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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 이효석

평창초교...모교의 교정에서,,

[ 평창초교 개교 100주년 기념비 앞에서,,,]

 

                                                                                                                 후세백작       12.06.18. 17:37  

 

 

 

지난 5월 12일  나의 모교인 평창초등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평창초교 화단  한켠에 기념비를 세우며 우리 평창초교가 배출한 최고의 위인으로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가산 이효석  선배님의 동상도 함께 건립하여 지역사회의 문화의 전당으로, 또한 자라나는 후배들에게 꿈과 희망을 실어주는 기념비를 제막하였다.

 

우선 이 글을 쓰기전에 이 기념비 제막위하여 관심을 가지고 찬조금이나 또한 제작에 헌신 노력하신 총 동문회 회장단과 선, 후배 동문 제위님에게 감사 드리며 이 글을 씁니다.

 

저는 2~3년 전에 앞으로 다가올 평창초교 100주년에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가산 이효석  선배님의 동제막 안의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http://blog.daum.net/kkks1/361>

 

가산 선배님은 부자나 정치인의 한 시기의 영예가 아닌 문학사의 한 장르를 개척하신 크리에티브 <창조자>의 한 분으로 대한민국이 존속하는 한 그 이름을 영원히 빛낼 지성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 동문 여러분은 뜻을 모아 가산 선배님의  업적을 기리며 또한 사회적으로 자랑으로 나는 후학들에게는 힘과 용기를 북돋아 주는 한점의 모티브로서 동상제막이 얼마나 뜻깊고 보람된 일 니까??

 

100주년 동문회기념 잔칫날에는 저는 참석을 못 하고 후일 모교 교정을 찾아보았습니다.

나는 기념비를 보며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규모에 노트와 연필로 한 오브제를 통하여 메세를 전달하고자 하는 기념비에 공감하며 그러나 그 옆에 가산 선배님의 동상을 보는 순간 그 좋던 미지는 싹 가셔지고 언짢은 기이었는데  이는 가산 선배님의 흉상의 동상에서 굴을 보는 순간 느낀 감상은 이 조각의 얼굴은 가산 선배님의 이미지가 아니란 느낌 때문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후세가 보는 기념비의 다른 생각을 게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문제의 생각은 이 기념물의 크기와 혹은 다른 방법 등의 기념비를 제막하는 등 다소 예산에 직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이 조형물 내에서 성의측면의 마감등 질적인 문제를 파악해 보도록 합니다.

 

 

* 흉상의 인물은 이효석과는 전혀 닮지 않았다.

 

우리 모두들 가산 선배님을 직접뵙고 그 기억으로 이 동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한 컷의 사진이 인터넷에 있는데 그에 대한 사진의 기억뿐이지만 유감의 말씀은 이 동상은 사진과는 이미지가 판이하다는 생각입니다.

 

 이효석이효석

가운데 작은 사진이 인터넷에 있는 유일의 사진이며 이 사진이 세로로 길어진듯 하여 우측 끝의 사진은 인위로 가로의

비례를 조금 넓게 하여 보았다.

그리고 아래는 이번에 제막된 모교의 흉상의 얼굴 입니다

 

우선 이 흉상은 어느 작가의 작품으로 이를 논한다는 것은 실례인 것을 알지만, 이것은 그의 작가적 시리즈 물이 아닌 지정인에 대한 복원적 사실이 먼저인데. 제멋대로 된 혹이나 그가 즐겨하던 특유의 시리즈적인 작품으로 해석해야 할까??

참으로 웃기는 조각엔 사실적인 역사의 인물의 묘사의 조각으로 인물과는 판이한 느낌이기에 부득이 그 원인을 파헤쳐 보는 것이다.

 

이 사진과 동상의 얼굴에서 우선 시각적으로 차잇점은 눈, 코, 입이 제일먼저 감상자의 눈에 들어 올 텐데 이에 사진과 닮은 점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저의 견해로 상세히 논한다면 사진에서 보면 이효석님은 목을 빳빳이 세웠지만 동상에서는 자연인의 목 그대로, 그래서 옆에서 보면 해부학적으로 목이 앞으로 15도 굽는 상태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앞에서 보면 동상은 턱이 사진보다 앞으로 쭉 내밀고있는 느낌인데 이로 인하여 얼굴이 뒤로졎혀진 상태이다.

상과 사진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우선 중절모의 눈에 보이는 차이가 크며, 사진의 귀는 당나귀나 귀라 부르며 턱 또한 동상에선 주걱턱과 사진에선 하악골의 아래턱은 유선형 턱인데 비해 동상의 턱은가로가 넙적한 주걱턱을 만들고 있다.

 

동상에서는 눈의 형태가 한쪽이 오므라드는 불규칙  타원의 촌스런  눈을 만들었는데 사진속의 이효석 눈은 위 아래 타원형 눈으로 귀티가 나는 눈인듯 하다.

또한 눈과 코를 연겨하는 미간의 경사가 동상에선 직각을 이루나 사진에서 보면 완만한 경사각을 이루미간의 폭이 넓어짐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동상의 입술은 아랫입술이 강렬한 선으로 더 드러나 보이는 반면 사진에선 아랫입술의 크기는 동일하더라도 그 볼륨엔 현저한 차이가 있으며 동상에선 광대뼈에서부터 턱까지 한 선의 고저로 음영의 차이를 보이며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일반의 작품조각에서 나타내는 데포름(변형)의 기법을 도입하여 얼굴 볼륨의 고져의 음영을 주는 작가적 임의의 기법이지 사실묘사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가져다 주는것이 이 인상의 큰 차이점의 원인인 것이다.

 

아마 막말을 한다면 중절모와 동그란 안경테만 닮았는데 혹 동상 제작자는 이 사진이 아닌 가산 선배님른사진으로 작업을 하였슬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떠한 사진이라도 그의 얼굴의 특징은 변함이 없다.

 

이효석의 사진에서 보이는 느낌은 분위기는 차고 내성적이며 이지적이며 또한 고고하고  귀족적자태의 긴 얼굴속에 준수하며 도도한 분위기를 나아내는듯 하다, 하지만 이 동상의 이미지에서 우리가 느낄 수 감정은 그러한가??

아마 이 동상의 얼굴 이미지의 느낌이란 넙적한  턱에서부터 어떤 혁명가적 강렬한 인상의 느낌을 받는 하다.

 

이를 비교해서 결론은 이 흉상제작자는 작가라는데 가산선생의 이미지에관한 기초적 작업의 고증 준비가 하고 선생의 세계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무의미적 사진으로 이는 마치 조각가가 가산 선생의 사진을 필요치 안는, 작가의 자신의 씨리즈의 유산물처럼 제작한 것이라 판독되는 것이 나의 이해이다.

 

우리에게 달랑 한장 남아있는 효석의 사진한장에 비슷하게도 처리못한 조각기법...차라리 내가 조각했다면 그러진 않았겠다. 본인은 조각을 전공하였기에..

 

 

* 흉상기단의 석물제작의 이해 

 

     

 

위 흉상의 기단의 좌대로 약 5톤 정도의 통석으로 마련했다.

이 기단석의 상판 면은 한쪽으로 약 3cm 정도 기울어져 있다. 원석이라 다듬질이 힘들어 그랬슬까??  아니면 이상하게도 지금의 이 기울어진 상태의 좌대 위에서 흉상은 똑바로 선 것이다. 그러면 아마 흉상이 오른쪽으로 기울기가 삐뚤어져 이것을 수정 보완키 위해서 좌대 왼쪽면을 깎아 내린 것일까??  그것은 더욱 웃기는 일이다.

 

그리고 또한 왼쪽의 세로의 수직선도 위쪽에서 귀가나 삐뚤기 값이 대략 2cm 정도이다.좌대라고 수직이고 직각일 필요야 없겠지만, 이 좌대는 분명 직각의 면을 나타내고자 함이 기준일 텐데 이런 삐딱이 좌대를 만든 것은 4각 6면체의 여러 면을 다듬기 위해서는 인치나 크레인으로 돌아 굴리며 다듬기 하여야 원석에서 그 수평, 수직을 완벽히 소화할 수 있슬진데 아마 그러한 여건이 아니라면

그것은 성의의 문제일 것이다.

여기서 성의 문제라면 기계 시설을 따진다면 아마 그 옛날에 10톤이 넘는 가공석들의 문화재 마감을 예로 볼 수 있다.

 

또한 통석에 글자를 새기기 위해서는 기계조각을 할 수 없기에 명판의 판석을 통석을 깎아 홈을 내고 끼워 넣기 하였다.

그런데 둥그런 그라인더 칼날로 이 통석의 안쪽 직각 홈을 파기 위해 통석에 칼금이 어지럽혀져 있다. 그라인더로 직각의 귀 홈을 판다는 발상이 무리하였고 그렇게 한 자체는 날림공사이며, 각이 불가능한 통석이라면 시간이 걸려도 정으로 쪼아야 했다.

 

한 예를 든다면 평창에서 가까운 주천의 법흥사를 모두들 다녀 보았으리라. 그리고 경내 한 구석에 있는 징효대사의 비석을 보자.

천 년전에 2m가 넘는 이 비석에 각자된 비문의 한문을 모를지라도 그 비문을 조각한 성의를 느낄 수 있는것이다.

아마  당시로는 10수년의 세월 동안 석수장이나 스님이 메달려야 될 일인데 그 인내에 감동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 비를 보는 감상이다.

그러나 요즘은 기계로 돌을 자르고 연마하고 각자하는 세월이라 자칫 무성의 한 점도 노출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평창군 입찰공사라면 납품이 되었슬까??그렇다면 입찰공사라면 이런 방법으로 공사하였슬까??

참으로 쓴 웃슴이 안 나올 수야...

 

* " 메밀꽃 필 무렵"중 인용문장의 이해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죽은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온통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듯이 흐믓한 달빛에 숨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의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위의 문장은 그의 작품 <메밀꽃 필무렵>이란 소설속의 한 문장으로 이는 낭만주의적 작가의 서정로 아마 울 나라에 이만한 글솜씨의 서정성의 표현은 더 없슬듯 하다.

그런데 언더라인을 친 마지막 문장은 제외되어 있다.

이 소설에서 보면 이 마지막 문장 다음은 다른 이야기라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어 이것이 서정적 묘사의 마지막 문장이란 점을 알 수 있다.

 

즉, 이 마지막 문장 " 붉은 대궁의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라는 문장윗 문장과는 동떨어진 듯한 느낌이지만 이 문장이 위 수식어들의 주체가 되는주체부분이 빠져버렸다. 

그래서 위 조각의 문장은 한갓 수식에 불과한 목적 없는 미사어구의 미아같은 느낌이 되어 렸다

이 작품은 인간 심리의 순수한 자연성을 허생원과 당나귀를 통하여 표출하고있는 낭만주의 소설이다.

또한 낭만성과 탐미주의 성향이 어우러진 이효석의 문학의 대표작이다.

이효석은 당 시대의 경향등에 미루어 이 소설에서 서정적 경향이 많으며 암시와 추리 등의 요소위에 한국적 순수 소설을 지향하였던 것이다.

 

 

* 기단의 기념비제작 해설의 명문의 이해

 

 

 

위 기념비 해설의 명문을 읽노라면 무언가 긴 문장을 짧게 뭉뚱그리다 주어나 목적어 등이 빠진것으로 보이는데 이로써 한 문장을 이루지 못하는 글이 되어 버렸다.

"산과 강 하늘은 노산과 사천강의 깨끗한 평창을 그리며"라는 글귀에서" 책과 연필을 형상화하여 산과 강 하늘은" 이라고 하였는데 이 문장의 연결상 무엇이 산과 하늘인지 그 대상체가 이 기념비내에 오브제들을 지칭 하였슬 텐데 빠져서 더 이상 알 수 없는 완전한 문장을 이루지 못하였다.

 

또한"그 위에 우뚝솟은 우리 학생들의 기상과 창조를 표현하며"에서  이 자체로 목적의 문장이 도 있지만 그위에 우뚝솟은 그 무엇의 목적어가 생략되었슬듯 한데 그 목적어가 생략 되었다면 그것이 암시하는 수식의 목적부분은 없다.

 

"화강석 돌과 스텐레스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나타내며"에서 그 나타냄이 모든 사람들이 알 수일반 상식이 아니라면 화강석 돌과 스텐인레스는 이 3개가 하나로 뒷 부분의 과거 현재 미래의 하나지향한 다는 말인듯 한데 얼핏보면 앞의 세 요소가 하나씩 뒷부분의 하나씩귀착된다는지 알 수 없또한 "나타내며"란 단어는 수동과 능동 동시에 포함하기 때문 화강석 등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수동느낌의 단어 사용보다는 본인의 의지를 나타내는 "화강석 돌과 스텐레스로 과거와 현재 미래를 표현하였으며"라면 전혀 뜻이 다른 맛의 문장으로  능동의 의지를 나타낸 단어로 더 적합하다.

 

즉 화강석등은 과거 현재 미래를 표현하였으며 하면 자연적으로 나타내며 하는 뜻보다는 인위적 의지글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 약력사항의 논제

 

 

 

위 약력사항에 대부분 그러하듯 메밀꽃 필무렵이란 소설을 발표하던 1936년에 " 평양 숭실 전문학교 교수 부임이라고만 적혀있다. 그러나 그는 1938년에 평양의 대동공업전문대학 교수를 재임했었다.

 

옛날 관선 군수시절에 어느 시에서 과장하느니 철령이북 갑산에 가서 군수 한번 해먹고 오면 죽어서칠성판에 군수 아무개 하지 않턴가??위의 약력사항을 간략히 할땐 대동공업전문대학 재임이 더 났지 않을까 한다.

 

숭실학교 교수(1936 - 1938)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수 (1938 - 1942)로 재직하면서


 

* 흉상뒤 작가 기명의 방법론

 

 

 

이 흉상의 뒤 기단 가운데 작가의 이름표시가 되에 있는데 교수라는 지칭어 비슷하게 썼다. 아마 적으로 권위를 나타내려는듯 하였지만 교수란 학교 내 계층, 서열의 표시일뿐인데 갤러리등의 그림전시에 교수라 지칭하였던가?? 작가 아무개라 표시하여야 존칭이고 약력사항으로 교수재임이 표시되어야 한다.

작가가 만들지 교수가 만들지는 않는다.이런것들도 모두 권위주의의 산물로 디지탈 시대엔 사라져야 하는데 추방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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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서  평창초교 100주년 기념비로 가산 이효석 선배님과 동상과 기념비의 매치에 자라나는 초들의 눈높이에 맞도록 연필과 노트를 소재로 매치한 동상 건립의 아이디어는 참신하였다.

 

동상을 감상으로 이해하여 보자면 첫눈에 들어오는 연필 기둥의 의미는 지금까지 100년의 역사위앞으로도 무한대로 이어가리란 뜻으로 마치 교가속의 가사처럼 " 노성산과 사천강의 정기를 이어받아 억만년 억누리에 이어나가자"는 상징적 오브제로 그 끝이 뾰족함은 모든 동문들이 화합, 단결하여 통일기상을 보여주자는 힘찬 의미의 표출이며 아래의 굴렁쇠같은 동그란 원통 두개는 앞으로 100주년무한대의 수학적 기호를 차입하여 상징적 수법으로 나타내었는듯 하며 그 두개가 하나는 작고 또 하나는 커진것은 점진적으로 확대 발전하는 모습으로의 무한대란 개념을 읽을 수 있다.

 

또한 그 옆에는 가산 이효석 선배님의 흉상과 "메밀꽃 필 무렵"속의 명문장 한 구절을 인용 조각다.

이 문장은 우리 문학계를 대표하는 서정성의 명문장으로 이는 아마 평창초교를 다닐적에 방학을 맞아 아버지가 진부면장 재임시 관의 전령의 우마차 편이나 걸어서 100 여리 봉평 집으로 당도하는 밤중의 빛 속의 봉평입구의 야산의 산 허리에 메밀밭의 전경의 기억에 대한 향수이리라.

 

그럼 우리 국문학사에 남긴  가산선배님의 족적은 무엇일까??

가산 선배님은 우리 평창초교가 낳은 시대를 넘어서는 지성으로 우리 국문학사에 찬연히 빛나는 위인니다. 또한 이러한 우리평창초교와 가산 선배님의 이야기가 안내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며우리는 가산 선배님을  랑으로 기리며 자라나는 후학들에게는 면학의 활력소를 불어 넣어야 할 입니다.

이것이 제가 오늘 모교인 평창초교에서 느끼는 감정인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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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사진은 평창 상인조합에서 평창 올림픽 시장 뒤켠에 세운 이효석 기념비이다.

소재의 선택도 좋은 간결하지만 보기에도 좋은 기념비이다.

 

기단석이 너무 크고 투박한 감은 느끼는데 이는 위의 기념비의 글귀가 눈보다 상향 15도 이상이 되게끔 처리기 위해서 높여진듯 하다.(모든 물체는 15도 올려볼때 그 무게감을의 효과가 있다) 이렇게 비문을 높이려 기단석을 높이자면 이중의 기단석이나 화단을 높였으면 더욱 간결하게 처리 되었슬듯 하다.

그리고 비문에 그의 약력사항에 부인 "이원경"과 결혼하다는 부인의 이름의 "이경원"이기에 오자가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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