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존 목조비 국구사우 위치 터 최초 발언 >
평창에만 있는 문화---국구사우(國舅祠宇)란?? (국구사우 1)
국구(國舅)는 임금님의 장인이란 뜻으로 왕후(王后)의 아버지를 이르며, 사우(祠宇)는 조상의 신주 (神主)를 모셔 놓은 집을 말함이다. 즉, 극구사우는 임금님의 장인어른을 모시는 사당으로 평창에만 유일하게 존재했던 문화로 잘 알려지지 않았는지 국구사우의 뜻은 백과사전에도 없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평창의 국구사우 역사 이야기>라는 평창의 국구사우가 생기게 되는 역사의 일반적 이야기와 극구사위의 제례가 500년 흐르던 전통 문화였는데 일제강점기에 그 맥이 끊겼었다.
그러나 지금 <국구사우 복원의 제 문제>의 장에서 이 문화를 복원하는데 대한 문젯점을 고찰해 보는 것이다.
<평창의 국구사우 역사 이야기>
국구사우는 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穆祖)의 비 효공왕후(孝恭王后)의 부친인 천우위장사(千牛衛長史) 이숙 공과 모친인 돌산군부인 정씨를 제사지내던 사당이다.
전주 완산구의 이목대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4대조 목조 이안사가 태어난 유허이며, 시조 이한(李翰)때부터 누대에 걸쳐 살던 곳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용비어천가》에도 묘사되어 있는데, 사연은 다음과 같다.
이안사는 전주 호족 출신으로 용맹과 지략이 뛰어났던 이안사는 스무 살 때 전주 관기(官妓) 한 여자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어느 날 지주사(知州事)가 전주 고을 안렴사로 부임하는 산성별감(山城 別監)을 접대하기 위해서 그 관기를 수청을 들게 하였으나 관기는 이를 거부하여 죽었다.
(당시 산성별감은 전주감영의 제2인자이고, 지주사는 고려 시대, 지방 행정 구역인 주(州)의 으뜸 벼슬이며, 안렴사는 고려 때 지방장관 중에 하나로 오늘날의 도지사 격이었다)
지주사는 전주 안렴사와 함께 이안사를 역적으로 몰아붙였다. 이리하여 전주 기록물에는 죄인으로 기술되었다.
이와 같이 신임 산성 별감과 갈등을 빚자 외가가 있는 삼척(삼척 이씨)과 처가의 평창(평창 이씨)으로 피신하였다. 《태조실록》에는 목조를 따라나선 집을 170호로 표현했지만, 전주 군지에는 7000여 명이라고 되어 있다.(고려시대는 사병화 제도임)
이안사는 삼척에서 피신생활을 한 지 1년 만에 아버지, 이양무 장군의 상을 당했다. 무덤은 현재의 준경묘이다.
전주에서 갈등을 빚던 산성 별감이 안찰사로 임명되어 오자 이안사는 다시 의주(원산)로 이주하였다. 조정에서 이안사를 의주 병마사로 삼아 원의 침략을 막게 했다.
효공왕후의 부친인 이숙은 평창 이씨 5대조로 이성계가 조선의 임금이 된 뒤 특명으로 평창현을 평창군으로 승격시키고 군의 호장으로 하여금 효공왕후의 아버지 제사를 주관하게 하고 일년에 세 명절마다 祭를 지내게하고 田土를 내려주어 祭需를 장만케 하였으며‚ 제사는 永世토록 지내게 하였다. 그리하여 평창의 극구사우는 이조 오백년간 제례를 지내던 것이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 그 맥이 끊기며 현재에 이른다.
평창이씨 시조 이광(李匡)의 7세손 이천기는 이성계의 이복 형인 이원계 장군 휘하의 인물로 위화도 회군에 반대 입장을 취하였다. 위화도 회군 직전시에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에 반대하는 이원계 휘하 장군들의 목을 모조리 베었다. 그리고, 이원계는 고려의 충신으로 자살을 택한다.
이광의 8세손인 이천기는 공민왕 4년(1355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이천기는 명 나라에 사신으로 건너갔으며, 당시 남만 평정에 국력을 쏟고 쏟고 있던 명나라의 황제가 이천기를 남만 정벌대장으로 뽑았다. 그는 2년 토평 끝에 오랑캐로부터 항복을 받고 돌아왔다.
명 황제 주원장은 이천기에게 공신 칭호와 함께 사신에게 주는 최고의 벼슬을 내렸다. 명나라 황제 주원장으로부터 1품직에 해당하는 산기상시(散驥常侍) 관직으로 고려 사신에게 내리는 최고의 벼슬을 받고 귀국해보니 고려는 망하고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상태라...
이천기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었기에 천만다행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그가 귀국시에는 위화도 회군의 감행 이후로 이천기는 개성 옆의 장단으로 숨어들어갔다.
불사이군이라. 이천기는 이성계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하여 아들 릉(稜), 곡(梏), 과(科),세 형제와 함께 장단(황해도)으로 낙향해 은거하였며 끝내 충절을 지키다가 운명였다.
이성계는 목조비의 고향이 평창으로 후손인 이천기가 은거하여 목조의 장인어른의 제를 지내지 못하게 되어 방치되고 있다는 보고에 접하며 목조 이안사의 장인어른인 평창 이씨 5대조인 이숙을 노산 부원군으로 봉하였고 (노산(魯山)은 평창의 다른 이름) 평창 호장으로 하여금 목조의 왕비 효공왕후(孝恭王后)의 아버지 노산부원군과 어머니 돌산군 정씨의 제를 지내도록 명령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이천기는 죽임을 면하고 평창이씨는 멸족의 위기에서 벗어난다. 이를 보면 불행중 다행이 아니라 평창이씨 문중의 이성계 5대조 목조비의 친정에 "극구사우"는 이조 오백년간 왕족의 예우로 제를 지내는 영예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국구사우 복원의 제 문제>
- 개국과 관련이 있다는것은,,,
- 국구사우는 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穆祖)의 비 효공왕후(孝恭王后)의 부친인 천우위장사(千牛衛長史) 이숙(李肅)공과 모친인 돌산군부인 정씨 (突山郡夫人 鄭氏)를 제사지내던 사당이다. 지금은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 개국과 관련이 있는 터라고 볼 수 있다.
- 干牛衛長史 公肅의 祠宇에 관한 기록을 正祖의 命에 의하여 江原道觀察 使인 李度默이 1788年(正祖 12)에 써서 懸板에 새겨놓은 것을 拓本한 平昌郡國舅祠宇記帖이 남아있어 사료로서 가치가 높다.
- 따라서 국구사우의 정확한 위치에 대한 지표조사를 실시하여 복원하는 것은 평창군의 정체성과 주민의 화합을 위해서 필요하므로 조속히 복구 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판단됨
위에 나열한 3항의 의제는 아마 평창 극구사우에 관한 심포지엄이나 세미나의 주 토론인듯 하다.
이 내용에 준하여 아래에서 본인의 주관적인 생각을 피력한다
용비어천가 3장에 “우리 시조가 경흥(慶興)에 살으샤 왕업(王業)을 여시니”라고 이안사가 왕업을 열었다고 노래했다.
또한 1장이 “해동 육룡(六龍)이 날으사 일마다 천복(天福)이시니라는 표현엔 세종대왕 때에 조선 건국의 당위성과 여섯 선조의 공덕을 찬양하기 위해 지은 노래이다.
여기서 “해동육룡”이 나오는데 “육룡”은 세종대왕의 선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 태조, 태종”의 여섯 선조를 일컫는 말로 “육룡”은 목조(이안사)부터 시작된다
이안사는 전주에서 외가가 있는 삼척으로 도피하였고 피신생활 1년만에 아버지 이양무가 사망하여 쓴 묘를 준경 묘리 한다.
그런데 평창은 처가의 고향이지만 무슨 관계가 있슬까?? 구체적인 언급은 없어 그 내용은 알길은 없으나 가상적이지만 본인의 생각으로 추론해본다면,,,
"태조실록"에는 전주에서 피신할때 목조를 따라나선 집을 170호로 표현했지만, 전주 군지에는 7000여 명이라고 되어 있다.
최소한 4-500여명은 넘는 노비나 고려시대 최씨 무신정권등으로 발달된 사병화에 근거하는 것이고 피신하며 삼척으로 모두 간다면 삼척의 미로면등을 보면 평야도 작아서 식량등 외가에 의존하기엔 많은 문제가 예상되며, 아마도 일부는 평창으로 분할하여 마치 효종이 승병을 양성하듯 사병이란 이미지를 감식시키며 그들의 의식주를 해결하여 주는 등,,,사병들과 목조의 상, 하의 유대를 강화시켜주는등 결속력을 가지게 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슬 것이다.
이렇듯 이안사에겐 장인 어른의 보살핌이 컷으리란 문제는 아닌가 추정해 본다. 이성계나 이방원은 인정이 여유로운듯 보이지만 정적엔 냉혹한 현실속에 그들은 언제나 논공행상을 잊지 않는 듯하다. 그래서 이성계는 특히 목조의 장인 어른 이숙에게 예우를 갖추는것인 듯하다.
위에 언급했듯이 세종은 용비어천가에서 육룡중 첫번째 시조인 목조가 경흥에서 왕업을 열었다고 노래한 대목에서 경흥에서 어떠한 일이 있기전에 그는 경흥에서 세력을 부풀린 것이 아니라 삼척과 평창에 분반되어있던 자기 세력을 경흥에서 부합시키고 이상을 향해 한걸음 나아간 것이다.
이 부분에 장인어른의 힘이 지원된듯한 이야기로 역사기록에 서술된 것은 없지만 그래도 이러한 추론이 타당성을 지닐듯한 이야기이다.
어느 지관의 "터"란 책에서 사람들에게 이성계의 발복을 삼척 준경묘(아안사의 부친 이양무의 묘)에서 찾고 있으나 그것은 우스개 이야기이고, 위에서 보듯 이안사는 이미 전주에서도 상당한 사병의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전주에서 갈등을 빚던 산성 별감이 강원도 안찰사로 임명되어 오자 다시 의주(宜州, 現 원산)로 이주하였다. 조정에서 이안사를 의주 병마사로 삼아 원의 침략을 막게 했는데, 1254년 원에 항복하였고, 오동(斡東, 알동)으로 이주하였으며, 다루가치(達魯花赤)로 임명되었다. 이렇듯 이안사는 무인으로 자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 국구사우의 정확한 위치에 대한 지표조사를 실시하여 복원하는 문제는?
평창군 관계기관에서는 극구사우와 판관대의 비 지정 문화재의 문화재 지정에 노력중인듯 하다. 그런데, 이 모두 분화재 지정 대상체가 빈곤한듯 하지만 그러면 사우를 짓고 제례행사를 실시하며 이로서 문화재신청을 할 수 있든가 지금으로선 정조때 강원도관찰사 李度默이 쓴 平昌郡國舅祠宇記 탁본만 서울대 규장각 지리지에 전하여진다.
이 기록만 가지고 문화재 인가는 대상체가 부족하기에, 지금으로서 할 수 있는 일는 세종실록에 전하여지는 목조(穆祖)비 효공왕후(孝恭王后)의 어머니 정씨의 무덤이 군(郡) 서산(西山) 서쪽 4리쯤에 있다.”라고 세종실록지리지에 명기되어 있기에 이 묘를 찾는 방법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이라도 찾아야 하는 당위성도 가지고 있다.
서산 4리의 깃점은 관아(官衙)에서 부터이며 세종때는 1리가 374.31m로 서쪽 1,500m정도에 위치함을 알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따져보면 평창 지리에서 서쪽 1,500m라면 하평밖에는 없고, 후일 이곳으로 이장을 하여 정표를 세웠다하면 그것은 어떠한 표식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반적으로 비석이나 석조물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 서쪽 4리 주변엔 그러한 묘도 없고 표석도 없다. 분명히 존제해야 하는데 어디로 갔슬까?? 그럼 서산 4리는어디일까?? 그러나 서산 4리는 하평밖에는 없다. 그리고 이장을 하였다는 기록에 아마도 부군인 노산부원군 이숙의 묘에 이장하여 합장을 했슬 것인지 하여간 이숙의 부인 돌산 정씨의 묘는 이장하여 그곳에 새로운 정표도 만들었다는 기록에...
새로히 이장을 하였다면 그곳은 아마도 명당이라야 당시사회의 풍습에 맞는 경우이기에 풍수적으로 길지의 터를 추정해 본다. 그러나 그 길지는 지금으로서는 언제인지 홍수로 인한 토사가 덮여있다. 그런데 이곳에 3기의 묘가 있었으며 조그마한 비석이 옆으로 쓸어져 있었다는 증언도 밝혔다.
현재로서는 이곳이 산사태로 유실되어 있어 그 비석도 묻혀서 확인은 곤란하지만 그 비석을 찾아내 확인해 보려는 시도를 하고있는 분들도 계신다.
이 비석의 확인작업엔 여러문제가 봉착되어 조심스럽게 하여야 하고 아마 내년봄쯤엔 비석을 찾아 확인해 보는 방안을 연구중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오면- 군내면, 동면, 미탄면, 남면, 북면.
*이조시대의 거리의시대별 1리의 길이는 다릅니다.
현대 1리가 392.727미터입니다. 10리가 3927.27미터 3.927km로 약 4km라고 하는것이죠.
세종 때는 1리가 374,31미터, 대동여지도가 만들어진 조선 후기엔 1리가 540미터,
대한제국 때는 1리가 420미터였다고 한다. 조선 이전의 시대의 단위는 달랐던것입니다
<출처-서울대 규장각 지리지>
------------------------------------------------------------
- 국구사우의 정확한 위치에 대하여 지표조사엔,,,
국구사우에 대하여 평창의 재야 사학자님들의 여러 의견이 있지만. 본인은 그 위치에 대한 새로운 가설을 주창한다.
오면지도에 평창의 진산 노산 아래에 관아가 있으며 그 옆에 세수로 걷어들인 군량미의 창고가 있고 윗쪽에 국구사우가 표시되어 있다. 이곳은 어디일까??
본인은 중학시절 어느 선배님이 중고등학교에 관한 또르륵 똑딱이란 옛날이야기로 자정이 넘으면 화장실에서 복도 회랑을 타고 또르륵 똑딱 소리를 내며 보이지도 않는 물체가 2층 방송실까지 한 바퀴돌고 간다는 귀신이야기끝에 사실은 평창중고 마당은 봄철 습기가 있는 운동장이 마르며 먼저 마른땅으로 어떤 시설물이 있었다는 구분을 드러낸다 한다.
본인도 얼추 그러한 이야기에 느낌을 받곤 하였는데 운동장 단상앞에 바닥이 먼저 마르는것으로 일자선과 블록들, 그리곤 테니스 벽보드 옆의 고목나무 앞에 조그마한 시설물의 바닥이 구분된다 하는데.. 이 두개의 운동장 땅 바닥의 이상한 그림자 형체... 이것이 일제 강점기가 아니라 조선시대의 건물이 있었던듯 하다.
오면지도에 순서대로 운동장 로얄박스 앞의 큰 덩어리의 그림자 물체는 조선시대 창고 群의 바닥이고 테니스 벽 보드 옆의 고목나무 앞에도 땅 그림자가 먼저 지는데 이곳이 국구사우의 자리 아닌가 추정 합니다.
고목나무란 하나의 큰 정표이듯 평창엔 물의 기준점의 천변리에 하천의 고목나무와 시루목의 병목의 서낭당에 고목나무와 중학교 운동장엔 영문을 모르는 고목나무가 있는데 이 고목나무는 아마 사당을 표시했던듯 합니다.
그리고 현 극락사 자리엔 신당이 있었던듯 합니다.
이런 추정을 해 봅니다.
-------------------------------------- 終---------------------
ⓒ 2019, All Rights Reserved.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평창의 국구사우' 카테고리의 다른 글
(3) 평창에만 존재하는 국구사우를 어떻게 볼 것인가?? (0) | 2018.09.27 |
---|---|
3] 목조와 목조비의 금구몰니(金龜沒泥)란 명당자리는..(국구사우 부록 3) (0) | 2017.11.04 |
[평창의 임진왜란사에서 노산편] 국구사우 별지 2 (0) | 2017.11.02 |
펑창의 자연취락적 마을 형태(國舅祠宇터에 배경적 고찰. 별지 1) (0) | 2017.11.01 |
[국구사우(國舅祠宇)터에 배경적 고찰의 소고] (0) | 2017.10.31 |
국구사우에서 의문은?? (0) | 2017.10.05 |
평창의 국구사우 터를 발굴하였답니다 (국구사우 2) (0) | 2017.09.09 |
후세의 글 호기심 (국구사우 최초발언) (0) | 2017.06.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