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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의고향 백옥포

" 율곡의 고향마을 가꾸기" 세미나는 코로라로 인하여 연기 되었습니다.

  이번 "율곡의 고향마을 가꾸기 "세미나는 박사님과 향토사가의 총 5명의 주제 발표로 계획되었습니다만 이번 코로라 사태 2단계로 인하여 연기되었습니다.

 

  본인의 논문은 약 60여 페이지 분량으로  율곡과 신사임당의  백옥포리 판관대의 생활과 저변의 이해에 대한 과제로 오죽헌의 영역과 판관대의 영역이 구분되는 논제로 한평생 서울대 교수에서 규장각 관장까지 역임한 자가 백옥포리 집은 강릉에서 서울을 다니기에 힘들어 신사임당의 어머니 용인 이씨가 그 중간에 지어준 별서라는등 웃기지도 않는 놀리들이 난무하기에 백옥포리 판관대에 대한 기준적 정ㅇ의의 글로 이번 세미나 자료집에는 후기로 별첨하며 13페이지로 새로 구성한 논문으로 판관대 부분만 집중적으로 조명합니다.

  세미나에서는 이러한 본인의 판관대의 역사적 사실의 실체를 조명하고 본인의 발표후 박사님 두 분이 신사임당의 백옥포리의 평창생활 18년에 대한 주장의 이해와 그 주장의 옳음을 논고할 것이었으나 코로라 사태  2단계로 연기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밝힐 이야기들은 언제라도 판관대가 평창의 역사로서 새롭게 조명될 것입니다.

 

  아래에서는 필자의 논문중 사실적 실체에 대한 역사적 증명의 두가지 이야기를 게시합니다.

판관대에대한 두가지 역사의 새로운 발굴에 아쉬웠던 점은 판관대 집의 건물과 아마도 사방 5리 (1리는 380m 기준)의 사패지였던듯한 5만평의 땅을 오죽헌에서 소유하고 있었으나 소송관계로 잃어버린 점등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당시에 이와 비슷한 큰 사건은 정몽주에게 내려진 사패지( 용인 소재)가 왜정시 등기 도용으로 타인에게 소유권이 넘어가자 재판에 붙여진바 필자의 지인의  조부께서 소송으로 지금으로 환산하면 1조원대의 땅을 팔아 소송비용을 쓰고 현재도 분당 서울대 병원 뒷산 태전리일대에 수천억대의 산이 연일 정씨니 종중 땅으로 되 찾은 점입니다. 이 소송도 일제시대에 서울에서 진행되었으나 현재로는 청주 법원에 그 문서가 있다고 합니다만 혹이나 판관대 소송문서도 당시 왜정의 사법부 체계하에서 청주법원에 보관되어 있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판관대도 소송비용에 강릉 동척회사에서 빌린 돈의 대납으로 5만평 땅이 전부 쓰여진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었으며 ( 물론 정몽주 사패지도 당시 땅값이 헐값이기에 지금 환산으로 1조대가 되는,,) 아마도 판관대의 당시 소송서류에서 재판정은 판관대의 소유자는 물론 취득 경위도 밝혀야 하는 원론에서 좀 더 구체적인 판관대의 역사가 밝혀질 수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미부여입니다.

 

   예를 들어서 당시 소송에 5만여 평의 땅의 원 소유자에 대한 재판정의 기록이 있어야 하는 문제에 소유자의 정당성에 본 토지의 사패지라는,, 지금으로선 사패지 기록은  '62년에 기록한 이은상의 책에서 현종이 하사 했다고 하나 그 원문은 어떤것인지 알 수도 없으며 찾을 수도 없다.

   원문이 있어야 역사적 자료가 될 수 있으며 또 한가지는 원문에서도 잉태지란 단어가 있었는가 하는 문제다.

 잉태지란 단어의 사용은 가령 자기 집에서 출산하였을 때 잉태지란 단어를 쓰지는 않는다. 또한 이 단어를 오죽헌쪽에서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면 잉태지란 단어는 어느 부분에서 생겨났는가 하는 문제에  필자의 추론으로는 1860년대에 봉평의 유림 홍재홍 선생의 잉태지에  대한 상소 건에서 처음으로 쓰여진 단어가 아닌가 합니다.

 왜냐면 잉태지란 단어는 출생지란 단어가 있슬때 상대적으로 쓰기기 때문에 판관대는 율곡의 고향 집입니다라고 서술했다면 오죽헌에서 출생했다는 것에 비해 강한 어휘가 되지 못하기에 오죽헌에서 출셍했지만 이곳으 잉태지입니다 하고 강하게 어필하는 단어로 사용된 듯 합니다.

이 문제에서 현종때 사패지를 내리는 것은 잉태지가 아니라 율곡의 고향 집이라는 어떠한 표현의 서술이 있지 않았슬까 하는 가정적 의문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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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세미나에서 발표할 논문중 일부 발췌>

 4, 판관대의 실체성의 고찰

1) 토지등기부상의 기록

  평창군민신문은 평창군청에 백옥포리 212번지를 비롯하여 모두 123개 번지에 대한 1916년 일제 식민지시대의 토지조사부에 대하여 정보공개청구를 신청하였다. 주23)

( 주, 보기의 글씨를 작게 해야 함인데 블로그 강제 개편시 이러한 기능이 없고 고치기로 했건만 아마도 실력도 없는 넘들이 만들어 제 기능이 없습니다)
이 토지조사부에는 당시의 소유자가 표기되어 있는데, 강릉군  정동면 죽헌리(현 강릉시 죽헌동: 오죽헌 소재지)의 권영달씨가 소유자 인 것으로 확인된다.

 

 

 

 

 

 

 

 

 

(소유자가 표기된 1916년의 토지조사부)

 

   오죽헌의 상속자는 사임당의 어머니인 용인 이씨의 넷째 사위인 권화가 율곡이 세 살 때 데릴사위로 들어와 결국 그 아들 즉 율곡의 이종사촌 동생인 권처균이 상속하였다. 오죽헌이라는 당호(집이름)도 권처균이 지은 것으로 이후 오죽헌은 안동권씨의 소유가 되었다.
당시, 판관대 일대의 토지소유권에 대한 분분한 이론들이 있었는데, 이번 자료의 발굴에 의하여 안동권씨가 강릉의 토지를 율곡의 외할머니로부터 상속받을 때 판관대 일대의 토지를 함께 상속받았을 가능성이 가장 높아졌다.
   토지대장의 기초가 되는 백옥포리일대 123개 번지수에 대한 토지조사부를 교부받아, 평창군민신문이 분석한 결과 총50,830평의 토지가 당시 안동권씨의 소유지로 밝혀져 이곳이 전해져오는 이야기로만이 아닌 실제하는 판관대임이 밝혀진 것이다.


이 토지를 지도상으로 보면 아래와 같다.

(지도로 보는 판관대 터)                                      (구글어스로 보는 판관대 터)

 

  봉평은 지리적으로 장평에서 흥정천을 거슬러 올라가며 들어가는 길과 그와 반대로 사리평을 지나 무이리쪽으로 빠져 둔내로 나가는길의 두 개의 길로 외부로 통하게 된다. 여기에 흥정천을 따라 장평으로 나가는 길을 따라 판관대의 땅은 길게 뻗고있다. 아마도 당시에는 판관대 터를 밟지 않고서는 봉평을 들어갈 수 없었슬 정도로 수 많은 땅이 1916년 처음으로 토지실측에 확인되는바 이곳이 판관대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이다.
  5만여 평의 땅은 개인의 땅으로 보기엔 한계가 있는듯 하며 이 땅은 현종으로부터 사방 5리를 하사받은 사패지인 것으로 추정되기에 이러한 입장에서 본다면 율곡이나 신사임당의 제사는 후손들이 지내야하지 오죽헌이 관할할 입장은 아니기에 이 부분은 앞으로 연구과제가 되는 것이다.

 

2) 문헌상의 판관대 실체 규명

  오늘날, 판관대는 ‘율곡이 잉태된 터로 수운판관 이원수 공의 벼슬이름을 따서 판관대라 불리웠다.’고 한다. 사임당과 이원수공이 살던 집은 유실되고, 그 터나 그 부근을 지칭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최소한 1906년에는 판관대는 실존하는 건물이었다.

  봉산서재의 건립중에 배향에 관한 문제로 유람사이에 각기 다른 의견을 서로 주고 받을 때, 의암 유인석(毅菴 柳麟錫)이 1906년 추성구(秋性求)에게 쓴 편지에 판관대가 빈 채로 쓰이지 않는다고 하니 그 곳에 율곡의 사당을 짓는 방안에 대하여 언급한 부분이 있다.


판관대에 대해서 의암 유인석이 1906년 추성구 선생에게 쓴 편지중에서,, 각주30)

  제 생각을 그만 말하라 하지 않으신다면, 율곡이 수태된 그곳의 판관대가 빈 채로 쓰이지 않는 다고 하니 그곳에 특별히 율옹(주; 栗翁, 율곡 이이를 지칭함)의 사당을 짓고 지금 짓고있는 사당 건물에는 (주; 봉산서재) 화옹 이하의 유상을 받든다면 31) 일이 적절할 것 같다고 말하고 싶지만, 한 마을에 사당이 둘인것도 영 마땅치 않으니 그저 율옹만 모시고 마는 것도 못합니다. 만약 지금 정하신것처럼 한다면 제 생각만 뜻도 없고 말할것도 없다 생각할 것이 아니라 율옹의 후손 인 이학사(李學士)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니 그 뜻을 어떻게 어길 수 있겠습니까??32)

 

   위 인용글은 봉산서재를 창건중에 배향의 문제가 논의되며 의암 유인석이 태은 추성구에게 보낸 편지이다. 봉산서재의 위패 배향에는 율곡 이이와 화서 이항로의 두 분을 모심으로  결정되었지만  결정전에는 중암과 성재의 위패까지 거론되며 율곡 이이 선생의 위패는 따로 판관대에 설치하면 하는 생각의 글이며, 현재 봉산서재에는 율곡과 이항로의 위패를 모시는데 서로 곡각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나란히 놓으면 이이의 후손인 이학사도 싫어할 것이기에 지금 사당에 두 존영의 위패는 곡각을 이루며 모셔져 있다.

 

   여기서 본 논문에 가장 중요한 문제는 판관대의 기록이다.

의암 유인석의 편지 가운데에는“판관대가 빈채로 쓰이지 않는다고 하니~“하는 문장에서 1905년쯤 까지에도 판관대가 사람이 살지않고 비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신사임당이 결혼한 시점인 1522년을 깃점으로 본다면 당시까지는 약 380년 존속되어 왔다가 이후 언젠가 정리된듯 하다.
당시의 건물이 380년 존속된다면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가령 오죽헌을 예로 본다면 율곡이 출생했다는 몽룡실이 있는 건물이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씨 분재기 이전에 배사조로 권처균에게 물려준 것중에는 오죽헌의 집 한 채도 포함되어있는 점으로 볼때 오죽헌은 배다리 건너의 선교장처럼 큰 집도 아니었던듯 하고 그 시대의 유택들을 비교하여 보아도 작은 규묘로 신 사임당이 외가에 거처햇다면 율곡까지 다섯 아이에 사임당의 동생들 3명등의 대 식구가 거처하기엔 좀 이해가 않된다. 물론 노(奴)들은 행랑채등 짓고 우거 했슬테이지만 사임당은 그렇게까지 하며 친정에서 살았슬까 하는 추론도 헤 봅니다.

이렇듯 판관대는 구한말까지는 존재하였으나 일제시대에 철거되었다면 아래의 등기부상 소유건 이전후에 발생된 문제는 아닐까 추론해 봅니다.
이 논문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로 신사임당의 신혼집인 판관대의 실체가 사실임을 입증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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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평창의 뿌리」. 박도식. “율곡 이이의 잉태지 판관대의 연구” 65쪽.
31) 화옹은 화서 이항로를 지칭함이며, 유상은 중암 김평묵, 성재 유중교를 말함.
32) 無已則聞栗翁受胎當地判官垈.虛而不用.特建栗翁祠於其地.今所營祠屋.奉華翁以下遺像.粗合事宜.然一里兩祠.終是未穩.不如單奉栗翁而止也.

 

5. 맺음말

“역사를 잊으면 미래를 잃는다.”
조선시대까지는 봉평도 강릉대도호부의 일부였기 때문에 율곡의 고향은 ‘강릉’이었다. 그러나, 행정구역의 변천의 따라 신사임당의 신혼 살림집은 봉평이다. 비록 율곡이 외가집인 오죽헌에서 태어났지만, 막내를 제외한 여섯 형제가 자라난 곳은 백옥포리 율곡의 고향이다.
이곳은 신사임당이 반 평생의 18년간을 살았던 정든 살림집이며, 율곡 이이도 여섯 살까지 뛰놀던 맑고 순결한 대자연이 숨쉬는 이곳 월포(月浦/백옥포)리가 고향임을 조명합니다.
비록 오백년 전이지만 이 고장은 우리나라 최고의 위인이 고향이다. 이제 이러한 판관대의 역사적 사실을 알았으면 우리는 고장의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이땅의 선현을 가꾸어 나가야 하는 사명감속에 문화역사를 가꾸어 나가야 함이다.
이것이 이 고장의 밝은 미래를 위한 도전인 것이다.

감사합니다.


<발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