때도 명나라는 사실 믿으려 하지 않았다.

 

  당시 중국에서는 조선은 고려, 고구려처럼 강군을 가지고 있던걸로 기억하기 때문에 불과 며칠만에 한양이 넘어 갔다는 이유로 원병하기 이전에 그 사실에 대한 진위여부를 밝히기 위해 상당한 시간을 보내야 했답니다.

  우리로선 사색 당파와 왕의 무능력이 주범이었다.

 

 

<모리 요시나리의 4번대의 강원도 大回戰> 

 

  모리 요시나리의 4번대가 강원도 평정의 길에 우선 평창 전사에 따라붙는 미사구 중에 왕세자를 잡으러 함경도에서 우회하였다는 것과 모리부대가 4천 또는 1만5천의 병력이나 병력이 평창을 쳐들어온 것이 아니기에 부가적 설명부터 합니다.

  가토 기요사마(가등청정)1592년 임진란때 도요토미의 명령으로 조선 정벌군 2번대 선봉장으로 417일에 부산에 상륙, 513일에 서울을 입성하여 함경도 해정창(海汀創 전투에서 한극성이 이끄는 조선군을 격파하고 함경도를 평정하였다.

  이후 국경인(鞠景仁)등 현지 조선인에 의해 생포되어 있던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삼았다.

  이어서, 가토는 조선의 국경 두만을 넘어 만주로 침공 하였지만 그들의 주 루트가 아니고 노획물이 적어 다시금 함경도로 후퇴하였다가 명군의 출병에 경기도로 후퇴하란 명으로 함경도를 철수 하였다.

  그러기에 모리부대는 함경도에 왕세자를 잡으러 갔다는 이야기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왕 새자의 기록은 가토 기요사마의 함경도 전사에 자세하게 나온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임란당시 강원도 상황으로 모리 요시나리의 4번대는 시마즈 가문 군대로 이 시마즈 가문 군대는 임란에 참전한 왜군 중 가장 악명 높은 군대이다.

  규수의 사스마현(현 가고시마)"시마즈 가문"은 센코쿠(전국시대) 말기 큐수의 다른 다이묘들을 거의 제압하여 수의 통일의 목전에 도요토미의 중재를 거부하자 토요토미는 20만의 대 병력을 보내 큐수를 정복합니다. 큐수는 싸우기 전에 항복하고, 토요토미에게 복종을 맹세하는 대신 사스마번을 보장받게 된다.

  슈는 미국의 오하이오, 한국의 전라도처럼 변방이며, 그래서 그들은 유사 성격들을 보이는 특징도...2 만의 군대로도 족할 전투에 무모하리만큼 20 만의 대군을 보내며 군 운용에 발전을 가하였는지 모르지만, 그로부터 5년후 20대군을 보내 조선정벌을 나선다.

  이에, 임진왜란이 벌어지자 4번대의 시마즈 가문은 14천 명의 군대를 조선징벌에 보내게 됩니다.

총 대장은 큐슈지방의 시마즈 가문등의 반란을 진압하고 부젠국의 다이묘가 된 도꾸가와의 가신 모리 요시나리이며 그는 자기의 병2,000명을 끌고 왔다.

  (뷰젠국은 큐슈지방이 북쪽 고쿠라 도시지역으로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은 원래, 이 고쿠라에 떨구려는 목표로  6시간이나 비행해 갔는데, 시계불량으로 3대의 편대가 흩어지고, 시계불량이 80%로 회항시 기름부족으로 원폭을 바다에 떨구려다 바다 건너편 섬의 나가사키에 조금 구름이 적게보여 조종사는 이곳에 투하하여 고쿠엔은 운 좋은 도시다)

 
  왜군 4번대는 한성에서 강원지역으로 진군을 하자 강원도 조방장 "원호"가 춘천에서 진을 치고 있다가 왜병이 김화에 출현했다는 소식에 병력 500명을 이끌고 김화에 도착하자 이 사실을 미리 안 왜구들은 매복하였다가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원호의 목을 베어 김화 성문에 매달고 조선의 군사와 백성들에게 위협을 가하였다.

(원호; 무관으로 선전관, 전라우도 수군 절도사 역임 , 왜구를 막지 못했다고 유배 후 석방되어 강원도 조방장으로 여주 등지에서 전투함, 좌의정 추승) 

  왜군 4번대의 시미즈 군대는 간성(고성)을 경유하여 춘천지역을 점령하게 되고, 여기서 4번대 총대장 "모시 요리나리"의 제1(아래 군기 1번기)는 삼척을 지나 백봉령을 넘어 정선, 평창을 지나고 원주를 점령하게 된다. 당시 모리 요시나리의 직속부대 2,000명과 규슈의 중소 다이묘의 군사를 포함하여 3~4,000명이 백봉령을 내려와 정선으로 들어가자 정선 현감은 그냥 항복하였다. 

 "호구록"엔 정선관리가 평창까지 끌려와 이번과 앞으로도 10월에도 두어 번 곡식을 공납하라는 강요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첩첩산중의 실오라기 같은 동네에서 항복하고 곡물 공납이나 성문화도 원색적이고 교양도없는 왜놈들의 질서는 참으로 문란이 도를 넘었슬 것이다.(*호구록- 임란당시 권두문 군수가 직접 쓴 평창임란전사중 일부이다

  4번대의 13~4,000명의 모리부대는 정선의 항복을 받고 성마령을 넘어 미탄에서 평창으로 접어들었다. 미탄 삼거리에서 첩경인 마차를 지나 영월로 가지 않고 평창을 경유, 영월로 들어가서 원주로 들어가게 된다. 미탄에서 평창으로 들어오기에 멧둔재를 넘어 평창으로 진군하였다. 

  그래서 영월-제천- 주천-원주길이 최소한 우마차가 다닐 수 있는 최적의 도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러나, 왜구들은 원주 강원감영을 접수하기 이전에 김화-고성-강릉-삼척-정선-평창-영월로 한 바퀴 돌며 우회하며 주변부터 정복하는 전술을 택하였고 "호구록'에 의하면 그들은 평창에서 원주로 가는 빠른 길인 주천으로 접어들지 않고 영월로 돌아 영월군도 접수하고 갔다.

왜구들은 종부를 지나 여울을 건너 약수에 본영을 자리 잡았다(호구록에서 권 군수는 포로로 잡혀 약수 본영에 임시감옥에 투옥 되었다)

 

평창현감 권두문이 겪은 난중일기 "호구일록"<虎口錄>에 기준하여 아래는 당시의 이야기들의 이해를 서술해본다

 

호구록 1) 8/ 7일,,,영동의 왜적들이 모두 대관령을 넘으며, 이날밤을 타고 왜적의 선발대가 정선으로부터 들어왔다.

                         ( 이곳 평창을 다녀갔다란 기록에서 아마 권군수의 부임 몇 개월째라 지리에 혼동으로 대관령을

                         넘었단 표현은 오류인데, 당시 평창에서의 이해로는왜구가 대관령을 넘었으리란 판단의 오류인듯,,,

                        하지만 모리의 기록엔 삼척 백봉령을 넘었다)

              8/ 9일,,,항복을 권하는 倭書를 가지고 온 자의 목을 베고 우리 평창은 항전의 기치를 높였다.

호구록 2) 8/10일,,연 나흘간에 이어서 왜적은 모두 도착한 듯, 약수에 본영의 진을 치고 정동굴에 피난을 한 관군민이

                          왜적에 적발 되었다.

호구록 3) 8/11일,,응암굴은 왜적에 포위되어 군수는 체포되고 강소사는 왜적에 체포시 응암굴 아래 천인절벽에 투신

                         자결 하였다. 군수 일행은 관아의  임시감영에 투옥됨.

호구록4) 이 장에서는 타이틀 표지에 임란당시에 함경도에서 왕 세자를 잡아 한양으로 보낸 후 원주 감영을 접수하러

                         간 설명은 오류로 왕 세자를 잡으로 함경도로 간 부대는 2번대 가토 기요사마의 부대임을 이미 밝혔다.

호구록 6) 8/16일,,왜적이 영월로 가면서 군수일행도 영월로 압송되었다.

호구록 7) 8/19일,,17, 18일에 영월사람들이 투옥되며, 19일엔 고씨굴에 피난한 고종원 형제도 체포되어 들어왔다.

                         그리고, 이 장에서든 고종경 어른이 영월서 의병을 일으켜 강원도백의 명에 미쳐 따르지 못한

                         죄명으로 평창으로 압송되어 권 군수는 명에 의해 형 횡(刑行)하는 기록이 정확히 서술되어 있다.

호구록 9) 8/23일,,자정쯤 부대는 이동하여 북천(주천인 듯)에 이르러 다른 진영과 합류하여 원주로 이동하였다.

                          (이날의 호구록엔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제천과 주천의 갈림길에서 길가의 촌가에서 재물을 뒤지느라 방방이 뒤지는 것도 보았고

                         그리고 간혹 여자도 태우고 가는 자도 있었다.

                         또한 큰 짐이나 작은 짐을 지고 가는 자는 반 이상이 우리나라 사람으로 왜놈 모양을 하고

                         있슬뿐이다.

                         웃고 떠들고 하는 말이 우리말이다.

                        깃발을 크게 벌리고 행군하는 걸 보면 마치 장수가 행군하는것 같다 . 그러나 허세다.

                         괴수는 보통 옷을 입고 말만 타고 대열 중간쯤에 섞여서 간다.

                       *그 옛날에도 일신의 호강을 위한 앞잡이 부역꾼들의 설명이다*

호구록10) 8/24일...신림을 지나 가리 현에 들어가니 10명 정도의 머리를 잘라서 바위 위에다 올려놓은게 보였다.

              8/25일.. (*주;원주 감영에서) 통역 왜인이 와서 어린애의 목에 창을 들여대고 목사(주;원주목사 김제갑 옹은

                           어디에 있느냐고 다그치니 한 노인이 영원성(*주;치악산 정상 아래의 성)으로 갔다 말한다.

              8/26일,, 어제 왜병들이 영원으로 갔는데 오전에 왜병 한사람이 영원에서 가져온 머리 하나를 보이며 누구냐

                          묻는다. 어느 노파가 살며시 말하길 원주목사 김제갑옹의 아드님이란다.

                          (*주: 영원산성에서 김제갑 목사와 그의 아들은 목이 베어지고 모리 부대인 4번대 1대의 3,000명의

                          왜적에 의해 군, 관민 4,000명은 참패를 당하고 강원감영 원주도 왜구의 손에 들어갔다.)

호구록 13) 9/2일... 권군수 일행 3명은 깊은 밤 폭우속에 왜병의 감옥을 탈출한다

 

 

  이로써, 권 군수의 8/7일부터 9/13일까지의 일기체 형식의 기록인 "호구록"16장과 완결편으로 끝을 맺는다.

420 여 년전의 글이지만 이를 읽어내려 가면서 마치 영사기록을 보듯 당시를 이해할 수 있는 역사서로 그의 기억과 정확하고 자세한 기록에 감탄사를 자아내며 또한 기승전결이 잘 갖춰진 한편의 드라마 같은 기록이.

 

  여기서 기승전결이라 함은 왜구가 평창으로 진격하며 응암굴에서 포로가 되어 원주까지 끌려가며 겪는 풍상과 원주 빙허루에서 탈출에 성공하는 과정 속에 주천에서 산간오지인 입탄으로 돌아 다시 평창 땅을 밟으며 정동과 공기. 도마치를 지났어야 할 외길의 첩첩산중으로 영월 상동에서 장남과 동생을 만나 깊은 밤에 고향 집으로 찾아가는 ...이 기록을 조금 간추려 보았는데, 물론 영원산성의 기록은 평창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이지만  이 호구록에 나의 이해를 피력해 본다..

 

  * 8/7일 정선서 첨병 왜적들이 평창으로 들어오고 8/8일엔 주력부대들이 약수와 천동일대에 집결하여 군장을 푼후 주변에 먹거리나 부녀자 납치등을 목적으로 8/9일 인근 천동 강 건너 응암리에서 응암굴에 피신할 때 풀숲에 감춘 깃발을 확인하고 주변을 검색하던 왜적들에게 피난 굴은 노출되고 다음날인 8/10일 피난굴은 공격당하였으며,

군수

일행은 체포 되었다.

 

  호구록내에 권 군수는 강녀에게 동촌으로 (*: 이 동촌에 대해서 평창인들의 논란이,,, 엄기종 님은 당시에 평창군 동면은 현 정선 신동읍이며 동촌의 요새는 미탄 백룡동굴이라는 언급이 맞는 듯 합니다피난을 권유하자 장수들은 군수가 그곳으로 갈 필요없이 난공불락의 요새굴인 응암굴로 가기를 직언하였다. 동촌이 어디인지 견해 차이는 있지만 권 군수는 고향 집 가기가 수월하고 가깝다는 표현인데..

 

  "응암지"에서 동촌은 권 군수가 고향 영주로 가기 가깝고, 또한 정선과 태백, 삼척으로 접했다고 표현되 있으며, 1906행정개편 이전에 지금의 정선군 신동읍이 평창군 동면이었으며, 지금의 미탄면은 그 당시에는 마을 형성이 않되었던듯아뭏튼 동쪽으로 동촌이라면 멧둔재를 넘어 미탄  뿐인데, 미탄은 청옥산 아니면 백룡동굴  뿐이라.

 

 그래서 군민등 100여명이 피란하고 숨을 수 있는 곳은 동촌 건너기 전의(*지금의 동강)의 백룡동굴이 천연요새로 엄기종님의 견지인 백룡동굴 피난설을 무조건 부정만은 할 수 없는 것이라..백룡동굴은 예부터 굴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찾기도 어렵고 강을 건너며 공격을 가하기 어려운 난공불락의 피난처인것이다.

만약, 동쪽으로 피난가서 왜구를 등뒤로 따 돌렸었다면 그들을 원주 도영을 정복하기 위해 찾기위한 시간은 없었던 하여 평창도 노역자. 곡물, 부녀자의 횡포는 있었슬 듯하다.

 

  임란당시 노산성 전투를 이야기 하는데, 위 평창 임란사를 보면 노성산에서나 장기적 전투도 없었다

또한, 노산성 뒤 강건너 여만리 여울의 뙈담이라는 두 개의 돌무더기는 요새로서의 의미는 전혀 없다. 왜담이 아닌 뙤담 즉 뙈놈이라면 오랑캐라,,, 고려때 70년간 이 땅을 밟은 몽골군에 항쟁 때 몽골군이 쌓았다는 추정도..  그러나 이 돌 무더기는 반대쪽에서도 노상산에 그대로 노출될 각도일텐데 은폐나 엄폐의 성을 쌓았다는 논리는 부정확한 뜻을 내포한다.

 일단 이 방추형 돌무더기는 인위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군사목적으로 부적격이라면 옛 선사인들의 강가에 무언가            지금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선사시대의 어떠한 생활 패턴이 아닐까 하는.,,,.

 

 *호구록 속에 왜의 대화 내용중 영월서 재천과 주천의 경계에서 길을 재촉하던 이유는 충청땅이기 때문이라던 글에서,.,그러면  4번대는 오직, 강원땅만 정복하고 모리 요시나리는 강원감사의 직책을 내정하고 왔다 갔다 하였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점은 수구의 방어자세를 갖추면 공격도 힘들어 질텐데 정선서 평창을 넘어오며 평창을

그냥 그대로 별 노력없이 정복하였다. 그것이 유사점이 위 영원산성의 기록에서도 나타난다.

  8/24일 선발대가 영원산성으로 찾아들고 25일엔 본대가 올라갔지만, 원주의 빙허루에선 적장들이 잡혀 온 포로

들에게 김제갑 옹의 파악에 고문을 가한다. 그러면서 26일엔 김제갑 부자의 목이 박스에 실려 서울 본영의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보내지는 듯 하다즉 영원성의 4천명의 병력은 25일 모리부대에 3천명중 원주 잔류 병력을 제외한 적군에게 전투 한번에 패하였다.

 

  이렇게 삘리 패하는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일까??

물론 평창의 관군 40여명 중 절반이 조정의 명에 의해 문경새제를 막으라는 신립군대에 차출 당하였듯이 원주 도영에서도 문경새제에 차출 당하였다.( 신립은 기병으로 탄금대에서 패하였지만 처음 조정의 명은 문경새재의 빗장을 꼬 막으라는 명이었다.

 하지만 이런 명령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고 신빙성은 갖지 못한다)

그런 이유보다 심각한 현상은 왜병에 대하여 심한 조력자들 때문이다.]

자기 편하자고 동족을 밟는 악질분자들은 이북제 박격포로 죽여야 할듯.

 

  물론 6,25때도 쌀가마를 걸머지고 수 Km줄의 행렬이 있었다지만, 역사에 그 유명한 안시성 전투에서 이세민이 패하고 돌아간 것은 식량이 부족하였기 때문인데, 이는 역으로 까 뒤집으면 군사들이 한자리에 너무 오래 주둔되기에 그 일대의 차출할 수 있는 군량미도 다 떨어 졌다는 점이다.

 

  삼국시대 뿐만 아니라 이 전쟁에서도 보급문제가 가장 큰 문제인듯...역사에 가장 큰 문제는 도로와 수레비퀴가 튜브가 아니라는 점과 과거 전투엔 솥 그릇까지 수송에 어려움이 많은 듯하다.

호구록에도 비춰지는 조선인들의 노역도 어쩔 수 없지만 오히려 이 왜적의 전시체제 상황이 더 유리한 조선인도 많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왜적들은 글을 모르는 상태가 대다수인듯.

우리의 이순신 장군은 개인의 목숨을 넘어 국민을 우선으로 생각했고, 국가관과 임금의 신하로 행동 했다면,이 시대에 왜넘들의 막부는 글보다 칼로 남의 목을 내려치고 약육으로 생존하는게 중요한 일이기에 글은 몰라도 된다. 이러한 무식한 군대가 전쟁초 하루만에 승리하는 점이다.

 

  여만리 강물이 시루목에서 꺾어지는 50m 전쯤에 지금의 제방 안쪽 선쯤에 호박돌 무더기 두개가 있었다.제법 높아서 그중 하나는 약 2층 높이인데 지금은 제방에 묻혔슬듯 한데.. 이곳이 언제 누가(아군,아니면 적군인지??) 무엇을 위해 쌓은 돌인지 알 수가 없다항간에는 임란때 왜적들이 노성산 요새에 대비한 성벽이란 설은 무의미하다.

 

   평창 임란사를 보면 노성산에서나 장기적 전투도 없었다. 또한 이 두개의 돌무더기는 요새의 의미는 전혀없다.

왜담이 아닌 뙤담 즉 뙈놈이라면 오랑캐라 ,,, 고려때 70년간 이 땅을 밟은 몽고군에 항쟁때 몽고군이 쌓았다는추정도..그러나 이 돌 무더기는 반대쪽에서도 노상산에 그대로 노출될 각도일텐데 은폐나 엄폐의 성을 쌓았다는 논리는 부정확한 뜻을 내포한다.

 

  일단 이 방추형 돌무더기는 인위적인 것은 사실이지면 이는 군사목적으로 부적격이라면 옛 선사인들의 강가에 무언가 지금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선사시대의 어떠한 생활 패턴이 아닐까 하는..

*호구록 속에 왜의 대화 내용중 영월서 재천과 주천의 경계에서 길을 재촉하던 이유는 충청땅이기 때문이라던 글에서,.,그러면 이 4번대는 오직 강원땅만 정복하고 모리 요시나리는 강원감사의 직책을 내정하고 왔다 하였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점은 수구의 방어자세를 갖추면 공격도 힘들어 질텐데 정선서 평창을 넘어오며 평창을 그냥 그대로 별 노력없이 정복하였다. 그것이 유사점이 위 영원산성의 기록에서도 나타난다.

8/24일 선발대가 영원산성으로 찾아들고 25일엔 본대가 올라갔지만, 원주의 빙허루에선 적장들이 잡혀온 포로들에게 김제갑옹의 파악에 고문을 가한다.그러면서 26일엔 김제갑 부자의 목이 박스에 실려 서울 본영의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보내지는 듯 하다.

 

  즉 영원성의 4천명의 병력은 25일 모리부대에 3천명중 원주 잔류 병력을 제외한 적군에게 전투한번에 패하였다.

이렇게 삘리 패하는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일까??

 

  물론 평창의 관군 40여명 중 절반이 조정의 명에 의해 문경새제를 막으라는 신립군대에 차출 당하였듯이 원주 도영에서도 문경새제에 차출 당하였다는 설도 있지만 기록상으로는 없는듯 하다..(신립은 기병으로 탄금대에서 패하였지만 처음 조정의 명은 문경새재의 빗장을 꼬 막으라는 명이었다)

그런 이유보다 심각한 현상은 왜병에 대하여 심한 조력자들 때문이다.

 

  물론 6,25때도 쌀가를 걸머지고 수 Km줄의 행렬이 있었다지만, 역사에 그 유명한 안시성 전투에서 이세민이 패하고 돌아간 것은 식량이 부족하였기 때문인데, 이는 역으로 까 뒤집으면 군사들이 한자리에 너무 오래 주둔되기에 그 일대의 차출할 수 있는 군량미도 다 떨어 졌다는 점이다.

 

  삼국시대 뿐만 아니라 이 전쟁에서도 보급문제가 가장 큰 문제인듯...역사에 가장 큰 문제는 도로와 수레비퀴가 튜브가 아니라는 점과 과거 전투엔 솥 그릇까지 수송에 어려움이 많은 듯하다.

호구록에도 비춰지는 조선인들의 노역도 어쩔 수 없지만 오히려 이 왜적의 전시체제 상황이 더 유리한 조선인도 많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 < 4번대의 각 부대별 군기>
  •  
  •  

  •  

    1번기--- 모리요시나리군기

    규수 부젠국 다이묘로 임란당시 직속부대 2,000명을끌고 옴.

    2번기---타카하시 모토타네 군기로 600명병사를 데려옴.

    3번기---시마즈요시히로 군기.

    7년 전쟁동안 가장 많은 문화재 약탈과 포로를 잡아갔고, 강원도에서 조선인 머리 70, 코와 귀 1,300개를

    베어 소금에 절여서 토요도미 히데요시에게 보내 충성을과시...이게 따블빽이란,,,

  •  

    -------------------------- 終--------------

  •  

  •  

 

 ⓒ 2019, All Rights Reserved.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