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의 국구사우 터를 발굴하였답니다 (국구사우 2)
후세백작 2017.09.08. 20:52
국구사우/정원대 세월을 거슬러 조선왕 정조 임금을 알현했다 정조12(무신1788) 8월16일(을사) 관아 옆 원우( 院宇)을 세워 사판祠版을 봉안 토록 하고 호장戶長에게 제사를 주관토록 문무백관에게 명하여 평창군의 이상을 하늘에 告하였거늘 무심한 하늘아래 원우지 院宇址 간곳 없고 목조의 국구國舅 이숙과 돌산군 부인 정씨 묘가 관아 서쪽 4리에서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하늘도 부끄럽도다 국구사우國舅 祠宇址: 1910년대 평창군 도면,조선시대(일제강점기)토지조사부등을 면밀히 분석 중리 343번지 토지조사부에는社寺地로 기록되어 있음 참고사항 : 현 평창중학교 옛 테니스장(고목나무)에서 도로변에 社寺地로 되어 있는 것을 알수 있으며 후세백작님이 중학시절 기억과 일치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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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 저의 글 평창의 국구사우란 글에서 아래와 같이 기록한 바 있습니다.
오면지도에 순서대로 운동장 로얄박스 앞의 큰 덩어리의 그림자 물체는 조선시대 창고 群의 바닥이고 테니스 벽 보드 옆의 고목나무 앞에도 땅 그림자가 먼저 지는데 이곳이 극구사우의 자리 아닌가 추정 합니다.
http://blog.daum.net/kkks1/1298
최근 평창의 향토사 정립에 평창문화원은 이 극구사우의 비 지정 문화재에 문화재등록을 위해 극구사우터의 위치파악을 확인하려는 연구가 다양하게 전개되었던 듯 하다.
그런데 2000년도 서울의 구청등이 지적도 전산화 작업에 이젠 전국 어느곳이든 지적도면이 과거에서부터 전산화 기록이 되어있어 너브산장님은 평창의 과거 지적도면을 살펴보다 본인이 국구사우터라 주장하던 평창중학교 테니스 백보드장 위치에서 社寺地란 지명을 발견하고 그냥 지나칠 수도 있겠지만 예전 저의 글에서 국구사우터란 추정과 일치됨을 간파하시고 극구사우터란 점을 발견한듯 하다.
(이 도면은 일제 강점시인 1910~20년 사이에 우리나라 전 국토를 최초로 지적도에 의한 측량을 하고 새로히 번지수를 임의 명기한 것이다, 여기에 본인이 국구사우 터라고 주장하는 곳은 중리 343번지이고 일본어로 社寺地라고 명기되어 있다한다 )
이로서 이제 국구사우의 문화재 등록에 요건의 가장 중요한 계기는 마련된듯 싶다.
여기에 정조의 명에 의하여 강원도 관찰사 李度默이 1788年(正祖 12)에 써서 懸板에 새겨놓은 것을 拓本한 平昌郡國舅祠宇記帖이 남아 있어 (규장각에 원본 소장) 사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또한 이를 기준으로 앞으로 국구사의 례를 재현한다면 이는 왕족의 례로서 "국조오례의" 전교편의 례를 따라야 할 듯 하며, 또한 중요한 것은 사당의 건물 모양이다.
건축양식에 우선 외모적으로 디자인의 가장 큰 차이는 지붕의 형식 선택으로 팔작지붕등 여러 모양이 있으나 아마도 물증이 없는한 종묘의 맞배지붕 형식이 神位를 모시는 건물의 깃품으로 맞는듯 하다.
일제 강점기인 1920-30 년대에 평창은 제빙공사와 강릉과 제천, 정선을 잇는 3거리에 시내에는 이 삼거리에 맞춰 "田"자 형의 신작로를 만들고 이와 똑같이 병행하여 관계수리시설까지도... 당시로선 펌프의 수도보다 공동우물 취수에 빨래등과 농업 관계수로 호율적인 선택인듯 합니다.
여기에 삼거리에서 田자 도로기준은 당시의 관아를 기준으로 관아 앞뜨뜰 끝으로 중리로 가는 도로를 뚫은듯 합니다. 그러기에 오면지도의 관아의 위치를 위 지적도에서 정확하게 유추해 볼 수 있슬것입니다.
그리고, 江原道觀察使인 李度默이 1788年(正祖 12)에 써서 懸板에 새겨놓은 것을 平昌郡國舅祠宇記를 拓本한 기록에도 국구사우란 단어는 않나온다.
혹시 국구란 단어는 이후에 생성되었기에 당시로선 社寺地란 표기를 했었을 수도, 그러기에 社寺地란 지명을 국구사우지(國舅 祠宇址)로 이해함은 타당한 듯 합니다.
정치, 경제등의 단어는 조선시대엔 없었으며 일제 강점기시대 이후에 사용된 일본식, 일본이 만든 단어들처럼 국구(왕의 장인)도 그런 유형의 단어가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일전 글에서는 내용이외라 지적은 않했지만 평창이 아닌 창평이라고 강원도 관찰사의 기록이라면 이것 또한 엣 지명에 관찰대상인듯 합니다.
"列聖朝에서 太祖의 뜻을 받들어서 매해 元朝에는 昌平郡戶長을 詣闕케 하여 술을 내려주게 하였다"
江原道觀察使인 李度默은 平昌郡國舅祠宇記에서 昌平郡이라 적고있다.
평창의 지명을 그 당시(1788)년 당시 차 상급 행정권자인 강원도백이 창평이로고 서술한 부분도 유념해 보아야 할 사항인듯 합니다.
그리고 지번이 중리 343번지이라고 숫자가 명기되었다면 사우지는 관아 한 쪽에 자리 잡은듯 하지만 이 부분도이곳(343번지)에서 약 70m가량 떨어진 고목나무 부분인지에 정확도를 기하기는 어려울듯 합니다.
옛 지도에 사우지란 표기가 343번지에 구체적, 정확적 물증이 없는한 이를 수기식 지적도에 옮기는 과정과 다시 캐드작업의 전산화로 이관하는데 오차도 있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옛날에 지형의 구분은 산과 물에 의한 작용으로 학교 뒷산의 샘물이 구릉지형때문에 343번지 앞으로 흐를 수도 있었겠지만, 이러한 작용이 지역 부분의 경계를 만들 수도 있지만 한 동리에 고목나무나 돌 누적단은 민속신앙의 서낭당을 표시하지만 영적인 神의 세계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서낭당은 여만리란 글에서 이야기했듯 당집이 아니라 고목나무와 돌 누적단 두 가지로 고목나무엔 일본소나무등 두 가지 나무만 제외하면 되고 일반적으로 비슬나무와 당산나무.소나무등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민속신앙으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며 특히 옛날엔 전염병등이 가장 무서웠기에 이를 기원하는 정표처럼 중리 평지가운데 수백 년된 고목나무는(지금은 고사되었지만) 필히 어떠한 정표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위 사지에 신중을 기해봅니다.
그리고 실록에 기재되었듯 돌산 정씨도 이장하였다는데 이 해석은 이성계의 명으로 국구사우를 지정함에 평창이씨 이숙 공의 묘소에 부인 돌산 정씨도 이장하여 합장한 듯한 이야기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필히 이곳엔 왕족의 예에 따라서라도 비석 하나는 있었으리라 생각되며 이 부분에 지난 이야기를 다시 노력해보아야 할 듯 합니다.
감사합니다.
위치에 다소 이견보다는 국구사우 터의 가능성을 가지는 문서가 확인된 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 장소에 대하여 학계나 특정부서의 심의가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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