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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의고향 백옥포

판관대 비석의 명문을 읽으며,,<울곡의 고향은 어디인가??.>

판관대 비석의 명문을 읽으며,,<울곡의 고향은 어디인가??>

 

 이 글을 쓰기에 앞서 본인 후세백작의 글중에는 율곡선생의 고향은 평창입니다

http://blog.daum.net/kkks1/424 와 봉산서재와 판관대로 보는 율곡의 고향은??

http://blog.daum.net/kkks1/1219 등 몇 편의 율곡의 고향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쓰는 글 "오죽헌과 판관대의 산책"에서는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이원수 공과 신사임당이 백옥포리에서집을 마련하여, 이씨 가문의 종친업무를 관장하러 서울로 오르기 전까지 18년간 이곳에서 살았다는 이야기의 글입니다(물론 결혼후 2년간 찬정 아버지의 3년상을 치르고 이사하게 됩니다)

 

엇그제 고향을 방문하여 친구 두명을 만났는데 재미있는 대화를 하였다.

그 이야기중엔,,,평창사람들은. 배는 떠났어도 이제사 뭔가 정신차린듯 평창 페스티벌의 백일홍 축제에 송어잡기 샡트를 준비중인 모양인데...평창은 그간 참으로 많은 소재의 테마를 잃었다.

 

정선이 한치 뒷산의 아라리(아리랑)을 쎕쳐가서 꺼꾸로 이젠 성마령에 정선에서 평창으로 아리랑이 젼파되었다는 억지의 비석도 세우고,,,송어축제는 평창이 송어양식의 본산인데 진부가 낚아가고,,,김삿갓이 이야기중에 여러 의문점과 90년대에 이장해간 천동리에 김삿갓 둘째아들의 묘에 의문점(이 의문점은 후손들이 계시기에 삽화정도로만 하였지만 다시 적나라하게 그려 보이겠습니다) 그리고, 메밀꽃은 평창에서 효석문학의 밤 3회만에 봉평으로 실려갔다.

 

효석이 의붓 어머니 아래 2년간 살았던 봉평이 고향도 아니며 고향이라 떠들며 전국에서 가장 긴열흘간의 페스티벌로 한해 기백억 메밀효과를 창출할텐데...(봉평 이야기에서 보면 효석의 생가라 하였지 출생지의 고향이란 말은 쓰질 않았다.

효석의 출생은 호적에서 찾아보면,.,,진부면으로 나올 것이다. 또한 효석은 평양에서 사망하였고 그의 아버지 이시우는 효석의 묘를 봉평이 아닌 그의 고향 진부에다 쓴 것이다)

 

더 웃기는 것은 봉평은 산수가 맑고 좋아 율곡이 대자연의 정기를 받았다 표현해도 무방하련만,,,, 판관대는 무슨 뜻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며 판관대에서 잉태를 했다고 떠드는,,,옆의 친구가 율곡선생의 고향이 어디라 생각하는가 하고 물으니 파주라 한다. 그리고 옆의 또 한 친구는 강릉 오죽헌이라 한다.

 

둘다 틀렸어, 율곡 이이선생의 고향은 평창이라...율곡 생전 당시엔 이곳 월포(평창군 백옥포리)가 강릉땅이기에 이후 구한말까지 사람들에게 율곡 이이선생의 고향은 강릉 월포이며 지금으로선 평창 백옥포리인 것이다라고 하니, 절대그렇치 안타나요.

아마도 평창사람들 대다수가 율곡의 고향은 평창입니다 하고 말하면 그건 아니다라고 머리를 흔들  입니다. 그래도 율곡 이이 선생의 고향은 평창입니다.

 

요즘은 인터넷 시대라 수 많은 사람들이 메밀꽃 필 무렵의 봉평을 다녀가며 판관대에 대한 소감의 글들에서 이원수공과 신사임당 부부는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추운 겨울날 판관대에 만나서 하룻 밤에 역사를 이루는듯한 3류 소설처럼 많은 오류의 글을 남기기에 이 원인은 바로 판관대에 대한 원론이 역사적 기록이나 비석의 명문등이 6하원칙에 결여된, 올바르지 못한 서술에 기인하기 때문에 온갖 억지의 글들이 난무하기에, 이 점에대하여 역사의 기록에 의한 소상한 견해를 아래에서 피력합니다.

 

 

<판관대의 명문의 안내문>

 

<판관대의 비석으로 아래는 위 비문 중간에 아래의 글이 있다>

 

"율곡선생의 어머님 행장에도 봉평에서 살았다는 기록이 보이거니와 강릉땅에서 지내던 신 사임당이 용을 현몽하고 서기1536년 음력 2월에 이곳으로 옮겼고 서울에서 수운판관직에 있던 부군 이원수공이 말미를 얻어 이곳으로 귀가하니 그때에 율곡선생을 잉태한 것으로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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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비석의 명문중 이 부분을 세밀하게 관찰해본다.

* 봉평에서 살았다는 기록이 보이거니와 강릉땅에서 지내던 신 사임당이 용을 현몽하고 서기1536년 음력 2월에 이곳으로 옮겼고 라는 기록에서, ~ 이 보이거니와라고 표현하는것은 그 다음 문장엔 그런 행장의 기록이 아닌, 지금까지의 기록은 전혀 무시하겠다는 의도형 문장으로 그 다음 글들은 역사적 기록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란 입장을 취하는 느낌이다.

 

* 또한. 강릉땅에 지내던 신사임당이라는 표현에... 신 사임당이 강릉 살았다는 정확한 출처는 어디에 기인하는가??

* 그리고 현몽하고 음 2월에 이곳으로 옮겼고라는 표현은 이사를 했는지 아니면 거처를 옮겼는지 정확한 뜻이 없는 여러 추정을 할수있는 的確치 못한 표현이다. 그러기에 이 문장은 이때 이사한 것이 아니기에 오류이다.

 

부부가 서로 기약도 없이 봉평의 판관대에서 상봉하여 율곡선생을 잉태하였다는 천재일우적인 기회포착의 순간의 표현은이것은 율곡의 생일이 12월이라 역으로 계산한 것이지, 음 2월에 오죽헌에서 백옥포리 왔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그건 가식이라.

 

판관대가 이원수 공과 신 사임당의 부부가 결혼후 3년차에 서울 시어머니 홍씨에게 인사드리고 자기집으로 내려와 18년 살았다는 주된 판관대의 본 뜻은 없고, 자기 집인데 음 2월에 이곳 판관대에서 만났다는 이야기에 무언가 어색한 개인의 주관적 감정이 내제한 소설적인 픽션만 그린 명문이다.(18년이란 수치는 아래에서 계산한다)

 

그러기에, 이러한 명문은 객관화된 기록에 의존해야지 주관적 시나리오처럼 취급한 점이 이곳을 방문한 많은 관광객의 인터넷 소감문에 유독 판관대의 오류가 많은 현상을 지적한다.  이것은, 이원수 공과 신 사임당이 살았던 집을 역사에서 존멸시키고 율곡의 고향까지도 상실시키는 주범의 한 문장이라 생각한다.

 

인터넷에 일반인들의 소감문엔 대부분의 이야기들에 용꿈을 꾸고 강릉 본가정도에서 이곳으로 오고 부군은 대화장터의 주막 갈보를 뿌리치고 이곳으로 달려와 율곡을 잉태했다는 마치 전설처럼 부정확하게 그려지고 강릉이 본가로 그려지는등 제대로 알고 쓴 글은 하나도 없었는데 판관대 비석을 읽어보면 이 명문자체도 6하원칙이 성립이 않되기에, 않되면 않되는 표현의 기록이 있어야 하지 글쓴 사람의 주관적 해석에만 의존하기에 오류가 있슴을 지적한다.

 

*또한 이원수 공이 말미를 얻어 라는 표현에 대성현을 잉태하는 시간에 짜투리 시간을 얻은식의 합당하지 않은 표현이다.

물론 비각의 명문하나로 모든것을 이해하기는 부족하겠지만 이 명문 서두의 풍수적인 이곳 지리는 장황하면서 최소한이곳이 이원수 공과 신사임당의 본가였고 따라서 율곡의 고향이란 글이 주 문장으로 들어갔어야 이곳을 설명하는 가장 합당한 명문이 아닐까??

 

그런데, 위 비문은 풍수적으로 좋은 곳에서 극적으로 상봉하여 심금을 울리게하며 율곡을 잉태하고 그곳을 주민들이 잉태지를 기리는 명문내용에 가장 중요한 주체의 이해적 설명이 없어서 이 명문을 처음 대하는 사람은 이해에 곤혹함을 느낀다.

 

판관대의 땅은 명당이고 부친 이원수공은 날이 저물어 대화장터에서 허덕이다 겨우 집에 당도하는 표현에서... 이러면서 신사임당만 미화시키는데... 왜서 미화인가 보면 용을 현몽하고 이곳에 왔다는 기록은 어디에 있는가?? 즉, 오죽헌 에서 현몽하고 추위도 만만치 않을 음 이월 대관령을 넘어 여기까지 당도할 수 있슬까??

 

그 주관적이란 이 글을 쓴 사람은 신 사임당이 이곳에 살았다는 행장의 기록은 있으나 오죽헌에서 생활하였다는 어디에도 없는 잘못된 편견적 생각에 치우쳐 이 글을 썼기에 이 비문은 로미오와 줄리엣같은 픽션을 하고있기에 역사의 명문엔 합당치 못해 각종 인테넷 정보들은 율곡의 고향은 오죽헌이라니 아니면 파주라하지 이곳 판관대라 하는 글은 하나도 없다.

따라서 평창사람들은 율곡의 고향까지도 상실 시킨 것이기에 이러한 비문은 파 딩겨야 하는 것이다.그러면 역사적 사실에 접근하는 비문은 어떻게 써야 할까??

이 문제를 귀결하기전에 율곡과 신사임당의 이야기에서 필요한 부분만 아래에 서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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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사임당이 오죽헌의 외할머니 댁에서 생활하였다면 이원수공은 데릴사위 생활을 했던가?  또한 본가에 아들 자식들이 많은데도 사위가 처가살이를 했슬까?? 이러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이 문제에 어떤 자들은 우리나라 옛적 결혼풍습이 어떻다는등 자기가 모르는 것이지 학자라 자칭하는 사람들까지도 괜스레 모계사회 영향이라는이상한 평을 하니, 세인들은 그대로 뱓아들이는 이상한 사회적 현상으로 잘못된 글들도 많다.,

분명한 것은 율곡학회 신사임당 연표에 의하면

19세때 덕수(德水) 이(李)씨 원수(元秀)공(이때 22세)에게 출가하다.출가하고 시댁으로 갈 준비차 친정에 물러 있던 중 11월 초7일에 친정 부친 (이때 47세)이 서울 본가에서 마침내 별세하다

 

21세> (中宗) 19년 서기 1524년)한성에서 시어머니 홍(洪)씨 부인께 신혼례를 드리다. 9월에 한성에서 맏아들 선(璿)을 낳다. 다시 이로부터 10여 년 동안 혹은 파주(坡州) 혹은 강릉, 혹은 봉평 (蓬坪; 지금의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白玉浦里))으로 옮아 다니다. (이 연표에서 봉평의 백옥포리가 거론되는것은 신사임당이 결혼후 마련한 살림집이다)

 

신사임당은 19세에 결혼하여 율곡은 33세때 낳는다. 그러면 맏아들 선을 서울서 낳고 자기집(백옥포리)로 이사하고도 12년만에 율곡을 낳게되는데 위 연표에서 평창생활 18년은 구체적이지 못한 것이다. 또한 출가하고 시댁으로 갈 준비에 부친이 돌아가셔서 결혼 2년째에 시어머니 홍씨에게 신혼례를 드리고 자기 집으로 간 것이지 오죽헌 생활이 아니다.

 

아래의 참고사항의 외손봉사란에서 남귀여가혼 풍습으로 결혼하였지만 곧바로 서울로 출경하려 했던 점으로 미루어 그가 오죽헌에서 신혼살림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고, 또한 이원수 공도 홀 어머니만 계시는데 오죽헌에 살았다는 것은 억측이다.

그럼 아래에서 판관대란 역사에서 무엇인가 정확하게 보여주며 후세백작의 생각과 추론까지 해보며 그 진위의 타당성을 개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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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헌은 3대째 외가로 대물림되는 특이한 현상을 나타내고 있는데,,,

우선 그 의미를 되돌아  보기위해 농담부터 한다면 오죽헌은 조상 어느 대에 풍수에 남아가 끊기고 외가로 향하는 氣에서 발복하는 명당인듯 하다.

 

남아를 낳지 못하여 대물림이 끊기는 것을 극복하려고 "외손봉사"라는 풍습이 있었으며, 이 외손봉사는 제물의 상속과 함께 이루어지며, 여러 대에 걸쳐 지속되고 있음이 우리의 역사속에 잘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개념으로 오죽헌의 역사를 잠시 살펴본다면...

오죽헌 입구의 안내판 설명문인 아래엔 <오죽헌은 강릉 유현인 최치운(1390~1440)의 창건으로 아들 응현은 사위, 이사온(신사임당 외할아버지)에게 물려주고, 이사온은 다시 그의 사위 신명화(사임당의 부친)에게, 신명화는 또 그의 사위 권화(셋째 딸의 남편)에게 물려주면서 그 후손들이 관리되어 권화의 아들 권처균이 상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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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손봉사란,,,)

이 제도는 조선 중기 이후에 정착한 것으로써, 15~16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아들과 딸, 친손과 외손을

구분하지 않는 문화가 보편적이었다.

어떤 한쪽 혈통을 통한 ‘단계적(單系的) 계승’의 관념이 희박하여 ‘양계적(兩系的) 계승’이 이루어진

것이다. 아들이 있는 경우에는 외손봉사가 절대로 나타나지 않고, 딸만 있는 경우에 한하여 나타나고

 있다. 이는 ‘부계 우위의 양계적 계승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문화는 남성이 여성의 집으로 혼인하여 들어가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이나 아들·딸·손자

등의 자손이 돌아가면서 조상의 제사를 모시는 윤회봉사(輪回封祀), 아들딸 가리지 않고 재산을

균등하게 분배하여 상속하는 자녀균분상속(子女均分相續) 등의 풍습과 제도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이후 종법제도가 공고하게 자리 잡고 부계 혈통 중심의 적장자 계승이 강화되면서 아들이 없는 경우

외손에게 제사를 맡기기 보다는 양자를 들여 집안의 대를 잇게 하는 제도가 정착하게 되었다.

 

우리의 부모나 조부새대에는 양자방법이 채택되었고 요즘은 남여 구분이 없기에 양자방법도 후퇴하고 이제는 대를 잇는 방법보다 양육의 방법에서 선택을 하고들 있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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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보면 오죽헌은 최응헌이 딸은 무남독녀로 아들잡이로하여 사위 이사온을 오죽헌을 물려 주었고,

이사온도 또 외동딸을 두었으며, 이사온의 딸(신사임당 어머니)이 신명화공과 혼인시에도 신명화 공도

이러한 아들잡이가 되었고, 신공은 41에 초시급제를 할때까지 서울에서 강릉을 오가다가, 신공은 당시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3일만에 무죄로 풀려나고서는 대과 응시를 접고 오죽헌으로 낙향하여 처가를

봉양하였으며 둘째딸 신 사임당의 혼사후 그해에 신공은 서울 자택에서 별세한다.( 이 이야기에서

오죽헌은 신사임당의 외가이고 신사임당의 본집은 서울이었다)

 

신명화공은 다섯 딸을 두었으나 아들이 없자 이번에도 이사온과 비슷한 케이스로 둘째 사위인 이원수

공에게 처가를 공경할 수 있는 아들잡이를 부탁한 것이다.

 

여기서 이러한 아들잡이의 양자제도와 양육의 구분은 양자제도는 대를 잇는 방법으로 우리들 주변에서

보듯 양자를 택하여도 가서 살지는 않다가 양부모가 늙으면 공양하는 모습도 잇고 양제제도의 근본은

가문을 잇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 주목적인 것이다.

 

이원수공과 사임당 신씨가 백옥포리에 살게 된 것은 두사람이 결혼시 장인어른인 신명화 공께서

사위에게이르길,,,내 딸은 가르칠 것도 많으니 딸을 멀리 시집 보내진 못하네.

그리하여 봉평은 당시로서는 강릉대도호부 관할이었고, 백옥포리의 강릉최씨 문중땅을 빌려서 집을

짓고 신혼살림을 것이다.

 

이원수 공의 가계는 명문가이지만 4대째 벼슬을 못한 약함속에 이원수공도 과거공부를 접고 판운의

말단 조세직에 종사하였는지는 모르지만 그래서 직업상 출장이 잦아 그러한 단점을 신공은 장점으로

여겨서 신 사임당을 서울까지 멀리 보내진 못하겠다는 의도였던가 추론해본다.

 

멀리 못 보낸다는 것은 봄부터 가을까지 출장이 잦기에 한양으로 보내지 않겠다는 의도였던듯 강릉땅으로

서울이 제일 가까운 대관령 너머의 봉평 집에서 오죽헌 홀 어머니도 봉양할 시간을 갖게 되지만 신 사임당은

둘째이고 아래로 세명의 여동생도 있는데 구테여 이원수공이 처가 살이를 할 필요도 없고 또한 이공의

본가엔 홀 어머니 홍씨도 계신데 장인 신명화공도 그렇게 부탁할 이유도 없었슬 것이다.

 

신명화공은 서울사람으로 처가가 지금의 오죽헌이다. 그러기에 이곳은 율곡의 외가가 아니라 사임당

신씨의 외가였고 정확히 하자면 신 사임당의 외조부의 처가에서 비롯된다.

친정 아버지의 3년상을 치르고, 현 평창의 백옥포리로 이사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이원수공과 신사임당의

신혼 살림집이 백옥포리로 정하게된 연유인듯 하다.

 

신사임당은 이곳 월포리 15년 거주시 12년째에 세째인 율곡을 낳으시고 율곡이 여섯살 되던 해에 18년의

백옥포리 생활을 정리하시고 서울 수진동으로 올라가 덕수 이씨 문중의 살림살이를 맏아 관장한다.

이 이야기에 정확한 수치는 율곡학회 율곡연표와 신사임당 연표에서 유추할 수 있다.

 

여기서 보면 요즘처럼 주민등록이 있었다면 율곡 이이 선생의 주소는 이곳 백옥포리로 명기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판관대가 율곡을 잉태한 곳으로만 부각이 될까??

저의 추론으로는 당시 율곡은 6-7살에 부모님을 따라 서울로 이사햇고 서울에서 힘들어 다시 파주로

이사하며,13세때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연달아 무려 아홉번 장원급제하여 9선장원으로 전국 방방곡곡에

그 이름이 날리게 되자. 후일에 오죽헌 부근의 사람들은 오죽헌에서 출생하였다고 출생지를 부각시켜

자랑하자, 그럼 이곳 봉평사람들은 그에 빗대어 정기는 이곳 본 집에서 받고 이곳에서 잉태하였다고

맞받아친것 아닐까 추론한다.

 

이러한 잉태지에 관한 엣날 율곡 이이 성현의 이야기를 듣고있던 임금님은 이 이야기가 재미도 있고

성현의 잉태에 대한 예의로 사폐지를 내려 주셨고, 또한 이원수공이 51세때 판운수운의 종 5품직을

하였기에 이 잉태지를 판관대라 명명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판관대 설명은 동화 이야기처럼 본가라는 말은 없고 부부가 2월에 서로 이곳에서 만나

잉태했다고만 하니,, 당시 역사에 봉평은 수십호 인구도 아닐테고 지방을 다니는 관헌들도 날이 저물면

아무 집이나 빈 방이나 헛간이라도 하룻밤 묵어가던 시대라.

 

객사헌이나 이러한 사신을 맞이하는 관헌은 있었지만 지방 관리나 과거응시자들이 묵어가는 여관은

전혀 없고 주막 뒷방이나 길가 나무아래라도 자고 다니던 시절이었기에, 핸펀도 없고 바로 연락도 안 되는

시절에 바람도 매섭고 차거운  음 2월에 봉평 어디쯤에 만나 율곡을 잉태했기에 그곳을 판관대라 명한다면

그곳이 살림집이란 부연 설명이 없기에 목적의 설명이 빠진 문장으로 마음껏 상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종내는 율곡의 어린시절 고향 백옥포리라는 그의 고향을 평창인들은 상실 시킨것이다.

여기서 음 이월에 바로 그날 이곳 판관대로 왔다는 기록은 전혀 없는 거짓말이고, 이를 가상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오죽헌에서 백옥포리로 왕래하던길은 선자령의 대관령을 넘는것보다 아마 소금강으로 해서 진고개를

넘었슬 것이고소금강에는 율곡이 공부하던 책상바위란 이름도 남아있다.

그런데 약 삼월쯤 이고개는 아마도 눈길에 여인네가 쉽사리 넘어다닐 고개는 아닐듯 쉽다. 또한 추위와

우리나라에 제일 큰 고개일텐데 여름철엔 하루에 왕래할 수도 있겠지만 겨울천엔 하루에 넘어다니지

못한다면 아녀자의 몸으로 사임당이 마음대로 다닐수 있었던 고개는 아니였슬듯 싶다.

 

그러기에 긴 겨울이 오면 아마도 백옥포리 집에 기거하며 춟장에서 돌아온 남편 이원수 공을 맞이하였다

라고 하면 충분히 이해가 될듯싶고 그래서 이 산수좋은 평창의 정기를 받고 성현 율곡 이이선생을

잉태했다면 이치에 맞는 아름다운 문장이 될 것이고 또한 율곡의 고향을 자연 동반시켜 설명하는 것으로 

엿부러 이곳이 고향입니다라고 부연 설명 할것도 없이 이곳 판관대가 율곡에게 그의  고향을 상실시키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그런데 작금의 판관대는 위의 비석의 명문이나 역사적 사료들에서도 본가란 말은 빠지고 그냥 잉태지에

맞추는 황당한 표현으로 판관대는 역사에서 알수 없는 이야깃 거리가 되며,그래서 율곡의 고향이란 의미도

상실하게 되는것 아닌가 추론해본다.

 

이곳 백옥포리가 율곡의 어릴적 정서를 담아주는 고향일텐데 위에서 이야기한 나의 친구들의 오죽헌이

고향이다. 파주가 고향이다란 억측만 쌓기게 만드는 원인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신 사임당이 자기의 본집이 없이 오죽헌에서 생활했다면 부군 이원수 공은 처가의 데릴사위도

아닌 신사임당의 외할머니댁에 얹혀서 살았다는 것인데...이것이 남귀여가혼일까??

 

장인 신명화 공의 이야기에서 보면 그도 처가살이보다는 서울서 생활하며 오죽헌을 오가다가 사화등의

정치적 격변기를 피하려 오죽헌으로 낙향했지만 둘째사위 이원수 공의 와가봉사라는 약속을 얻어내고

신공은 서울로 올라와 세상을 뜨게된다.

그렇듯이 이 처가봉사에서 이원수공과 사임당 신씨는 결혼 20년째에 서울 시댁의 업무를 관장하러 서울로

올라온다.

 

이 두가지 사실에서 유사점은 결혼하자 곧바로 처가살이를 하자는 것도 아니고 살면서 그런대로 처가에

신경을 썼던 점이다. 또한, 이때 서울의 집의 장만의 내력은 이렇다.

오죽헌은 원래 최응현의 집이었는데, 사위인 이사온에게 상속되었다가 이사온의 딸인 용인 이씨에게

상속되었다.

 

용인 이씨는 딸을 다섯 두었는데, 재산을 물려줄 때 둘째 딸의 아들 이이에게는 조상의 제사를 받들라는

조건으로 서울 수진방의 집 한 채와 전답을 주었고, 넷째 딸의 아들 권처균에게는 묘소를 보살피라는

조건으로 오죽헌전답을 주었다.

이렇게 오죽헌을 중심으로 한 외손봉사가 한 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몇 대에 걸쳐 일어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541년(중종 36년) 서울에 올라온 이원수 부부는 장모가 외손자 율곡에게 유산으로 물려준 수진방의

집으로 이사했다. 수진방은 지금의 종로구 수송동과 청진동 사이에 있었다.

이때로 보면 신사임당의 어머니는 넷째딸의 외손자 권처균이 묘소를 관리하게 분담하게 되고 그가

오죽헌에 살게됬으며 그가 뒷마당의 검은 대나무를 오죽이라 명명한것으로 알수있다.

 

당시 이원수는 과거 공부하는 선비로서 변변한 수입이 없었으므로 가정을 건사하기가 힘들었다.

생활비는 신사임당이 처가에서 물려받은 유산으로 곤궁한 생활이 되자 다시 덕수이씨의 문중 파주

율곡리로 이사했다. 그로 인해 아들 이이가 ‘율곡(栗谷)’이란 호를 쓰게 된 것이다.

 

봉산서재를 검색하여 보면율곡 이이 선생의 부친 이원수(李元秀)공이 수운판관(水運判官)으로

 벼슬을 하던 조선 중종(中宗;1530년경)때 이 곳에서18년간(1526-1543) 거주하는 동안 사임당

신씨에게서 율곡선생을 잉태하였는데(1536년 봄) 이 사실을 후세에 전하고 기리기 위하여

창건(創建)한 사당(祠堂)이다.라고 검색된다.

 

여기에서 이원수 공과 사임당 신씨가 봉평 백옥포리에 18년간 살았다는 이해를 제대로 하고있지만,

이원수 공의 운판관이란 벼슬은 51세때에 오른것이다.(신 사임당이 47세에 돌아가시던 해로(1550)

이를 정확히 구분하지 않아 인터넷의 글들은 상당한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특히 기자들의 기사는 정확한줄 알고 무조건 따라벴겨서,,,

신문뉴스의 황당한 오류를 보자.

율곡 이이선생의 부친 이원수공은 판관으로 벼슬을 하던 조선 중종 1530년대에 이곳에 판관대를 세웠다.

이원수공은 이곳 판관대에서 사임당 신씨와 4년간 거주하는 동안 율곡 생을 잉태했다

제목; <평창향교, 봉산서재 제향 올려>2014-10-24 오전 10:29:56 박용달 기자  mail@cfnews.kr

 

수운판관이 된 것은 51살이었고 1550년이다.

판관대에서 4년간 생활했다는 것은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인지...

1530년 이원수공과 신사임당은 이곳 백옥포리에 집을 장만하고 신혼살림을 차렸으며....

결혼 12년째인 이곳생활 9년째에 이곳의 수려한 산수와 자연의 맑은 정기를 담고 이율곡 선생을

잉태하게 되었다.

후일 임금님이 이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으시고 수운판관의 벼슬에 올란던 이원수공의 직위를

따서 판관대라 명하였으며 사패지도 내려주었다.

만약 이러한 명문정도라면 율곡의 어린시절 고향이 자연 평창이란 뜻을 담고잇는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는문장이 아닐까 생각한다.

 

詩 한편을 인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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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생각들이 후세백작이 바라보는 판관대의 사색입니다.

누가 판관대의 명문을 이렇게 엉터리로 쎃는가??

율곡의 고향은 어디인가??

판관대의 명문은 율곡의 고향을 상실시켰다.

그로서 율곡의 모든 이야기에 고향이란 단어는 찾아볼 수가 없다.

이것이 평창인들의 역사소명의식이 부족한 탓이라.

판관대 비석에 쓰여진 명문은 글 솜씨를 뽐내는듯 흉내냈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자의 글이라.

당장 파 딩기고 싶다.

이것이 판관대를 바라보는 후세백작의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