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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 이효석

평창역사의 재해석에대한 과제는??

평창역사의 재해석에 대한 과제는??

 

후세백작 2017.01.30 15:08

우선 이 글을 쓰기전에 본인은 어떤 역사가나 그러한 위치에서 쓰는것은 아니며 다만, 평창출생의 영원한

평창인으로 내고장 역사의 정립을 위해 역사를 사실에 입각하기위한 노력입니다. 그러기에 이 글들은

전문적이지는 아니하므로 비중에 의한 순서나 어떠한 오류도 발생할수 있슴양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 평창초교의 역사와 이효석 선배님은??>

 봉평문학관의 연혁을 보면 가산 이효석(李曉晳)은 1907년 출생으로 1914년(8세)평창공립보통학교

입학하여 1920년(14세)에 평창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 제일고등보통학교 입학하였으며, 1925년

(19세)경성제1고등보통학교 우등으로 졸업, 경성제국대학 예과 입학.1927년(21세)에 대학 예과 수료 후

 법문학부 영어영문학과 진학. 1930년(24세)에 경성제국대학 영어영문학과 졸업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평창초등학교의 연혁을 칮아보면 1912.03,06 평창공립보통학교 설립인가,1912,05,14 개교하였다. 그리고

가산 이효석은 1914년에 평창 공립보통학교를 입학하여 1920년에 졸업하였으며 졸업대장번호 97번이다.

 

이 기록을 보면 1912년에 개교하여 제 1회졸업생은 1017년 6학년으로 익년인 1918년에 제1회 졸업생이

배출되며 따라서 1914년 입학이면 1020년 졸업하게되는데 그때는 6회가 아닌 제 3회 졸업생이어야한다.

그런데 왜 6회 졸업생일까??

일전, 평창초교 100주년에대한 어느 글에서 기존의 글들의 연표의 모순을 아마 개교 원년에는 소문이

 퍼지자 학구열에 입교학생이 늘어나자 일년에 두번씩 3년에 6회 입학한것이 아닌가 하며, 마치 울 나라

육군 사관학교의 10기까지의 특채같은 현상아닌가 하는 글을 쓴 적이있다.

물론, 이 물음의 답은 대장번호 1번부터 97번까지 전부 확인해 보고 답을 내려야하지만,, 우선 그 몇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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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의문에 앞서 우리나라 근대 교육제도의 역사를  잠시 열거해보면..

 

<소학교>

고종은 1895년 29개 조항으로 된 소학교령(小學校令)을 공표하면서 우리나라 근대교육이 시작되었다.

소학교령의 목적은 “아동의 신체 발달에 맞추어 국민 교육의 기초와 그 생활상에 필요한 보통 지식 및

기능을 기르는 것”이었다.

학교의 종류는 관 · 공립과 사립으로 나뉘며, 관립은 국가에서, 공립은 부와 군에서, 사립은 개인이 설립 ·

운영하도록 했으며,편제는 5년제였다.

 

소학교령(小學校令)을 공표하면서 고종은 아래의 교시를 내렸다

교육은 개화(開化)의 근본이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부강해지는 기술이 모두 학문으로부터 생기니,

나라의 문명(文明)은 학교의 성쇠에 달려 있다. 학생은 8세 이상 15세까지 더 모집하고 그 과정은

오륜행실(五倫行實)로부터 《소학(小學)》과 우리나라 역사와 지리, 국문, 산술, 그 외에 외국 역사와

지리 등 시의(時宜)에 맞는 책을 일체 가르치면서 헛된 형식을 버리고 실용을 숭상하여 교육을 완전하게

하기에 힘써라.

당시학부대신은 변절하기전의 38세의 이완용으로 국비장학생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서구식 학문을 가장

많이 습득한 지식파로 아마도 위의글은 서구를 이해하는 학부대신의 문장인듯하죠??

 

<보통학교로 개편>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한 일제는 1906년 4월 학부관제를 개정하고 8월에 보통학교령을 발표해, 갑오개혁

당시 개혁으로 설립된 초등교육기관인 소학교(5~6년제)를 보통학교(4년제)로 고쳤다.

입학연령은 만 8~12세였으며, 동화정책의 실현을 위해 일본어로 교육했다.

 

제1차 <조선교육령>

한일합병 후 일제는 1911년 제1차 조선교육령을 발표하고, '조선인의 일본인화'를 목적으로 주당 10시간씩

일어시간을 배당했으며, 수신·지리 및 역사 등을 교육시켜 민족의식을 말살하려 했다.담겨진 보통학교의

교육은 보통의 지식과 기능을 습득하게 하고, 특히 국민된 성격을 함양하며 일어를 보급함에 목적을 두었다.

제2차 조선교육령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기만적인 회유책의 일환으로 실시된 문화정책에 따라

1922년 제2차 조선교육령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입학연령을 6세로 낮추고 종래 4년이었던 수업연한을 일본과 같이 6년으로 연장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한국어 과를 줄이고 일본어 교과를 최대로 확대했으며, 식민사관에 입각한 역사교육을 통해

일본사를 찬양하고 한국사의 비주체성· 정체성을 강조했다. 교육 연한은 1920년에 다시 6년으로 늘렸지만,

실제적으로는 4년제 보통학교가 더 많았다.


그 후 1938년에 ‘보통학교’를 다시 심상소학교’개칭했는데, 심상(尋常)은 고등(高等)이 아닌 ‘보통 수준’의

학교라는 뜻이었다. 학제는 일본의 초등학교와 같은 6년제로 개편되었고 심상소학교는 1941년에 국민학교로

개칭되었다

 

초등학교의 명칭은 1941년에 또 ‘국민학교’로 바뀌었는데,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식민지 정책을 강조하기

위해 ‘황국 신민의 학교’라는 의미로 바꾼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1996년 우리 정부가 늦게나마 ‘초등학교’로 개칭했다

 

◆ 심상소학교는 일본인 자녀들이 배우는 보통학교를 말하며 일본과 동일한 편제로 6년제였으며 조선인 고위

관리나 왕족의 자녀들도 이곳을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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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공립보통학교의 설립 배경을 위 예시에 보면 1911년 제1차 조선교육령에 따라 1912년 각 군단위제로

공립 보통학교 건립을하는 과정에서 평창공립보통헉교도 개교한다. 따라서 보통학교령에 의거 학부는

4년제라야 맞는 것이다.

그래서 위의 가산의 연표를 다시보면 "가산 이효석은 1914년에 평창 공립보통학교를 입학하여 1920년에

졸업하였으며 "라는부분은 오류인듯 하다.

 

그렇다고, 4년제라면 그의 졸업년수는 1917년+ 4년+익년 2월까지 5년이 만 4년으로 (일본은 그 당시에도

4월 입학제인지는?)이효석은 1914년 입학하여 1918년 졸업을 하여야 정상이다.

그런데 1920년 경성제1고보(경기중고의 5년제)에 입학하였는데, 이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고보 진학까지

2년간의 공백이 생기는 모순을 가진다.

 

또한, 경성제대 예과 2년(1925~1927), 본과를 1930년에 졸업하면 3년으로 합 5년으로 당시 경성제대

(현 서울대)는 5년제였는지, 아니면, 가정사정등으로 휴학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수석으로 졸업했다.

 

엇그제 연휴에 고향을 다녀가며 향토사학자인 어느 분에게서 1920~30년대의 평창을 설명들은바 당시의

평창초교는 현 중리 감리교회에 평창보통학교가 설립되었으며 일인학교인 심상학교는 옛 일신중학 자리에

었다 한다.

 

여기서 평창공립학교는 4년제가 분명하기에 그의 보통학교 시절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만약 효석은 당시

진부면장의 아들이란 평창으로서는 고위 공직자의 자녀 신분이기에 일인들의 자녀들이 다니는  심상 소학교에

 다녔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1937년 7대에 취임한 군부출신의 미나미 총독하에서 보통학교는 모든 보통학교는 심상소학교로

개편하였는데, 이때에 학제도 6년으로 개편했다 한다. 아마 이러한 개편속에 일제 심상학교도 평창공립보통

학교의 편제에 속하고 그간의 졸업대장등의 장부도 이후에 재 기록되었다면은??

 

그러기에 지금으로선 평창 보통학교의 개교와 6년제에 이효석의 6회 졸업생이란 시간의 어패를 다시 밝혀야

모순되지않는 역사로 후손에게도 물려줄 수 있슬 것인데...또 한편의 생각으론  효석은 정말 심상학교에

다녔슬까? 그렇할 이유도 충분하지만 이 문제는 졸업대장을 비교 검토 연구해야될 문제이다.

 

그리고 여기서 의심의 하나는 당시 일제강점기에 졸업대장에 창씨 개명된 이름으로 나타나지 않는 점은

왜넘들의 창씨개명론에 찬,반론이 대두되다 1937년 부임한 군부출신의 강성분자 왜구인 미나미 지로 총독의

지시로 1940년대부터 창씨개명,황국신민 서사와 신사참배. 조선어 사용 금지등이 강행되었다.

그러기에 강점 초기엔 창씨개명되지않은 조선인 이름대로 역사는 기술한다.

 

아마 이 점에 역사는 잊혀져 가는데 지금이라도 증언과 졸업대장을 우선하여 분석적 자료로서라도 역사의

바른 정립과 이해가 있었으면 좋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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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역사를 배웁니까?? 역사는 바로 우리의 정체성과 현실을 지향할 수 있는 동력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주변엔 정선 아라리의 왜곡과 영월의 김삿갓 묘의 허구는 김삿갓 당사자로서는 슬픈 이야기일듯 합니다.

그렇듯이 봉평이 이효석의 출생지라는 모순 또한 효석 당사자에겐 그리 달갑지 않을 것이란 점에서 바른 역사와

바른 이해가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이 모든 이야기의 허구를 문제로 제기하였으며 또한 평창인 스스로에게는 늦은감이 있지만 요즘 현안문제로

떠오르는 극구사우와 판관대의 연구와 문화재 신청에 있어서 저의 생각도 발표했던바 좀 더 확대 생각해보면서

강조되어야 할 부분들의 이야기를 다시 그려보겠습니다.

 

하나, 농담조로 이야기하면 귀향길에 친구의 부탁대로 다시 평창시장으로 돌아가 메밀부치기 한 박스 주문을 하고

 찾으러갈때 어느집인가 필요해서 문패를 보았더니 "원경"이란 부치기 점이었다.

"원경"이라 상호를 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 나는 이효석 부인 이름을 본딴게 아닐까??

평창 재래시장 모퉁이 한켠에는  이효석 시비가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다.

여기에 이효석 부인의 이름이 원경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그 부치기점은 여기서 발췌한 것은 아닐까??

만약 이 이름을 발췌하였다면 큰 오산이고 역사에 또 하나의 흉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비석이 언제 세워졌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 동상의 릴리프 판의 조각상은 그래 못나지는 않았기에 관심있게

본 적이 있다. 그것을 보노라니 효석 부인의 이름은 "경원"인데 꺼꾸로 '원경'으로 표기된 것을 알았다.

그리고 삼사년뒤 친구와의 대화에서 이 오류를 이야기하니 그는 대화 도서관으로 나를 데리고가서 책을 찾아보는데...

 

이리 분주할거보다 막국수나 한사발 사봐라,,, 그러면 간단하게 정답을 줄테니..

그리고 국수를 주문하고 봉평 문학관에 전화 한번 해 보시게...

나의 말이 정답이니 점심값은 네가 내도록 하게 하고, 어느 여름 시원한 막국수 한사발 한적이 있는데..

아마 "원경"이란 상호의 메밀 부치기 점이 이곳 동상을 보고 이름을 따 왔다면 역사는 허사란 점이다.

 그렇지 않길 바라며 한번 웃어본다.

 

그리고 구정날 깜한 새벽에도 다음날 새벽은 날이 좀 포근해 남산을 오르다가 경찰서 옆의 고분 발굴자리를 어떻게 했는가

둘러 보았다. 그곳은 이미 원상복귀로 평탄작업을 하였다.

그렇겠지... 하지만 영월사람들이었다면 이렇게 묻어 지울 수 있슬까 하는 생각이...

http://blog.daum.net/kkks1/1290 를 보시면 영월인들의 개미부대같은 준비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른 아침 이곳을 지나던 언 선배님왈,,,

 이 유적을 다시 재발굴한다하는데 긴 이야기는 모를것이기에 묻지도 않았다.

 정말 다시 발굴 보존한다면 이 얼마나 큰 역사일까??

 같은시각 춘천 위도에서는 비파형 청동검이 40여개. 고인돌(무덤)이 약 100개 발견되엇지만 유골을 녹고 풍화되어 없다.

하지만 평창 고분에선 2,500년전의 유골이 출토되었다.

 

 이 점이 역사의 큰 획을 긋고 또한 교과서에도 채택될 고조선인인 것이다.

이 점에도 몇개의 글이 있지만,,,못난글 솜씨라 평창인들은 외면하는듯 하다.

 하지만 재 발굴사업에 보존 박물관 하나 번듯하게 세워졌으면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