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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의 국구사우

[국구사우(國舅祠宇)터에 배경적 고찰의 소고]

[국구사우(國舅祠宇)터에 배경적 고찰의 소고]

 高柱浩 2017.10.22 10:43

 이 글은 저번주 쓰다가 본의가 아니게 블로그의 게시글을 내리는등 소란속에 그래도 본인이 국구사우의 문제를 알게되어 그 터는 중학교 지금은 폐사된 고목나무 아래란 생각을 가지게 된 서술적 기록과 본인이 지명한 위치에 확신을 가지며 이 글을 게시합니다.

본인은 국구사우(國舅祠宇)터의 위치를 평창중학교 고목나무 아래라고 지목하게된 배경적 이해

 1] 국구사우에 대하여 본인이 관심을 가지게 된 연유

평창에만 존재하는 유일한 국구사우가 조선 500년간 제례를 지내다 일제 강점기 이후에는 끊겼다며 이 문화의 전통을 살리려고 평창문화원에서는 학자님들도 초빙하여 연구도 하는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정작 국구사우터 발견하지 못한다는 아쉬움의 글을 접하며. 어디엔가 있어야 할 문제인데 그곳은 어디일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 논문에서 학자들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구사우터를 찾지 못한다는 발표에 이러한 지방적 특수성의 역사는 학자들의 개괄적 연구에 힘입어 이하 부수적인 지방의 역사, 예를 든다면 과거에 어떤 내용이 지금은 잊혀지고 알 수없는 사료의 채집과 발굴이 지방 향토 사학자들의 몫이 아닌가 하는 판단에 향토사학자님들의 이러한 연구논문에 의하여 국지적인 역사 사료를 들추어보면서 향토사학자란 책상머리가 아닌 증인들과 탐문조사들 발로뛰는 연구논문에 맞추어 보는 현장적 보완적 관계를 갖어야 함이란 생각에 본인은 향토사학자는 아니지만 여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일전 어떤 통화에서도 어느 분은 학자들은 데이타만 들고온다는 비유적인 말에 그럼 당신은 책상머리에 앉아 무얼하고 있습니까 하고 되받아 묻고도 싶었는데, 향토사학이란 지방적, 국지적 특수성의 모든 데이타를 탐문조사하는 현장조사 정신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국구사우 문제도 전문가들의 동 레포트에 의하여 충분히 제시되었기에 이제는 이 논지에 맞아 성립되는 것을 찾는것이 현장 향토사학자들의 몫으로 지방에서 역사가라는 분들이 이런 정신이 없다고 본다.

물론 참고로 여기앤 도시락을 싸들고 평창의 많은 산성 확인,답사를 하시던 엄기종님, 또한 방대한 양의 탐문조사의 평창의 역사적 사료를 가지고 계신 정원대님은 현장적 역사를 채집 발굴하는 진정한 향토 사학자라 본인은 이야기 한다..

구국사우 터를 논하기 전에 본인이 국구사우에 관심을 갖게 된것은 어느 기록에 서산 4리에 묘가 있다길래 그곳은 어디일까 하는 추론에하평 미륵땅의 묘는 별로 없는 산세인데 의아했다. 하지만 이 기록엔 다시 함장을 하고란 설명도 있는데 평창의 풍습은 합장은 단일분이 아닌 쌍분형식이 주종이고 또한 태조의 명이었다면 최소한 형식을 갖춘 비석도 세웠슬텐데 산속에 있는 화강암의 비(오석은 익산석이라 당시로선 화강암재 비석이 아닐까 추정) 하나 못찾을까 하는 글을 까페에 게시한바 정원대님이 GPS로 검색과 동네에 85세 노인의 증언에의해 추정되는 묘가 있다 하여 지난해 추석쯤 그 장소를 동행하게 되었다.

 이때 정원대의 이야기로는 국구원우 터는 현 극락사 자리이고 그 뒷담 한 구석엔 국구사우의 건축부재들이 보관되어 있다 한다. 그 정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면 동 세미나에서 왜 거론되지 않았슬까 하는 의문에 그곳은 아니란 생각이며 그러면 과연 어디일까??

규장각 보관의 정조때 원춘도 관찰사및 방어 절도사인 이도묵의 국구사우에 대한 기록까지 게제하며 그 위치는 오면지도에 평지에 국구사우란 것을 본 기억과 그 논문 어디엔가 정조의 명에 원우를 司( 관아) 옆에 세우라는 지시에 또한 평창역사 어느 기록에 관아로부터 동북방 1리에 성황단이 있다는 기록을 보며 세미나 자료에서는 옛자리에 다시 재건축하였다는 기록을 기억한바 또한 이곳은 평창의 正東은 " 평창 포토 뉴스"의 사진에서 해는 멧둔재 선익골쯤에 떠오르는 모습에 이곳이 정동이란 점을 알고 동북방이란 관아에서 중리, 상리쪽 방향이다.

 그리고 1리란 정조시대엔 약 380m이기에 관아는 지금 천주교 옆의 위치라면( 그곳엔 고목 두 그루가 있었는데 아마 이것은 관아의 여름철 햇볕가리게용 관상수로 이해하여 본다면,,,) 국구사우 위치 터가 맞아 떨어지는 곳은 평창중학교 고목나무옆 테니스 백 보드장일것이란 추론을 하며 언제인가 평창중학교 엣날 이야기를 들은바 그곳엔 어렴풋하지만 건물 그림자가 진다는 내용까지도 첨부하게 되었다.

이 위치적 장소의 지목은 지난 2016년 본인이 게시글 ""평창에만 있는 문화 ----국구사우(國舅祠宇)란?? ( 국구사우 1)글의 댓글(2016, 10,25,19:04 에서 본인의 블로그 닉네임인 후세백작으로 본인은 동 장소가 국구사우 터라고 주장하였다.

 이후 2017년 4월에 본인은  서낭단의 이야기를 듣고 여만리 강가의 방어용 적의 진지인양 뙤담이라 불리던 강변 돌 누적단이 서낭단이란 글을 쓰기에 서낭단(성황단)으을 검색하며 일전 평창역사란 책에 중리 이만년씨의 증언기록은 암 서낭단이라것을 기억하며 그를 찾아보며 다시금 국구사우의 치폐전말에 대한 두 역사교수님의 세미나 레포트를 곰공히 또 다시 읽고 또 보는등 수없이하며 국구사우터가 본인이 예시한 평창중학교 지금은 폐사된 고목나무 아래란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던 지난 9월초 정원대님으로부터 전화에 군청에 가서 평창에 제일 처음의 일제때의 지적도면을 전산화되어 다운받아 보니 고목나무 아래에 사사지란 단어가 나온다 한다.그래서 아마 그것은 일어로 국구사우가 일반 명사이지만 제한된 평창에만 있는 단어라 일인들이 모르고 일어의 뜻으로 사사지라 했던것 아니냐면서 우리가 쓰는 정치, 경제 이러한 단어도 일본이 만든단어들이라 설명하였더니 일주일채 안되어 이런 글이 올라왔다.

평창고, 대화고 두 학교의 일어 선생님에게 社寺地를 문의한바 社寺地는 신전과 사당을 겸비하는 현재도 일본에서 사용하는 단어라 한다.그리고 본인은 국구사우터를 발굴하였답니란 글을 쓰며 중리 00 번지이제 국구사우가 고목나무 아래란 확신과 그에 정확한 도면에 社寺地란 용어가 국구사우라는 등식이 성립할 수 있는 과제가 현안 관건이다.

2] 국구사우 터가 평창중학교 고묵나무 아래임의 입증의 제 문제

 국구사우의 터 찾기에 본인의 평창중학교 고목나무 아래란 추정지가 정원대님의 노력에 의해 일제 강점시인 1910~18년에 걸친 전 국토의 제일 처음의 측량기록이 1992년도부터 서울 구청별로 캐드의 전산화되며 이 모든 자료가 전산화 되어있다

이러기에 위의 이야기대로 국구사우터에 대한 단 하나의 단서가 될 사사지를 장확히 알게 되었다. 이 사사지를 지금까지 역사적 문헌에 대입하여 국구사우란 답이 도출될 수 잇어야 하리란 생각에 우선 이번 4월에 위 두분 교수님들이 "국구사우 치페전말"에 대한 세미나를 읽으며 확신을 가지게 된 점들을 점검해 보기로 한다.

1) 司(관아) 옆에 새로 원우를 지으라는 정조의 명령

아마 그 레포트 앞줄이라 박도식 교수님의 글에서 정조는 司(관아) 옆에 원우를 새로 짓고 예를 행하라고 원춘도 관찰사및 방어 절도사 이도묵에게 명한다. 그래서 원우는 관아 옆이 여의치 못하면 최대한 가까이 있슬것이란 생각인데..이도묵 기록에 의하면 옛 원우터에 다시 지었다 한다. 아마 새 원우도 옛터에 다시지은 터로서는 그대로이지만 정조의 명이기에 관아 옆에서 그리 멀지는 곳이라야 어명에 거슬리지 않을듯 하다.

2)관아로부터 동북방 1리에 성황단이 있다는 평창 역사 기록

 평창역사 어느 기록에관아로부터 동북방 1리에 성황단이 있다는 기록을 보며 1리는 이조시대에는 3-4번 그 거리가 변경된듯 하지만 그 차이는 모두 대략 370~380m이내이다.그러기에 이 성황단은 관아(옛 군수관사 자리)에서부터 고목나무 아래는 대략 1리에 해당된다.  그리고 성황단이란 신당과 사당 모두들 포함할수 있는 영역의 단어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신당은 지형이 돌아눞는 곳의 項이나 관자놀이 격의 目등 특징적 위치에 자리하나 사당의 경우는 평지이다. 그 예로 국구사우의 사당은 기록에 4칸 반이라 하고 담장이 있다면 줄잡아 10m의 길이를 갖어야 하기에 평지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서 1항은 2항의 범위내에 집합의 요소로 성립이 되어야 한다. *( 단 여기서 사당, 신당의 堂자는 일제때의 일본적 단어이기에 이조때는 국구사당이 아닌 국구사우로 표기했듯이 이조시엔 신당이 아닌 신우로 표시하여야 할지는 잘 모르는 사항임)

3) 오면지도엔 노산 아래에 국구사우란 지명이 표기되어 있다

"국구사우 치폐전말" 세미나 레포트 뒤편에 인용된 오면지도를 보며 정장룡교수님의 세로로 국구사우란 글이 써져 있는데 이곳이 어디인줄 모른다는 글이 무척인상적이었으며 그 인상이란 하리에서 중리의 구간 어디엔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그 특징적 요소도 사라졌다는 이해이다. 과연 그곳은 어디일까?

성황단이라면 고목나무나 돌 누적단이 있어야 하는 것이기에 쉽게 평창중학교 고목나무를 연상할 수 있다그러나 이런 요소는 올 봄 이모님으로 부터 성황단의 학술적 의미의 이야기 듣고 검색을 했기 때문이며 지난해에 이곳이 국구사우터라고 예측을 하기엔 너무 많은 고민을 하였다. 그래서 동 레포트의 오면 지도를 다시보고 심지어 돋보기로도 확대도 무척이나 여러번 해봤던 기억이있다.

물론 여기에 첨가할 것은 아니지만 중학교 바로 위 교회자리는 일제 초에 현 교회와 평창공립학교 자리가 되었는데 그러면 일제가 이 당우를 철거한 용지는 아닌가하는 의문도,,정원대님의 자료에 의하여 일인 자녀들이 다니는 심상초는 구. 경찰서 자리몄으며 2~3년제 공립학교 자리가 의심의 대상이긴 하였다.

또한 중학교를 가로질러 흘러내리는 샘물 도랑 건너 중리쪽에 고목이 위치했슬 것이며 이 고목이 신당이나 사당의 정표로 샘물건너 중리쪽으로 사우가 있어야 했다는 생각이다.

그러면 이제 이 오면지도에 대한 본인의 이해를 피력해 본다 

우선 오면지도는 지도제작에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을테지만 오면지도는 지도로서의 정확성은 없다. 그리고 오면지도는 그 기록의 중요성은 가지지만 붓으로만 그린 점에, 또한 특정지역 기술에 붓의 면이 넓어 옆으로 밀린듯 하다.그래서 오면지도에 좌로부터 세로로 관아, 객사, 국구사우, 여제단의 글귀에 대한 각 표시지역에 대한 본인의 이해는 다음과 같다.

*관아 현재 천주교 바로 옆 옛 군수관사 터라고 보며 그곳엔 나란하진 않지만 두 그루의 고목이 있었는데 이는 아마도 여름철 관아를 그늘지게 해 주는 관상수 아닌가 추정한다,

*객사는아마도 관아옆 채마밭들을 좀 지나 현 평창중학교 정문정도까지란 이해와 그곳엔 노산에서 내려오는 샘물이 있다. 노사는 곰의 배꼽형이라 구릉지에 물이 고일 수 있으나 아마도 지층아래는 카르스트 지형의 자연동굴들이 많은듯하여 샘물이 보통 도랑보다도 더 많이 흐르기에 식수도 용이하지만 당시에는 주변이 상류천의 자갈밭과 늪지화는 아닐까 추정됩니다. 그래서 이 샘물이 땅을 갈라 시내를 위에 말한 하리쪽은 양택과 중리쪽은 음택으로 구분한듯 하다.

여기까지가 관아에 부속된 사신들을 맞이하는 장소로 이해 한다면 극구사우는 그 도랑을 건너 시내와는 좀 구분되는,예를 들어 음택성의 땅이 아니었던가 그려볼 수 있다.

이조시대 여관이 없슬시 갹사는 중요한 장소이며 강릉에는 객사헌이란 전국 유일의 거대한 객사 출입문도 있다.

*국구사우

오면지도에 관아 다음 오른쪽으로 적혀있는 국구사우의 지도상 위치는 어디일까?? 관아와 적당한 채마밭이랑 郡 창고등이 이어 나가며 평창중학교 정문까지는 관아적 성격이라면 그위로는 샘이 흘러내리는 도랑이 있고 그 샘을 건너 중리쪽에 바로 고목이 위치하며 그 자리가 국구사우터란 지목이다.

국구사우터는 이 1,2,3번에 공통으로 적용되어야 하는 집합이어야 한다.그러기에 이 고목아래를 국구사우터로 적용해 보면 우선 고목나무가 사당이란 정표이며 이 또한 윗 1,2,3항목에 정조가 관아옆에 지으라 해서 옛 자리에 복원했다면 그 옛 자리도 관아와 멀지 않았을 것이란 추정과 동북방 1리라는 역사기록과 오면지도에 객사 옆에 적혀있는 국구사우란 기명의 위치에 적용이 위배되지 않는 지점이다.

*여제단

관계수로의 도랑 아랫쪽은 저지대라 천변이란 생각과 여제단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곳은 현재도 공동묘지가 있고 강점기시 일본인이 쓴 풍수책엔개의 앞발형상으로 공동묘지라면 이조시대에도 여제단이라는...본인은 이 여제단을 무연고 사자들의 제를 올리기도 하지만 지금의 곳집같은 역활도 하였으리란 추론이다.

*(일제시대의 풍수책에 의한 노산의 풍수설명 첨부되어야 여제단의 위치적 파악이 더 쉽기에 별첨에 첨부합니다.)

3] 현 극락사 자리에 대한 고찰

본인은 국구사우에 대하여 2010년쯤 엄기종님의 글을 읽었으나 무관심이었는데 위에 언급했던 것처럼 지난해 정원대는 국구사우 터는 현 극락사 자리이고 지금도 건축부자재가 싸여 있다길래 언듯 읽은 "평창문화"란 책의 동 레포트의 이해로 그곳은 아니란 생각에 처음으로 평창중하교 고목나무 위치라고 추정하였다.

그리고 올 봄 극락사 뒤편에 암서낭당이란 글이 있는 것을 알고 동 레포트를 다시 꼼꼼히 읽은 결과 이만년씨는 중리 농악대 패거리 3인의 증언에서 당시는 포교당일 것이고 그 뒤편에 한 칸짜리 암 서낭에 여자 그림이 있다 하였다.물론 이 글을 발췌하는 장정룡 교수님도 이 극락사 자리가 국구사우 터는 아니란 전제하에 쓴 것이지만,,정확하게 끊지는 않은 것으로 지금은 생각됩니다.

문화원 이 위원의 까페를 검색해보니 12일 아이디 "샘과 나무"님의 두개의 댓글이 달렸고 아마 15일쯤 이모위원의 선배님과 통화에서 저는 사과하는 마당에 따질게 무었이 있을까 무조건 잘못했다 하였으나 그쪽에서는 미안타는 표현은 없었고 다만 논문을 쓰는데 후세백작이란 아이디를 인용하긴 그렇고 본명을 알았으면 왜 그러겠냐는 자인을 하지만 아이디 戒溢淸德이 본인 글에 댓글을 보면 자기가 발견한것처럼 이란 표현이..(물론 주관적인 해석이지만,,,)

 약 일전전쯤 "느티나무"란 아이디로 본인의 불로그에 댓글을 남겼는데 이는 필히 선배님이라면 누굴까. 이 선배라고 추정했는데. 물론 후세백작이 누구인지 모르는듯한 감을 잡았습니다만.

.. .서울서도 어느 후배들을 만나면 저에게 후세백작이란 아이디가 누구인지 무척 궁금해 저에게도 물어보는데...문화원 홈피에도 엇그제 일부 지우긴 했지만 자유게시판에 절반이 넘는 , 때로는 일만자씩 되는 글에 후세백작이란 이름으로 썼는데 최소한 향토사 원장님으로 그런 평창에 어느역사라도 검색하면 대게 후세백작이란 이름이 걸리는데 향토 위원장님으로서 그러한 관심과 파악이 없었다면 그것은 아무리 막역한 선후배사이이지만 그보다 향토사 위원으로서 모른다고만 할수 있으랴.

만약 극락사 뒤편의 암 서낭단이 국구사우라면 천우위장사 이숙 공이 왜 노산 위 서낭단에 떨어져 있어야 할까하는 의문에 이곳이 국구사우 터엿다면 국구사우는 4칸 반인데 한 칸이란 증언과는 너무나 차이가 나고 또한 원우 둘레에 담장과 문이 있다는 기록에 그러면 원우 터는 10m가 넘어야 하는등 예닐곱게 이상이 차이가 나기에 그 신당은 국구사우가 아니란 점이다.

그렇다면 극락사(구 포교당)은 해방 이후 월정사 주지인 이종욱씨기 건립하였는데 그 전에는 어떤 자리였슬까??이점은 별지 "풍수적으로 보는 노산의 이해"편에서 다루겠습니다.

(* 이종욱씨는 양양생으로 월정사 주지시 평창지역 초대 제헌국회의원을 역임하고 조계종 총무원장까지 역임후 김제에서 사망)

4] 나가는 말

 대게의 성황단은 관자놀이의 目이나 돌아굽는 項등의 특정 지역에 위치해야하나 국구사우의 정조의 어명에 관아 옆에 사우를 지으라는 어명이나오면지도의 국구사의 표기등은 국구시우의 역사적 기록은 평치를 가르키고 있다.

또한 본문의 예로 도입된 1,2,3항 모두 평지이고 관아에서 1리정도 이내이기에 국구사우로 추정되는 터로 평창중학교 고목나무 아래를 추정함에 이곳을 1910~18년대의 국토조사시 古지적 도면에 확인하면 社寺地란 표기가 있으며 이는 일본인의 지적도면에 社寺地란 일어의 뜻으로 신당과 사당이 겸한 현재에도 사용되는 단어이기에 이 추점점이 국구사우 터였다고 확인이 된다.

그러기에 국구사우의 역사적 사료 이외에 지금껏 나타난 단 하나의 추정위치에 대하여 앞으로 정밀한 심의가 사료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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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 도서- 2015년 평창문화원 발행 "평창역사"중 "국구사우의 치폐전말"

별지 참조

1) 평창의 지형적 고찰

2) 노산의 풍수적 이해로 보는 여제단 위치

3)임란시 평창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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