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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의고향 백옥포

세미나 논문 후기

<논문후기>

 

1, 판관대 비석의 명문에서

 

(1) 비석의 명문 해석

 

<판관대의 비석의 명문 중 발췌>

        "율곡선생의 어머님 행장에도 봉평에서 살았다는 기록이 보이거니와 강릉땅에서 지내던 신사당이 용을 현몽하고 서기1536년 음력 2월에 이곳으로 옮겼고 서울에서 수운판관직에 있던 부 군 이원수공이 말미를 얻어 이곳으로 귀가하니 그때에 율곡선생을 잉태한 것으로 전해온다"

 

◈ 봉평에서 살았다는 기록이 보이거니와 강릉땅에서 지내던 신 사임당이 용을 현몽하고 서기1536년 음력 2월에 이곳으로 옮겼고 라는 기록에서, ~ 이 보이거니와라고 표현하는것은 그 다음 문장엔 그런 행장의 기록이 아닌, 지금까지의 기록은 특히 율곡이 쓴 선비행장의 기록도 전혀 무시하겠다는 의도형 문장으로 그 다음 글들은 역사적 기록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란 입장을 취하는 느낌이다.

 

◈ 또한. 강릉땅에 지내던 신사임당이라는 표현에... 신 사임당이 강릉 살았다는 정확한 출처는 어디에 기인하는가??

 

◈ 그리고 현몽하고 음 2월에 이곳으로 옮겼고라는 표현은 이사를 했는지 아니면 거처를 옮겼는지 정확한 뜻이 없는 여러 추정을 할 수 있는 的確치 못한 표현이다. 그러기에 이 문장은 이때 이사한 것이 아니기에 오류이다.

 

  부부가 서로 기약도 없이 봉평의 판관대에서 상봉하여 율곡선생을 잉태하였다는 천재일우적인 기회포착의 순간의 표현은 이것은 율곡의 생일이 12월이라 역으로 계산한 것이지, 음 2월에 오죽헌에서 백옥포리로 올라 왔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그건 가식이라.

판관대가 이원수 공과 신사임당의 부부가 결혼후 3년차에 서울 시어머니 홍씨에게 인사드리고 자기집으로 내려와 18년 살았다는 주된 판관대의 본 뜻은 없고, 자기 집인데 음 2월에 이곳 판관대에서 만났다는 이야기에 무엇인가 어색한 개인의 주관적 감정이 내제한 소설적인 픽션만 그린 명문이다.(18년이란 수치는 아래에서 계산한다)

그러기에, 이러한 명문은 객관화된 기록에 의존해야지 주관적 시나리오처럼 취급한 점에 기인하여 이곳을 방문한 많은 관광객의 인터넷 소감문에 유독 판관대의 오류가 많은 현상을 지적한다.

이것은, 이원수 공과 신 사임당이 살았던 집을 역사에서 존멸시키고 율곡의 고향까지도 상실시키는 주범의 한 문장으로 오죽헌에 빌미만 제공하는 문장이다.

 

   인터넷에 일반인들의 소감문엔 대부분의 이야기들에 용꿈을 꾸고 강릉 본가정도에서 이곳으로 오고 부군은 대화장터의 주막 갈보를 뿌리치고 이곳으로 달려와 율곡을 잉태했다는 마치 전설처럼 부정확하게 그려지고 강릉이 본가로 그려지는등 제대로 알고 쓴 글은 하나도 없었는데 판관대 비석을 읽어보면 이 명문자체도 6하원칙이 성립이 않되기에, 않되면 않되는 표현의 기록이 있어야 하지 글쓴 사람의 주관적 해석에만 의존하기에 오류가 있슴을 지적한다.

  또한 이원수 공이말미를 얻어라는 표현에 대성현을 잉태하는 시간에 짜투리 시간을 얻은식의 합당하지 않은 표현이다. 물론 비각의 명문하나로 모든것을 이해하기는 부족하겠지만 이 명문 서두의 풍수적인 이곳 지리는 장황하면서 최소한 이곳이 이원수 공과 신사임당의 본가였고 따라서 율곡의 고향이란 글이 주 문장으로 들어갔어야 이곳을 설명하는 가장 합당한 명문이 아닐까?? 그런데, 위 비문은 풍수적으로 좋은 곳에서 극적으로 상봉하여 심금을 울리게하며 율곡을 잉태하고 그곳을 주민들이 잉태지를 기리는 명문내용에 가장 중요한 주체의 이해적 설명이 없어서 이 명문을 처음 대하는 사람은 이해에 곤혹함을 느낀다.

   판관대의 땅은 명당이고 부친 이원수공은 날이 저물어 대화장터에서 허덕이다 겨우 집에 당도하는 표현에서... 이러면서 신사임당만 미화시키는데... 왜서 미화인가 보면 용을 현몽하고 이곳에 왔다는 기록은 어디에 있는가?? 즉, 오죽헌에서 현몽하고 추위도 만만치않을 음 이월 대관령을 넘어 여기까지 당도할 수 있슬까??

하나의 명문에 이러한 주관적이란 이 글을 쓴 사람은 신 사임당이 이곳에 살았다는 행장의 기록은 있으나 오죽헌에서 생활하였다는 어디에도 없는 잘못된 편견적 생각에 치우쳐 이 글을 썼기에 이 비문은 로미오와 줄리엣같은 픽션을 하고있기에 역사의 명문엔 합당치 못해 각종 인테넷 정보들은 율곡의 고향은 오죽헌이라니 아니면 파주라하지 이곳 판관대라 하는 글은 하나도 없다. 따라서 평창사람들은 율곡의 고향까지도 상실 시킨 것이기에 이러한 비문은 파 딩겨야 하는 것이다.

 

 

(2) 판관대의 새로운 비문의 명문은??

 

그러면 역사적 사실에 접근하는 비문은 어떻게 써야 할까??

사임당의 생애는 율곡 이이가 지은“선비행장”(先妣行狀)에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1524년부터 1541년 사이에 봉평에 주로 살면서 친정 어머니가 계신 외가 강릉엘 다녔던 것으로 확인된다.

선비행장에 원문으로 보면“其後惑歸臨瀛 惑居蓬坪”으로 되어 있는 바, “그 후 (1524년 이후) 친정인 임영(강릉)에 들르거나, 봉평에 살았다.”고 율곡 이이가 16세때 직접 적었다. 결혼 후 백옥포리에서 서울로 이사간 시점까지 기간은 18년이 되며, 율곡 이이는 신사임당이 백옥포리에 살던 시기인 1536년에 4남 3녀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봉평(판관대)와 임영(강릉 오죽헌) 두 지역 중 어느 곳이 신사임당의 거주지는 율곡이 쓴 윗글 『선비행장』에서 나타난 ‘其後惑歸臨瀛 惑居蓬坪’(귀후혹귀임영 혹거봉평)에 번역은‘혹간 강릉 가기도 하고 봉평에서 거주하였다’라는 문장으로‘봉평에 살고(居蓬坪,거봉평)’라는 문구에 분명히 나타난다.

상대적으로 강릉은 친정에 들르거나(惑歸臨瀛,혹거임영)‘라는 문구로 주 근거지가 판관대임을 확연히 알 수 있다.

 

이것만이 판관대를 이야기 할 수 있는 역사다. 그리고 양택인지 음택인지 구분도 안되는 명당론은 교육상도 많은 문제를 야기하는 것으로 산수가 좋다는 말에서 끝내야 한다. 명당론은 극히 주관적인 이야기로 야사나 설화적으로 남겨 두어야 하는데 본인이 풍수가는 아니지만 그보단 더 재미있는 명당론을 그려본다.

 

 

(3) 판관대의 명당론 (필자의 주관적 해석임)

 

   벡옥포리는 뒤로 송項치 노정현 마전치라 부르는 산마루가 부채살처럼 드리우고 있고 앞으로는 멀리 서쪽 양지동 쪽으로부터 흘러드는 물이 금강평을 지나 화엄( 아마도 팔석정을) 감아돌아 창동을 거쳐 백옥포리를 감싸고 지나가는 산태극 수태극을 일반적으로 장황하게 그리고 있는데 이는 판관대의 조산은 청룡은 계방산에서 발원하고 백호는 오대산(비로봉)에서 발원하였다. 또한 안산격의 주작은 태기산에서 발원하여 3룡이 천리를 달려와(30리길) 만난곳으로 이곳의 산세는 와(窩)형으로 벌어진 개구혈 형상으로 청룡, 백호의 주산보다는 조산(주작)이 발달해 있는 격이다. 조산은 태기산에서 발원하여 큰 호형을 그리며 백호에서 청룡까지 닿아있어 dso 명당에 빈틈을 주지 않는데 이를 가로지르며 막고 있는것은 지네 형으로 지네는 다산을 의미하며 조산을 따라 입수하는 천문(물이 들어오는곳)의 득(得)에서 지호(地戶. 물이 나가는곳)까지의 파(破)는 見과 不見에 靜의 고요함으로 흐르며 특히 지호에서 청룡의 산세를 만나 270도 꺽어 돌아 금당으로 흘러간다, <금낭경>에서 이르기를 수구는 한 번 꺾였다 가는게 좋다한다.(청오경과 금낭경이 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책에 미국 남부의 목화밭 이랑이 길게 만들어지는데 이랑은 똑바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가다가 삐뚤거리게 꺾어 놓은 것은 양분이 빗물에 전부 빠지지 않게하는 작용으로 수구가 한 번 꺾여서 벌지( 주머니)를 만들어 속을 궁휼하지 않게 하는 작용을 함이다.

 

  귀인은 東에나 난다는 옛말은 태백산백의 모든 물은 산세를 따라 동에서 서로 흐르는데 이곳 판관대로 흐르는 명당수는 판관대 터에 올라서면 흥정천은 보이지 않으나 산 아래 길게 내려 흐르고 있는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게 아니라 2차적 기억의 사유로 인지할 수 있는데 이 냇물은 조산인 태기산을 돌아보는 회룡고조형으로 즉 서에서 동으로 조용히 흐르기에 동에서 귀인이 난다는 이야기가 명당이라는 풍수론으로 전해져온다. 이 풍수론을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 과거 어느 선인의 풍수론에 이런 의미를 담고 있어야 할듯 하다는 것이 필자의 설명이다. 판관대는 이렇게 특이한 이러한 조산이 청룡과 백호의 끝을 가로 막아 넓은 대 명당을 만들며 멀리서 이곳에 와서 멈춘 3龍은 여의주 하나를 빼앗아 승천하고자 하는 3용쟁취(三龍爭取) 형으로 서로 여의주를 잡고 중앙 평원으로 올라가려는 패권의 씨름을 하는곳 이곳이 명당으로 그 중심은 원래의 판관대 터이다.

  이곳이 양택의 대 명당으로 그곳엔 판관대터가 자리하고 태백의 정기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풍수론은 서로 상당한 견해차이가 있는 것으로 정론도 없는 이야기이기에 판관대 비석의 명문에 명문에 서술된 명당론은 불 필요하다, 다만 이곳은 율곡이이 선생의 고향으로 상서로운 곳이라는 정도로 그쳐야 하는 것은 율곡의 성리학의 기조는 경세론으로 실천하고자 하였으며 이 경세론은 만 백성이 동일하게 노력하는 결과를 지향하는 학문으로 노력도 없이 명당에서 태어나 잘 되었다는 논리는 이이선생의 철학에는 대비되는 비논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 선비행장에서 관서는 평안도인가??

 

필자가 일전에 강원문화원 연합회 공모전 출품에 본 논문을 출품하였던바 공모전 성격이라 조금 단순하게 서술하여 출품하였던바 발표회를 거쳐서 시상하는 절차에 심사위원장은 동 논문에서 거론하고 있는 장정룡 교수였다. 장정룡 교스는 판관대 세미나를 두 번 발표한 바 있는데 이를 촌평하는 본인에게 그는 당사자로서 어떠한 상을 줄 수 있슬까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되는 점은 공교롭게도 본인은 불참하여 기권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본인의 당시 논문은 공모전 출품책에 실려 오죽헌 학자들도 논문내용을 알고서 봉평에 18년 거주한 사실은 어디에 있는가, 또한 평안도로 출장갈 수 잇는 문제 아닝가 하는 두 개의 물음에 답합니다.

 

조운이란 고려시대부터 조선 중기까지 세금을 조세미로 나던 시기에 조세미를 받아 한양 경창으로 나르던 일을 조운이라 하며 고려말에는 13개 조창이 있었으나 조선 중기에는 9개 조창으로 운용하였으며 조운에는 수운과 해운으로 나누어 집니다,

조운은 가을에 지방 관리들이 조세를 모아 각 조창지역에서 조창의 말직 관리들이 조세미를 수급해 보관하다 다음해 2~4월 사이 경창으로 이송하는 업무를 담당합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이원수공이 수운판관으로 평안도로 출장갔다면 조창도 없는 어디에 왜 갈곳도 없는 것입니다. 또한 평안도에 조운이 있다면 해운판관 소속이지 수운판관 소속은 아니란 점입니다.

아마도 수운판관하면 조세미를 받는 조세 공무원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수운과 조운이란 각 지방 관헌들이 받은 조세미를 조창에서 수납하여 한양 경창까지 나르는 운송담당의 업무이다. 본문에서 밝히는 조운은 세곡의 수납, 보관, 운송의 3가지 기능인데 수납은 농민에게 직접 받는 것이아니라 각 지방에 관리들이 세금을 부과하여 받는 세곡을 조창으로 가져올때 받는 업무를 말함이며, 함경도, 평안도, 제주도는 조운을 하여 한양으로 나르지 않고 각 지방에서 현지의 경비로 쓰였다 하였다는데 아마도 소출이 적고 운송의 어려움때문인듯 하다. 제주도는 논이 없어 제삿날이면 제상에 올려진 밥이 쌀밥을 먹었다 하는바 이 3곳의 지방에서는 소출이 적을뿐더러 운송도 어려웠던듯 싶다, 그러기에 평안도에는 조운의 수운창이나 해양창이 없는데 어디로 출장을 가느냐 하는 문제가 봉착이 된다.

또한, 조창에서는 11월에 지방 관헌으로부터 조세미를 받아 저장, 보관하였다가 다음해 2~4월에 한양의 경창(용산창)으로 실어 나르는 임무를 가지며 조창보다 먼곳은 즉, 조창보다 수운이 먼 관할지역은 5월에 바로 관할지에서 경창으로 실어나르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규정에 선비행장에 기록에서 관서지방에 조운의 일로 출장을 갔다고 하는것은 5월에 일로 조창보다 먼 관할지역의 수계를 가지는 곳은 원주 부론의 흥원창으로 현 영서지방인 영월, 평창, 정선은 남한강의 지류천인 동강과 서강을 점하는 곳으로 이곳을 옛 지명으로는 영서가 아닌 관서로 표기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조운은 내사로 중부에 징청방이 있으며 외사로 전라도 지방 곡식을 관장하는 광흥창이 있는 마포나루에 있었다. 그러기에 율곡이 쓴 선비행장에서 신사임당은 아프다는 편지를 수점에 갔다두었다는 기록에 수점은 전함사내의 기구이지 일반적인 서강으로 영서, 진주, 원주, 충주등지의 서강은 아니란 점이다. 또한 조운의 일을 마치고하는 부분에서 조창보다 먼 곳은 강 상류를 뜻하며 상류지방을 갈때의 배는 작고 폭이 좁지만 배 바닥이 평저선이 아니라 빠른 물살을 가르기에 바닥은 뾰족하게 생긴 점도 본 논문에서 시사하고 있다.

조창에서 조운은 2~4월에 이루어지며 한 번은 가홍창의 배가 16척이 동시에 강풍의 풍랑에 죄초된 점을 미루어 볼때 5월에는 본문의 서술대로 조창 이외의 지역을 출장 간 것으로 이에 타당성을 가지는 지형으로 원주 흥원창의 관할지중에 현재의 영서지방인 영월, 평창, 정선은 남한강 상류로서 흥원창에서 목계나루로 올라 단양을 지나야 당도하는 지형의 특수성을 가지기에 이곳이 율곡의 선비행장에서 관서지방이라 주장하게 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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