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9
차로에 몇개 안되는 교량중 하나인듯 합니다.
조선시대 평창을 들어 오자면 30년대를 기준으로 건설된 신작로가 없던 시대에 평창을 들어오자면 천동과 하평
도로는 아마도 칠족령처럼 사람이 다닐 수 없었고 마지에서 응암. 응암에서 천동,천동에서 유동, 유동에서 종부,
종부에서 평창읍내로 들어 올 수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일전 이러한 저의 추정치의 글을 확인시켜주는 다리 건설 연표,,,평창의 근대화의 중요한 깃점의 연표인듯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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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6.09. 06:52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아흐레
낙숫물 소리가 귓전을 울렸으면 합니다만...
지금도 기억속에 어린 시절에는...
하느님도 야속하게시리 꼭 일요일이면 비가 왔으니..
남산정아래 돌맹이 낚시를 하려고 했는데...
비야 비야 오지마라
낼 모레 떡 사줄께.
없어 못먹는떡, 남 사줄리야 없지만,,,
멧돼지 울음소리에도..너브산장님 농부의 들판에도,,
하늘은 무심한지고...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아흐레 낙숫물 소리가
귓전을 울렸으면 ,,,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아흐레 ,,,
낙숫물 소리가 귓전을 뚫고 흘러갔으면,,,, 합네다만..
너브산장17.06.09. 19:28
17.05.25. 09:46
놀다갈까요??
성남의 어느 과수원에 옛날에 60만원의 거금을 주고 명견을 사다 두었더니 어느날 만주개장사가 와서 개가
좀 크니 값두 잘 받을텐데 파세요 하더랍니다.
아니 식용개도 아니거 그 돈으론 텍도 없는데..그래서 거절 하였답니다.
그리고 한 사흘뒤 그 멀정한 개가 죽어 할 수없이 과수원 귀퉁이에 파 묻었다나요...
그런데 이틀뒤 그 만주개장사가 찾아와서 하는 말,,수표한장 내밀면서 그 개 파가도 되요 하길래..
아니 저기 묻은것까지 어떻게 안담??
에유 이제 원금 60만원은 고사하고 10만원 한장 건지는게 났다싶더라나..
그런데 만주갸장사 의심은 가지만 물증이 물증이 없어서,,,
소련의 수용소 군도인가 "이반의 하루"인가 이젠 어렴풋 하지만, 그들의 명절날에 국에 고기 한절음 나오면
먹지않고 그걸 말려서 할미꽃따다가 않에 넣어 꿰메고는 이를 수용소 철망을 지키는 개에게 던져주고
감시하던 개가 죽으면 철망을 넘어 탈영을 해서...
"길은 멀어도: 라는 실화에 여덟명이 시베리아 형무소를 탈출하여 천산산백을 넘어 걸으며 4명이 살아서
인도까지 걸어가는 책에 탈출장면에 할미꽃이 나옵니다.
항상 개는 만주개장사가 임자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17.04.30. 22:27
자연의 생태게에서도 독재자인 그녀는 오직 종마일뿐,,,
자유로운 바깥세계도 못느끼는 3,2,1 철장속의 독재자일뿐,,
차라리 본인의 의사가 없는 민중 일벌들은 허리뿌러지는 노예지만,,
그래도 삶은 느낄것이란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3년에 단 한편 석줄의 詩를 쓴다하여도...
이름있는 문인들은 그 바탕이 경험측과 진솔한 삶의 여운이란 점 입니다.
물론 돈 많은 나라는 헤밍웨이처럼 좋아하는 바다에서,,, 긋도 모자라 쿠바의 호텔에서,,그렇게 노인과 바다는
만들어진 경험률에 의한 명작이듯이..
파블로 네루다는 바닷가 낙원같은 곳에 집을 짓고 살면서,,
물론 석양에 지는 바다의 서정도 좋치만 비바람치는 을씨년 스런 바다를 마주하는 고독도,,,
이렇게 삶이란 고뇌가 묻어나는 경험칙의 단 석줄의 詩가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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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님의 글 호기심 (국구사우 최초발언)
운동장을 지나 테니스 백보드를 지나 사천강으로 흘렀겠지요.
1930년대에 아마도 신작로라는 도로가 생기기 전에 상리서부터 평창시내 제방이 먼저 선행되어야 ,,,상리로
이어지는 신작로라는 도로와 그를 따르는 도랑이 후속으로 생겼기에 그 우선 순위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제방과 신작로가 없슬때는 노산의 샘물은 그대로 흐르면서 범람원을 만들고 운동장 테니스 백보드
옆으로 도랑을 만들어 시내쪽을 형성하였다.
백보드 옆의 고목나무는 성황당이 있었기 보다는 극구사우의 사당이 있었슬듯하다. 일전에 극구사우편에서
그 사이는 아마 1~200m일텐데 이 사이라면 어디쯤일까??
지금은 논으로 변했슬 수도 있겠는데,,, 그런 땅이 논이 되었슬까,,,집터가 되었슬까??
그리고 일전 저의 글에 평창중학고 운동장은 봄철에 습기가 마르는 오후쯤엔 그 바닥에 물체 그림자가 먼저
마르는 곳이 두곳인데, 그곳 하나가 테니스장 백 보드 앞쯤이며 그 이야기에서 길게 설명은 생략하였는데...
당산나무나 비슬나무무의 고목나무가 자라는 곳은 일반 주택도,, 들판도 아니며 사자의 神의 땅의 영역이라는
표식입니다.
그래서 테니스장 옆의 고목나무는 수백년 자라 제 수명을 다하는듯한 인상 입니다.
그리고 또한 어느 글중엔 옛날에 관헌은 구 면사무소 자리로 군청도 그곳에 있다가 옮겨가고 면 사무소가 자리
잡았는듯 한데...
어느 역사 글중에 관헌에서 북동쪽방향으로 1리에 성황당이 있다 하였는데 성황단은 어디쯤에 무관하게 1리,
즉 400m가 떨어졌다면 (아마 포교당 위치쯤으로)
오면지도엔 그곳정도에 불상사등에 아우르는 칠성각같은 곳이라면,,
현 면사무소가 옛날엔 관헌이란 점과 관리상으로도 그에서 멀지 않은곳에 극구사우 터가 자라하였슬 것이란
점입니다.
우리 역사에 지금은 상당히 도외시하는 부분이 서낭당의 토지 수호신입니다. 아마 새마을 운동에 뒷차로 밀려
시각조차 없지만, 그러면서도 지금도 돌길을 갈땐 돌 세개 탑을 쌓고, 뒷마당 장독대 위에 정반수를 떠 놓고
기도하는것 이것이 모두 전통적인 주신관계이란 점 입니다.
이렇듯 극구사우 사당에도 서낭당의 누적단이나 고목나무의 요소처럼 고목나무가 있어서도 극구사우 사당의
조건에 불가하지 안으리란 점과 또한 그러면 평창중학교의 고목나무는 혼자 자생된것도 아니란 점에 기인하는
생각입니다.
역사란 정확한 물증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없는 마당에서 여러 의미를 한번 되새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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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4.18. 21:46
하일은 평창 독립운동은 하일에서,,,평창초교 옛 본관 입구 첫번째 액자사진에 이승노 선생,,,(나의 친구 종우
할아버님)이 4월 4일 독립운동 거사를 앞두고 발각되었으며 이 분들은 하일지역 분들이며 하일에서 천주교
박해라면,,,
신유사옥으로 정약용은 귀양을 가며 정약용의 자형 이승훈과 부인(정약용의 누이)는 천주교 신도회장인 바로
위의 형 정약종과 함께 옥고를 치르며 순교하게 됩니다.
이에 이승훈은 서울生이지만 평창이씨라 한동안 평창이씨들은 기를 못폈다 하는데 아마도 이후에 평창에
천주교 신자들이 포교되고 평창주민들은 천주교 세력에 탄압하는 과정의 이야기인듯 합니다.
내일 평창 천주교 신부님 만나뵙고 교우촌 기록을 자세히 담아 보겠습니다
1907년엔 고종황제의 퇴위에 평창에서도 의병이 봉기되어 하일리에서 집결하였고 이때 평창에선 남산에서
도망가던 읍민들을 일본 순사들이 조총으로 4-50명 사살하였습니다.
평창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역사의 하나는 송기산 정상부 바로 아래에 두개의 수직동굴이 있는데
언제인지는 잊었는데 일본순사들이 평창읍내 장정 250여명을 끌고가 아래 동굴에 몰아넣고 흙으로 덮어
생매장 하였다 합니다.
아마도 임란때는 평창읍내 가구수는 100호를 넘지못하였슬테고,,,
어느 역사책인지 기억도 잊었는데, 그곳에 기록엔 읍내 500여호중에 남자만 250여명 끌고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장바우는 장을 꺼내려 갔다는 구전 이야기만 남았슬뿐,,,누구도 장바우에 굴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 역사는 복원하여 평창의 선인들의 원혼을 달려주는 진혼제도 드려야 할 것입니다.
이후 1919년엔 3,1운동에 평창에서도 천도교에서 독립선언서를 배부받아 4월 4ㅡ5일 대화 장과 평창장에서
만세를 부르며 독립운동을 할 것을 계획하였는데 이때 이승노 옹은 하일리 이장쯤으로 거사의 핵심인물
이었습니다.
아마 10여년전쯤 독립유공자 대열에 오른듯 합니다.
이 부분의 평창의 3ㅡ1운동의 의병봉기역사도 정립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천주교의 이승훈은 우리나라 첫 순교자이면서 4대에 걸처 순교합니다.
신부님은 혹 아마도 평창 이씨들은 이승훈의 최초의 순교란 가문의 업적에 후손들과 신부님은 평창천주교
마당 한켠이라도 이승훈의 순교비를 세울 생각은 없으신지요??
감사합니다.
17.01.10. 02:18
그리고 고자대감의 묘는 입탄고개 대학교짓다 망가진 옆산, 조동리로 들어가는 입구쯤이군요.
말 그대로 고자의 환관으로 품계가 종 5품까지 올라가는 고자대감,
후손들이 없어 역사기록도 어두운듯 합니다.
어느 책에선가 읽은 글에는 숙종따 모자끝에 오색 깃털을 달고 피리들 들고
강원도롤 다녀갔다는기록은 아마 내시를 뽑기위해서인듯 합니다.
산골 머슴아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듯 합니다.
약천명의 내시가 필요한데....최대 덤핑시에는 6천명정도가 거세하였는데...그것도 경쟁율은 6;1
요즘만이 아닌듣합니다,
학예사와 같이 가서 재답사 하려고 합니다, 요즈음 이효석 원적지 (하진부 196번지) 답사하고 많은자료를
담고 왔습니다
그래서 저의 가산 선생님의 글에서는 효석이 서른 여섯에 평양에서 죽자 아버지 이시후씨는
그의 시신을 이목정 골짜기 옆에 묻엇습니다.
그것은 그의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의도에서 진부에 묘를 쓴 것입니다.
그런데 봉평사람들은 창동이 출생지라고 하는데... 그 출처 기록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요??
만약 봉평이 가산선생의 출생지를 왜곡시켰다면 가산선생은 봉평사람들이 얼마나 원망스러울까??
이런것은 생각도 안해봅니까
또한 저의 글엔 봉평은 아버지 이시후시가 진부면에 근무시 효석의 어머니는 타계하시고 그러지 보따릴싸고
서울로 이사하여 청진동에서 교편을 잡다가 2년만에 다시 진부면장으로 부임한다.
이때 둔내여자를 얻어 후실부인으로 맞으면서 진부도 아닌 둔내와의 중간지점인 봉평에 집을 장만하고 산다.
그래서 효석은 봉평에서 6,7세때 2년간 의붓어머니와 생활하다 평창 공립 보통학교에 입학하고 1봉평에서의
2년간 추억보다는 평창에서의 6년간 어린시절 추억이 그의 정서로 남게 되는 것이다.
그는 평창초교의 저의 대 선배님으로 평창초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의로 가산 선생의 조각을 세웠다
그것은 물론 저의 글을 본 어느 선배님의 발의에 의해서였다.
여기서 다시 평창초교에 제안의 글을 써야겠습니다.
지금 봉평의 메밀꽃 필 무렵은 옛날 1976년도쯤에 평창군 주관으로 효석의 밤의 축제를 열고 백일장과 효석
문학의 밤을 개최하다가 평창중고 동문회장인 박동락 선배편에 봉평으로 실려간 것입니다.
설사 그렇더라도 우리 후배들은 평창초교에서 자라나는 후배들의 심신을 잔련하는 과정에 대 선배님의 자치를
이어받기 위하여 효석 백일장과 효석 문학의 날을 지정하여 문예를 가꾸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일전 글에 마지막으로 부자 3대 못간다하지만 가상 이효석 선배님은 우리나라 문학에 문예사조의 한 장르를
하나 개척하신 문인으로 대한민국이 존재하는한 지성으로 영원히 기록되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천년 신라를 도의적 정치가 왕건에게 넘겨준 비운의 왕이죠.
경순왕의 묘는 일반인들은 갈수없는 G,O,P내에 고랑포 사미천옆에 있으며
일년에 한번 시제만 지내러 들어갈 수 있는데,,,호명리 후손들이 다녀오는것은 아닌지...
감사합니다.
다녀 온다고 합니다
그 내력을 잘 알고있는 것입니다.
경순왕 김씨 후손들은 9개김씨로 나뉘었으며 우리나라 씨족중 김씨는 천만정도로 최대 성씨를 이룹니다.
선합니다. 좋은 기록 고맙습니다. ^.^*
이는 문명의 시작에 인간은 철기문화에 철을 녹이는 제련법을 발명하였으나 <바그다드의 힛타이트족이 발명한것임>
나무의 화력으론 주철 생산에 약 200도 온도가 모자라서 구리에 주석 합금의 청동기 시대가 처음으로 시작됩니다.
청동가는 나무의 화력에 잘 녹으나 제련술이 까다로워 많이 번성하진 못했습니다.
즉, 문명의 판도를 변혁시키진 못했다는 이야기 입니다.
비파형 청동검은 고조선 시대의 문물영역으로 이 청동검 녹여 붙던 거푸집이 발견이 않되어서
아직은 국산인지,,, 국내기술인지,,,그 구분이 모호한듯 합니다.
당시 평창의 권위를 이야기 하는듯 합니다.
(비파형 청동검은 전국에 40여개정도밖에)
지금도 면면히 흐르는 고조선 유물의 문화엔 막새무늬 기와의 도깨비상이나 축구의 붉은 악마 상징그림등은
고조선의 치우천자상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아직도 우리 주변엔 고조선 문화가 남아잇고 발전된 것도 몇점 있습니다.
그리고 일전의 서산 4리나 이 글에서 서남쪽 3리에서,,,
그 기준점은 아마도 현 포교당쯤인것 같습니다만...
고고학을 학점받기위해 좀 배운적이 있습니다.
평창의 기상,,,
조은 역사 詩,,, 감사드립니다.
후세백작 16.09.15. 03:39
어느 여성분이 9일 이 발표회에 가서 본 이야기중 동검을 반 뿌뎌놓은 점에 대한 학예사의 소견의 글,,,
참으로 중요해서 다시보았는데 본인이 지우신듯 아쉽군요.
석실속의 유골은 꼴릴 수는 있읍니다만 압력으로 반 갈라진다는 것은 이해가 어렵군요.
마치 흙이 건조해 말라서 갈라지는듯한 현상을 말함이나 구리에 주석합금의 청동기가 일자로 갈라져
절반이 뿌러지는 물리량은 없습니다.
그것을 왜 부뎌 놓았는가 하는 논리적 추론을 쓰겠습니다.
옛 선인들의 기지가 였보이는듯 합니다.
그리고 오대천-조양강- 진탄나루로 흐르는 연화진과 흥정계곡에서 평창강(사천강)- 주천강으로 흐르는 용
연진은 이곳 평창을 양 변으로 휘어감아 내려가고 있습니다.
물론 동강, 서강 할때에 그 기준은 평창에서 바라볼때이며,
그래서 이는 평창인들이 이름붙인 것이라야 하지만,,,
그러기에. 山, 水 음양의 조화를 이루는 풍요로운 平昌은 서정과 풍광에 관한한 압권이죠.
어려운 詩, 잘 감상하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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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어렷을적에 친척아주마 이웃집 아줌마들과 함꼐 큰산나물 뜯으로 많이 다녓습니다.
나물을 뜻다가 아줌마들이 아라리를 몇마디 하는데 ...저 건너 산에서 아라리로 화답을 해와요.
그렇면 신이나서 주거니 받거니 한참을 하군해요.
저도 나이 먹으면서 우리 산촌소리에 관심이 들어 더러 살펴보군합니다.
감사합니다.
태백 영서의 아리랑의 보고는 미탄 한치뒷산 청옥산입니다.이 아라리(아리랑)은 메나리조 산의 아라리라
표현들 합니다.
메나리조는 메나토리권역으로 강릉의 오곡떼기. 삼척의 메나리등을 모두 말함이며 이 유형의 분류로는
밀양아리랑의 정자소리조, 진도 아리랑의 육자베기조등으로 나누어 집니다.
민요는 가창자가 듣는 청자인 특색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민용위 기능성 분류는 (미국의 로맥스부자의 뉴올리안스의 재즈를 발굴한 민요학자)의 산의 민요와
들의 민요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산의 아라리는 나물 뜯거나 김매기, 나무하기등 산간지역의 민초들은 혼자서 하는 작업에 무료함을 달래려고,
부르는 노래로 영서지방에서 불리우는 아라리로 대게의 특징은 빠른 템포와 특히 평창아라리는 후렴이 없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작금의 정선 아라리는 이러한 기능성을 버리고 개화의 물결을 타고 후렴이 다시 붙여지는 상태로 템포도
후렴을 부르기 위해 창자에 숨을 깊이 한번 쉬는 작업등으로 가락의 템포는 느려지는 변형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러한 변형은 독백조의 산의 아라리의 전통적 특징을 배제하고 문명, 시대문화와 융화되는 짬뽕의 결과를
초래하지만 평창아라리는 원음 그대로 유지, 발전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영서 아란리는 평창이나 정선이라는 군단위로 구분될 수 있는 것입니까??
정선아라리는 이렇게 영서 산간의 전통과 기능성을 저버리고 시류에 따른 세태와 융합하는 짬뽕이고 이론이 억지인
튀기 음악이란 점 입니다.
본래는 평창이나 정선이라는 군 단위의 아리랑이 아니지만 작금의 정선아라리 사무총장이라는 김연갑은 군 단위
아리랑을 주장하고 있지요.
아리랑에 가장 먼저 채집된 영서 산간의 아리리는 진부면지에서 발췌되는 1933년 김소운의 " 왕자 축자로 다 나아
간다"라는 아라리로 다음글로 그 뜻이 무엇인가 올려 드리겠습니다
정선 아라리의 이론자를 자처하는 김연갑은 평택생으로 평창지역의 과거의 역사와 정서를 모르기에 이러한 해석은
못하고 그저 정선아라리편에서 채가려고 눈만 부릎뜨는듯 하게 보입니다.
이러한 왕자축자로 다 나아간다란 아라리 가사의 해석은 이 지역 역사와 정서를 지닌 지역 향토사학자님들의
몫이라고도 생각합니다.
1970년대까지 청옥산 아래의 회동리 화전민들은 선생님의 글에서 보듯 아리랑을 많이 불렸고 이것이 영서 아라리의
주요한 기폭제가 되었는데도 정선넘들은 몇해전 비행기재에 정선애서 미ㅏ탄으로 아리랑이 전래되었다는 시비를
세우고,,, 이것은 먼 후일 다시 인용하면 정선이 아라리 시발지라고 인정이 될수있는 지점입니다만,,,
정선아라리라는 이렇게 김일성식 억지주장을 펴고 있는 것입니다.그런데 평창은 아라리의 제 이론도 없고 당해야만
하기에 저는 이를 간과할 수 없는 글을 남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고 받던 아라리 사례의 글에 감사드립니다.
이러한 객체적 사실들의 증언이 모여 평창아라리의 스토리는 완성될수있기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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