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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의고향 백옥포

팔석정의 석각(石刻)의 제 문제에 대한 논고

팔석정의 석각(石刻)의 제 문제에 대한 논고

 후세백작   2019.09.17 03:59

 팔석정은 평창군 봉평면 평촌리 903-17에 위치하며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은 이곳의 바위에 팔 석의 이름을 새겼다 한다.

바위의 모양에 따라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 석대투간(石臺投竿) 석지청련(石池靑蓮) 석평위기(石坪圍棋) 석실한수(石室閑睡) 석요도약(石搖跳躍) 의  여덟 개를 바위에 새겨 八 石이라 하는데, 여기엔 많은 문제점을 가지기에 이에 대하여 하나씩 분석합니다.

 

의문 1 

八 石의 여덟개의 명칭을 石刻을 새겼다 하는데, 그럼 여기서 이 여덟 개의 명칭을 왜 八石亭이라 부르는지 어원의 이야기는 없다. 또한 석요도약(石搖跳躍)에서 도약(跳躍)이라는 단어는 그 음은 한문이지만 단어는 일본이 조합한 단어이다. 정치(政治)나 경제(經濟)같은 단어도 일제가 만든 단어로 우리 단어의 1~20%는 대체로 그러하다, 그러기에 이 단어는 구한말에 정비되었던가 아니면, 일제 강점기 이후에 수입된 단어로 보인다. 그러기에 이 팔석이 양사언이  새긴 것이란 기록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도 없다.

* 일어로는 跳躍ちょうやく

* 중국어는 1.跳跃2.弹跳3.起跳

 

의문 2

조선조 중기의 문인 양사언은 이곳의 경치를 천통구곡 중류백(天通九曲 中流白) 지접삼산 반락청(地接三山半落靑)이라 읊고, 이곳을 일컬어 사미구기(四美九奇)라 칭송하였다고 한다. "四美九奇"의 四美는  동유봉산(東有逢山), 서유삼산(西有三山), 남유청강(南有靑江), 북유노송(北有老松)으로 동쪽에는 봉산이 있고, 서쪽에는 삼산(봉래, 방장, 영주)이 있으며, 남쪽에는 푸른 강이 흐르고 ,북쪽에는 오랜 소나무가 있다는 뜻으로 극히 아름다운 곳을 말하며, 九奇라 함은 ‘만장혈용(萬丈穴龍)에 행석구룡(行石九龍)을 말하며, 기이한 돌과 물의 어우러져 아름다운 곳을 뜻하는 말이라 한다. 이 사미구기가 양사언이 쓴 글이란 출처는 없다. 더구나 양사언은 이곳에서 살았다 하는데 그의 연표에서는 단 일년도 그러한 시간의 공백이 없고 팔석정에 양사언은 다녀갔다는 기록도 가지지 못한다.

 

의문 3

아래의 인용부에서는 "봉서"선생의 병인년(1866년)고종3년 봄에 봉서 선생의 八石亭 記(봉서유고) 기록에 의하면, 물의 가운데 신선들이 사는 땅에 취해 봉래(蓬萊),  영주(瀛洲),  방장(方丈)이란  이름을 붙였다 기록한다. 바위의 모양새와 형상에 알맞는 이름을 붙여서 여덞개 바위에 석안(石鞍), 석귀(石龜), 석옹(石瓮), 석평 (石枰), 석두(石竇)의  이름을 새겨 놓았으니 전해 오기를 율곡 이이 맏형 죽곡(竹谷) 선생이 노닐던 곳으로 물의 동쪽에 정자를 세웠는데 팔석정(八石亭)이라고 하였다

 

◆ 팔석정의 역사사료의 고찰에 의한 제 연구  http://blog.daum.net/kkks1/1687

  위 기록에서 보면 봉서선생은 1850년대에 이곳 팔석정을 다녀가며 "이선"은  봉래(蓬萊),  영주(瀛洲),  방장(方丈), 석안(石鞍), 석귀(石龜), 석옹(石瓮), 석평 (石枰), 석두(石竇)의  팔석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 하였으며 동쪽에 팔석정을 짓고 살았다 하였다.

하지만 "봉서" 선생은 '양사언'이 팔석정에 대한 기록은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석요도약, 석평위기, 석실한수등의 요즘 팔석으로 불리는 단어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이것이 그가 1850년경 팔석정을 다녀간 기행문이다. 그러기에 팔석정엔 양사언이 일년에 서너번 다녀갔다는등 또한, 부임시나 전근시 다녀갔다는 역사적 사료의 출처는 어디에 있는가??

 

  단원 김홍도는 44세 때인 1788년 가을 정조의 어명으로 금강산및 관동 8경의 海山, 승경을 그려오게 명하였던 바 "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 60폭 그림 중 첫번 째가 청심대이며 2번이 월정사, 3번이 사고. 상원사, 대관령의 순으로 그려져 있다.여기서 보듯 서울서 강릉을 가는 길에 평창지역 코스는 문재 - 전재 - 방림 - 모리재(대화 신리) - 청심대(진부 수항리) - 진부로 다니는 코스였지 지금처럼 장평으로 다니는 코스는 아니였다. 그러면 아마도 서울서 강릉 부임시 2~3일은 족히 걸릴듯한 거리인데 팔석정을 구경하러 50여리길(왕복 100여리)을 더 다녀가야 한다. 이를 다니자면 하루 이상 더 소비해야 할 것이다.

 

한양에서 강릉가기도 힘들텐데 그런 여유가 있었슬까?? 또한 강릉에서 고성으로 전근갈때는 양양으로 동해안으로 오르면 될텐데 강릉에서 대관령을 넘어 팔석정을 거쳐 어디로 해서 부임지 고성에 갈 것인가?? 우겨도 우겨도 정도껏 우겨야 할 일이지 미화를 시키다보니 이치에도 맞지않는 이야기들이 난무하고 있다.

 

  해동지도(대동여지도)애는 평창~정선간의 성마령은 大路이고, 서울~ 강릉간은 中路로 표시되어 있는데, 강릉르로 내려가기앤 中路의 이 길을 다녀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당시로서  양사언이 부임차 잠시 쉬어가던 곳이란 뜻은 하루를 더 소비해야 될 거리이기에, 요즘 사람들 생각엔 고속도로 길이 장평을 거쳐가듯 양사언도 지금의 장평을 경유해 가는 줄 알고서 잠깐 쉬며 팔석정을 다녀간듯 생각하지만 기실 대화의 모릿재를 넘기전에서부터 강릉으로 가는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봉평으로 들어와야 하는데, 산간의 도로로 약 오십리 길이 좀 넘을듯 하다, 양사언은 과연 임지 강릉 가기도 먼 길의 여정을 팽겨치고 이 길로 팔석정을 다녀갔슬까 하는 점엔 큰 의문을 가진다.

 

의문 4 

현재 남아있는 팔석정의 石刻엔  아래 사진에서 어떤것이 양사언의 체일까요??

양사언은 해서(楷書)와 초서(草書)에 뛰어났으며 안평대군, 김구, 한호와 함께 조선 4대 명필로 일컬어진다. 특히 큰 글자를 잘 썼다고 하는데 팔석정에 새겨놓은 石刻의 글체를 보면  모양세가 보기좋은 명필의 글씨는 하나도 없다.

그러기에 이것이 양사언의 친필인가 하는 문제에 의문을 던진다.

물론 현재 팔석정의 남아있는 깡통으로 긁은듯한 석각이 양사언의 글씨라 하고 있지만, 양사언의 글체라 하여도 그것은 모각(謀刻)이다, 왜냐면 1866년 신범선생이 이곳을 다녀가며 8석의 기문을 자세히 기록한 바 그것은 현재의 4자성어의 팔석의 기문이 아니기에 이후 팔석은 새로히 이름지어지고 모각되었다는 점이다.

 

*신범선생은 봉평 원길리 사람으로 화서 이항로선생에게서 수학하였다.

신범선생은 면암 최익현과 동문이며 뱌슬을 접고 향리에서 "봉호재'를 마련하여 후학을 양성하며 밭을 갈고 땔감을 하는 시골 선비로 살았다. 그의 유고집 봉서유고(1903)에는 부친 신석우(1823년 원길촌 출생)의 성현습유"도 함께 전한다.  

 신범선생의 봉서유고에서 팔석정에 율곡의 맏형 이선의 이야기롸 이아산까지의 이야기 기록등은 등은 아마도 신범선생 조상 대대로 문인으로서 이곳 봉평에 살았기에 많은 이야기들이 화자되었던 점을 볼 수 있다.

 

▲위의 여섯 장의 사진의 石刻이 모두 팔석정의 石刻으로 모두 다른 글체로 마치 낙서나 한듯 보인다.

 

   조선 4대 명필의 한 사람인 양사언은 아래의 여러 사진들에서 보는 필력의 소유자인데, 팔석정엔 글체의 양식도 갖추지 못한 똥체 글씨를 써 놓고 양사언이 새긴것이라 하면 그것은 팔석정이 양사언을 존경하고자 하는 입장이 아닌 양사언을 모독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도공들이 가마에서 나온 도자기를 하나하나 확인하며 마음에 안들면 모두 깨버리듯 명필의 소유자 양사언은 자신이 글씨를 사진에서 보듯 마구잡이로 써 놓고 갈수야 없을뿐더러, 이를 양사언체라 우긴다면 필자인 본인은 속지않기 위해 이를 거부한다. 아마도 그가 팔석을 썼다면 본인의 주관적 견지로는 이런 글자체가 아닌 행서나 초서로 분위기를 나타내었슬듯 하다. 

 

  누구나 팔석정에 대한 이야기에서 위에 언급한 봉서선생의 기록을 알앗더라면 지금의 팔석정이라 함은 더 이상 양사언이 기록이라고 하는 것에 속을 이유는 없다. 봉서 선생은 죽곡 이선(이율곡의 큰형)이 팔석정 정자를 짓고 살았다는 기록과 팔석은 위에 게시한 석안, 석위. 석귀등이라 하였지 만약, 석대투간, 석평위기, 석실한수 등이 석각돼 있었다면 봉서선생은 기행문에서  왜 기술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의 의문이다.

그러기에 팔석정엔 양사언이 다녀가지도 않았으며 또한, 바위에 현재 석각되어있는 팔석은 아닌것이다.

 

  역사는 假定하지 말라고 선인들은 말하지만 후세백작의 블로그에서는 역사에도 假定法으로도 이러한 역사의 오류를 밝혀 역사든 이 사회가 속이는 모든 역사를 정정하여 정립하고 있다. 또한 본인은 팔석정의 석각이 양사언 쓰고 새긴 것이란 것도 이 범주에서 속해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양사언의 석각 글체및 친필들

 

 

左)만폭동의 바위에 ‘蓬萊楓岳元化洞天(봉래풍악원화동천)’이라는 글씨를 새김.

右)평양 대동문 1층에는 봉래 양사언의 초서 현판, 2층에는 평안감사 박엽(1570-1623)이 쓴 해서 현판이 걸려 있다

 

     

양사언 서찰 글씨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의 필적「오언절구축(五言絶句軸)

 

 화락문조성(花落聞鳥聲)이라는 양사언의글씨    양사언은 명종 19년(1564) 48세 때, 고성군(高城郡) 구선봉(九仙峯)

(꽃이 떨어지니 새 소리 들린다)                  아래  감호(鑑湖)가에 비래정(飛來亭)을 짓고는 시 한편을 남겼다

 

                  

양사언 봉래전적탑본 (국립춘천박물관 소재)

  글쎄요, 한문이라기 보다는 아랍어라 해야,,,    

                          

양사언의 초서 글씨

  위 안내판에 설명의 석실한수, 석요도약의 팔석정이란 역사적 사료는 어디에 있습니까?? 또한, 동래고정이라는 이야기의 출처는 어디에 있습니까?? 동래고정이란 이야기는 이후의 이야기이지 당시에 이런 이야기의 역사는 어디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이렇게 모순되는 이야기에 안내판은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양사언은 아름다운 선율의 詩와 문장가이고 또한, 글씨는 조선 4대 명필의 한 사람으로 칭송됩니다. 여기서 양사언이 바위를 쪼아 석각의 글자를 새겼다 하는데, 그럼 석공과 문필가의 차이를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추사 김정희는 말년에 봉은사에 거처하였는데 그때 과노(과천노인이라는 추사의 호)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었다는데 어느 사람은 아버지를 따라가서 본 과노의 인상을 약 40년 후 기억을 더듬어 표현한 글에서 첫째는 과노의 눈은 부리부리하게 빛나더라는 점이고 둘째로, 손은 조그마하고 손가락은 가늘어 매촐하다는 인상의 기억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 눈썰미에 손이 작다는 특징을 캐치하는데 글쎄 얼마나 작았으면 어린아이의 눈으로 간파하였슬까만 그 분은 후일에도 이러한 인상의 기억을 글로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작은 손으로 할수있는 유리한 점은 무얼까 하는 생각에 문득 손이 큰 사람보다는 손의 회전이 빠를거라는 사실에 주목해 보면,, 그래서 붓글씨에는 손이 작은 사람이 유리하다는 의미를 유추해 생각해 봅니다. 가령 망치질을 잘 하는 큰 주먹, 힘센 주먹과 손이 작은 주먹, 이 둘 사이에 붓글씨는 손이 작은 사람이 유리할 것이란 점으로. 이를 반대로 생각해 보면 가위질을 할때는 손이 작은 사람보다 큰 사람이 손 마디가 길어 빨리 자를 수 있다기에 유리할 것입니다.

  그럼, 이와 반대로 목재도 아닌 아주 단단한 돌을 정으로 쪼아 글씨를 새기는것은 돌의 강도가 수성암보다는 화강암이 더 견고하기에 대부분의 석수쟁이들은 팔에 힘을 주기에 힘줄도 굵어지고 손도 크게 발달된다. 그리고 손이 큰 사람은 작은 사람보다 긂쓰기에 불리하기에 서예가가 돌을 쪼아 글씨를 새겼다고하는 표현은 옳치 않은듯 합니다. 

그러기에 서에가가 집적 돌에 글자도 새긴다 하는 문제는 가끔은 보이지만 보편적으로 정확치 못한 것에 대한 이야기들이란 생각으로 그 예로서는 단양의 탁오대는 이황의 글씨를 가져다가 석공이 새겼다고 정확하게 표현되어 있는바 여기엔 거짓말이 난무되지 않는다.

 

  그럼 팔석정은 부임시, 고성으로 전근시, 사시사철 일년에 4번씩 또는 8일간 이곳을 다녀갔다는 왜 여러 이야기가 난무하는가에서는 그 본래의 正史가 부재하기 때문이며,  양사언의 호가 봉래이고 팔석정에 봉래란 석각이 있어서 양사언을 이곳에 연관지었으리라 추정합니다.

  팔석정에서 양사언은 역사적 자료는 한 점도 없다. 양사언이 말년에 내직으로 발령받아 이곳을 찾아와 정자를 관리하기 위해 봉래고정(蓬萊古庭)이라는 앞마당에집한채 짓고 연못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의 출처도 없이 지금 현재 떠 다니는 봉래고정이라 하는 이야기는 역사적 근거가 없이 그냥 팔석정을 이야기함에 재미를 더 할뿐이란 점이다.

또한, 봉서선생의 봉서유고에 실렸다는 팔석정記의 기행문에서 죽곡의 이야기는 눈에 보인 그대로의 서술을 어떻게 부정 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봉착된다.

 

 양사언의 서체는 초서로서 초서는 3가지 유형으로 구분되지만 그런 구분보다는 독특한 그의 서체는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자유스럽고 활력이 넘치는 그의 필체에 비하여 팔석정의 석각의 글체는 지렁이 말라 죽은 느낌으로 글체의 평 조차도 못할 각자를 가지고 이를 양사언 글씨라 할 수 있는가?? 그러기에 팔석정의 석각의 글씨를 양사언이 새겼다고 한다면 그를 칭송하기 보다는 그의 글씨가 난잡하다고 비난하는듯한 이치이기에 이런 점은 수정되어야 한다.

 

 또한, 앞에서 보듯 팔석정의 정자는 죽곡선생(이선)이 세우고 후손 이아산이 수리하여 거처하였다는 봉서유고의 글에서 당시의 팔석의 뜻과 의미를 부활시키고 팔석정의 정자도 복원해야 하는 문제를 지니고 있다.

나아가서 당시 모든 관료들이 그러하듯 죽곡 선생은 율곡의 첫째 형으로 아버지 이원수 공을 도와 수운직의 일을 도와 주며 이곳에서 살았다.

 

  수운판관이란 종 5품 직으로 이원수 공은 나이 50에 수운판관직에 오르지만, 그 이전에는 음서직으로 수운직에 종사하며 여러 아들이 교대로 배에 승선하며 아버지를 도와 주었다.

수운판관직은 년 20석의 쌀을 녹으로 받는데 아마도 백옥포리 일대에 전답을 과전을 받아 농사를 지었는 연구 확인해 보아야 할 숙제를 남기며, 전 글에서 피력하였듯이 판관대에서 팔석정과 청소년 수련원까지 연계하여 하나의 문화공간을 형성하는 것이다.

 

   봉평에서 판관대라 하는 잉태지 문화에 율곡의 고향은 상실되었습니다. 또한 잉태를 하는 역사는 뒤집어 맞추는 이야기이기에 正史의 역사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봉평으로서는 율곡의 고향을 복원해야할 당위성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에 맞추에 판관대와 팔석정과 봉산서재, 청소년 수련원까지 합하여 지금이라도 자라나는 아동들에게 수련의 장으로 서원을 만들고 청소년 수련원은 율곡 수련원으로 개명을 하고 팔석정은 율곡의 큰집으로서 팔석정의 이야기도 다시 복원하여 백옥포리 일대엔 어릴적 율곡이 뛰놀던 고향으로서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벨트를 조성하여야 좋은듯 합니다.

  9선 장원급제와 성리학을 완성한 대 성현 이이 선생의 학문의 산실과 진영으로서 자리매김하여 자라나는 세대에게 귀감이 되었으면 합니다.

 

  끝으로 이 논고는 詩와 문장가로서 또한, 서예에도 진수를 보여  많은 루머속에 격이 낮고 왜곡된 假문화를 생산하는 것보다 양사언 선생은 우리의 역사속 문화를 더욱 밝게 빛낸 문인으로서 더욱 위상을 높여 기리기 위함입니다.

이점이 역사의 바른 이해의 정사라는 본인의 이해 입니다. 

  일전 포천 문화원장을 역임하신 후손분과 청주 楊씨 문중 여러 후손분께서는 이 점을 양지하여 주시기 바라며 혹, 본인의 견해와는 상이한 다른 견해가 있으면 아래에 댓글을 부탁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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