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평창 청동기 유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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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에서 청동기 유적의 비파형동검 발굴]
후세백작 2016.09.11 00:2
평창의 옛 무덤(평창읍 하리 240-4)에서 한반도 청동기시대(기원1500~300년)의 중기 무덤에서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과 피장자의 인골이 동시에 출토됐다. 대표적 무기인 비파형 동검과 인골이 나란히 출토되기는 처음이다.
<강원 평창의 청동기 시대>
강원고고문화연구원이 진행한 평창군 하리 건물 신축부지 내 유적 발굴조사에서 기원전 500년 제작으로 추정되는 비파형동검과 피장자의 인골을 동시에 확인했다고 문화재청이 8일 밝혔다.
발굴 조사 결과 판석으로 만든 청동기 시대 석관묘 14기를 확인했으며, 이 중 9기에서 피장자의 매장부가 발굴됐다. 특히 2호 무덤은 장축 2.04m의 대형 석관묘로 형식과 크기가 주변 다른 무덤과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여기서 곧게 편 형태로 매장된 인골과 나란히 비파형동검이 출토됐다. 청동기 무기 혹은 제기로 지배층의 부장품으로 알려진 비파형동검이 함께 묻힌 것으로 봐 2호 무덤의 주인은 당시 지역사회 유력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길이 26.3㎝, 최대폭 3.8㎝의 비파형동검은 동검을 구부려 부러뜨리는 방식으로 석관에 매장됐다. 전형적인 비파형동검으로부터 퇴화된 세형동검으로 변해가는 과도기 유물이다.
이번에 발굴된 인골과 비파형동검은 무덤 조성 시 사용한 석회암 등으로 인해 보존상태가 양호한 것이 특징이다. 이번 발굴조사로 청동기시대 시신 매장 방법과 장례 풍습 등 선사시대 무덤 연구에 필요한 중요 자료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강원고고문화 연구원은 향후 추가 연구를 통해 피장자의 신원을 밝히고 DNA 분석 또한 진행할 계획이다.
이번 발굴조사는 개인주택 신축부지에 대한 소규모 발굴조사로 진행됐다. 2013년 입회조사를 통해 토기 조각, 마제석검편 등 유물이 수습돼 청동기시대 무덤 유적이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 706㎡의 사업 부지에 대한 정밀 발굴조사가 추진됐다. 이번 발굴조사의 성과는 9일 오후 2시 평창군 평창읍 하리 240-4번지에서 열리는 현장설명회에서 공개된다.
피장자는 지역사회의 유력자였을 것”이라며 “인골이 썩지 않고 비파형동검도 녹슬지 않은 이유는 무덤을 조성할 때 사용한 석회암 때문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강원 평창에서 곧게 편 형태로 매장된 인골과 동시에 출토된 청동기 비파형동검.둘 다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주변에서 확인된 석관묘들과 형식과 크기가 달라 지방 유력인물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2호 무덤 전경. (문화재청 제공)
세형동검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양상을 보이는 비파형동검. 청동기 시대 중기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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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파형 청동검이란 비파는 요즘의 기타같은 악기에 'S'곡선의 주름이 있으며, 지금 차고 다녀도 멋있슬 劍인듯 합니다.
인간의 문명의 시작엔 철의 제련법을 발명하여(바그다드의 힛타이트족이 발명) 철기문화가 시작되었으나 제련하기 어려워 청동기가 발명되고 주로 사용되엇다. 문제는 나무의 화력으론 주철 생산에 약 200도 온도가 모자라서(철의 용융점은 1,580°) 구리에 주석 합금의 청동기 시대가 먼저 도래되었습니다.
청동기는 철보다는 저온으로도 녹일 수 있어 나무의 화력에서 잘 녹으나 제련술이 까다로워 많이 번창하진 못했습니다 즉, 청동기가 문명의 판도를 크게 변혁시키진 못했다는 이야기 입니다. 비파형 청동검은 고조선 시대의 발명품으로 전국에 40여개의 고조선식(라오닝식) 청동검이 발견되었으나 이 청동검 녹여 붙던 거푸집이 발견되지 않아서 아직은 국산인지 또는, 국내 기술인지 그 구분이 모호한 듯 합니다
하리 출토의 고조선식 검과 古인골은 당시 평창의 권위를 이야기 하는듯 합니다. 청동기 시대의 석관묘 14기 발굴에 9기에서 매장부가 발견되는데 인골과 청동검이 동시에 발굴됨으로 청동기시대인 고조선 시대인들의 연구도 가능해진 점에 학계의 고조선 시대사 문화 연구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당시 시대에는 이렇게 만들기 어려운 청동검이 유골과 함께 출토된 하리 유적은 초기적인 원시 방식으로 석축을 쌓아 적석총을 만든 석관묘는 학계로서는 고조선 시대사를 밝히는 좋은 자료가 될 듯 합니다.
*주 - 고조선 시대라함은 아직 정립이 안된 고조선은 한반도 전체의 여러 부족국가들을 지칭한다는 의견에 따라 하리 출토 정동기 문화는 당시 시대의 한 국가를 지칭함.
매장부에서 특이한 것은 2호기만 전신상이고 나머지 8개분은 약 50㎤로 아마 당시 일반인의 장례문화로 시신이 마른다음 뼈만 추려서 50㎤의 땅을 파고 넣었던듯 합니다. 앞으로 연구 이야기가 있어야 할 듯 합니다. 또한 2호분의 묘는 삼국시대의 횡혈식 석실분 이전에 나타나는 묘로서 토광묘가 부서져 흘러 내리지 않도록 석축을 쌓아올린 아주 초기 무덤형태로 이에 연구도 흥미로울듯 합니다.
우리는 세계 유일의 선사시대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민족으로 역사가 있기에는 문자가 있어야 서술이 가능한 것으로 고조선 시대에는 문자가 있던 세계에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문자를 가진 선사시대인 것이다. 그러기에 이번 평창읍 하리 240-4번지에서 발견된 청동기 시대 유물은 우리 역사에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될 것 아니겠습니까??
이번 발굴은 평창엔 아주 상고시대부터 촌락을 이루고 살았던 점이 확실히 밝혀진 것이다. 이 발굴에 특이한 점은 동검은 석실무덤에 청동기시대인의 인골과 같이 발견되었기에 청동기 시대인의 증명엔 어려움이 없는 점이 특이하다.
이 석실무덤들은 하평리 산자락이 끝나는 개활지에 있으며 이 골자기 일대를 지금은 방축골이라 불리며 풍수사상의 산세가 좋아 향교를 위시하여 공동묘지를 형성하고 있지만, 옛 석기시대인들은 이 구릉이 비옥한 토질의 배사토라 농경이 쉬운점등으로 이곳에 정착하였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런데, 무덤속의 劍이 부러졌네요. 이것은 劍의 주인은 족장이나 지배계급으로 세상을 정의하고 지배하는 상징으로 劍이 존재했다면 그가 죽게 되자 이제는 劍의 효력이 정지되었다는 표시인듯, 지금도 면면히 흐르는 고조선 유물의 문화엔 막새무늬 기와의 축구의 붉은 악마 상징 치우천자의 도깨비상등은 고조선에서부터 비롯되는 고조선의 문화입니다.
이렇듯 아직도 우리 주변엔 고조선 문화가 남아있고 그것의 발견에는 당시 당시의 풍습도 있습니다. 이에 좀 더 구체적인 연구가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동이족은 마치 E.T 모양의 괴상한 외계인같다는 표현은 청동제 투우를 쓴 표현인듯 하며 夏나라(중국 최초의 나라)의 한족을 보면 무참히 내려쳐 죽였다는 것은 몽둥이를 가진 한족보다 고조선은 칼과 창등 의 청동기 문명을 지녔단 점으로 이해됩니다.
비파형동검에서 세형동검으로 변화해가는 과도기적 양상이다. 주변의 다른 석관묘에서 출토된 발형토기, 마제석검, 관옥 등의 유물들과 종합해 보면 동검을 비롯한 유적의 편년(編年)은 청동기시대 중기로 판단됩니다.
이 비파형 청동검은 세형의 예리한 劍 이전의 검으로 연대는 최소 2,500여년전 검으로 집단 매장지에 장신의 시신은 아마도 경주에서 한 점 보이는 장신의 스메르족이 아닌 아리안족 고조선인으로 간주되는것과 같은 이해로 추정됩니다.
스메르 인보다 후기에 한반도에 유입된 아리안족은 좀 더 진화된 문명을 가지기에 지배계급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하리 2호분 석실의 전신상 석실의 길이가 크다는,,,)또한 고조선은 스메르인과 아리란 족이 혼연일체가 부족장 체계를 갖추는 것이 고조선이란 학설이 좀더 다가가는 듯한 설명을 할수있게 되는 현장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리 청동검 유적의 중요성을 지니는 것입니다.
평창읍 하리 청동기 유적지는 이러한 고조선의 청동검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역사의 현장입니다. 이곳은 앞으로 청동기 시대의 고조선 인과 청동검 유물의 메카가 지향하였으면 좋을것이란 의견입니다. 이것이 본인의 관심과 이해입니다.이번 하리의 청동기 유적은 아마도 고조선 시대의 하리유적이란 명문을 달아 보존하게될듯 싶습니다.
왜냐면, ‘하리 고조선식 청동검과 전신상 유골의 석축분 유적"의 중요성은 석축묘와 유골과 청동검이 같이 발굴되어 명확한 시대와 문화를 인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리유적은 인골과 비파형 청동검이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고조선 문화유적이란 점으로 아주 중요한 청동기 문화유적지로 지정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