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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 이효석

No. 4423 [수정요청] 가산(可山) 이효석(李孝石)의 본관은 전주입니다 <스크랩분>

 

No. 4423 [수정요청] 가산(可山) 이효석(李孝石)의 본관은 전주입니다

 

No. 4423 [수정요청] 가산(可山) 이효석(李孝石)의 본관은 전주입니다
이름 : 이왕섭 등록일 : 2011-02-23 조회수 : 1067

가산(可山) 이효석(李孝石)의 본관은 전주입니다.

이효석(李孝石)

1907년 2월 23일∼1942년 5월25일. 소설가.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가산(可山).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하진부리 196번지에서 출생.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0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하략)..........

또는

이효석(李孝石)

1907년 2월 23일∼1942년 5월25일. 소설가.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가산(可山).

전주 이씨 안원대군(安原大君)의 후손으로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하진부리 196번지에서 이시후(李始厚)와 충북 충주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1남 3녀 중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0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하략)..........

 

 

오렌지색의 내용처럼 수정이 필요하다. 이효석의 출생지가 현재 알려진 것처럼 봉평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봉평이 이효석이 살았고 현재 이효석문화관이 있다고 하여 그의 출생지로 착각하는 여러 글의 잘못된 내용을 이곳에서나마 바로 잡았으면 한다. 그러고보니 가산 이효석이 태어난지 오늘이 104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하네요.

 

전주이씨 안원대군파의 대표적인 인물은 춘원 이광수(안원대군의 증손인 동남군 이춘흥의 19대손), 동의수세보원의 저자 이제마(안원대군의 아들인 동해군 이보하의 18대손) 등이 있다.

 

아래는 가산 이효석의 맏딸 이나미(李奈美)씨의 인터뷰 기사입니다. 아래 내용을 정리하면 가산 이효석은 전주이씨 안원대군파 후손으로 1907년 2월 23일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하진부리 196번지에서 출생하였다(평창군 봉평면이 생가가 아님을 확인시켜줌)는 사실과 묘소는 1998년 9월 9일 경기도 파주로 이장하여 현재는 파주 추모공원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터뷰 내용중에 이효석의 본관과 출생지 그리고 현재 그의 묘소가 있는 위치한 곳에 대한 이야기를 뽑아 보았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전주 이씨 안원대군 후손으로 유교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많은 문학작품을 탐독해 문학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재능을 갖고 계셨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전주 이씨 안원대군 후손으로 1907년2월23일 평창군 진부면 하진부리196번지
에서 태어나셨는데 어떻게 하여 봉평에 생가가 있다고 알려져 속이 많이 상합니다. "

 

"주위 친지들의 도움으로 부모님의 산소를 경기도 파주로 이장하던 1998년 9월9일입니다."

"그렇게도 힘겹게 안식처를 찾은 아버지는 파주 경모공원에서 청년기의 대부분을 보냈던 북녘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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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다정다감하셨던 내 아버지는 문학이 인생의 전부였던
분"

필자는 지난 4일 <메밀꽃 필무렵>의 작가 이효석의 맏
딸인 이나미(70)씨와 이메일 인터뷰를 시도했다. 이효석
작가(1907∼1942)는 1930년대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아버
지를 일찍 여위고 힘겹게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며 한평
생을 살아온 이나미씨의 답변에서는 아버지 이효석에 대
한 애틋한 그리움이 베어있었다.

 

한국문학의 금자탑으로 평가받으시는 이효석 작가는 작가가 아닌 아버지로서 어떤 분이셨나
요?

 

저의 아버지는 평소 자식들에게 정직을 강조하셨던 분으로 위선과는 거리가 멉니다. 온화한
성품에 키는 그다지 크지 않으셨고, 매사에 서두시는 법 없이 언제나 차분하고 얼굴에는 항
상 부드러운 표정을 잃지 않는, 지금 생각해보면 외유내강의 성격을 지닌 분이었던 것 같습
니다. 겨울이면 스키를 타시거나 빨간 목도리를 날리면서 스케이트로 대동강을 달리시던 모
습과 여름이면 가족들과 함께 대동강에서 물놀이를 즐기며 능라도에서 옥수수를 사다가 나
누어주시며 그것이 마치 우유 맛이 난다고 하시던 아버지의 다정한 모습이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참 멋진 분이셨죠.

 

이나미 선생님은 어릴 적에 부모를 일찍 여의고 온갖 역경을 이기며 살아 오셨다는데, 아버
지에 대해 가장 기억에 남는 모습은 어떤 모습인지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저에게는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에 아직도 아버지의 모습과 기억이 많
이 남아 있습니다. 특히 평양에서의 일인데, 어머니가 갑작스레 돌아가시고 나서 제가 아홉
살 때인 1940년 4월 한식날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저를 데리고 아침 일찍 어머니의 산소를
찾았는데, 1월달에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서 3개월만에 잔디를 새로 입히고 아버지와 함께
가지고 간 꽃나무를 어머니 산소 옆에 정성스럽게 심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평소 어머니께
서 좋아하셨던 생과자를 어머니 산소 앞에 놓아 드리며 큰소리로 어머니를 부르며 울기만
했지요. 이런 제 모습을 보시고 아버지도 마음이 안좋으셨던지 제 눈물을 닦아주시며 "나미
야, 그렇게 울면 지하에 계신 어머니가 더 슬퍼하지 않니" 하시며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서
눈물이 부쩍 많아진 아버지께서도 감정을 억제하기 힘드신 듯 돌아서서 억지로 눈물을 삭이
셨죠.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치시며 슬퍼하시던 그때의 아버지 모습이 지금도 가장 기억
에 남는데 그날 어머니 산소 앞에서 우리 부녀는 어린아이처럼 한없이 울었습니다.

 

아버지의 문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저의 아버지는 문학만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시고 사셨던 분입니다. 1942년 5월에 평양
에서 36세를 일기로 짧은 생을 마친 저의 아버지는 외면의 세계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처
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무척 고독하고 불행했던 분입니다. 그런 아버지의 문학을 자식으로서
평가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작품 하나하나 피를 말리는 혼신의 힘을 다 기울이며 쓰셨
으니까요.

그리고, 저의 아버지는 결혼 전까지만 해도 경향적인 색채가 짙은 작품을 쓰셨는데, 1931년
어머니의 고향인 함경북도 경성에서 결혼해 생활의 안정을 찾으면서부터 1932년부터는 <돈
> , <수탉>, 등 서정성이 깃든 작품을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아마 이런 작품들이 훗날 독자
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저는 아버지의 작품을 모두 좋아하지만 지금
도 시간이 날 때마다 장편소설 <화분>과,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를 자주 탐독하고 있는
데 읽을수록 좋은 것 같습니다. 지금도 가을이면 아버지의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에서 낙
엽 타는 자연의 향기가 물씬 나는 것을 느낍니다.

 

작가 이효석에 대한 작가론이나 작품론 등 그동안 그 분에 대한 문학적 연구는 폭넓게 이루
어졌는데 딸의 입장으로서 만족합니까?

 

이 기회에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저의 아버지는 태어나신 곳은 '봉평'이 아니고 '진부'입니
다. 봉평은 단지 저의 아버지 작품인 <메밀꽃 필 무렵> 에 나오는 지명일 뿐입니다.
그리고
저의 아버

우선 그동안 저의 아버지 문학을 사랑하고 연구하신 연구가들에게 깊이 감사 드립니다.

그런데 몇 년 전 서울의 어느 대학 국문학과 교수가 저한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효석문학에 대한 연구자료를 보게 되면 너무 획일적으로 흐른 감이 있고 본질
과는 전혀 다른 부분이 너무나 많아 일방적으로 매도당한 느낌이 드는데 이런 것은 연구하
는 사람들의 올바른 자세라고는 볼 수 없으며 처음부터 다시 새롭게 연구해야 한다"고 말입
니다. 앞으로 연구하는 분들은 한번쯤 되새겨 볼 만한 얘기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버지의 고향은 봉평이 아닌 평창 진부면"


이효석 작가가 일찍 돌아가셔서 사실이 왜곡돼 알려진 부분도 많을텐데 이 기회에 바 로잡
고 싶으신 사실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지요.

 

저의 아버지는 전주 이씨 안원대군 후손으로 1907년2월23일 평창군 진부면 하진부리196번지
에서 태어나셨는데 어떻게 하여 봉평에 생가가 있다고 알려져 속이 많이 상합니다.
지금도
저는 그 부분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저의 아버지와는 경성제국대학 동기동창이고, 지금은 고인이 되신 국어학자 이희승 선생님
도 생존시 저에게 이런 말씀을 들려주신 적이 있습니다. "자네 아버지와 경성제국대학 시절
인 여름방학 때 관동팔경을 돌며 진부에 있는 방아다리 약수터를 같이 간 적이 있는데 그때
자네 아버지는 이곳 진부가 자신이 태어난 고향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지" 하시며 오대산 옆
에 있는 진부에는 장날 목기를 팔러 다니는 상인들이 많은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하셨습니
다.

 

그리고 학창시절 1년 선배이자, 한때 동반자작가로도 함께 활동하셨던 아버지의 절친한 친
구였던 유진오 선생님도 "자네 아버지와 그토록 친하게 지냈지만 학창시절에 가끔 관동팔경
을 여행하면서도 진부가 태어난 고향이라고만 말했을 뿐, 한번도 고향집에 초대한 일은 없
었다"고 하시면서 이희승 선생님과 같이 태어난 고향이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임을 분명히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두 분은 저의 아버지와는 형, 아우하며 아주 가깝게 지냈던 분이지
요. 또 아버지의 경성제일고보와 경성제국대학 학적부를 보더라도 원적 사항에 평창군 진부
면 하진부리 196이라고 분명히 적혀 있습니다.

 

지는 네 살 되던 해인 1910년에 부모님을 따라 서울 근교에 와서 여섯 살까지 생
활하다가 다시 진부로 내려갔는데 이때부터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평창의 고명균씨 댁에서
하숙을 하며 평창보통학교를 다니셨습니다. 그리고 1920년에는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곧바
로 서울로 유학을 와서 경성제일고보와 경성제국대학을 나오셨습니다.

 

최근 이효석문화관이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에 생기는 것으로 언론에 보도되었는데, 문화관
에 이효석 작가가 평소 사용하셨던 안경과 잉크병, 책상 등 유품이 진열될 계획이라고 보도
됐습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이효석 작가를 보셨을 텐데 그 유품들이 모두 이효석 작가의
손떼가 묻은 유품들인가요?

 

한마디로 언급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진실을 왜곡시키는 현실이 불행할 뿐입니다. 저는 1942
년 5월25일 평양에서 당시 열한 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운명을 끝까지 지켜보았습니다.
1940년 1월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그로부터 2년 후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는데 저는
그 2년 동안 어머니 대신 아버지의 시중을 들며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아버지
의 유품을 일일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에 평양에서 돌
아가셨기 때문에 그런 유품이 서울에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왜 하필이면 잉크병과 책상, 안경 등 그런 유품만이 남아 있겠습니까? 지금 남아 있
는 것이라고는 현재 제가 보관하고 있는 아버지의 서신과 엽서, 몇 장 되지 않는 사진, 그리
고 생존시 발행했던 고서들이 전부입니다. 저는 1949년에 당시 강원도 진부에 있는 동생들
을 만나기 위해 북한에서 혼자 월남을 하면서 아버지의 사진을 품속에 지니고 나왔는데 그
나마 6.25 사변 때 피난 중에 모두 소실되었습니다.

 

그런데 관광객의 관심을 끌기 위해 상업에 치우쳐 그곳에서 마치 저의 아버지의 유품을 전
시하는 양 선전하고 있는 모양인데 거짓은 인간을 잠시 속일 수 있을 지 모르지만 하늘은
속이지 못할 것입니다. 저희 아버지의 문학 혼과 내면의 세계도 전혀 모르는 채 이름 석자
를 그런 식으로 팔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고인의 영혼이 지하에서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그 지역에서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실 그곳을 다녀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현지에서 장사를 하면서 이효석 선생을 너무 상품화
시키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순수문학 자체를 오염시키고 있다고 안타까워하며 분개해 합니
다. 특히 지방자치제가 되면서 이효석문학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채 순수성을 외면하고
상업적으로 돈벌이에만 이효석 이름 석자를 이용하면서 문학혼 자체를 왜곡시키고 있는데
대해 이제는 더 이상은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제 힘껏 아버지의 명예를 지켜 나갈 생각입니
다.

 

1998년에는 당시 평창군에 있는 나의 아버지 산소(어머니와 합장묘)를 관광지로 만든다는
구실로 유족도 모르게 흉물로 만들어놓은 적이 있습니다. 그게 속상해 이장을 하기 위해 가
까운 친지들과 이장을 하려 갔는데 청년들이 술을 마시고 올라와 산소 주위에 술을 뿌려가
며 삽을 빼앗고 난동을 부리는 등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심각한 사태가 벌어졌고, 신변의
위협을 느껴 이장을 못한 채 제가 전신에 상처를 입고 돌아와 병원에 입원까지 한 적이 있
었습니다. 물론 며칠 후 부모님 산소를 이장했는데 고인에 대한 존경은커녕 이장이 불가피
하도록 원인제공을 해놓고도 그렇게 몰상식하게 고인을 대우해도 되는지 정말 수치스럽고
부끄러웠습니다. 그때 찍어 놓은 비디오 테이프가 있는데, 언제까지 이효석 작가를 해당 지
역의 상업적 상술에 이용당하도록 놓아둘 수는 없으며 적절한 시기에 그 비디오 테이프 공
개와 함께 적법한 조치를 취할 생각입니다.

"아버지 전집을 내손으로 출간시킨 일이 가장 뿌듯했다"


이선생님은 칠십 평생 집안의 맏이로서 아버지의 유지를 받드는데 온갖 정성과 노력을 기울
였다고 들었습니다. 살아오시면서 가장 보람됐던 일 두 가지와 가장 슬펐던 일 두 가지를
말씀하신다면?

 

칠십 평생을 살아오면서 보람되고 슬펐던 일은 제 생애에 두 번은 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내 일생에 가장 보람되었던 일은 내 손으로 직접 창미사란 출판사를 설립하여 생존시 그토
록 갖고 싶어 하셨던 아버지의 전집을 내드렸던 1983년 11월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주위
친지들의 도움으로 부모님의 산소를 경기도 파주로 이장하던 1998년 9월9일입니다

.

사실 두 번씩이나 유족의 뜻과는 무관하게 부모님의 산소가 헐리는 것을 보고 더 이상은 평
창군에 부모님의 유택을 모셔야 할 이유가 없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돌아가신
평양의 북녘 땅이 바라다 보이는 경기도 파주로 이장을 하면서 부모님의 고혼을 달래 드리
며 자식으로서 떳떳하게 문패를 달아 드렸던 일입니다.

 

그리고 가장 슬펐던 일은, 어렸을 때 외할머니와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입니다. 특히 1942
년 5월 아버지께서 평양에서 돌아가셨을 때 열한 살의 어린 나이에 평양의 어느 화장장에서
외삼촌과 함께 흐느끼면서 아버지의 유골을 수습할 때입니다

.

또 한 가지는 1973년 유족의 뜻과는 전혀 관계없이 평창군으로부터 이장통고를 받고 부모님
의 유골을 31년 만에 또 다시 수습하고 평창군에서 주선해준, 아무 연고도 없는 남의 문중
산에 부모님의 유택을 모셨을 때입니다.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면서 가장 힘들었던 기억은?

 

1980년부터 아버지의 전집 출간을 계획하면서 수십년 동안 묻혀 있던 귀중한 작품들을 3년
에 걸쳐 금싸라기 줍듯이 어렵게 찾아 모을 때입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에 걸쳐 밤낮 가리
지 않고 수많은 노력으로 전작품을 집대성해 잘못 알려지고 있는 이효석 문학의 새로운 정
립에 온갖 힘을 기울일 때가 역시 가장 힘들었던 기억입니다. 다행히도 지금은 이효석 문학
연구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현대문학 연구에까지 큰 보탬이 된 것 같아 한편 고생한 보람
을 느낍니다.

 

작가 이효석 하면 소설 <메밀꽃 필 무렵>과 에세이 <낙엽을 태우면서>가 기억나는데 실제
로 이효석 작가가 갓 볶은 커피와 낙엽 태우는 냄새를 좋아하셨나요?

 

60년전 당시 저의 아버지처럼 커피를 좋아하셨던 분도 드물 겁니다. 원고를 쓰실 때에는 항
상 진한 커피 향기를 맡으면서 밤새도록 글을 쓰셨으니까요. 그리고 1930년대 초 어머니 고
향인 함경북도 경성에서 잠시 교편생활을 하실 때에는 십리 떨어진 나남까지 일부러 커피를
마시러 가실 정도였다고 합니다. 또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는 어머니 생존시 단란했던 평
양 창전리에 살던 시절에 쓰신 것입니다. 당시 인정도서관 옆에 있던 우리집은 빨간 벽돌의
단층 양옥이었는데 여름이면 담쟁이로 온통 집을 가려서 주위에서는 우리집을 '푸른집'이라
고 불렀습니다. 이 시절 가을이면 부모님과 함께 정원에 떨어진 낙엽을 긁어 모아 태우던
일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생각이 납니다. 아버지께서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를 쓰셨던
평양 창전리 48번지 집은 저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그리운 집이기도 합니다.

 

현재 고령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이효석선생기념사업회와 출판사 창미사를 운영하고 계시는
데 운영하시게 된 동기나 계기가 있으신가요?

 

사실 사람의 기억 속에서 가장 오래 또렷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자기 부모에 대한 생각일
것입니다. 저는 부모님은 비록 일찍 돌아가셨지만 오늘날까지 부모님을 자랑스럽게 생각하
며 살아 왔습니다. 그래서 1982년에 메마른 현대를 살아가는 후세들에게 아버지의 문학정신
을 고취시키고 작품을 널리 보급코자 하는 뜻에서 유진오 선생님과 백철 선생님, 그리고 30
년대를 전후해 문단을 이끌어온 문단원로들을 모시고 이효석기념사업회를 창립했습니다.

 

또 같은 해 서울대학교 정한모 교수님과 이효석문학연구회도 발족시켰습니다. 그리고 아버
지께서 1942년 5월 25일 평양에서 작고하신 후 오랫동안 묻혀 있던 전 작품에 대한 원전을
수년 동안 어렵게 수집한 것을 근거로 1983년에는 전 8권으로 된 이효석전집을 창미사에서
간행했습니다. 출판사 창미사는 제가 직접 설립했는데 창미사는 문학평론가이신 백철 선생
님께서 직접 창명해 주신 것입니다.

 

지금 저희 이효석기념사업회와 연구회에서는 아버지의 육필원고와 서신, 사진과 1930년대
발표 당시의 초판본 및 원전, 그리고 이효석논문을 소장 관리하면서 이효석 문학을 연구하
는 분들에게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필요하시면 언제든 오셔서 보실 수 있습니다.

얼마전에 자서전을 내셨는데 출간하게 된 동기와 책 소개 좀 간략하게 부탁합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어렸을 때 비친 부모님의 면모들을 소홀히 할 수 없어 작가의 딸로서 무엇
인가를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을 회상하는 글을 <마지막 날의 아버지
이효석>이란 제목으로 출간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요절로 인해 지금까지 잘못 전해지고 있는 아버지의 출생과 생애, 아버지
의 문학의 본질을 독자들에게 정확하게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이 책 속에서 저는 아버지의
성품과 파란만장했던 삶, 그리고 작품세계와 집필 당시의 시대상황과 분위기를 당시의 사진
과 함께 자세히 나타내려고 노력했는데 이효석 문학에 대한 작품론이나 인물론을 깊이 있게
연구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모두 3부로 엮어진 이 책은 1부에서는 부모님과 함께 행복했던 어린 시절과 부모님에 대한
회상으로 엮었고, 2부에서는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어린 나이에 겪어야 했던 슬픔과 갈등을
다루었고, 3부에서는 집안의 맏이로서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노력했던 일들과 문단
원로들의 일화로 꾸몄습니다.

"남은 여생 올바른 이효석 문학 정립에 힘쓸 터"


남은 여생에서 꼭 하시고 싶은 일이나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 주시지요.

 

1983년도에 아버지 전집을 발간해 드릴 때만 하더라도 거의 완벽한 전집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동안 여러 편의 작품을 다시 발굴해 냈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을 다시 보완하여 작품이
끝날 때마다 출전을 전부 밝힌 총집대성한 이효석전집을 완벽하게 만드는 것이 제 남은 여
생에서 꼭 하고 싶은 일인데 이 전집 작업은 지난 4월부터 착수했기 때문에 곧 발행될 예정
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여 희망하고 기원하는 일이 있다면, 저의 아버지는 1942년 평양에서 돌
아가시면서 화장을 했는데 그때 아버지의 유골을 담은 나무상자는 아버지의 유골을 전부 수
습하기에는 너무 작았고 당시는 또 일제시대의 비상시라서 그런지 유골을 전부 수습하지는
못하고 결국 하반신을 아버지의 영혼과 함께 평양에 남겨야 했던 일이 지금 생각하면 너무
나 가슴 아픕니다. 그래서 내 생전 하루속히 통일이 된다면 부모님의 영혼이 살아 있는 평
양에 부모님을 모시는 일입니다.

 

작가의 딸로서 문학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문학이란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는데 언제나 희망과 유익한 꿈을 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의 아버지 역시 생전에 돈과 명예보다는 문학 속에서 항상 마음의 여유를 찾으려 하셨습
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문학이 푸대접받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우리는 우연이 아니게 문학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나라는 모두 선진국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도 경제가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만큼 문학도 많이 이해하고 사랑하는 국민이 되
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 중에는 악한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사회도
이제는 금전만능의 사고에서 벗어나 문학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밝고 맑은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에 응해주시고 고령의 나이에도 성실하게 답변해 주신 이나미씨에게 감사드린다.

 

홍지화: <giwha777@joins.com>

2002년 9월 5일 조인스닷컴 사이버리포터 게재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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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의 자료중엔 진부에서 호적부는 어떤 연유에 누구에 의해서 그랬는지도 알 수 없이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한다.(가족의 이야기 입니다) 그리고 봉평이 출생지라 주장한다면 아래처럼 사본한장 올려 놓으시고 주장 바랍니다.

 

 

아래 사진은 이효석의 서울대 학적 자료 사본입니다,

오른쪽 첫 입구에 주소록에 주소란에 평창군 하진부리 196번지로 정확히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이효석 스스로가 썼던 주소이며 그는 이 주소를 학적부 공문서 상에 사용하고 있다.

 

또한 그이 묘에 가족이 세운 묘비 뒷면에 그이 출생지가 새겨져 있다.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1632번지 함남 C지구 2열 78번)

 

 

<아래 사진은 이효석의 서울대 당시의 학적부로 맨 오른쪽에 그의 주소가 잘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