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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동리에 김삿갓

평창의 역사가 소설화되는 문제는??

 

Re:김삿갓은 왜 방랑을 떠났나?

 

후세백 2017.09.19 00:26

 

아래에 인용한 사이트의 김삿갓은 왜 방랑을 떠났나?? 란 글은 평창 대화출생의 역사 소설가인 황 원갑님의 글로서 역사작가 황원갑님은 1982년 영월의 문화원장인 박영국 옹이 김삿갓 생가 발굴시 현장에도 함께다닌 김삿갓에 대한 지대한 관심에 앞으로 김삿갓 전기를 쓰겠다 하며 이러한 글을 평창문협 까페에 게제하였습니다.

 

***************************인용부*******************************

 

이러한 여러 기록을 살펴보건대 김삿갓의 가출과 방랑은 빼어난 재주를 타고났건만 출신성분 때문에 구만리 같은 앞길이 막혀버린 좌절감과 울분이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저런 이유로 자신의 인생과 장래를 두고 수년간 고민하던 김병연은 가출을 단행했다. 대삿갓 쓰고 대지팡이 짚고 미투리 신고 방랑길에 나선 김삿갓은 어제는 저 고을 오늘은 이 마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중략-

 

http://cafe.daum.net/pcmunin/1Jov/1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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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본인 후세백작은 일전에 ""김삿갓은 죽어서 천동을 다녀간듯""이란 글에서 어필한 바 김삿갓의 방랑이유에 대하여 위 인용의 견해는 부분집합이고 이것이 방랑의 전부를 포괄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김삿갓의 방랑에 異見을 어필해 봅니다.

 

이래의 글은 어떤 물적증거가 아닌 우리 상식선의 보편적 이해의 타당성으로 김삿갓과 영월의 사이를 그려 봅니다.

 

一,김삿갓은 영월 동헌에서 열린 백일장 에서 장원급제하였다 한다.

이러힌 백일장은 지방시의 과거제이며 김삿갓(김병연)은 조부 김익순이 역적으로 사형당하였기에 역적의 가문으로 백일장에 응시할 수 없다.

 

호패는 그의 성분을 나타내며 과거 급제시엔 외조부 호패까지도 확인을 거친다. 가령 예를 하나 든다면 과거 응시자가 공부 지지리 못하는 넘을 대신 부정입학도 방비하였던듯 하다.

 

一, 우린 김삿갓을 시성이요, 그가 스무살때 향시에 장원급제할 정도로 우수한 천재로 부각시키며 그의 나이 6살때 할아버지가 사형 당하고 황해도는 노비 집으로 숨어가 살던 기억은 없단 이야기는 이치에 맞지 않다.

 

또한 그는 와석리 깊은 골짜기에 숨어살며 조부인 선천 방어사 김익순의 잘못까지 미세한 역사서를 어디서 구입했슬까 의심도 된다.

 

一, 김삿갓이 방랑을 하게되는 이유에 위의 인용글은 모순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김삿갓이 출신성분때문에 앞길이 막혀버린 좌절감일랑 울분때문에 대문을 박차고 나갔다면 그는 왜 양주에서 가평, 평창 율치,그리고 영월 와석리까지 산골짜기로 숨어들었슬까??

 

이 부분이나 방랑을 하는것은 동일한 이유이기에 위 인용글은 방랑의 부분적 이해는 되지만 방랑의 전부를 포괄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라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서 잠시 논리적 이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외도를 해 본다면...

본인은 40여년전 군대시절에 106mm 사수로서 약 60쪽의 노트에 적힌 이론서를 카피하여 총의 사격술및 기계적 기능을 배웠다. 당시로선 월남전에서 들고온 장비라 그런지 육본 교본이 없었고 고참 노트가 제원서인데, 본인은그 이론의 약 60여부분을 수정시켰다.

 

그것은 하나의 작동이 한가지 경우의 수가 이론이기 때문에 다른 경우의 수는 불가해지고 또한 그 이론이 역으로 치환이 되지 않는 모순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하나의 이론이란 모든 경우의 수를 포함하고 아우를수 있어야 하며 역으로 대입에 치환이 되는 가성수즉, +쪽만 살리고 대입시 마이너스 측의 수는 죽여야 한다. 이게 수학적 상식 아닐까??

 

더 쉬운 이해로 우리나라 아리랑에 기원설이 많은데 아마도 기원이라면 하나나 두개정도일텐데 그럼 그중 어느게 진짜일까?? 그러나 어느설이고 모두 아리랑의 부분집합일뿐 진 부분집합으로는 역으로 불 충분하기에 모두들 국지적, 시간적 어느 일정분의 잔 가지일뿐이란 점이다.

 

더 나아가 이야기하면 모든 설이 공통적으로 아리랑의 일인칭이란 점을 빠트리고 있다. 민요의 특징은 가창자가 스스로 聽者란 사실을 잘 모르는듯 하다, 이 부분의 본인의 관점으로 아리랑 편에서 다시 하기로 한다,,,)_

 

이러한 논리에서 본다면 위 인용글에서 김삿갓은 분명 출세길이 막혀버린 울분에 대문을 차고 나간 것이란 해석은 일부분적 해석이고 그것이 산꼴짜기로 이사간 것엔 역 치환이 될 수 없는 상태다.

 그러길래 이 부분의 이해를 하자면 이 스토리 문맥만이 아닌 동 시대상의 영향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본인의 ""김삿갓은 죽어서 천동을 다녀간듯""이란 글에서 당 사회상을 조금 그렷듯이 조선 말기의 안동김씨의 외척세력의 폐해로 이어진 구한말에는 민비를 쪽바리들이 죽이기전에 박영효 라인과 유길준 측에서 서로 암살하여야 정당하다고 생각하기까지 이르렀으며, 양반은 조세는 민초들에게 중과세로 전가하고 노비들의 눈알도 뽑는 린치사건이 전국적으로 성행하였던 모양이다.

 

여기에 더욱 노골적 이야기로 주미공사에게 미국 관리들과 5일간 배를 타고 가는데 미인들이 매일아침 독실에 있는 박 공사에게 문안인사 드리는데 그의 방에 들어가야 하는데 똥냄새가 코를 찔렀다 한다.이것은 양치질과 세수를 안한다고 코를 찌를 악취가 발생하지 않는다. 바리 댕기를 풀면 똥가루가 떨어지는,,

당시사회선 고관까지도 휴지로 닦지 않았던 습관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일반적인 문화양상이다.

 

여기에 더한것은 알랜의 기록엔 우리가 옛 사진이라고 정취넘게 감상하는 청계천의 빨래하는 모습들,,,심지어 엇그제는 언 일본인의 청게천 사진에 양치질 했다고까지 하는데...

알랜부인이 쓴 기록엔 청계천은 반이 누런 똥물이었고 먹는 우물엔 쓰레기가 반정도라...당시 콜레라, 장티프스등이 나돌았다는 기록에... 당시 어느 외국인이 찍은 남대문 사진엔 한 발적 건너기에 소똥, 돼지똥, 말, 개똥등 똥을 않 밟을 수 없었다는데, 하기사 먹는 우물도 쓰레기가 반이라는데 이도 이해갈 사항이다.

 

대외적으론 데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시 카즈라테프트 밀약으로 루즈벨트는 일본이 빨리 조선을 먹기를 바랬다, 래야 미국은 필리핀을 먹는데 가로막힘이 없으니까,,

 

그래서 카즈라 - 테프트 밀약을 다시 확인하는 루트- 다카하라 밀약을 재차하여 카즈라 테프트 조약을 확인 사살한 것이다. 이때 미국과 일본이 바라보는 조선은 문화는 간곳도 없는 참으로 문맹의 국가였으리라,아마도 지금 우리가 아프리카 원시인들을 바라보는 그 이상인것 같았다.

 

마치, 서양 중세의 암흑보다 더 처절한 생활상인듯, 민중들뿐만이 아니라 양반들도 생활에는 문화 양식론은 전혀 없었고 그야말로 한끼 식사를 걱정해야할 때였든듯 하다. 이러한 시기에 이 글에서 주목해봐야 할 것은 양반들의 린치 사건들이다.

 

김삿갓의 조부가 역적이 되어 처형되며 역적집안은 3족이 멸문 당해야 하는데 최소한 직계 존속은 살아남지 모할것인데 아마도 안동김씨라 당시 안동김씨 외척의 집권시기라 보이지 않는 세력의 특혜를 입은듯 하다. 그래서 그의 가족들은 목숨만은 부지하는 역적으로 떠 돌게 되었다.

 

여기서 떠 돌게 되엇다라는 표현은 역적은 곧바로 노비가 되어 양반가문으로 달려가지만 아마 안동김씨 출신이라 함부러 손찌검이 않되었던듯 하다.

 

그리하여 그들은 가평등지로 이사하였으나 동리에 좀 떵떵 거리고 질이 않좋은 양반 나부라기들이 있어 언젠가 김삿갓은 신분이 노출되면 역적에 안동낌씨 출신이라 가만둘 양반은 아마도 한 명도 없슬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양반들이 별로없슬 강원도 아주 산골에 숨어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 이사란 더 좋은 환경을 찾아가겠자만 김삿갓 집안은 더나쁜 환경을 찾아 그곳이 그들에겐 적합한듯 하다. 그래서 강원도의 양반도 적은 산골로 찾아 들어간 것인데 평창 율치리에서 다시 영월 와석리로 간 것은 율치는 영월- 마차- 정선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라 그들에겐 조심해야될 사항이 한두가지가 아닐것이기에 다시 영월로 이사했던 것이다.

 

이렇게 이사가 반복되는 것은 오직 양반의 눈에 띠면 노비가 될 수도 있고 또한 봉변의 린치를 당할 수 있는 압박감 때문이다. 그러기에 위의 예문에서 말하는 가출과 방랑은 빼어난 재주를 타고났건만 출신성분 때문에 구만리 같은 앞길이 막혀버린 좌절감과 울분이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라는이야기에 본인은 생각을 달리하여 김삿갓이 이러한 산골짜기를 이사하였어도 그의 머리인식엔 언젠가 사대부들이 들이닥치면 좋치않은 결과가 발생된다는 생각이 머리속을 떠나지 못해 이만 집을 나서는 것으로 생각한다.

 

만약 김삿갓이 위 예문의 이야기처럼 구만리 앞길에 좌절감과 울분이 원인이었다면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었기에 그는 가출이 아닌 불교에 출가하고 입적하는, 아니면 김시습처럼 운둔하느 방법론아 더 타당할 듯 하며 왜 그렇게 더 좋치 않은 곳으로 빈번히 이사한 것에 설명은 곤란하기 때문에 이사와 방랑은 모두 동일한 값으로 양반들을 피하는 수법인 것이다.

 

영월 와석리는 구글 지도로 보면 산과 산이 맞붙은, 그야말로 실오라기 같은 골짜기로 20여리 들어가서야 냇물이산을 감아도는 배사지에 겨우 집한두채 지을 땅이 나오게 되며 뒤로는 산을 넘어 영춘은 갈 수 있지만 과거에 이러한 골짜기를 드나드는 사람은 심마니나 산마물 캐러 간혹 다닐 사람 이외엔 없었을것같다.

 

김삿갓은 안전을 위해 이러한 골짜기까지 파고 들었지만 그의 머릿속 불안감은 해소되지 못해 언제나 긴장감속에 으로 뛰쳐나가 외유를 했는데 이를 뒷받침 하는 또하나는 그의 아들 김익균은 평창의 천동리로 다시 이사하게 되었다.

 

익균이가 살았던 도마치란 곳의 지형을 구글어스로 검색해보면 영월 북면 공기리에서 평창 천동까지의 실오라기같은 통로에 지형중엔 어느 부분만 조금 넓어지고 양쪽의 입구는 실오라기처럼 산과 산이 붙어 있기에 와석리와 판박이 지형임을 알 수 있다.

 

영월 와석리에서 어떠한 보안적인 사건이 있었던지 아니면 좀더 큰 고장을 찾아 김삿갓의 아들 익균은 천동리로 이사했는데 가문이 역적은 자손 대에도 역적이고 이 시기에도 양반을 의식하여 와석리와 동일한 지형을 찾아 도마치로 이사한 것은 도망의 연속이란 점으로 볼 수 있다.

 

두곳 모두 논은 고사하고 밭 한뙈기도 않되는 지형이라 김삿갓일가는 화전민보다더 더 열악한 환경속으로 자원해 들어가 힘든 여정의 생활을 한 듯 하다.

그러기에 본인은 김삿갓이 자기 앞길의 불만보다는 이러한 양반이란 위기의식속 피해망상으로 뛰쳐 나간 것이고 또한 가족과 연을 끊은게 아니라 아들이 어릴때는 자주 집을 찾곤 한 흔적도 볼 수있다.

 

그의 처는 일찍 사망하고 두 아들은 고아가 되자( 물론 첫째는 형에게 양자를 보냈으나 형이 죽고, 형수도 죽게되자 집으로 돌아오고 김삿갓은 다시 결혼하게 되는 것으로 보아 그는 집에대한 연을 끊은 것이 아니라 항상 마음을 두고 있었으며 방랑 초기엔 잠시 잠시 방랑을 하게 된다.

 

김삿갓의 가출과 방랑은 빼어난 재주를 타고났건만 출신성분 때문에 구만리 같은 앞길이 막혀버린 좌절감과 울분이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으로 본다면 김삿갓은 아무리 시성이라 한들 가족을 버리고 때론 술집에서 동거도 하는등의 일화로 이해한다면 김삿갓은 도덕률이 없는 존경해서는 안될 위인인듯 하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란 점이본인이 바라보는 점이다.

 

여기서 한점 주목해봐야 하는것은 김삿갓의 詩碑는 근자에 지자제이후 각 고장의 관광상품으로 세워지지만 그 옛날 언제인지는 아 수 없으나 아마도 초라하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평창의 마지리에 마을주민들의 정성으로 김삿갓 비를 세운게 아직 전해지고 있다한다.

 

김삿갓이 전국을 떠 돌며 방랑하였지만 아마도 마지리의 김삿갓추모비는 전국에 오직 한점이란 것이다. 아마도 당시로서는 넉넉지도 못한 마을에 주민들이 뜻을모아 세운점에 감동하지 않을수 없다. 그러기에 그 비석의 가치와 중요성도 있겠지만 익균이 사는 천동으로 가는 입구마을이라 역사에 무언가 심상찮은??

 

혹 김삿갓은 죽어서 이 길을 가지 않았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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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의 역사가 소설화되는 문제는??

 

역사는 보는 관점에 따라 틀리지만 이 작은 일에 관하여 장문을 쓴 것은 역사는 오직 역사로서만 존재해야 할 듯 하다.

그러기에 역사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후대에 이르러서는 역사적 개체가 사실적이 아닌 허구의 픽션의 소설이 되었으며 이러한 예는 영월의 김삿갓 추모에서도 또하나 왕방연 詩碑의 시조를 왕방연이 셨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지금은 단종의 죽음에 정설로 되어있는 졸개의 활 시위로 목졸라 죽이는 사건에 이런 詩를 쓸만한 금부도사라면 날이 저물건, 시간이 촉박하건 사약 이외의 타 흉기로 살인은 하지 않았어야 되며 그것이 정설로 내려오는 사실적 이야기라 한다면 왕방연은 금부도사(종 5품)의 사약의 최고 책임자로서 단종의 시신을 청령포 강물에 내 팽개치고 한양을 가기 빠빴다면 그가 가는 길을 재촉하다 잠시 쉬며 이런 詩를 남겼다면 모순의 발상이란 점이다.

 

그 시는 아마도 후대의 언 시인이 당시 사회에서 화근이 될까 필명은 어려워 詩의 내용의 주인공인 왕방연을 팔아서 발표했으리라.이렇게 사람들은 속여서 바보로 만드는 역사 그것은 역사가 아니라 픽션의 소설이란 점이다.

예를 들어 평창군지엔 임진란 당시 응암리 전투에서 매를 이용하여 상, 하굴이 교신하다 왜구에게 발각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정작 당시 평창군수(종 4품)인 권두문 군수는 당시 임란에 대한 일기형식의 기록에서 매를 날려보내라고 명하여 날아갔다고 기록하며 그 매로 통신은 하지 않은 것이다.

 

당시 평창전사에 노산성에서 전투를 했다니 대관령으로 넘어왔다는 스토리는 거짓이고 응암록도 전후에 쓰여진 오류가 많은 역사서술을 하고 있다. 이 부분에 언젠가 모든 부분에서 오류를 조목조목 따져서 보편적이해에 통용할 수 있는 역사로 수정하겠다.

 

역사를 모른다고 얼마나 우를 범하는가 하면,,, 

진부에서 평창군 처음으로 1930년대애 진부서 발췌된 "박달낭근 왕자 축자로 다 나간다::라는 평창아리랑을 정선 아리랑에선 풍자, 해학편으로 취급하고 있다.

 

또한 여만리 강변의 돌 누적단이 수해에 당집이 유실되고 40년이 지난 지금은 사가들이 이 돌 누적단은 몽고군 항쟁시 방어벽이란 뙤담이라 말하고 있다. 이러한 우를 범하기엔 역사적 작은 단서 하나의 잘못해석에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역사적 관찰과 평가엔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것이다.(위 의 글에서 여만리 강가의 돌 누적단이 서낭당이며 박달낭근 왕자축자로 다 나아간다는 아리랑의 가사적 의미도 본인은 적확하게 해석해 놓았음) 

 

본인은 문필가나 어떠한 류의 역사를 보는 사가는 아니다. 차라리 본인의 희망은 다음 세상에 태어난다면 형사 콜롬보를 멋지게 하고 싶다. 물론 본인의 글엔 다음세상이란 없다고 즉, 인간의 영과 혼이 환생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본인은 퀴즈,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하고 싶어하는 취미가 강하기 때문에 역사를 재 평가해 보는 것이다. 평창은 율곡의 고향이지만 오죽헌은 율곡의 외가나 신 사임당의 친정도 아닌데 율곡의 동상을 버젓이 세우고 율곡이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자랑하고 있다.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죽헌이 율곡의 외가라는등 율곡의 생가라는등 오도들 하게 만들고 있다.

 

신사임당 아버지 신명화공이 오죽헌 주인도 아니고 신사임당 어머니의 외갓집으로 2대에 걸처 외손으로 이어진 것이고 신사임당이 결혼후 오죽헌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3년도 아닌 2년상을 차리고 본가로 돌아왔다고 율곡학회 연표엔 정확히 기록되어 있는바 우리는 신 사임당이 아버지 장레를 오죽헌에서 치룬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나 신명화 공은 타계전 서울 본가로 돌아갔고 사임당은 서울 친정에서 상을 치룬후 본가로 돌아왔다.

 

이 본가를 또 오죽헌이라 추정하면 안된다. 본가는 백옥포리에 마련한 신혼살이 집이다. 백옥포리란 기록이 명확한데 글은 읽지도 않고 역사를 마음대로 추정하는것은 금물이다.

 

그런데, 강릉사람들이 율곡은 오죽헌에서 탄생했다하니 평창에선 그러면 잉태지는 판관대라고 맞받아 주장한바 후일 사람들은 잉태지만을 강조하여 주장하다가 율곡의 고향을 기억속에서 상실시키고 이젠 컴의 블로그등에서 주접떠는 것은 참으로 우서운 꼴이나 그보다 더한 것은 판관대 비석의 명문(銘文)에서는 율곡의 출생이 12월이라 이를 계산해서 음 이월이 이곳에서 만나 잉태했다는 소설을 썼는데... 

 

음 2월 엄동설한에 강릉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대관령을 넘어 이곳으로 올 수 있었는지, 또한 그 시대에 부군 이원수 공이 휴가차 서로 봉평에서 만나는 ,, 요즘 핸펀보다 더 정확한게 무엇이 있었는지?? 추리소설이 아니라면 이들에게 적합한 설명을 하는 문장이라야 옳은데 그런 명문은 아집에서 나온 결과이다.

 

평창의 허술한 면은 어디 그뿐인가??월정사 8각 9층 석탑은 지난 1970년 해체, 보수공사를하였다.

그때 공사감독 정영호 선생은 본 공사의 레포트에서 동 탑은 이방형이고 고구려 목각 팔각탑에 기원한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월정사는 강릉의 신흥 호족세력의 장으로 원주의 법천사지의 지광국사의 현묘탑은 11게기 것으로 그곳엔 아라베스크 창문까지 조각되어있다.이 지광국사는 수다사(진부면 수항리 소재의) 주지도 하였단 기록에 대체적으로 월정사를 위시해서 원주, 횡성, 평창, 강릉권의 절들이 갚은 유대를 가짐을 알 수 있다.

 

이미 이 문화권에서 아라베스크 문화가 도입된 것은 이미 서역과 교류가 있슴을 시사하는데 그게 고구려는 아니다. 신라의 황남대총에선 로만 클라스의 유리 병이 출토되고 김해의 가야 고분에서도 이러한 로만 클라스의 병들이 출토되는 점으로 보아 이들은 이미 5세기쯤 서역과 직, 간접이라도 교류가 있었으며 그러기에 법천사의 현묘탑은 남방문화권이며 고구려가 아닌 신라 양식에 기반을 둔 것이다.

 

또한 불교 사상에 고려초기에 대각국사 의천은 스스로 왕자임에 교종을 왕권지배배경으로하는 천테종이 융성하였지만 이것은 중앙행정력의 개경 서경등지에 분포하고 통일 고려에서 각 지방 호족의 특색으로 명주는 구정면의 굴산사지의 범일국사의 선종의 평민사상아래 우리나라 선종의 체계는 보조국사 지눌의 대중화를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명주권 불교문화는 고려 왕정수호의 교종과는 대조되는 호족들의 행진이라 볼 수 있으며 여기엔 남방문화권이 배경으로 당시 선진문물의 송나라 문물을 수입하고 선호하였으며 또한 평민적 구도에서 밀교도 수용하는 폭 넓은 불교문화와 사상, 철학이 어루져 하나의 통일된 불교관을 자아내는 탑으로서 영원성을 추구하며 또한 감각적 섬세함 까지도 불타에 대한 공경심으로 돌을 쪼아 빚은 거대한 경전의 하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동탑은 고구려 8각 목탑을 이 시기에는 헐어져 보지도 못했슬진데 고구려 양식의 복고는 아니란 점이다. 모든 문화는 문화적 특성에서 복고가 아닌 선진유행 문물을 때르는게 통상적 수법이다.우리는 보릿고개를 넘긴 칼국수세대이지만 요즘 젋은이들은 서구적, 인스턴트를 선호하듯문화는 단점을 가지면서도 앞으로 나가지 복고란 어려운 것이다,

 

다만 중세 서양의 인본의 르네상스의 복고주의는 그간 중세 문화적 탄압에 인본이 사라졌기에 복고한 것이지 서양문화사는 그러기에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이러기에 월정사 8각9층석탑에 8각이란 모양을 가지고 고구려 복고풍이란 해석은 어딘가 어색한 것이다.

 

가령 열 사람에게 재미있는 도형을 그리라 한다면 삼각형, 사각형보다는 오각, 육각, 팔각을 그려낼 것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도형이란 키워드에 삼, 사각형은 배제되고 오히려 팔각형은 두 세명 이상이 나올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월정사탑이 팔각을 취하였다고 무조건 고구려복고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 문제다.

 

그리고 이방형이 아니라 우리나라 전통양식인 탑 문화에서 1,200여기 탑파중 가장 공들여 만든 완성형으로 중생구도의 부타의 위대함을 창출하려는 중생구제의 佛과 가장 아름답고 넉넉하게 보이는 美를 자아내려는 석불스님들의 최고의 걸작이란 생각이다.

 

이것을 정영호 선생의 단편적인 생각에 의해 지금까지 홀대받는 탑이 되고 어지 신라시대 탑만 정형탑이란 말인가?? 그리고, 또 하나 이상한것은 수항리의 폐사지 수다사이다.

 

동 사찰은 자장율사가 말년에 기거했던 절로, 물론 자장의 파워는 좀 빠진 상태인듯하지만, 그러나 1,400여년을 이어오던 사찰로 그간의 조금의 기록으로는 법천사와 월정사. 신복사와 연계되어 있슴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언제 어떻게 폐사지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며 뭇 사람들은 6,25 전쟁의 화마가 폐사지의 원인이라 꼽고있다.

 

하지만 본인의 일전 글에서도 전쟁이 폐허를 부른것은 아니란 생각이다. 동 사찰에 잔존하는 두개의 옥개석과 아래 떨어져있는 옥개석을 보면 4귀가 모두 깨져있다.  만약 동탑이 폭탄을 맞았다면 옥신의 면석에 맞을경우 두세갈래로 깨지겠지만 그보다 밀치는 압력에 탑의 균형이 일그러져 넘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옥개석등 통돌에 맞을경우엔 곡괭이로 내려친 자국처럼 꿁힌 자국만 남을 것이다. 그런데 아래 땅바닥에 있는 옥개석은 폭탄에 4귀가 이리저리 깨진것은 아니다. 관리 소홀로 어떤 문제에 봉착해 이리저리 두둘긴 것이다.

 

마치 구석기의 돌도끼처럼 한 면으로만 날이 선게 아니라 사방에서 압력을 가한 점을 볼 수있기 때문이다.

지난 2013년 평창군과 월정사는 학자들을 불러서 돈도 주고 학술세미나를 하였던바 그 의미는 수다사의 활용방안이었으나 아직 평창군 어디에도 세미나 자체의 기록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럼 활용방안 이전에 수다사의 역사를 완전히 이해 못한것에도,,

 

그러나 수다사는 수마나 화마에 페사지가 된 것이 아니라 정치적 견해라는 이야기에 그의 한줄이라도 자료를 입수하여 수다사의 모든 이야기를 다시 할 것이다.

수다사는 앞으로 역사적 고찰과 연구를 통하여 천여년이 넘는 세월동안 중후한 사찰로 민족 문화의 한줄의 사료란 점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억불정책의 조선시대에 스님들은 아무런 기록을 남기지 않은게 민족문화의 치명타이지만 그리고 일반적인 폐사지는 주춧돌들이 남아있어 가람배치로 규모를 파악하지만 어찌된일인지 이 절터는 개인소유가 되고 경작을 위해 주춧돌등이 많이 파헤쳐진 것이 유감이지만 그래도 지금 남아있는 부재로만도 동 사찰의 규모와 의미를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원주권의 폐사지의 하나인 거돈사지는 고고학회에서 유적, 유물출토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동 수다사지도 학자들이 하루 바람쐬며 다녀가서 무엇을 알겠는가?? 그래서 엉터리 세미나를 하지만 말고 고고학회에 의뢰하여 통일되고, 완벽한 조사를 하였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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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들의 이야기는,,,

 

어쩌다 친구들이 아주 쬐금 나의 글을 보는모양이다.

그리고 몇 친구들 하는 말,,,

글좀 간단히 써라...

아래를 읽다보면 위엔 무슨말인지 기억도 없다는데...

그래서 주제에 관해서 간단 명료하게 쓰라는데...

 

그럼 그 해석은 내가 아닌 독자들 맘대로 할거라.

그래서 만약 역사라면 소설을 만들것이고, 위 군 시절 노트에 적은 교범책은 고참들 맘대로의 쓴 각본이지

그것이 질서정연한 논리의 이론 교범이 못 된다는 점의 논리와 같은 것이다.

 

그러기에 본인은 간단명료하게 쓰고 다음은 독자 마음대로 생각하시오 할려면 그것은 일반적인 생각이지

본인이 생각하는 논리의 이야기는 아닌것이다.

 

그래도 친구들 왈,,,

나의 글은 길어서 아래쪽을 읽을때 위엔 무슨 말인지 기억이 않난다는데...

그러면서도 "장미 여관으로 가자"라든가 이런 책들은 끝까지 생생하게 읽을 것이람??

지금의 이 글정도는 책으로 따지면 5페이지 정도 불과한데 200페이지 책 읽는것은 다 읽으면서 5페이지

분량을 줄궈쓰라면,,  긋두 요즘세태처럼 무엇을 요구하는 침권자같다.

 

그럼, 혹시 말이다.  그대들의 머리를 한번 의심해 보았는가??

물론 학창시절에 공부가 부족하여 유급된 칭구는 한 명도 없지만 말이다.

그냥 내맘대로 놀게,,, 친구들 낮잠이나 자고있으랑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