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석의 진부시대(1부)
후세백작 2019,0222 03;57
강원일보 2019, 01, 25 (금요칼럼)에 기고한 전인화(전 관동대 교수)의 "다음에 내리실 역은 '이효석 역'입니다"의 글을 인용합니다.
----------<인용부>------------------
"다음에 내리실 역은 '이효석 역'입니다" 이 안내방송을 듣는다면 평창에 또 하나의 문화유산을 만나는 기분일것이다.
나는 KTX 경강선 진부역이 '이효석 역'으로 개명되길 희망한다.
가산! 이효석. 그의 본적이 평창군 진부면 하진부리 196번지이기 때문이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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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사는 춘천의 김유정 역처럼 강경선 ktx의 진부역을 이 고장 문인의 고향으로 앞으로 "이효석 역"으로 개명하였으면 좋겠다라는 기사입니다. 이러한 신문 기사중에 "가산! 이효석. 그의 본적이 평창군 진부면 하진부리 196번지이기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기사는 조금 어리둥절하게 일반적으로 알기에는 사단법인 "봉평 이효석 문학 선양회"의 작가 연보에는 "1907년 2월 23일,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창동리에서 부친 이시후(李始厚)와 강홍경(姜洪卿)의 일남 삼녀중 장남으로 출생"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작금의 인터넷등에서는 그의 출생이 진부와 봉평의 두 곳으로 엇갈리고 있습니다만, 이러한 혼란스러움에 필자는 전기 작가는 아니지만, 예전의 글에서 객관화된 자료로 진부나 봉평에서 그의 호적을 열람해보면 되는 것은 아닐까 하였으나 진부나 봉평은 그의 호적을 제시한 점은 없습니다. 하지만 아래의 글을 통하여 충분히 이해 할 것이기에 진위의 판단은 독자들에게 맞기겠습니다.
이효석의 부친이 진부면장을 10년 하셨는데 진부면이 출생지라면 호적대장엔 그의 호적이 있어야 할텐데 없다고 합니다. 그것은 아마 6,25 당시의 진부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 점으로 진부는 지리적으로 물자 수송의 강릉비행장의 전략적 중요함에 홍천과 대관령을 넘는 운두령의 비상작전 도로에 지리적 중요 위치를 점하기에 6,25당시에는 아마 군인지대였던듯 합니다.
오대산은 '49년 이호재 휘하의 북한 강동정치학원 출신의 야산대라는무장공비는 1병단뿐만 아니라 2, 3병단의 무장세력까지 10여회 오대산 루트로 내려오며, 인근지역에 수많은 수탈과 학살등에 대화 신리에서 진부 봉산리까지 평창경찰서 경찰과 군의 합동작전으로 간첩을 소탕합니다.
일 년후 6,25가 발발되어 태백산맥의 동해안으로 내려오는 북한군 침공에 국군 7,9사단은 수항천 골짜기로 내려 밀리고 적 치하에 약 3개월 떨어지게 됩니다, 또한 수도 서울로 침입하리란 에상을 깨고 중공군의 6차 공세는 방태령에서 운두령으로 침입하자 국군 3, 0사단은 진부까지 퇴각하고 이러한 패전에 책임을 물어 벤플리트 장군은 횡계고지 현장에 내려와 당시 진부주둔의 3군단사령부를 폐지 시키고 한국군에게 국지적으로 전개되던 군사작전권마저 회수합니다.
그리고, 강릉주둔의 수도사단의 한신 연대장은 중공군보다 한 시간 먼저 대관령 고지를 선점하며 아군 12명의 희생에 천백여명의 중공군을 사살하는 그 유명한 대관령 전투에 힘입어 중공군을 퇴각시키며 하진부, 속사리 전투등으로 소탕하며, 이로써 강릉을 급습해 보급물자와 미군 화약까지 노리던 중공군은 크게 위축되는 전사를 남기는 곳입니다. 이후 국군은 파로호 전투에서도 대승을 가져오게되는 깃점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 이 글은 진부의 6,25전사를 구체적으로 보는 모습이 없기에 개괄적으로 쓴 것입니다)
이렇게 6,25 전시하의 진부는 대관령을 넘는 병목지로 마치 월남전의 다낭 비행장 사수의 짜빈동 전투처럼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기에 많은 전화를 입은 곳이다. 이효석의 출생지이며 또한 아버지 이시후씨는 진부면장까지 역임하셨는데 진부면에 호적이 없다 한다면 아마 이러한 사유의 6, 25당시의 면사무소의 호작의 손실인듯 합니다. 그리고 6,25때 호적이 소실되면 동네의 증인이 있어야 호적을 본적지로 부활시켜 주었지만 생존자에 한해서 입니다. 그래서 가산 선생의 호적은 부활되지 못한 듯 합니다.
이러한 사정인지는 몰라도 면사무소에 호적이 남아있지 않다면 그럼, 또 다른 방법으로 공적인 자료로 평창공립보통학교(현 평창초교)나 서울대학교에 생활기록부에 당시에 본적지가 기록되어 있슬터이고, 또한 지금 파주 묘원에 있는 가산선생의 비석은 본적지의 출생지가 조각되어 있슬 것이기에 이런 기록에서 유족분들의 어떤 입장일까?? 이런 지적을 하였던바 아마 이 부분은 본인보다 먼저 이를 갈파한 분이 계셨던 듯 인터넷상에 서울대 생활기록부 사본(서울대 학적부 발췌분. 2002년)이 흘러 다닌다. 물론, 이 부분은 지금으로서는 알권리에 개인의 사생활이기에 타인은 열람조차 안될텐데 이는 아마 오래전부터 이러한 규명을 노력하신 분들이 작업하였던듯 하다.
그리고, 다른 점으로 봉평이 가산 선생의 고향이란 이야기중에 하나를 인용해 보면 '90년대 초에 출판된 유흥준의 「나의문화유산 답사기」란 책 2권에서는 어디서 출처하였다는 명시도 없이 항간에 주어들은 이야기인듯 효석의 고향이 봉평이라고 서술하고 있으며, 아마도 당시 이러한 내용이 레져여행의 붐속에서 역사관점의 시사성 이야기들을 실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라는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기에 효석의 출생지가 봉평이라는 이야기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듯 하다.
유흥준 선생은 「나의문화유산 답사기」라는 책에서 전국에 무수히 많은 소재의 글을 쓰지만 정작 처가인 평창에는 봉평의 메밀꽃 필무렵의 가산 이효석의 이야기 단 한편만 마치 3류 극장의 대본처럼 오류로 베껴져 있다.
하지만, 평창엔 여러 이야기거리도 많다. 마치 에수의 잉태를 이야기하는 우물의 가브리엘 교회처럼 판관대가 율곡의 잉태지라는 점에 그럼 율곡의 고향은 어디일까?? 평창 천동리의 김삿갓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나 정선 아라리의 원조인 한치 뒷산(미탄면 평안 2리)의 아라리의 이야기나 또한 본인은 사가(史家)도 아니면서 오대산 수항천 골짜기에 위치한 삼국유사에 나오는 자장율사의 말년 거처지 "수다사지"에 대해서 약 6만자의 글을 쓰고 있듯이 평창의 무궁한 소재에 선생은 모르는듯 하며 이효석의 스토리도 정론으로는 쓰고 있지는 못하는 듯 하다.
아마도 베스트 셀러였던 동 책에서 서울고보시절의 서울땅을 밟은이래 한번도 고향엘 내려온 적이 없다고 하는 고향 상실증의 이야기를 인용하는데.. 이 점이 무엇일까?? 이렇게 고향을 상실하고서도 굴절된 심성속에도 고향에 대한 빼어난 시정과 맑은 문체가 가능할까 의심이 되기에 필자는 작가의 가정사를 들먹일 필요야 없겠지만 이러한 결여된 요소는 그의 문학적 이해를 가늠치 못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올바르게 서술해야 그의 문학의 이해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동 책 「나의문화유산 답사기」2권 P114에서는 「이효석- 문학과 생애」 (민음사,1992) 이상옥 교수가 쓴 글에 다섯살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를 따라 진부서 서울로 올라갔던 (이는 4살때) 일과 봉평에 내려와 2년 생활 후 현 평창읍의 평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하숙하였다. 이것이 효석으로서는 고향을 아름답게 간직하지 못한 이유였던바 고향에 정붙일 없었던 것이라하며 이러한 것을 고향 상실증이라 한다며 나름대로 작가상과 인간상을 잡아낼 수 있다 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친모가 아니기에 고향을 한 번도 내려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이 책에서 이상옥 교수가 인용한 부분은 이효석의 자전적 이야기인 「영서의 일기」에 한 부분 발췌한 것이지만, 작가는 이 책을 읽지도 안은채 비퍙하고 잇는듯 하다. 왜냐면 동 책속에서는 유년시절의 두 부분의 삽화가 그려지고 있으며 앞 부분의 스토리는 아마도 대학시절 방학때쯤으로 추정하는 진부에서의 삽화가 그려져 있는데, 이 이야기에서는 당시 여학교는 경성에서나 있슬듯하며 이러한 여자 친구와 꿀을 따러 다난것은 하루 아침에 친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선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상옥 교수가 밝히는 고향상실증의 한번도 고향을 다녀가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오류란 점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오류의 글을 만약 당사자인 이효석이 보고있다 할 경우 그 분의 기분은 어떨까하고 한 번 생각해보면 과연 타인의 생의 글을 어떻게 써야 되는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당사자의 입장에서 글을 써야 하는 것이지 자기가 알고 있는 부분만으로 남의 이야기를 판정을 내리면 엄청난 오류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이런 오류로 혹간 미래에 효석의 문학은 불안정 정서라는 괴상한 논리가 불거지면 어찌할 셈인가??
본인은 일련의 가정사를 들추기 보다는 이러한 고향상실론같은 비 논리로 가산 선생의 소설에대해서 와설(訛說)이 또 있슬 수 있기에 이를 이해코져 하는 것입니다. 이상옥 교수는 이효석 생애전에서 그의 이야기를 다룹니다또한 그냥은 이해가 안될점은 지난 스크랩글에서 (이효석의 본관은 전부입니다. http://blog.daum.net/kkks1/1550)에서 그의 고향 상실증이 무엇인가 답을 내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고향집이 봉평이 아니고 진부라 한 점은 기실, 효석의 부친은 진부면장으로 부임시 서울서 봉평으로 이사했지만 다시 진부로 이사 했기 때문이다. 이 점을 볼 수 있는 글은 시인 이영춘(강원여성문화예술인연합회장)의 "이효석 그는 누구인가"라는 글에서(http://cafe.daum.net/pcmunin/1KQg/114 진부할머니라고 인용하고 있다.
효석의 아버지 이시후씨는 진부면장으로 부임시 서울서 봉평으로 이사했지만 "진부 할머니"라 불리는 것은 봉평에서 진부로 다시 이사했음을 알 수 있고 10여년 면장 재임후에는 진부에서 농사를 지으며 대서소도 운영하셨다 한다. \
(고향상실증이라고 학자들까지도 이 소문에 끼어들어 어떠한 결론을 내어 단정지었는데 이 결론의 이야기를 만약 당사자 이효석이 들었다면 어떤 기분이었슬까 생각하며 학자들은 「영서의 기억」이란 자전적 글을 읽었더라도 이 글에서 평창의 서정등을 완전히 이해못하고 오류한듯 합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영서의 3부작 감상다음에 마지막으로 자전적 넌 픽션의 「영서의 기억」에서 고향상실증이란 단어가 오류란 점을 확실하게 입증해 드리겠습니다)
자전적 글 「영서의 기억」속에서 효석은 나의 반생을 푸근히 싸주고 생각과 감정을 그 고장의 독특한 성격에 맞도록 눅진히 길러준 고향이 없다. 그것은 고향의 관념이 희박하고 세계주의와 또한 초라한 고향은 눅진하고 친밀한 회포가 뼈속까지 푹 녹아들 여지가 없는 것이기에 거기에는 찾아야 할 진정한 고향을 잃어버렸다 한다.
고향의 생각이 일상의 생활에서 떠 오른적이 없고 자별스럽게 마음을 녹여준적도 없다. 이방인같은 서글픈 느낌에서 백석의 [사슴]을 읽고 잃었던 고향을 다시 찾은 느낌이라 한다(효석은 진부 출생으로 4살때 서울로 올라가 6살때 봉평으로 다시 이사하였으며 8~14세까지 평창에서 기숙하며 보통학교를 다녔고 다녀간 것이 고향과 향리에 대한 기억 전부이다라 서술하였고 친척도 없는 이곳에 정붙을 리도 없었던 듯 하다)
「영서의 기억」 책속에 가장 또렸한 기억으로 책 후반부에서 평창초교시절 가을 품평회에 소녀 친구와 함께 밤 늦게 쏘아다니던 추억들이지만 이 책의 전반부(앞 부분)에서는 가끔 한 철씩 시골에서의 추억중에(이는 방학때 진부에서의 추억인듯) 여학교를 졸업한 소녀와 꿀을 따러 갔다가 늦은 밤이 되어 소녀네 머슴이 이등교 아래서 마중할때의 모습등이 자세하게 그려진바 그는 때때로 고향집으로 내려갔던 자전적 서술 부분으로 그는 도시에서의 기억 시골에서의 기억들이 있다고 서술하는 바 고향을 내려가지도 않는다는 이야기이 만연되어 고향 상실증이라는 항간의 이야기와는 상충되는 모습이다.
이런 맥락의 반증으로는 고향을 배경으로 하는 「메밀꽃 필 무렵」과 「산협」, 「개살구」과 자전적 이야기인 「영서의 일기」에 당시 평창의 시대이 유감없이 나타나고 있다. 일제 강점 이후 10년간 전 국토를 측량하며 대략 평창군은 1914~15년에 실시한듯 하며 이로서 토목사업 신작로를 만들고, 부대적인 사방사업으로 관계수로와 畓의 농지가 생기며 평창초교 고학년 시절엔 읍내에서 가을철엔 야시장이 열리며 봉평을 무대로 하는 「산협」과 특히 진부를 소재로 하는 「개살구」에서 배경적 소재에는 서울 유학시 방학철에 시골에 네려와 놀던 기록속에서 당시 시대상을 잘 나타내고 있는데 누가 고향상실증이라 말함이 타당성 있는 말일까??
효석의 또 다른 자전적 글인 「나의 수업시대」에서 평창보통학교 입학전에 봉평에서의 2년간 유년기 시대에 추운 겨울 아침에 추위에 병풍을 둘러친 윗목에가서 추월색 책을 들고와 어머니가 읽어주셨던 대목이다. 이 시기는 1915년대로서 당시에 한글을 아는 여성은 과연 얼마나 많았슬까?? 아마도 한글을 읽을 수 있던 신 여성으로 중요한 것은 효석의 문학적 재능을 일찍 간파하고 동화책을 읽어준 점이다. 요즘 아이들에게 동화책 읽어주는 어머니는 보편화 된듯 하지만 그 당시에 이렇게 책을 읽어주는 점이 효석의 재능에 도움도 되었겠지만 또한 어머니와의 다정했던 사이도 엿볼 수 있다.
여기서 볼때도 항간의 고향상실증이란 단어는 이러한 종합적 진단을 하지 않은듯하며 그러기에 본인으로서는 이상옥 교수의 인용글은 이러한 점에서 전반점인 넓은 폭의 이해를 못하고 서술한듯한 것으로 이해 불가이다.
인터넷 등지에는 효석이 서울로 유학 후엔 한번도 고향을 찾아가지도 않았으며 학비도 제때에 올라오지 않아 알바를 하는등 이런한 이야기는 사실일까?? 아마도 아버지가 면장 퇴임후 진부에서 농사를 지으셨다는데, 농사란 다달이 돈을 만지는게 아니라 때로는 좀 늦어지고 알바도 한 것이 아닐까?? 그러기에 한 모습의 단편적인 이야기가 확산되어 이런 부분들을 보며 고향상실증이라 단정한다면 그것은 효석의 문학적 이해의 단절을 가져올 수 있는 매우 잘못된 처사이리라..
또한 이희승, 유진오 선배와 관동팔경 여행시 방아다리 약수로 가며 진부를 지날때 이곳이 내 고향이라 이야기 하는 당사자 효석도 이런 이야기를 할때 얼마나 아렸슬까 아니면, 우리네 속된 표현처럼 부모님은 허리뻐자게 농사지으셔 학비를 보내주시는데, 방학이라고 친구들과 유람다니며 찾아 뵙는 것이 예의는 아닐것인지?? 하는 마음이 앞서지 그것이 고향 상실증이라기보다는 찾아뵙지 못하는 고향에 염원은 얼마나 깊었슬까 하는 점으로 이해하는것이 오히려 더 깊은 사려인듯 하다.
자신이 머물던 이념의 관념적 사조(ism)를 탈피하여 새로운 세계로 귀환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점에서 미술 사조를 하나 예로 본다면 우리가 잘 아는 화가" 렘브란트'는 궁정화가였다. 그에게 왕은 이번 만찬회까지는 왕과 왕비어 어떤 자태의 그림을 주문하였지만 렘브란트는 연회장에 왕과 왕비가 없는 자연만이 존재하는 풍경화를 제출하였다. 당시까지 풍경화는 자체적으로 그림이 아니란 인식으로 풍경화는 누구도 그려본적이 없고 풍경이란 인물 뒤의 배경에만 존재한다고 보는 상식이 기준인 사회였는데 렘브란트는 이러한 관념의식을 탈피하고 자연을 대상체로 하는 풍경화를 최초로 그려 제출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렘브란트는 궁정화가에서 쫒겨나고 끼니를 굶는 화가가 되지만 그는 당시까지 인간의 통속적 관념의 세계를 탈바꿈시켰다. 이렇게 바꿔지는 인식의 전환점은 위험하리란 판단에 사람들은 언제나 일상의 조그만 고정관념의 틀속에 안주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사유의 한계에 치우쳐 그들의 삶은 고착화 되지만 작가 이효석은 시련속에 끊임없는 도전으로 이데올르기의 변화를 추구하여 고향의 서정으로 다가와 불후의 명작 「모밀꽃 필 무렵」의 소설을 그려낸 것이다.
필자로서는 한 작가를 비평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닙니다만 가산 선생의 문학세계는 초기 동반작가 시절 당시 사화사적으로 태동하는 좌파적 이데올르기의 경향으로 관념적 구호를 외치는 현실과 동떨어진 경직된 관념의 세계에서 가식과 허구를 그를 탈피하고 즉 일상이 관념적인 공간에서 선동적인듯 좀 과격해지는 경향의 문학에서 스스로 자아의 모순을 인식하고 자기 본연의 생활로 다시 돌아온 그로서는 자연이며 이상이 아닌 현실이며 그가 찾아갈 수 있는 곳은 언제나 푸근히 감싸주고 포용하는 고향인 것이다. 이로서 그는 우리나라 단편소설의 대명사화된 순수문학의 「메밀꽃 필 무렵」을 탄생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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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이효석의 진부시대 2부에서는 영서의 3부작이라 일컷는
「메밀꽃 필 무렵」 「산협」과 「개살구」 를 통해보는 당 시대(1930년대)의 평창의 사회상을 통해보는 평창의 역사적와 정체성의 이해를 키 워드로 이야기 하겠습니다.누구에게난 고향이란 어머니의 모성인것처럼 효석에게도 고향 평창이 있었기에 깊은 애정의 눈으로 관찰하고,영서의 3부작의 소설에서 평창서정을 예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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