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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의고향 백옥포

<봉산서재와 판관대로 보는 율곡의 고향은??>

 

<봉산서재와 판관대로 보는 율곡의 고향은??>

 

 

  봉산서재를 검색하여 보면 율곡 이이 선생의 부친 이원수(李元秀)공이 수운판관(水運判官)으로 벼슬을 하던 조선 중종(中宗;1530년경)때 이 곳에서18년간(1526-1543) 거주하는 동안 사임당 신씨에게서 율곡선생을 잉태하였는데(1536년 봄) 이 사실을 후세에 전하고 기리기 위하여 창건(創建)한 사당(祠堂)이다.라고 검색된다.

 

  여기에서 이원수 공과 사임당 신씨가 봉평 백옥포리에 18년간 살았다는 이해를 제대로 하고있지만, 이원수 공의 운판관이란 벼슬은 51세때에 오른것이다.(신 사임당이 47세에 돌아가시던 해로(1550) 이를 정확히 구분하지 않아 인터넷의 글들은 상당한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특히 기자들의 기사는 정확한줄 알고 무조건 따라벴겨서,,,신문뉴스의 황당한 오류를 보자.

 

율곡 이이선생의 부친 이원수공은 판관으로 벼슬을 하던 조선 중종 1530년대에 이곳에 판관대를 세웠다.

이원수공은 이곳 판관대에서 사임당 신씨와 4년간 거주하는 동안 율곡 생을 잉태했다

제목; <평창향교, 봉산서재 제향 올려>2014-10-24 오전 10:29:56 박용달 기자 mail mail@cfnews.kr

 

수운판관이 된 것은 51살이었고 1550년이다.

판관대에서 4년간 생활했다는 것은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인지...


그럼, 아예 판관대의 비석 사진을 보자.

 

 

 

  위 비문 중간에 이런 글이 있다.

강릉 땅에서 지내던 신사임당이 용을 현몽하고 서기 1536년 음력2월에 이곳으로 옮겼고 서울에서 수운 판관직(水運 判官職)에 있던 夫君 李元秀公이 말미를 얻어 이곳으로 귀가하니 그때에 율곡선생이 잉태것으로 전해온다.

 

  이러한 명문에서 윗글에서 금방 말한 1550년 이원수공이 51세때 판운수운(종 5품이 된다 하였거늘,,,1536년 판운수운직으로라는 비문은 일단 거짓말이다. 또한 출생에 역으로 시간을 꿰 맞추는 맞춤식 거짓말이다. 1536년 2월에 강릉에서 이곳 판관대로 이사한 기록의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그러한 기록은 없다.

 

  이 글은 12월에 출생하는 율곡에게 역으로 게산하여 2월에 잉태하고, 이 판관대 위치는 명현이 태어날 명당임에 이곳으로 옮겨와  바로 잉태했다는...이렇게 맞춤식 거짓말의 허위이므로 이 비석의 안내글은 픽션이란 점이다. 그리는 과장기록으로 이러한 위증적 비석은 눞혀져야 한다.

 

그러면 여기서 율곡학회의 율곡선생과 신사임당의 연표를 보자.

 

율곡학회의 신사임당의 연표에서

 

19세때 덕수(德水) 이(李)씨 원수(元秀)공(이때 22세)에게 출가하다.출가하고 시댁으로 갈 준비차 친정에 물러 있던 중

            11월 초7일에 친정 부친 (이때 47세)이 서울 본가에서 마침내 별세하다

21세> (中宗) 19년 서기 1524년)한성에서 시어머니 홍(洪)씨 부인께 신혼례를 드리다.

           9월에 한성에서 맏아들 선(璿)을 낳다. 다시 이로부터 10여 년 동안 혹은 파주(坡州) 혹은 강릉, 혹은 봉평 (蓬坪;

           지금의 평창군 봉면 백옥포리(白玉浦里))으로 옮아 다니다

33세>(중종(中宗) 31년 서기 1536년)

          이른 봄 어느날밤 꿈에 동해에 이르니 선녀가 있어 바다속으로 부터 살결이 백옥같은 옥동자 하나를 안고나와 부인의

         품에 안겨 주는 꿈을 꾸고 아기를 배었고, 다시 그해 12월 26일도 검은 용이 큰 바다로 부터 날아와 부인의 침실에

          이르러 문머리에 서려 있는 꿈을 꾸고 조금 뒤에 아기를 낳으니 그가 바율곡 (栗谷) 선생이요 그래서 태어난 방을

           몽룡실(夢龍室)이라고 하다.(다만 전설로는 봉평에서 배어 강릉 친정에서 낳았다고 함)

 

38세>강릉 친정에서 어머니께 하직하고 한성(漢城)으로 올라오며 대관령(大關嶺)에서 시를 읊다.<유대관령망친정

           (踰大關望親庭)>서울 수진방(壽進坊;지금 수송동·청진동)에서 시집의 모든 살림살이를 주관하다.

             ( *주-이때에 봉평 백옥포리 집을 정리함)

 

47세>부군 이원수공이 수운판관(水運判官) (지방으로부터 나라에 조세로 바치는 곡식을 실어 올리는 선박 사무를 맡은

           從五品 벼슬)이 되다.(*주 ; 판운수운은 종 5품 벼슬이다)

48세>  여름에 부군이 세곡(稅穀)을 실어 올리는 일로 평안도 지방으로 내려가다.(이 때 아들 선(璿)과 이(珥)가 동행하다)

           5월 17일 새벽, 병으로 누운지 2, 3일만에 홀연히 별세하다. 바로 그날 부군과 두 아드님이 배를 타고 서강(西江)에

            도착여 부인의 별세한 소식을 듣다

           부군은 51세, 맏아들 선(璿)이 28세, 맏딸 매창(梅窓)이 23세, 둘째아들 번▷, 둘째 딸▷, 셋째아들 이(珥)가 16세,

            셋째딸▷, 넷째아들 우(瑀)가 10세였음)

             파주 두문리(坡州 斗文里) 자운산(紫雲山, 지금 파주군 천현면 동문리= 坡州郡 泉峴面 東文里)에 장사 지내다.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증직되다

 

             * 주; 서강- 영월서 동, 서강이 갈려

           (* 서강-주천, 평창, 봉평 흥정계곡까지 이르는 강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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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연표를 보면 은 사임당 신 씨는 이원수공에게 19세에 출가하지만, 친정 부친이 그해에 별세하자 이에 상을 치르고 일년 후21세때 서울 시댁으로 올라와 시어머니에게 혼례 상을 올린 후 맏아들 낳고 이때에 친정이 가까운 백옥포리에 집을 마련한 듯하다.

 

사임당이 출가시 아버지 신명화공은 사위 이원수에게 당부하길 내 딸을 시집보내도 가르칠것도 많고 고명딸이라 멀리 보내겠다 하였던지라 출가 3년째인 21세 때부터 가정을 사임당은 본집을 백옥포리에 정하고 병환홀어머니가 계신 오죽헌과 파주 본댁을 10년간 드나들며 되었다.

 

아마도 장인어른께서 사위가 후일 종 5품의 판운수운에 오르는 조세직이라 함경도에서 경상도, 전라도까지 출장이 잦을걸 알고 멀리 보내고 십지않고, 강릉에서 한양이 가장 가까운 봉평의 백옥포리에 집을 장만한 듯 하다

 

사임당의 봉평 백옥포리에 본가엔 12년째 해에 이율곡을 잉태하여 친정인 오죽헌에서 출생하였며, 위의 연표에서 율곡이 6세때 (사임당연표 38세때) 백옥포리의 18년 정든 집을 정리하고 서울 수진동으로 이사하여 시집의 모든 살림을 주관하였다는 기록으로 볼 때 봉평면 백옥포리는 어린시절 여섯 살까지의 율곡의 고향인 것이다,

 

율곡학회에서도 백옥포리의 정확한 지명이 있는데 왜 잉태지란 설이 대두되었슬까하는 의문엔,,,
당시 율곡이 13세때부터 구선 장원급제등 이름이 날리자 외가인 오죽헌은 명당으로 더욱 알려지기에 백옥포리 생가도

당시엔 강릉이라 율곡이 강릉이 고향이라하면 사람들은 오죽헌 외가를 연상하는듯 하기에 잉태지란 구체적 명기가 필요했던 모양입니다(이 글은 가설 입니다)

지금이라도 잉태지라는 어렴풋한 용어보다는 율곡의 생가란 구체적인 표식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평창문화원에선 이곳을 사적지로 하려는 뿌리찾기에...


군 지자체에서 도 지자체 심의 의결로 문화재청에 인가가 있어야 문화재로 될 터인데 잉태지라는 것은 생가터 보존이란 명제 아래에 에피소드적 성격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후세백작이 바라보는 율곡의 이해입니다.


판운수운이란 종 5품직으로 전국이 아니라 오직 한강수계에서만 조세의 세수를 거두어 한양으로 실어나르는 조세직 공무원입니다.

또한 오죽헌과 신사임당, 율곡에 관한 이야기는 본 링크 37번에( 판관대 비석의 명문을 읽으며...)에 자세하게 설명하였습니다.

판관대 비문엔 "율곡선생의 어머니 신사임당의 행장엔 봉평에서도 살았다는 기록이 보이거니와"" 라고 쓰고있는데 기실 당시에 봉평은 평창군이 아니라 강릉부 땅이라 특히 강조할 이유도 없었거니와 이곳 판관대 기록에서 평창이란 지명은 당연히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비의 명문엔 "강릉땅에서 지내던 사임당이 龍을 현몽하고 서기1536년 음 2월에 이곳으로 옮겼고.." 라는 글귀의 출처는 없다. 다만 이 글은 율곡이 12월생이기에 꺼꾸로 환산하여 마음대로 쓴 것이기에 어패가 생기는 것이다. 만약 용꿈을 꾸었다고 신사임당이 아이들을 데리고 음 2월 추운 겨울에 대관령이나 선자령이라도 올라 봉평까지 하룻만에 당도하긴 힘들끼 때문이다. 그러기에 율곡은 12월생이기에 음 2월에 잉태한것은 사실로 사료되며 그러기에 사임당은 이곳 판관대의 자기 집에서 그해 겨울을 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 타당하리라 생각합니다.


또한 당시에 핸펀도 없던 시절에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소설같은 이야기를 현실로 이해하기가 좀 곤혹스럽기도 하거니와 부연 설명을 하면 율곡의 잉태당시에 부찬 이원수공은 아직 종 5품위 판운수운직에 오르지는 못한상태로 기록은 없으나 하급 관리직에 종사하며 겨울철엔 강이 얼고 추수도 끝난 농한기상태라 아마도 이 직책은 그리 넉넉치 못했던 점이 율곡이 우계 성혼에게 보낸 편지로 유추해 볼 수 있으며 뱍옥포리에서 서울로 이사할때는 율곡이 오죽헌 외가(2대째 외가로 전하기에 최응헌의 집이었다)

오죽헌의 제사를 물려받고 이에 댓가로 받은것이 서울 집이었다. 이렇게 넉넉치 못한 살림에 노비도 없슬텐데 음 2월에 자식들 엎고 대관령을 넘어왔다는 것은 기록에도 없으려니와 그것은 역사가 아니란 점이다.


오죽헌이 율곡 탄생지라는등 너무 과대 강조하니 그의 생가 백옥포리에선 그럼 이곳이 출생지라고 맞 대응하여 이야기 하지 않았나 생각되며 신사임당이 홀어머니를 봉양하느라 오죽헌에 많이 살았다는 기록 또한 없거니와 사임당의 동생의 조카가 오죽헌의 묘 관리(강릉 최씨)를 하라는 외할머니의 분부로 미루어볼때 강릉에 사임당 형제분들도 살았기에 우리가 알고 있는오죽헌과 사임당은 정도가 좀 넘은듯 포장하였으나 판관대는 올바른 기록으로 서술한다면 그것이 더한 진가를 발휘하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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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율곡의 고향은 어디일까 물어보면 대다수가 오죽헌이라 하며 백옥포리라고 하는사람 단 한명도 없읍니다.
율곡의 고향이 오죽헌이라 할때 그곳은 외갓집인데 하고 반문하면 그 다음은 답이 없습니다. 그럼 율곡은 고향이 없다는 것일까??
이것이 판관대만 강조하다 판관대가 율곡의 고향이면서도 판관대는 율곡의 고향을 상실시킨 점 입니다.

그러므로 판관대가 율곡의 잉태지로서 후대인들은 이곳을 아름답게 가꾸어야 도리이지만 너무 억측보단 우리가 알고있는

역사속에 자연스레 사실로서 이곳이 생가라는 해설속에 잉태지로 설명하였으면 좋으리란 생각이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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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석정에 대하여,,,,

 

 

팔석정의 유래에서 양사언의 호 봉래에서 봉자를 따서 봉평이라한다는데...

봉래 양사언이 강릉부사 재직시보다 40년전 판관대에 거주시부터도 봉평이라는 지명이 보이므로 봉평이 양사언의 호 "봉래"에서 따왔다는것은 아마도 오류임에..

 

또한 이 이전에 양사언은 평창부사를 역임한바 있지만 당시에 봉평은 강릉부 땅이라 이때에도 양사언의 호 봉래와 봉평은 무관할 것이다.

 

또한 평창의 각 읍면의 한자에..평창읍에서 平자나 방림의 芳, 대화의 和, 진부의 富, 봉평의 逢등의 한자들에 공통성은 모두 넉넉하고 부드러운 곡선등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팔석정이란 냇가에 바위에 양사언이 직접 바위마다에 암각의 글씨를 정으로 팠다는데...아마 지금 현재 남아있는 위치는 5곳 정도인데 수마에 의해 마모된듯하지만 그 글씨체도 당대의 양사언의 필체만은 아닌듯 하며, 그중 일부는 후대사람들이 깡통등으로 긁은듯한 체가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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