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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아리랑

3) 구한말 아리랑의 확산이란,,,(평창아라리의 이해)

3) 구한말 아리랑의 확산이란,,,(평창아라리의 이해)

   <정선아리랑 인식과 과제>

후세백작 2018.05.19 03:36

< 정선사람들이 성마령에 정선아리랑詩碑를 세우는 이유는??>

아리랑에는 언제부터 불리워졌는가 하는 시원설과 또한 구한말 유행했던 아리랑의 전국확산 이유는 무엇일까하는 의문에 많은 설을 가지고 있다. 어떤 설들은 불명확한 점을 내포하며 또한 어떤 설들은 주관에 치우쳐 역사적 소명을 오도함에 아리랑에 대한 이해의 길을  왜곡시키는듯 하다.

이러한 대부분의 의문이 정선 아리랑으로 귀결됨에는 모든 연구자나 학자들이 정선 아랑이 뗏목을 타고 서울로내려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는 경복궁 중수설에 무게를 두고 있으며 이를 정성 아리랑으로 귀결시키기에, 자연히 정선아리랑이 그러힌 역사적 사실들을 내포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분석한다.

 

 하나는 아리랑의 시원설로 고려말 두문동 7현과 오대산에 찹거한 이색의 詩에 준한다하며  아리랑 가사중에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려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라는 가사를 가지고 고려말을 시원으로 간주하고 있다. 하지만 이 두가지 정선의 고집스러운 논리에 대하여 확실한 역사적 기록이나 물증은 없다.  다만 심증이 간다는 개연성으로 이들을 역사적 사실로 간주한다면 그것은 일반적인 역사를 창출하는것이 아니라 편증되고 왜곡되어 특정견해의 그릇된 사관의 만드는 잘못을 하고있다.

 

우선 한마디 한다면  뗏목인부들이 정선 아리랑을 서울로 전파시키고 각 고향으로 돌아가 정선 아리랑을 불러서 확산시켰다는데..김연갑은 아라랑 시원이란 책에서 정성 아리랑도 과거엔 후렴이 없다가 붙엇다 하지만 기실 그것은 김연갑은 평택생으로 어릴적부터 향토문화를 알 수 없고 정선부군수 역임의 연규한씨가 이야기 한 것이다.

여기에서 그럼 후렴이 없었다면 전국확산 아리랑도 후렴이 없었어야 할 것이고, 정선 아라리는 뗏목경기에 문화가수입되어 없던 후렴이 붙어버리는 것은 뗏목경기에서 가능한 일이다.그러기에 정선치들은 그것을 꺼꾸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한, 시원설에서 아리랑은 민요로 구전되는데 두문동 7현의 명단도 각기 틀리게 나타나는 세월속에.. 그들이 아리랑을 탄생시켰다 하니,, 깜낌한 구멍속에 쥐도 웃을 일이지.,,,

민요를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긴 처음인데...?

아리랑에 있어서 "만수산"이란 단어 하나가 차임되었다고 그것이 아리랑의 시원이라는 이야기는 정상적인 역사일까?? 아니면 왜곡돤 편협의 역사가 아닌 이야기뿐일까??

 

만약 이 문제를 역사학자 E.H.카에게 묻는다면 그의 답은 변화하는 현재의 가치관에 따라 과거 역사는 변해야하지만 역사는 사실이어야 하기에, 이러한 역사 사실이 아닌  개연성을 가지는 것을 역사로 인정할 수는 없다라고 잘라 말할 것이다. 그의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그는 사실을 갖지못한 역사는 뿌리가 없으며 열매를 맺지 못한다. 즉, 죽은것이고 무의미하다라고 하였으며 보편, 타당성이 있어야 가장 효과적인 것이라 한다.

 

그러기에, 본인은 아래에서 이 두가지 즉, 정선 아라리가 뗏목타고 한양으로 내려가 정선 아라리가 퍼졋다는 아라리 확장성의 논리와 또 하나는 아라리 사설중에서 "만수산"이라는 단어하나 차입으로 600년전 고려말에서부터 아리랑이 시작되었다는 아리랑의 태동을 알리는 시원설다시 고찰해 보며 각기 통일성이 없는 그들의 주장을 분석해 보기로 한다.

 

우선 이 모든 이야기에 앞서서 아리랑의 연구에 참으로 이상한 점은 학자도 아닌 사람들이 아리랑의 고증적에 있어서"하우스 만"은 보조과학인 금석학, 고고학, 고전학, 연대학등의 전체의 연관성도 가져야하며 한 사건에 여러 요인이 복합되어잇고, 여러 원인의 상호관걔, 상하관계를 잘 정리하여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기엔 일반화를 이끌어야 한다는 역사적 소명에 정선아라리의 제 이론들은 역으로 치환해보면 전부 모순의 괴리에 빠지는 것이다.

 

정통 학자도 아니고 ( 여기서 학자라고 한다면 주장하는바 이론이 정확한 논증이나 일반화를 창출하는 합리성을 지닌 것으로) 이러한 논증을 가지는 이론도 아니고 , 검증도 없는 아무런 비판적 제어도 없이 후일 자신 스스로 이를 인용하면 마치 학설은 인용한 듯한 효과로 화석화 된다.

 정선 아라리에 대한 김연갑의 글들은 이러한 과정을 가지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인다.

 

이렇게 아리랑은 주관적인 견해로 마구잡이로 이론도 아닌 제반 이야기를 마구잡이로 양산하고 특히나 학위논문이나박사논문에서도 사실적 고찰의 현장성도 갖지 못하고 논문 책 열권 책상위에 올려 놓고, 이 책들의 열거에 틈바구니의공간을 찾아 가공의 새로운 이론을 주장함도 적지 않다.

그것은 아래에서 인용하는 고숙경의 1980년 석사논문 <정선아리랑에 관한 연구>에서 에서 인용하고 있다.* 강원도 아리랑 중에서 정선 아리랑을 택한 이유는 그 기원이 가장 오래되었고~(중략)이러한 그의 논문에서 정선 아리랑의 기원이 오래되었다는 증명은 무엇으로 하는 것일까?? 그것은 현장성없이 책에 의존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보형등이 주장하는 논지와 연관되어 시원을 단정하는 것이다.

 

김지연, 이보형의 주장은 후일 김연갑도 뜻을 같이하기에 종내에는 김연갑의 정선아라리에 대한 견해와도 연관된 부분을 고숙경은 인용하였고,이를 다시 "시원설 연구"란 책에서 역으로 재 인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이러한 정선 아라리가 뗏목타고 내려간 아라리의 확장설은 이미 모순이란 사실이 학게의 일반론일때에모르고 그런 논문을 썼슬까 아니면 다시금 반전의 주장이라면 새로운 이론의 견지를 도입했어야 했다아리랑 역사의 변천사에 조금의 이성적 사유로 판단읗 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거래로 현재의 필요에 의해 과거의 역사에 의해 변화해야 한다. 하지만 과거에 사실의 개연성을 가지고 오늘 역사적 사실로 둔갑한다면 그것은 역사의 밀거래란 의혹이 불거질 뿐이란 점이다.그러기에 본인은 정선아라리에 이 두가지 논리의 실체의 오류를 분석하여 평창아라리의 그들이 막아논 평창아라리의 출구를 찾아 가도록 한다.

 

일전에 본인은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려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라는 아라리 사설은 청옥산에서 나물 뜯을때 부르던 아라리란 점을 주장한바 있다.

이 가사가 아리랑의 시원인지 아니면 본인의 주장한바 청옥산에서 나물 뜯을때의 가사인가 하는 과제는 다음 장에서 김연갑의 <아리랑 시원설>이란책의 내용등을 상세하게 비교하여 피력할 것이다.

 

그 글을 쓰기에는 본인으로서는 정선 문화까지야 거론할 필요는 없지만, 1997년 발표한 "채미헌실기"내에 도원가곡이나 이색이 썼다는 "정선의 제영시" 두편까지도 아리랑 시원설에 기초로 작용하는데 물증으로 확인할 수 없는 그들의 주장속에서 아리랑의 시원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에 본인으로서는 부득히 정선문화론까지도 고찰할 것이다.

 

그래서 출처의 원본이나 실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문화론이 아리랑과 무슨 상관인가의 관계를 확인해 볼 것이다.정선 아리랑의 제 논지들은 1985년 이후에 불거져나온 주장들로 그 이야기들의 원본은 찾아볼수가 없어서 원래 없는것인지 숨기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도원가곡이란 것은 강릉본과는 틀리는 2개의 도원가곡인지도 알 수가 없다.또한 정선이 자부하는 제원시는 이색이 정선을 위해 썼다는 표시도 없다. 이색문집의 남아있는 55권 50여만자의 기록에 정선이란 단어는 한번도 거명되지 않았다정선인들은 이색이 전오륜의 이모부라는 인척에 충분히 이색은 큰 동서가 있는 정선을 다녀갔슬 것이란 개연성을 가지고 정선 아라리를 시원설에 접목시킨다면, 그것은 개연성이란 심증은 가지만 물증은 없고 가상적인 확증만 가지고 추론하는 것으로 정선의 논리는 개연성위에 또 다른 개연성으로 이어지는데 그를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기엔 정확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역사는 그보다 더 상고시대로 가더라도 정확한 연표와 정확한 기록들이 남아있는데 이런 미비한 물증으로 보편타당성의 희박하기 때문이다.이색은 치악산에 침거하는 원천석을 찾아가 단사에 올라 절을 하였다는 기록도 있는데 원천석은 태종의 스승이었기에 방원의 탄압에선 어느정도 자유로룬듯 하며 80여명의 려말 은거선비들이 다녀갈만도 한 곳인데 이색은 이곳을 다녀갔다는 기록은 있지만 정선을 다녀간 기록은 없다.

 

이색이 쓴 詩 2점이 정선으로서는 정선의 재영시라 하는데, 이 시를 이색이 정선을 보고 쓴 시라는 점의 기록은 없다.

그러기에 이도 개연성을 지닌 이야기라면 그보다 이색은 치악산에 원천석이 차려놓은 단사에 절을 했다는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절을 마치고 치악의 먼산들을 바라보며 회상하는 의미의 詩라면 좀 이해는 가나 이를 막연하게 정선을 그린 시라 한다면 어찌 이해해 줄 수 있는가?? 증거나 단서는 무엇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기에 이색의 시 한수에 특별한 정선의 기명도 없는데 이를 위의 인척관게이고 정선을 다녀갓슬 추정에 정선을위해 쓴 詩라고 단정한다면,,, 위의 설명에서보듯 치악산 사람들은 그 詩를 빼앗긴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는 않을까??오히려 본인으로서는 이색이 치악산에 올라 원천석이 차려놓은 단사에 절을 하고 돌아서서 저 먼산들을 바라보며 쓴 시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가 치악산에서 쓰던 정선을 다녀가며 쓰는게 문제가 아니라 이 제원시 두개가 정말로 정선을 읊은 詩인가 하는 점이 의문이다.

 이색이 전오륜의 외숙으로 오대산에 칩거하였고 그의 문집에 詩도 있다하지만  그가 전오륜의부친 장사때 다녀가지 않앗슬까 추정하는데 다녀갔다고 하여도 문중에 들어가 알랑 타령을 할 것인가?? 어떻게 정선까지 전해졌슬까?? 또한 이색이 정선 가기전에 죽림 7현은 이미 만수산 노래를 부르며 정선으로 숨어왔슬것이거... 그러기에 이것은 전자의 개연성의 이야기위에 다시 개연성의 이야기를 옳려놓는 격은 아닐까??

 

여기서  어차피 정선역 광장에 세운 비석이 허위로 들어난 바에는 이에 문제로서 원천적으로 죽림 7현의 역사 기록부터 내 밀어 증명하여야 한다.

주관적인 확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어 역사적 사실로 기록응 제시하지 못하는 시원설의 이야기 위에 한발 더 진행된 제원시나 도원가곡등은 개연성을 지닌 이야기라면 사실적 물증이 없기에 사실의 역사로 단정하기에는 곤란한 것이다.

즉 개연적 역사위에 다른 개연적 이야기를 펼친다면 전자의 개연적 이야기는 사실로 간주한다는 논리로 합당한 정론은 못된다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한 본인의 견해는 다음장에서 <아리랑 시원설 연구>라는 책에 여러 부분들을 전격 분해해 보기로 한다.

* <아라랑 시원설 연구> 저자; 김연갑. 도서출판 영상. 2006.

 

◆  구한말 아리랑이 전국으로 전파되는 확장설의 문제는 ??

이제 이 장에서 일반적으로 구한말에 아리랑이 확산되었던 바 이에 서로 상반되는 두가지 견해를 나타내고 있는데,

그중 하나는 정선 아라리가 뗏목을 타고 한양으로 내려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는 경복궁 중수설이고, 한가지설은

경복궁에서 전문 예인단의 집단 가무로 알랑이 불리워졌고 이로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는 학설이다.

 

구한말 아리랑이 전국적으로 불리어지는데는 두가지의의 설이 서로 대립하며, 그중 어떤 점이 정설이 될까? 아니면 두개모두가 성립되는 양론은 있슬 수 없다. 시기적으로 경복궁 중수설이 연대는 앞서기에 전문 예인단에 의한 확산은 중수설에서 볼때는 이하 종소적이란 관점 아니겠는가??

그러기에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하는것도 역사적 과제이다꺼꾸로 올라오면서 당시 경복궁 중수공사에 공역으로 차출된 전국각지의 노역자들이 강원도 아리랑을 불렀슬 것이며, 이후 공사가 끝나고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강원도 아라리를 부르게 되어 전국적으로 유행하게 되었다는 추론이다.

당시에도 기층민들에게 아리랑이 알려지기에 경복궁 중수만이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슬까 하는 문제에서 경족궁의 중수라는 전제는 전국적으로 유행할 수 있는 사건의 하나에 불과한 점이다.   또한 특정지역 강원도 아리랑이 선택되었다는 증거도 없기 때문이다

. 이러한 연유로 경복궁 중수설은 스스로 모순을 가지고 있는데 경복궁 중수설은 이후에 학자들이라기 보다는 연구자들에 의하여 논리적 근거가 되었다.

 

최영년의 『해동죽지』를 근거로 같은 논리를 펴고 있으며 이보형이나 김연갑이 이 설에 합세한다. 경복궁 중수설은 명확한 이론이라기 보다는 논리의 시발로1930년대 일제 강점기시 조선총독부 기관지『조선』에 김지연은「조선민요의 연구」라는 제목의 기사를 연재, 여섯 가지의 기원설을 기록한것에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물론 김지연은경복궁 수수라는 단정의 글은 없지만 그 뜻은 공유되는 시발을 가진다)

이는 1930년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이 내면에는 흥선대원군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정치적 시각이 담겨져 있다. 이러한 견해가 현재까지 내려오면서 정치적 시각은 배제되어 가며, 강원도 지역의 아리랑이 선택되어 한양에 들어오는 확산의 흐름이라 한다

 

◆ 정선 아리랑의 위상편에서.. 가증스러운 위상

강원도라는 특정 지역의 민요가 어떠한 이유로 선택되었는지 설명하지 못하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연갑의 <아리랑 시원설>에서 강원도 아리랑중 그 대표적인것이 정선아리랑이라고 단정하는 것엔 동 책P51에 4, 정선 아리랑의 위상편에 이보형의 아래의 논지를 인용하고 있다.

* 강원도의 모든 아리랑의 원형이며 (중략) 아리랑 하면 긴 아라리를 가르킨다. 여기서 정선 아리랑이 모든 아리랑의 원형이란 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매우 주관적인 독단이다.

또한 긴 아라리(8/9박자의 정선 아라리를 가르킨다)만이 아리랑의 전부는 어니란 점으로 아리랑의 기장 처음 기록은 경기도의  자진모리아리랑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보형의 기록엔 정선 아리랑은 800여수 평창아리랑40여 수의 데이타를 가지고 있다 하는데 평창아라리를 정선서 채보해서 정선 아라리로 둔갑되고, 또한 분간이 안되는 것도 있고 하여서   진정 800수가 정선 아라리란 규정을 어떻게 했는지에 의문에, 이러한 데이타의 신빙성이 있는지 데이타의 각 지역을 찾아다니며 검찰해보기나 했던가..  그러기에 앉아서 연필만 굴리는 엉터리 소리라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인용엔 고숙경의 1980년 석사논문 <정선아리랑에 관한 연구>에서 에서 인용하고 있다.

* 강원도 아리랑 중에서 정선 아리랑을 택한 이유는 기 기원이 가장 오래되었고~(중략)

 

고숙경의 이러한 문장도 정선 아리랑의 기원이 가장 오래되었다는게 일반적 사항이 아니기에 그 근거를 제시하여 기록하여야 옳으며 통설에 의핸 이야기들을 자신의 기록으로 이입하는 것은 매우 주관적인 모양새로 전자의 경복궁 중수설의 모순에도 반하며 김연갑은 이러한 추종으로 정선아리랑의 제 논조를 해석하고 있다.

정선 아라리는 위에서 보는 경복궁 중수설의 모순에도 불구하고 자기 합리화 과장에 논조가 모순되는 글이라도 집어 삼키는듯 하다.대표적인 예로 정선교육청의 학습자료엔 홍교장의 글에서 정선 아라리는 평창을 거처서 서울로, 태백을 거처서 부산까지 전국방방곡곡의 아리랑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우리의 문제에서 박사 논문이나 이러한 수 많은 학위논문들,,, 그 중에는 현장적 연구가 아닌 남의 글만 보고 확신적 가상문제를 인용하여 사실로 둔갑하는, 넓게보아 학문의 매러지즘에 빠지는...위 논문에서 정선 아리랑이 가장 오래되었고 하는 글은 편중되어있는 글을 인용함으로서 합리화 시켜주는 과정이듯,,,

이러한 수많은 오류들을 잘 파악해야 할 것이다.시대적 상황에 따라또는 지역적 환경에 의하여 다양하게 변화된 아리랑은 그것을 연구하는 학자가 곧 향수자라는 점 때문에 그 기원을 연구하는데 있어 취향적, 향수적 편견을 배제하고 객관성을 유지하지 못한 문제점이 있었고, 또 하나는 논리적 구조위에 현실의 역사를 무시하는 점으로 이것들은 아리랑 연구에 있어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문제이다.

 

객관성을 가진 아리랑의 기록

그러나 경복궁 중수때 강원도 아리랑이 뗏목을 타고 서울로 전이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는 이론과는 다른 관점에서황현의 『매천야록』과 더불어 헐버트의 기록을 보면 경복궁 중수라는 주관적인 견해와는 다른 구체성을 가진 객관화된 역사를 기술한 점이 연구의 대상이 된다.

 

헐버트의 기록을 보면 , 그는 “나의 개인적 지식으로 이 곡은 3,520일간 밤마다 노래되었고 대략 1883년부터 대중적인 애호(the public fancy)를 받았다고 전해진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886년 6월 중순경이며 그해 6월 11일은 헐버트가 처음 조선 땅을 밟은 날이다. 그의 말처럼 헐버트는 조선에 온 날이후로 그것을 기록하는 날까지 밤마다 들었고, 자신이 증명할 수 있는 부분은 그가 조선에 입국한 이후부터이며, 아리랑이 1883년부터 밤마다 노래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다음은 1894년 이전에 기록된 『매천야록』 기사이다.황헌의 매천야록에는 아리랑의 제목만 명기되고 그 내용의 사설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단지 아리랑을 부르게 된 동기와 그치게 된 전후 사정만이 남아있으나 전문적인 광대廣大 의해 연주되었고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이 있던 시기에 밤마다 전등을 켜고 노래를 했고 궁중에서 매일밤 불리어졌다 한다.

 

하지만 헐버트나 황헌의 기록은 전문 가무단이라는 객관화 사실에 인하는 사료이며 헐버트는 아리랑의 선율도 기록하고 있다.이미 경복궁 중수설은 미약한 이론으로 성립되었지만, 이 두가지 대립되는 논제중에 어느쪽이 타당하고 역사의 사실에 가까워지는 당위성을 내포할까?? 아니면 혹 이 두가지 모두 아리랑 확산의 경로를 가속화 시켰던가 또는 두가지 모두 부정되는 다른 논리가 부여될 수 있슬까??

이 지역에서 잘 아는 강릉대의 강등학은 "정선아라리의 민요생태와 문화적 의미"에서 아리랑이 통속화, 대중화 과정을 거쳤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현재의 모습으로 과거의 모습을 추측한 환원론적 시각이다.

 

아리랑이 통속화하는 과정에서 각 지역의 아리랑이 발생했다는 점은 헐버트는 강등학의 의견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강등학이 주장하는 이 토속적 성격은 19세기 후반 음악문화의 통속적 성격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한국민요학』(한국민요학회, 2008) 23집아라리’라는 헐버트는 최초로 오선지에 3/4박자의 아리랑 선율을 기록한바 이는 8/9박자의 정선아라리와는 다른 구조의 기록한 아리랑의 곡조는 강원도의 ‘아라리’가 아니다.

황현과 헐버트의 기록을 검토해 보면 아리랑은 전문예인집단에 의해 시작되었고, 그것이 민요로서 민중들(민초)들의기층문화로 전파되었다는 추측이 충분히 가능하다.

이에 비해 경복궁 중수공사는 1864년 고종의 섭정자격으로 정권을 잡은 홍선 대원군이 1865년 경복궁 중건을 착수하여 2년후인 1867년 7,700칸의 대역사를 완공한 것이다.

이는 연표상으로 보는 것이지만 경복궁 중건시 특정 강원도 아리랑이 서울로 들어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는것은 개연성을 가지지만 개연성이란 점은 확증은 없이 사실이 그렇다고 볼 수 있는 것을 말함이기에 정확한 물증의 증명은 없는 이야기이다.

 

여기에 아직 的確한 자료는 없기에 이하 개연성의 추론일뿐이란 점으로 단정하면 그것은 오류라고 본인은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아라리의 역사들이 단편조각들을 개연성에 의해서 역사의 사실로 둔갑될때는 중대한 오류가 있슬 수 있슴을 시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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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평창아리랑은 무엇일까??

여기서 평창아리랑의 제 이론을 논하자면 평창아리랑의 제 논리는 정선 아리랑의 논리성이 이를 덮어버렸기에 정선 아리랑의 모순과 허구성을 헤아려야 하는 필연성에 봉착하기에 그에 대하여 논고하고자 한다.

그 한 예로는 평창군 미탄면 평안리 일대의 한치 뒷산 청옥산 아라리이다.

정선 아라리 가사중에 산나물의 가사의 발상지는 일명 "한치뒷산의 아라리"라고하자 정선인들은 정선땅에도 한치가

있다고 한다.

 

정선의 한치는 광업소가 있던 산으로 나물한포기 않나는데 곤드레딱죽이 아라리 가사의 시원지라 함은 비 논리적이다.이렇듯 산나물 채집의 가사는 모두 한치뒷산 청옥산의 아라리라 볼 수 있으며 봄철 춘궁기에 끼니를 연명하기위해 해발 1,200m의 청옥산 고원에 올라 산나물 뜯는 산의 아라리인 것이다.

그러기에 정선아라리에서 시원설로 잡고있는『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가사의 아라리는 시원에 대한 기록도 없으며 <아리랑 시원설>이란 책에서 동 가사는 정선뿐만 아니라 강원 남부 산간지방에서 채집되었다 하는데 기록이나 출처도 없는 왜 정선 아라리 시원이라 규정해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의 주장일 뿐이고 그러하면 필자의 주장으로서는 <만수산 사설>의 아라리는 이른 봄 춘궁기에 청옥산에 올라 나물 뜯을때 검은 먹구름이 내게 몰려 오는데 이것이 비가될지 눈이 될지 애틋한 심정을 노래하는 것이다.

정선인들이 이 가사를 믿고 아라리 시원설이라 하는 것은 담음장에서 충분하게 분석하고 이에 물음의 멧세지도 남길 것이다. 그러기에 본인의 글에 대한 다른 의견이 계신분은 언제라도 논쟁에는 응답드리겠습니다. 또한 평창아라리와 정선 아라리는 동일한 영서의 산간지방이라 같은 시대성과 같은 문화권이기에 대략적으로 같은 가사를 공유하는데 평창아라리는 천 오백수이지만 정선 아라리는 2~3천 수니 하는것은 가사 스토리가 전부 다른 것이 아니라 "아"니, "어"하는 조사의 받침이 각 지역마다 , 남자와 여자사이에서도 발음이 틀리기에 그것을2~3천개의 가사로 파악한 것으로 늘어난 추정한다.

                                          <육백마지기 아래 한치 마을>

 

 

< 구한말 동강 뗏목에 대한 이해>

구한말 뗏목이 뗏군들의에 의해 강원도 산간지방에서 서울 마포나루까지 이동하는 과정에는 남한강에 이동경로에서 벌목이 가장 성행한 곳은 오대산에서 내려 흐르는 오대천 사이의 해발 1,000m가 넘는 산도 5~6개가 있으며 일제강점기 시에는 월정사 위에 관대사거리에 "계림회사"라는 목재회사가 존재하였으며 월정사 아래엔 260여호의 벌목공들이 있었다. 아직도 상원사에는 당시 목재를 운반하던 협궤 레일이 남아있다.

 

당시에 가장 비싼 목재는 박달나무로 안동 목기공장으로 이송되는 1930년에 채집된 "박달낭근 왕자 축자로 다 나아간다"란 아라리 사설은 합격이란 검인도장의 王자 丑(소축)자가 찍힌 모습을 말하며 대관령을 넘어 안동현까지 우리도 못탄 기차를 타고 간다는 가사이다. 그런데 정선 아라리에선 이에 뜻도 해석을 못하며 유머로 분류하고 있다.

 

오대산에 흐르는 오대천은 정선 나전에서 동강으로 유입되는데 지류천에 뗏목은 불가능하여 "보메기"라는 물을 가두고 목재를 쌓아서 비가 와서가두리에 물이 넘치면 일시에 물막이를 터쳐서 순간에 많은양의 물이 흐르게 하여 목재가가 등걸로 떠 내려가게 하는 것이다<* 보메기란 뜻은 월정사 원행스님의 홈피 인용>

 

이러한 과정을 거처 목재가 동강에 다다르면 뗏목으로 묶어 내려보낸다. 하지만 뗏군 2인 1조로 이를 뗏목을 마포나루까지 몇밤을 세우며 끌고가는 것은 아니다. 1번 주자는 마하리 진탄나루까지 운송하는데 사북의 핀 꼬까리라는 황새 여울에 뗏목이 감아돌며 조그만 바위에 부딪히면 뗏목이 부셔저 등걸목들이 뗏군을 치게되어 한 해에도 몇 명이 죽게된다.

 

또한 2번 주자는 진탄나루에서 영월 덕포까지 어라연에도 죽음의 여울을 타고 내린다. 이러한 죽음의 공포에서 살아나온 긴장감에 덕포나루에 올라선 뗏군들은 밑바닥 인생의 희열인 "만지산 갈보야" 하며 전산옥의 대폿집에서 술 한사발 하는 것이다.

이때에 부르던 아라리가 " 산옥이에 입술은 객주집에 술잔이오, 이눔도 빨고 저눔도 빤다"

 

여기서 부터 3번주자는 남한강의 단양을 거치며 좀 안전한듯 꽃 단양이라 부르며 충주, 여주 이포나루, 팔당, 미움나루를 거치며 뗏군들은 물의 흐름을 잘 아는 그 지방 뗏군들에게 교대되어 마포나루까지 운송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각 뗏군들이 같이 한잔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도, 뗏목에 의해 강원도 특정지역 아리랑이 서울로 확산경로를 갖었다는 개연성에 본인으로서는 상반되는 견해를 피력하는 것이다.

또한 김소운이 채집한 1930년대의 평창아리랑은 김소운이 일간지에 현상공모로 게시하여 전국 각 지방의 아라리를 채집하여 보네주면 사려금을 주기에 이때에 평창에서 누군가가 응하여 아라리 사설을 채집하여 보내서 전국 아리랑채집의 최초의 기록으로 남게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