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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 이효석

[평창]이효석 선생 유해 평창 온다

[평창]이효석 선생 유해 평창 온다

 
 
 
  2014-9-26 (금) 21면 - 정익기 기자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유족들 이장 의사 밝혀
16년만에 고향 돌아와


1998년 경기 파주로 이장된`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 선생의 유해가 고향인 평창으로 다시 돌아올 전망이다.

군 관계자는 “25일 이 선생의 장남인 우현(77)씨와 통화한 결과 `누나인 나미(82)씨가 생전에 아버지의 유해가 고향으로 갔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며 가족끼리도 합의가 이뤄졌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군은 현재 경기 파주시의 함경도 실향민들의 집단묘역이 있는 `동화경모공원'에서 유족들이 유해를 이장해 올 경우 봉평면 효석문학관 인근에 마련해 놓고 있는 부지에 절차에 따라 안장할 방침이다.

이와 관련, 양근용 이효석문학선양회 이사장은 “고향으로 이장해 오는 것은 무조건 환영하지만 파주시와의 관계는 명확하게 정리하고 와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효석 선생은 36세때 평양에서 숨을 거둔 뒤 부친에 의해 평창군 진부면 하진부리 논골에 묻혔으나 73년 4월 영동고속도로 개설로 용평면 장평리로 옮겨졌다가 영동고속도로 확장공사로 이전이 불가피해지자 98년 이 선생 부친의 고향인 함경도 실향민들의 집단묘역이 있는 경기 파주로 이장하게 됐다.

당시 이장을 놓고 평창지역은 물론 예총도지회, 문협도지회 등이 성명서를 통해 “강원도의 자랑인 선생의 묘소는 고향이자`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문학적 금자탑을 쌓은 평창에 그대로 모셔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강력하게 반대했었다.

평창=정익기기자 igjung@kw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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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세백작  14.09.26.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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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던 이는 더 서러웠겠지만 먼 여로에서 다시금 돌아온단 소식에 무척이나 반갑습니다.
그리고 우린 이제라도 외로움에 지친 효석 선생의 묘소나 묘역 공원을 더욱 아름답게 가꾸어야 한다.
크고 성대한 요즘의 공사방법이 아니라도...

번동의 공초 오상순 선생의 비석 하나만 보아도 공초 선생, 그를 대신하는듯,  

 

좀 더 멀리 보면 ,,,수덕사 만공선사의

부도비처럼 작가나 조각가의 컨셉이나 지휘로 ...

좀 심벌적 상징성있는 묘역공원을 만들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효석선생의 생활자체의 모던스타일의 분위기나 또한 작품의 로맨틱(낭만)을 넘어서는  순수적 경향을 비춰볼 수

있는 그러한 공원을 만들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후세백작14.09.26.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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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나의 선배 조영웅 님은 선생의 묘소,  파주 묘역에 참배하였지만 봉평인들은 효석선생의 스토리를 테마로

전국에서 가장 긴 열흘간의 페스티벌로 한해 기백 억 창출하면서도 선생의 묘에 참배하였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이제 봉평은 메밀꽃만 우려먹지 말고 스스로 아름다움을 세워야 더욱 아름다운 고장이 될 것이다.
저의 이 표현이 거친 게 아니라 봉평은 그간 축제를 개최하면서도 앉은 자리에서 애헴하였지 실상 효석선생에게

찾아가 잔을 올렸던가??
매년 축제기념에 파주로 달려가 그의 묘에 잔을 올려야 격식에 맞지 않았슬까??

그러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어 내용은 알 수 없다.

이제라도 봉평은 대의를 존중하고 예를 갖추어 .앞으로 봉평은 아름다운 고장으로 거듭나길 희망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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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석 , 그는 죽어서도 이제 다시 몽매에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온다.

지난날 영동고속도로 확장에 밀려 또다시 이장에 통일이 되면 그의 선친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염원에 파주공원

묘원으로 이장 되었는데 이제 다시금 그의 고향 땅 평창으로 돌아옴이 유족들의 생각인 것이다.

 

그의 출생지는 현 기록으론 봉평이지만 또한 일설에 진부였으며 4살 때 봉평으로 이사하였고 봉평에서 2년 생활

양어머니와 생활 후 평창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평창에서 6년간 하숙하게 된다.

 

위의 기사에서 효석의 유해는 그의 부친에 의해 평양에서 봉평도 아닌 진부로 묘소를 만들었던 점도 그의 출생

지가 진부였다는 같은 맥락이리라.

이 모든건 뒤로 차치하고서 그의 유골은 당시 군정(郡政)과 여건의 아쉬움속에 고향을 등지고 선영으로 가기위해

피난민도 아니면서 철책선앞에서 20년 세월을...

 

이제 그의 유골은 고향으로 돌아옴에 누구보다도 그 자신이 제일 기쁘리오.

어릴 적 추억이 깃든.. 방학이면 관용 달구지 뒤에 타고 어드메쯤 갔슬 것이고 또한 걸어서 봉평 고향 집으로 당도

하기엔 바지가랑이 걷어 올리고 흥전 천을 건너 보았슬 것이고, 가끔은 파장후에 옆 면으로 이동하는 장똘뱅이들과

함께 걷기도 하였슬 듯,,,

 

100여리 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어둠이 내리고 봉평 시내를 들어 가기 전의 달밤에 비치는 산허리의 넓은 메밀밭에

메밀꽃은 소금을 뿌린듯한 느낌의 인상도 가졌슬 것이며 정적스런 달밤엔 차라리 고요하다

못해 어디선가 멧돼지의 거친 숨소리가 들릴 듯 한 ..... 한밤중의 길을 걸으며 느끼는 고요함도 이 모든 서정의

원천은 그가 유년시절 방학을 맞으며 ,,,

평창에서 봉평으로 걸어감에 늦은 밤에야 다다르는 봉평의 시골스런 느낌인 듯하다.

 

이렇게, 어릴 적 뛰놀던 추억과 서정이 묻힌 고향.

유년시절 이맘때쯤 가을이면 풍년이 들고 품평회의 농악대 꽹과리 소리에 그는 단짝 여학생과 평창 읍내 온 동내를

휘젓던 기억도,,,

그간 고향도 선영도 아닌 어느 분단의 철조망 아래 타관객지에서 십 수 년의 이유없는 기다림에 지쳤슬 그의 유골,

이제 이 고향에 마음을 내려놓고 영원한 추억 속에 편히 쉬소서.

 

봉평 이효석 문학관의 세미나에서 어느 젊은 연사는 역사편찬위원회의 매국노 규정도 아닌 가산 선생을 친일의

내선일체에 동조하였다고 까지 스스로 비판하면서 봉평 메밀 꽃 축제에 가산 선생을 결부시킨다면 이는 이중성의

모순을 가지는 이율배반적 행동이리라.   http://blog.daum.net/kkks1/27

 

 

그러면서도 이효석과 메밀꽃 필 무렵의 소설을  봉평 메밀의 대명사로 이번 유해의 돌아옴에 고무적인 봉평.

한 번도 찾아본 이 없던 그의 묘가 이장  된다는데 봉평인들이 좋아해야할 이유는 없는 것이 정상이라면

자기 필요목적으로 가산선생을 해하고  내선일체의 협력자라 욕하는 등 별 지랄 다 하는 봉평의 언 문인덜,,,,

앞으로 봉평은 구린 장사속 마음보다 진정 아름다움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면  더욱 아름다워 질

것이란 생각이다.

 

 

 

내선일체 []란?

 
백과 내선일체 엔하위키 미러

1937 일제() 전쟁 협력 강요

위해 취한 조선 통치 정책. 일본 조선 한 몸이라는 으로 이후 조선 대한

일제 식민 정책 표어였다.

1930년대 후반, 내선일체 정책 의해 조선인 일본인 결혼 내선 결혼 크게 권장되었다.

 

일제 우리 민족 문화 말살하기 위해 황국 신민이나 내선일체 같은 기만적 정책 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