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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의고향 백옥포

잉태지의 단어적 이해

잉태지의 단어적 이해

 

2020. 12.5, 05;00 平昌歷史硏究者 高 柱 浩

(1) 율곡의 사패지에 관해서 앞으로의 연구방향

   이곳 판관대는 신사임당이 율곡 이이을 잉태한 곳으로 알려지자 현종은 사방 5리의 사패지를 하사하였다.(1655년, 임인년). 이러한 기록에 의하여 평창군민신문은 백옥포리 212번지외 123개 번지에  1916년 일제식민시대에 토지조사부 정보공개 신청하여 밝혀진 바 총 50,830평의 토지가 당시 강릉군 정동면 죽헌리 (현 오죽현)의 권영달씨 소유로 밝혀졌다.

   이는 "이씨 분재기"에 신사임당의 어머니 용인 이씨는 율곡 이이에게는 제사를 지내는 봉사조로 재산을 분배하였으며, 대릴사위인 넷째딸의 부군 권화의 아들 권처균에게는 오죽헌에 벌초를 하는 배사조로 오죽현을 물려었고 이후 오죽헌은 안동 권씨의 소유로 내려왔기에 토지대장에 소유주는 권영달로 되어 있다.. 이러한 5만여 평의 방대한 토지는 당시 오죽헌의 이씨분재기에 의한 오죽헌의 모든 재산의 합한 것을 넘는 것으로 사패지임이 증명된다.

(* 권화가 데릴사위라는 점은 율곡 이이선생이 지은 권화의 묘비문인 『습독관 권공 권공 묘지명(習讀官權公墓誌銘)』 에 수록되어 있다. 이종술외 역주, 국역 율곡전서 (Ⅶ) 296쪽).

   이후 일제 식민시대에 우리나라 토지 측량에 처음으로 지번을 갖게 돠었던바 곧바로 5만여평의 토지가 사기로 매매되자 법원에 소송비용으로 강릉의 동척회사란 금고에서 소송비용을 빌려 썼던바 이후 대금반납의 사유로토지는 넘어갔다고 한다,

   일제 식민시대에 이와 유사한 소송사건은 정몽주의 사패지에서도(용인 모현면에 충렬서당) 현 분당 뒷산 태전리일대의 960만평 현재로는 수천억원의 땅을 사패지로 하사받았는데 일제 강점기에 연암 이씨네 문중 "고려 문신" 이석형"의 관계로 15년 송사가 있었는바 연일 정씨인 필자의 지인의 증조부님이 땅을 팔아서 송사비용을 마련하였던바 이 땅은 지금 거의 1조원대에 육박하는 땅으로 그 기록은 당시 서울서 재판하였지만 아마 충주지방법원에 보관되고 있다고 알려졌다.

판관대의 사패지도 지금 법원에 그 기록이 보존키는 희박하겠지만 그 기록이 남아 있다면 당시의 재판의 기록으로 권씨가문과 오죽헌쪽 입장에서 판관대의 사패지란 점의 진술등으로 사패지 확인방법도 연구가 좀 더 있어야 할 것이다.

당시 법원 소송에 거의 1조원대의 땅이나 판관대의 5만평 땅이 소송비용이라는데 당시로서는 땅값이 비지 값이었겠지만 한편으론 법이란게 어마어마한,,, 그래서 우리나라엔 법관을 제일로 치는 인식이 잡혔는지도 모를일,,

 

   오죽헌의 연구회(전신 율곡학회)의 신사임당 연보에서도 사료적으로도 정확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이러한 율곡연구회의 신사임당 연보에서 하나의 주장에 상반되는 욕심도 나타내고 있다. 그 예의 하나로 신사임당은 결혼하고 서울에 올라가 시어머니 홍씨에게 상견례를 치렀다한다. 그리고 부친 신명화공이 돌아가시자 강릉에서 삼년상을 치렀다 한다. 또한 맏아들 선은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하면 삼년상의  만 2년 사이에 삼년상이든 서울 출생 둘 중에 하나의 이야기는 위배되는 이야기이다.

이렇듯 지금 신사임당과 율곡의 생애에 대해서는 역사적 사료도 없는데 많은 이야기가 바르지 못하게 전개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오죽헌의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만 모두 발췌하여 본인의 이해력을 피력할 것입니다.

(2) 잉태지를 이해하기 위한 사고의 전환

  잉태지에 대한 논고는 개인적 주관에 의한 글임을 고지하며 서술합니다.

  필자의 세미나 연설문에서 우리는 이순신, 강감찬, 을지문덕, 김유신등 무인들만 위인으로 모시는 경향에 이러한 문제는 아산 현충사에다가 이순신을 성웅으로 부각시키자 사람들의 사고는 그것에 고정되며 스스로 한 발 더 나아가 을지문덕등 무인들만 위인이라 생각하게 되며 또한 이러한 작용으로 70년대 TV가 전국적으로 보급되며 드라마에 무신들의 스토리가 흥행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위인상에 문인과 무인의 전체를 찾아보지 못하고 이순신이 조명되자 반사적으로 무인들만 위인으로 생각하는 국수적이고 편향성을 가지고 지향하게 됩니다. 즉 이순신의 성역화에 누가 위인이라고 제시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은 스스로 한 발 더 나아가 무인들만 위인으로 모시는 단편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편향적 생각에서 사고적 전환은 있어야 한다. 그 점은 마치 인상주의, 낭만주의등의 사조(ism)를 예로 보면 그러한 프레임 구조 안의 생각의 고착화를 벗어나 사고와 사유의 다른 해방구를 찾는 방법적 모색을 가져오는 것으로 그 하나의 예로 중세말 렘브란트는 궁정화가로서 왕으로부터 다음 연회때까지 왕비와 왕이 함께 있는 그림을 그려오라는 명령을 받고서 렘블한트는 그림을 그려 연회장에 들고 간 그림은 왕과 왕비의 인물이 빠지고 자연의 풍경만의 있는 그림이였다. 이때까지 그러한 풍경화는 그림으로 존재하지도 않았고 있슬 수 없었다. 그래서 왕은 대노하여 렘브란트는 궁정화가에서 쫒겨나고 밥을 굷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까지 모든 그림은 인물이 중심이였고 풍경은 배경의 장식으로만 존재하였는데, 렘브란트의 풍경화를 본후  자연의 풍경으로만도 그림이 될 수 있구나하고 하고 사람들의 사고의 인식력이 더 넓혀지게 된 것이다. 인간의 사고는 지금까지의 인식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는 이즘(사조)에 의해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 두가지 예에서 보듯 우리는 현재로서의 인식력만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은 당시 역사에 오류를 만들 수 있는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범위가 많다 하겠다.  그렇듯 판관대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이러한 오류를 하나 지적하면 여러학자들의 보편적 기록에 백옥포리 판관대는 강릉에서 서울을 다니기에 중간에 쉬었다 가는 장소로 생각하는바 이는 현재에 영동고속도로 장평 톨게이트에서 2km 정도에 판관대가 위치하기에 중간거점으로 보는 듯 하나 이것은 현재로서 과거 역사를 보기에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 역사는 역사 당시의 과거의 시점으로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본인의 일전 발표글에서 옛날에 김홍도의 "금강사군첩"를 인용하여 관동대로의 평창구간의 코스를 밝힌바로는 대화 신리에서 모릿재를 넘어 청심대를 거쳐 진부 길이라 밝히고 있다.

그러면, 진부나 대화 어디에서도 봉평은 오십여리 먼 외지마을로 강릉서 한양길이 600여리에 서울서 대화나 진부까지와서 강릉 200여리를 더 가기에  벡옥포리까지 왕복 백리길을 쉬었다 간다면 이는 뭔가 이해력이 떨어지는 표현이다. 이러한 문제는 학자들의 표현에서 역사를 과거의 시점에서 이해하지 않고 오늘의 환경등이 묻어서 역사적 규명을 하는 잠에 그르친 결과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역사는 오늘의 환경을 극히 절제하고 과거의 환경을 살펴 유추해서 서술해야 한다. 1872년 평창군 오면지도에서 보면 평창에서 정선을 넘는 성마령은 대로라고 표시되어 있지만 대관령은 가마도 겨우 넘는 중로(中路)로 표기하고 있다. 이렇듯 조선시대에 우리나라는 육로가 발달치 않은 상황에 조선시대에는 수군이 육군보다 더 많았다. 그러기에 산을 넘고 강을 건널 때 수심이 조금 깊으면 아녀자들은 멀리 돌아가야 하는 이러한 환경까지 고려하여야 한다. 이러한 눈에 보이지않는 상황까지도 그 옛날로 돌아가 이해하며 역사를 조명하여야 바른 역사를 창출할 수 있는 것이다.

  아래에서 잉태지라는 본인의 해석이 요즘으로 이해하기엔 너무 주관적인 면도 있으나, 이러한 고찰에는 요즘의 우리생각의 인식을 절제하고 사유의 한계의 고정적 관념의 벽을 넘어서 잉태지란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이해와 인식의 사고의 전환을 가져야 한다는 설명을 하면서 아래 장에서는 잉태지를 어떻게 볼 수 있는가를 피력합니다.

(3) 잉태지란 용어는 어떠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슬까??

  우리는 임신을 하는 것을 잉태라고 한다. 이 부분의 좀더 확장된 이해를 하기위해  윗 장에서 일상의 고정관념을 넘어서 사고적 전환을 해야 한다고 설명하였듯이 이 장에서 잉태에 관한 이해로 우리의 일상에 대한 고정적 사고는 어떠한 축에의한 한계점이 있기에 이를 넘어서서 새로운 생각으로 돌아가 잉태에 대한 이해를 풀어나가고자 한다.

  율곡 사후 7~80년후 현종은 백옥포리 판관대가 율곡의 잉테지란 이야기를 듣고 이곳에 무려 5만여평의 사패지를 하사한다. 물론 사패지란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인물에게 임금이 내려주는 땅이다. 그런데 율곡 이이는 큰 공을 세웠지만 특별히 판관대가 잉태지라고 판관대에 사패지를 내려 주었다.

  이때 판관대는 잉태지요, 오죽헌은 신사임당이 용꿈을 꾸고 울곡을 낳은 출생지입니다라고 말을 했슬텐데 왜 판관대 잉태지에만 사패지를 하사 하였슬까?? 아마 출생지 이야기를 듣고도 그건 의미없는 얘기야라고 할때는 이미 그런 얘기는 아뢰지 않았슬 것이다. 그럼 당시 이야기에 출생지 애기를 모르고 못했다면 현종은 잉태지와 마찬가지로 출생지도 사패지를 내려야 하니 다시 알아 오도록 하게나 하고 명 하였슬 것인데, 현재가지도 출생지라는 오죽헌엔 그런 사패지 문화는 없는듯 하다.

  현재 우리의 단어 이해력이나 사고력에서는 탄생지도 잉태지와 똑같이 사패지를 내려주었어야 할 것이나 잉태지인 판관대에는 사퍄지를 내려 주었지만 출생지라는 오죽헌엔 사패지를 내리주지 않았다. 이 점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이 점에 문제에 답은 가져야 한다.

 이러한 문제에서 본론적으로 본다면 잉태지는 출생지를 수반하는 동반어는 아니란 점이다. 잉태와 출생이란 서로 상관관계를 가지는 상대어가 아니라 잉태 그 자체가 탄생이란 점이다. 즉 잉태는 하늘에 점지한 출생 즉 생명체로서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으로 출생지에서의 출생은 의미없다는 것으로 이해를 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관점이다. 이러한 문제로 볼때  당시로서 오죽헌의 출생지 이야기는 없었어야 이 이야기의 추론은 맞는다. 단 신범선생의 「봉서유고」집에서 이야기에 강릉 사람은 율곡은  오죽헌에서 출생했고 오죽헌에서 살앗다고 기술한바.. 이 책은 1850년대 사회상을 기록한 것이기에 약 200년 후의 기록서이기에 현종이 사패지를 하사할때의 기록은 아니란 점이다.

  그러기에 현종은 판관대는 율곡의 잉태지인 하늘이 점지한 고향으로 사패지를 내려주고 이로서 제향을 하고 받들게 되지만 당시에는 잉태지가 출생이란 개념이기에 오죽헌은 출생지라 하는 점은 후일 비약시켰다는 것이 본인의 이해입니다.

   현재로서는 아이를 낳으면 출생신고로 태어난 날을 호적에 기재하며 생일로 기념하고 있다. 하지만 출생때 하늘의 정기를 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인간도 자연의 귀속체로 보는 동양사상에서는 잉태라는 단어 자체가 최초의 탄생이고 정기를 받는 것이란 의미라, 현종도 이에 펀관대를 잉태지로 기념하며 사패지를 하사한 것이다. 그러기에 잉태 자체가 생명의 기원이기에 하늘의 정기를 받는다는 믿음이란 추론이다. 따라서 이후에 율곡을 오죽헌에서 신사임당이 용꿈을 꾸고 출생히하였다는 출생설은 의미가 없다. 그러기에 용꿈을 꾼 것은 하늘의 정기를 받은 것은 아니고 출생을 원만하게 치르는 정도의 이해 이상으로 볼 수 있는 입장은 아닌것이다.

  물론 오죽헌에서 신 사임당이 용꿈을 꾸고 율곡 이이를 출산한 기록도 없거니와 또한 만약 판관대에서 잉태와 출산을 같이 하였다 하여도 잉태가 하늘이 내리는 출생이고 현재적 출생일은 태어난 날의 출산일이라는 의미의 해석이다.

이상에서 보는바 현재의 우리는 흔히 출생일의  생일을 기념하지만 율곡 이이는 대 성현을 모시기에 현종은 동양사사에 기인하여 명확한 탄생의 잉태지를 기념하는 것으로 보인다.

위에 언급한 현재의 사고의 개념을 전환시켜볼때 원초적 이해로 이러한 설명이 잉태의 개념이 필자가 주장하는 잉태란 단어의 해석이다.

지금까지  판관대를 율곡의 잉태지라는라며 역사 학자와 민속학자들이 두세번 세미나를 하였다.  하지만 잉태지란 설화적인 이야깃 거리로서 역사를 규명함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잉태지 역사는 없다. 역사이래 잉태지 이야기는 동정녀 마리아의 수태고지 이야기밖에는 없는데 그것은 종교적인 이해로 풀어야 되는 관점이지 역사적 관점의 이해는 아니다.

 이처럼 판관대에서 신사임당과 율곡을 조명함에는 잉태지 설화가 아닌 역사적 사실로 규명 하여야 한다. 이에따라 필자는 판관대에서 "율곡의 고향마을 가꾸기:란 주제아래 잉태지가 아닌 역사적 사실로서 판관대와 신사임당, 율곡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현재 우리의 사고력의 고정관념을 넘어서서 이해할 수 있는 필자의 주관적 견해임을 전제로 합니다.

이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