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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昌歷史 史觀定立

김삿갓에 대한 저의 생각

김삿갓에 대한 저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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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백작 2017.05.31.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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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해거사 17.05.26. 23:40

익균이 천동리에 살았고, 마지리에 김삿갓시비가 있다는 말은 처음 듣습니다. 소생이 지금 김삿갓

전기소설을 쓰는데 참고하려고 하오니 보다 상세한 정보를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익균의 형 학균은 제가 조사해보니 20세에 일찍 죽은 것으로 나옵니다. 김삿갓은 재혼을 했고,

손자는 1863년 죽은 이후에 태어났습니다. 연락을 당부드립니다.
010-3755-4396 황원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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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해거사님 안녕하세요??

답이 좀 늦었습니다.

 

  김삿갓에 대하여 일반론 이외에 특히 참고하실 자료가 저에게는 없고, 양평의 후손들 까지 알고 계시는데 혹시 영진, 택진등 가족사를 몰랐다면 모르지만,,,알고 계시는 군요.

물론 천동리로 이사온 차남 익균은 김삿갓의 대를 이어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택진이 20살 되던 해에 익균은 일찍 세상을 뜨고 장남은 동생 영진의 공부 뒷 바라지를 위해 나무도 해다팔고 훈장도 했다는데 이는 일반적 이야기로 읍내에 팔던 나무등 땔감은 동편 미탄방향의 노산, 이곡리 선익골등에서 나무를 해서 10여리 읍에 팔았지 천동을 물을 건너기도 하지만 큰 소나무등 땔감이 충족한 지형은 아닙니다.

 

  그리고 훈장을 했다는데 천동이나 응암등지는 사행천의 물이 산이 갈라놓은 고립된 마을로 각 동리는 그저 2~30여호의 마을로 서당의 상설된 것이라기 보다는 아마 영진은 동네 일을 도와주며 번 돈으로 동생 학비에 보탬이 된듯하며 동생은 일찍이 건봉사로 출가하여 서울 근교의 절로

올라갔으며 젋은 스님이 또렷함이 그 절의 신도인 궁중나인의 눈에 띄어 고종에게 이야기가 전달되었다.

 

  당시. 고종은 어수선한 국내정세에서도 저녁으론 궁내에 각종 향연을 개최하고 민족적 자긍심을 일깨우며, 헐버트의 말을 빌면 한국의 땅에 발을 딛는날 부터 천일이 넘도록 매일 아리랑을 안들은 날이 없다고 기록하는데 이는 고종의 궁중 아리랑 소릿꾼 선발대회등 민족혼의 장려에 힘입었으며 이러한 고종은 이야깃 거리도 좋아하며 김삿갓의 일화도 즐겨든곤 했답니다.

 

  김삿갓 얘기를 재미있게 듣고있는 중에 김삿갓의 손자는 스님이란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고종에게 알려지고 이 이야기를 듣자 그를 불러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영진을 만나보자 그 자리에서 대역죄인의 후손이란 제재를 바로 풀어주었으며 그 순간 김삿갓 가문은 양반으로 복권되었으며 택진은 처음엔 궁내 주사직으로 고종의 시종을 지내다 홍천군수를 거쳐 경흥부사를 역임하였습니다.

 

  그는 군수(종 4품)에서 부사(종 3품) 까지 지냈으며 그의 후손들은 선친의 고향인 양주에서 양주장, 묘목사업, 목재상등으로 재산을 일궈 1978년에는 무등산 자락에 김립시비를, 1987년에는 영월에 비석을 건립하였습니다.

 

 

다음으로는 이러한 일반론이 아닌 저의 남다를 생각을 피력합니다.

 

(http://cafe.daum.net/pcmunin/RDke/286) 김삿갓은 죽어서 평창을 다녀간듯)이라는 일전 저의 글에서는 일반적인 김삿갓에 대한 모순등을 지적하였지만 부정적인 면을 너무나 강조하는 듯하여 논리적 비약의 극한 이야기는 회피하였지만 아래에서 김삿갓에 대하여 저의 생각을 피력해 보겠습니다.



* 김삿갓은 영월대도호부의 동헌에서 백일장에 장원급제하였다.라는 이야기에 대하여..


 영월은 군사적으로 도호부인가??(김삿갓 생가 비석의 명문중에,,,) 뭐 이를 따지자는것보다 동헌에서 백일장이란 지방 향시의 과거제도에 입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김삿갓은 대 역죄인의 후손으로 과거시험에 금지된 자이다. 당 사회도 이러한 규정때문에 신분증의 호패를 확인하는 사회였으리라

.

 우리가 잘 아는 정약용의 두 아들중에 첫째 학연은 의사가 되어 아버지를 탄핵한 반대파 장본인들을 죽음 직전에서 살리는 명의가 되었고 둘째 학유는 문인으로 언젠가 이야기했듯 농가월령가로 이름을 남겼다.

 

  그런데 김삿갓 생가의 안내도에는 김삿갓은 가문의 내력은 알지 못한채 오직 학업에만 정진하여 영월도호부의 백일장에서 "論鄭嘉産忠節死瑛金益純罪通干天"이라는 시제에 장원급제하였다는데 이러한 시제의 백일장이란 지방의 향시의 과거제도로 영월에서 과거를 볼 수 있었는지도 의문사항이지만 위에 언급한 바 대 역죄인의 자손은 과거 응시가 않되는 역사도 모르는 이야기인듯 합니다.

이렇게 영월은 역사적 사실과 당위를 기만하여 사람을 속이면서 무엇을 추구하는가에 답은 물론 쩐의 추구란 점일 뿐이다.

 

  또한 만약 김삿갓이 이러한 향시의 지방 과거에 응시했다면 (과거시험에 반역의 대역죄인 자손들이 호패검사에 의해 응시할 수 없지만,,) 여기서 위의 김익순을 논하라는 시제를 받아들고서는본인 후세라면 백지를 내고 말았슬 것입니다. 아무리 아둔해도 다섯살 12월 다음해 3월에 처형된 할아버지의 특별한 사연에 집안의 가세가 기울었는데 이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논리성립에 어패란 점입니다,

 

  저는 다섯살, 세살 두살(생후18개월때)의 특별한 사연들은 기억합니다.

18개월때 할아버지 대상날인데 어저께 산에 갔던 곳에 다시간다기에 할아버지 산소란 점은 이해도 못하며 재미있던 기억에 얼른 가고 싶었다.

당시의 이야기는 아버지는 아랫목에서 담배를 피며 신문만 보고 계신다. 그래서 산에 가자고 보채니 부엌의 어머니가 일이 끝나야 된다기에 문을 열고 복도를 지나 부억쪽 방으로 가서 어머니한테 빨리 가자고 하니 상황도 한 두 마디가 아니라 어머니를 계속 부르고 나타나자 더 쫄랐고 무어라며 야단을 치신다.

밖에는 몇 분이 일을하고 계신듯 하다. 그럼 나 먼저 간다고 하니 가라고 하여 그길로 복도를 걸어서 집을 나와 골목쪽으로 향하였다. 여기서 천주교에서 방칫골로 좌회전 하여야 하는데 아마도 전도관 골목으로 향하야 시루목 초입 어딘가를 향하였다.

 

시무목에선 큰 길을 건너지 않고 노산아래의 어느집 대문에서 집안쪽 사람을 바라보며 울었다.

솟을 대문처럼 송판의 양문 대문으로 좁은 마당에 젋은 남자가 도끼로 소나무 가지를 패다말고 나와서 나를 안고 들어가 "ㄱ"형마루에서 젊은 아주머니가 무어라 말하는데 이름을 묻고 집도 묻곤 했겠지만 울고만 있는 나를 달랜다.

여기까지만 기억이 나는데 이후 일신고앞의 파출소에서 마을 방송으로 찾아왔다 한다


언젠가 집안에서 이야기 끝에 나를 잃었다가 한참 후 파출소 방송을 듣고 찾아왔다 하길래 저는 이러한 시루목까지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한 적이 있는데 듣던 사람들도 당혹스러웠겠지만 그래도 당시 두 살 짜리가 틀리지 않는 말을 하니.. 당시에 본인은 자신의 이름도 말하지 못하는 아기 수준인듯, 방송에서 이름을 말했다면 아마도 가두 방송보다 누구네 집일텐데 하며 전화부터 왔슬 것이라.

 

이렇게 충격적인 순간은 누구나 어느 정도 충분히 기억하리라 생각하는데 김삿갓은 여섯살 기억도 안나며 여섯살에 한문공부를 했다면 본인으로서는 이해하기 곤혹스러운 점 입니다. 김삿갓은 똑똑합니까 멍청합니까 ?? 두가지 다 겸하는 영월이 더욱 멍란듯 하지 않습니까??


또한 그는 장원급제하고 그날 저녁 김익순은 너의 조부라는 이야기를 전해듣고서는 조부를 탄했던 큰 충격에 집을 나가 35년 방랑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그 방랑생활은 조부를 욕한 죄인으로서의 참회는 눈꼽만큼도 없으며 처자식을 나두고 어느 기생과 겨울 엄동설한에 동거했다고 자랑식으로 어필하는 이야기꾼들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일까?? 김삿갓의 풍류詩는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 하여도 조상을 욕한 죄인으로서 고해의 순간들은 아니란 점입니다.

 

그럼 그는 왜 방랑을 하였슬까요??

이에대한 저의 생각으로는 당시 김익순의 반역죄는 당사자에게만 한한다는 결정은 대역죄인의 가족들은 노비가 되어야 하는 것인데 안동김씨의 가문이라 조정의 비호가 있었던듯 가족들은 노비 김성수의 고향 곡산에서 이천, 가평등지와 강원도 두메산골 평창미탄 율치까지 이사를 하며 미탄에서 영월 삼옥리로 이사가게 됩니다.

 

이렇게 이사를 많이하게 되는 것은 구한말 역사 인용에서 보면 안동김씨 세도외 민비 외척의 시대에 박영효와 유길준도 민비를 시해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며 박영호 라인이 시해날자가 결정되자 유길준은 자기측이 해야 정당하다고 박영효를 밀고하게 됩니다,

 

이렇게 백성들은 안동김씨나 민씨등을 미워하는 사회에 김익순의 후손들은 양반에게 걸리면 안동김씨라는 이유로 노비보다 당시 사회의 양반들은 노비들의 눈알을 뽑는게 일상인 사회에 상당한 린치를 받을까 하는 두려움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한 마을로 이사가면 그 동리의 양반들의 작태가 겁이나 다시 이사를 하고 급기야 영월 삼옥리 앞산과 뒷산이 붙은 골짜기까지 숨게 되는 것이란 생각입니다.


여기서 김삿갓은 그래도 가족을 부양하며 힘들게 살 수도 없게 되는것은 그래도 산골 깊숙히에 살고있다는 소문이 양반들에게 전해지는 두려움에 차라리 방랑을 하게 되는 것이란 생각입니다.

그럼, 역사의 한 장면을 다시한번 들춰보면 안동김씨 김병직 이하 3대왕조의 시절에 정가를 주무르던 시절에 대원군은 왕족으로서 귀양을 가고 끝내는 사약이 따라야 하는 것인데...이러한 패턴은 서양도 동일 합니다.

 

스탈린은 말렌코프의 맥시코로  망명을 보내고, 그 후 권총이 따라붙듯 이조시대엔 급하면 현장에서 사약이지만 다음으론 귀양을 보내고 사약이 따라 붙었던 것인데 이하응은 그런것 모를 리도 없지만 이에대한 대처로 살아남기 위해서 도포자락에 똥칠도하고 걸뱅이들과 함께하는 반 미치광이식의 행동으로 양반들의 눈에 그는 인간이 아니라는 정도로 무시해버렸기에 대원군은 살아남아 후일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참 무서운 사회에 김병연이 김익순의 손자로 모반도 아닌 반역자 집안으로 살아남을 방법은 방랑과 랑이란 점입니다. 이것이 저의 생각이고 하나의 역사를 바라보는 사색입니다.

 

그러면, 다음은 그의 후손 익균은 평창읍 천동리에서 영월 북면으로가는 좁다란 산간지역인 도마치 초입으로 이사하였습니다. 도마치도 삼옥리처럼 산이 마주붙는 좁은 지형으로 남의 눈이 띠지않고 경작지도 별로 없어 이 인근에는 양반들도 없다는 점에 주목하여야 할 것입니다

.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그는 이곳에서 살며 화순에가사 아버지 유골을 모셔와서 영월 삼옥리 생가로들어가는 초입에 묻었다고 보기는 힘든 이해입니다.

물론 이 부분들은 가족사라 후데인 지금도 김삿갓 묘에 대하여서는 어떤 내용을 잘 알고 있슬것이란 점과 천동에 이사한 익균은 이곳에서 사망하고 천동리의 토마치 초입의 강병준씨댁 근처에 산소를 썼는데 평창군 홈피 어딘가엔 그 위에도 묘가 한기 더 있었다 한다.

 

그리고 홈피엔 가족들의 영월 김삿갓 묘역에 행사하고는 꼭 평창 천동리를 들렸다고 기록되어있다.

90년대쯤에 익균의 묘는 어디론가 이장해 갔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그 위의 묘도 같이 이장해갔는지는 아직 확인해 보지는 않았습니다만,,산소는 역장도 있지만 이곳이 妻나 기타 가족의 묘라기보단 김삿갓의 묘일 수도 있다.

 

삼옥이에서 천동리로 이사한 익균이 아버지 시신을 화순에서 운구하여 삼옥리 입구에 모셨다면 ,,,글쎄요 천동리로 이사하기 전에 운구하여 묘를 썼다하여도 삼옥리 입구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여기 김익순의 손자 묘입니다 하고 알릴 것인가??

 

1982년도에 영월 문화원장님이 학계에 건의를 여러번 하여 이곳이 김삿갓 묘라고 인정을 받는데 이는 기록을 찾아 인정하는 방법도 아닌 학계가 이런것도 하는가 하는 우스운 점으로 이 부분도 이해가 불가한 점입니다. 얼마나 숨었는지 영월서도 모르는 묘를 학계는 어떻게 안다는 말 입니까?? 참말 우스운 학계 아닙니까??

 

또한 전장 의 아래의 답글에 너브산장님의 댓글에 응암리에 김삿갓 시비가 있다고 합니다.


  천동이나 응암은 영월서 평창을 들어가는 길목의 다른 길은 힘들고 산세에 따른 곡류 사행천이라 강을 다섯번 건너야 하는 길목에 놓인 곳입니다.

(1930년대 신작로가 개설되기 이전엔 지금의 하평이나 천동 앞 도로는 다닐수 없는 험준한 산세라 원동재 아래의 골짜기의 아패실을 지나 마지리에서 응암 여울을 건너 곧 천동 여울도 건너고 또 한번 평창강을 건너 유동에서 다시 강을 건너 종부에서 또 강을 건너야 평창읍내로 들어오는 험준한 산세의 도로입니다)

 

  그러기에 영월서 천동리로 들어가기엔 북면 도마치 골을 탈 수도 있겠으나 마지에서 응암을 지나 천동이라...응암엔 아마도 익균을 잘 알고 이해해 주시는 분들이 있었슬 듯 합니다.

그렇다고 이곳 응암리에 김삿갓 시비를 세울 수야 없겠지만은 아마도 김삿갓이 죽어서라도 지나갔기에 비석을 세우진 않았슬까 가상해 봅니다.

 

  이러한 김삿갓과 영월에 대한 전체적인 맥락으로 이해해 보면 생가는 그의 후손들이 평창에 거주하였기에 삼옥리에 생가는 맞는 사실이지만 그외 김삿갓에 대한 영월의 거주한게 맞는 사실이지만 그외 김삿갓의 이야기들은 기록도 알 수 없는 이야기로 억측이 지나쳐 거짓말로 와해되어버린다는게 저의 추론입니다.

여기서 응암리의 김삿갓 시비는 마을 주민들이 세웠슬 것인데 이는 언제, 왜 세웠는가 하는 이유를 지금이라도 탐문조사하여아 하는 필요성을 가지고 있다.

 

그 필요성이란,,, 만약에 영월 백일장에서 김삿갓이 조상을 욕하는 시를 쓰지도 않았는데 썼다고 한다면 당사자 김삿갓은 지금도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쓴 결과를 자초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인간사가 끝날때까지 그는 조부를 탄했다고 영원히 뒤집어 쓴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이렇게 하고 세인들은 김삿갓에게 올가미를 씌워 재미있게 바라본다면,,그것은 남이야 어쩧든 내만 즐거우면 된다는 현 영월인들처럼 양심이 실종된 ,,,역사를 이용한 본능적 인간의 쾌락만 추구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아름답고 정의로운 역사의 서술이란 바른 이해와 바른 판단으로 서술하여야 하는 것이다.그것이 인류의 보편적 가치의 기준이며 미래로 지향하는 이상이라 생각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

 

끝으로 평해거사님의 김삿갓 전기는 현 영월의 이야기처럼 일상에 대한 논리모순보다는 사관에 입각한 역사적 사실의 고찰과 사유를 통하여 세인의 사랑을 받는 알차고 이성적 판단의 전기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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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백작의 어느 댓글에서>

평해거사님은 평창태생의 역사 작가입니다.

그리고 김삿갓은 율치리에 살았다가 영월로 이사합니다.

 

당시 김삿갓 후손들은 대 역죄인의 가족이라 노비가 되어야 하는데 자유의 몸이 된것이다.

이게 안동김씨란 가문의 비호세력이 있는듯 하지만,,,부귀영화를 위하고 뭐를 더 잘먹고 편리를 찾아 이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 언제라도 시빗거리가 되고 지방 양반들에게 달려가 어떤 해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입니다.

 

어떻게 본다면 킴삿갓의 방랑이란 조부를 탄해서 무엇으로 사과할 길없는 잘못을 짓고 그로 인해 방랑했다 하는데 그의 시는 대부분 멸시받는 천대, 홀대의 해학적인 詩들일뿐. 그가 평생을  외유하며 조부에 대한 참회의 詩 한 점  있습니까?? 평생 방랑을 속죄양으로 일관 했습니까??

어느 기생과도 동거했다는 유머스런 이야기는 조치만 자기 처,자를 남겨두고 로맨스도 아닌 불륜보다는 비 정상의 이러한 것에 자아 성찰도 없이 좋다고 하는 우민들,,,한심합니다.

 

이 시대의 모럴과 도덕적 가치관은 땅에 떨구고 김삿갓에게 핑크색 옷을 힙히고 광대를 바라는 우민들,,,진짜 한심한 작태는 아닌가요?? 그러길래 김삿갓의 편애는 새롭게 다시 조명되어야 할 것입니다.

 

김삿갓의 방랑이란 조부를 탄한 속죄양이란것이 아니라 반역죄란 절문일텐데 대역죄인의 후손으로서즉시 노비가 되는게 상례인데 이 죄는 당사자에게만 한 한다는 결정에 후손들은 폐인으로 떨어진다. 바로 이 점에, 그 시대적 상황아래 어떤 양반이라도 린치를 가할 수 있기에 경각에 달린 목숨의 부지의한 방법입니다.

그런고로 율치리에 사는 것은 주변에 노출이 잘 되든가 하는 문제로 그들은 불편이 있었는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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