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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아리랑

정선 애들은 성마령 잿말랑에 무슨 장난질을 하는고??

 

정선 애들은 성마령 잿말랑에 무슨 장난질을 하는고??

 

 

 

 

 

  본인은 아래의 도발행위를 하는 정선사람들에게 마음적 여유를 갖지못해 그런 자들이 우습광대 짓거리에 백발 노인네가 이러한 행동을 하였다 하더라도 그들은 소꿉장난하는 애들로 취급한다.

 

아리랑은 음악적 선율이 아니라 사설 가사에 치중한 한풀이를 통한 자기 성찰의 노래이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정선 아리랑 한 곡이 세계를 향하여 멋지게 울려 퍼졌다. 누가 보아도 가창자 정선 촌노의 아름다운 음색에 매료될듯 정갈한 노래는 세계화 그 자체였다.

이에 고무된 편집광적인 어느 정선아리랑 향수자는 정선의 긴 아라리는 애국가에 비교하는만큼 입밥으로 위상을 높이자고 주장한다.

 

  하지만, 동계올림픽에서 열창된 정선아리랑을 다시한번 분석 고찰해 봅니다.

만약 앵콜을 받고 또 한 수의 정선 어리랑 사설의 가사를 열창했슬때 서구인들은 처음에 들은 아리랑보다 열기가 그만 못하고 식을 것이란 추론입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똑같은 선율의 가사가 번복하기 때문에 바로 실증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정선아라리의 사설은 평창아라리와 대부분 거의 같아 서로를 구분할 수도 없는 가사가 1,000여 수 넘게 있는데 선율은 긴 아라리와 자진 아라리 두개의 가락에 의존된다. 하지만, 평창아라리의 선율은 정선과는 대조를 이루어 정선아라리보다는 좀 빠른 엇모리조 형식의 장단이 대부분이다.

 

  정선 아라리는 메나리조 산의 아라리라 하는데 이는 제 논리에 어긋나는 이야기이다. 10/9박자의 느린 긴아라리를 부르며 산의 민요의 기능성인 김메고 밭갈고하기에는 템포를 맞출 수 없기 때문이다.

유희謠로는 하나의 이상적 장르를 갖추지만 기능면에서 산간의 노동에 템포를 맞추는 노래는 아닌 것이다. 하지만 평창아라리는 조금 빠른 형식으로 산간지방의 노동의 대부분인 혼자서 하는 일에 템포를 맞추는 기능을 지금까지도 고수하고 있다. 이것이 영서지방 원래의 산간 아라리의 전통성이다. 그러기에 정선 아라리는 근작에 후렴을 달고 이를 부르기에 몰아쉬는 호흡으로 인하여 더욱 느려지는 가락으로 개산된 짝퉁이란 점이다.

 

  정선 아라리는 선율에 매력이 있다 하지만 그를 두번 부르면 쉬이 실증을 느낄것이란 위의 지적에서 그러면 사설의 수가 천여 수 넘도록 가락은 하나, 두개에 의존된다면 그도 답답한 심정을 느낀다. 천 여수의 가사 하나의 가락에 의본된다면 이것 자체도 큰 문제이거니와 아마 요즘 젋은 친구들은 랩이나 헤비메탈이니 수 없는 가락의 장르적 발전의 진보를 가져왔슬텐데 왜 하나의 선율에 의존하여 천 여수의 가사를 가지게 된 것일까??

 

  그것은 다름아니다. 태백산맥 영서지방에서 많은 가사적 다양성의 발전은 일상의 모든 이야기를 다루고자할때 선율이 아닌 가사적 발전이 가해지기 때문이다. 또한 이에 준하는 평창아리랑은 가사적 발전속에 악보의 선율은 무시되고, 또한 후렴도 필요없는 아리랑이 전통성의 원형이 되는 것이다.

  임석재는 강원도 아리랑은 후렴이 없었다고 보고한 바가 있습니다. 이렇듯 정선 아라리도 평창아라리와 동일한 선율에서 변모를 하게되는데 정선아라리 향수자들은 경복궁 중수시 뗏목을 타고 한양으로 내려가 정선아라리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가고 하지만 기실 뗏군이나 산판 작업자들이 올라오며 외부인과의 저촉에 정선 아라리는 가락의 선율이 변해지고 지금까지도 변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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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게시글에서는 정선 아라리가 뗏목을 타고 한강을 내려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는 경복궁 중수설의 허상을 문헌을 통해 고찰하겠습니다.

 

*최영년의 1926년 발행된 <해동죽지>에서 경복궁 중건과 아리랑을 연관시키기 위해 제시한 최영년의 기록은 어떠한 근거도 되지 못한다.

 

*김지연의 1930년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조선>에 3차례 연재의<조선 민요연구>에서 여섯가지 기원설은 일본의 기관지에 조선의 혼의 이야기(아리랑)를 싵은 것은 대원군을 멸함하는 것에 이용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고교형(高橋亨)의 <조선민요총설朝鮮民謠總說>의 내용의 뜻.

*황현의 <매천야록>에서 아리랑은 신성염곡(新聲艶曲)이라고 표현하였는데,  고운 노래를 염가(艶歌)라 칭하였는데, 김연갑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염곡(艶曲) 요염(妖艶)한 노래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으며, 염곡이란 아리랑의 장르를 말한 것으로 보인다.

 

* 여기에 분명한것은 헐버트의 제 3자적 입장으로 당시의 기록이다.정말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으로 사망 일주일전 한국에 와서 사망하여 한국에 묻힌 헐버트. 그의 눈으로보는 객관화된 이야기에서 아리랑의 정답을 찾아본다,

 

  이러한 점들을 따져보며 정선 아리랑이 뗏목을 타고 전국으로 확산되었다는 논리는 타당성을 결여한 아무런 가치나 의미도 없는 점을 밝혀져 이 논리의 타당성은 없다고 보고있는데 정선 아리랑병 향수자들은 개가 고기물듯 끈질기게 물어당긴다.

 이 점에 본인의 생각으로 다시한번 고찰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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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고 따분한듯 느낄 논리들은 다음으로 미루고 오늘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이야기만 피력하며, 하지만 아래 글에서  평창인들이 분명하게 액션을 취해야 할 이야기를 발표합니다.

 

  아리랑은 민요로서 구전되어오는 노래인데 정선 아리랑처럼 잘 숙련된 가창자가 별도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아리랑은 민중의 노래로 음치나 어떤 제한도 없이 민초 자신들의 삶의 한탄을 리얼하게 부르는 것이고 산간의 생활속에 김을 메고 나물 뜯을때등의 혼자 일할때 혼자서 흥얼거리는 자신이 스스로 가창자이고 또한 듣는이도 없고 스스로가 듣는 창자(唱者)가 청자(聽者)라는 점이다. 

 

  이렇게 혼자 흥얼거릴때 마음속 한 구석에 응어리지고 자주 기억속에 오르는 일상의 삶속에 돌출되는 기억의 여러가지 구박받는 한. 소외되는 한. 이별의 한. 아픔의 한등 여러가지 일상에서 돌발되는 恨을 삭힘이 중요한 것으로 이러한 대꾸나 도치의 강조법의 즉흥성이지만 그 가사들은 구전으로 잘 다듬어진 가사들을 부르며 한을 정화(카타르시스적)시키는 것으로 혼자 흥얼거릴때 후렴이란 너무나 반복적이기에 실증스럽고 지루하기에 후렴의 의미는 없어지는 것이다.

 

  또한 이런 노래를 부르며 연상되는 생각속에 김메기등 일의 실증을 잊어버리고 시간적 템포를 가지는 이것이 민요의 기능성을 갖춘 산의 아라리란 뜻이며 평창아리랑(아라리)는 오늘에까지도 그 정통성의 맥을 이어가는 산의 아라리의 진수인 것이다.

 

 그러므로 영서지방 산간의 메나라조 아리랑은 선율이 아니라 체험적 가사에 치중하게 되는 것이다.

체험속에서 못내 아쉬운 응어리의 恨, 갈망과 삶의 고뇌속의 恨, 비애의 恨嘆(한탄)등 생활속에 얼룩지고 가슴앓이가 되는 모든 기억들의 이야기를 내면의 세계에서 깊이 성찰하고 자기 중심적이야기로 재편하여 읊어내는 恨의 탄식조인 아라리 가사가 아리랑의 고형이란 점이다.

 

  이로서 영서 산간의 아라리는 자신의 감정의 해소(카타르시스)를 통하여 승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이 전국 모든 아리랑속에 흡입되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가락의 선율이 아닌 생활속에 구겨지고 응어리진 기억들의 한탄스러움에 대한 스스로의 자기 성찰적 노래인 것이다.

 

  자, 그럼 이제 선율이 유장하다는 정선 아라리는 산간 아라리의 기능을 버리고 문명세게의 문화를 수용하면서 후렴을 달기에 후렴을 부르기 위해 긴 호흡을 하기에 자연 장단은 느려지고 이로서 산의 일들을 하기에 템포가 맞지않아 민요의 산의 기능성을 상실한체 외부의 교류에 동화되고 흡입되어 가사적이 아닌 가락적 유희의 민요로 변질된 것이다.

 

  이런 유희요로서 정선 아리랑은 한번들으면 감탄사가 만발하지만 앵콜로 두번 들으면 가락이 똑같기에 곧 실증을 느끼고 느낌도 반감되는 정선 아라리가 아리랑의 원류일까요, 아니면 후렴도 없고 가락적이지 못해서 듣기도 심심하지만 영서 산간지방의 삶의 정체성을 유지한체 어쩌면 그것이 이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지니는 고통스런 삶의 의미가 통하가에 이로서 전국적으로 아리랑이 확산일로에 들어섰다는 본인의 견해가 옳은 것일까요??

즉, 선율보다는 가사에 치중되는 평창아라리가 아리랑 기저의 恨의 공통성의 분모를 가지게 하는 아리랑의 원류일까요 함는 물음입니다.

 

  본인은 아리랑의 기저에 작용하는 삶을 내용으로하는 가사적인 평창아리리가 원류라고 생각하기에 정선 아리랑의 향수자들의 아리랑의 정체성과 현장성이라는 이창식 교수의 이론도, 여타 수십명 발표자의 이야기 모두 시점을 바라보는 관점의 기준이 틀리기에 본인은 그들의 국소적인 이야기에는 반합니다.

 

아리랑에 행정단위로 구분하는 시간과 공간성

 

  지난 80년대 중반에 정선아리랑의 성장에는 진용선의 기여가 큽니다. 그는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를 보며 고향 정선에 무엇을 할 수 있슬까 생각하고, 그것이 곳 정선 문화의 기저를 이루는 아리랑임을 간파하고 아리랑 채록에 심혈을 기울여 정선 아라랑이 이름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들춰 봅니다.

진용선은 신동읍 출신이며 신동읍은 과거 1904년 행정개편 이전엔 평창군 동면이었는데 그러면 그의 신동읍에서  아리랑 채록은 평창아리랑 아니었던가요. 신동읍 사람들은 옛날 평창군 동면일때에는 평창아리랑을 부르고 정선군 신동읍으로 행정직제가 개편되었다고 정선 아리랑을 불렀다면 그것은 김일성보다 더한 억지란 점 아닌가요?

지금도 신동읍이 평창군 동면이었다면 진용선은 평창아라리를 채집했슬까요?? 그냥 우스개 애기입니다.

 

  미탄의 평창아라리 가창자 중에 남극선은 정선출신으로 미탄에 와서 살면서 평창아라리를 유창하게 부릅니다. 하지만 그 속엔 정선 아라리의 발성법과 인토네이션(억양)이 묻어있다 합니다 이렇듯 태백산맥의 영서지방의 구분을 행정적, 인위적으로 하기엔 참으로 개탄스럽다는 생각이다.

 

  물론 평창과 정선의 아라리에서는 가락의 차이는 있지만 그것도 원래는 차이가 없었던듯 하다. 그러나 정선 아리랑이 외부의 물결에 후렴을 달며 박자가 좀 느려지는 현상으로 변모해 가는데 정선 향수자들의 정선 아리랑이 전국으로 확산 되었다 하면서 기실 자기네 정선아리랑은 후렴을 달고 변하는 것엔 아무런 설명도 없는데 이는 똥개가 무서울때 꼬리를 쭈빗하듯 정선 아리랑도 이점에서는 꽁지를 내린다.

 

  그러나, 본인은 그렇게 옹졸한 처사와는 반대로 일전에 발표한 "평창에 박물관을 건립하자는 평창 남부권 개발안"에서 이야기하듯 평창, 영월, 정선은 태백산맥 영서지방으로 평창에서 비가올때 정선도 비가오고 눈이 올때 날씨도 흐린 지리적인 공간성이나 시간성의 환경이 거의 같거나 비슷한 하나의 문화권이란 점이다.  

 

  물론 평창과 정선, 두곳의 아리랑은 같고 비슷한 가사이나 선율적으로는 달리하고 있다. 여기에는 위에서 말한 임석재는 ‘과거 강원도 아리랑에는 후렴이 없었다.’고 보고한바 있다. 그러면 정선 아라리는 변화하고 있다. 물론 정선 아라리 향수자들도 이를 인정한다.

 

 김연갑의 책에서 아리라는노래를 부를때 막상 제목을 생각하지 못한때에 시간을 주기위해 후렴을 부르는등 아직도 후렴을 붙여가고 있다고 김연갑은이 마치 자기의 이야기처럼 말하지만 이 이야기에 진원은 연규한으로 김연갑이 인용부를 찍지 않은 것이다. 그는 "정선 아리랑"이란 책에서는 연규한의 이야기를 그대로 표기하여 적었지만 다음책인 "아리랑의 시원설"이란 책에서는 마치 자기의 이야기인양 하고있다.( 김연갑은 평택생으로 후렴이 달린 이후에 정선을 찾아 들었다. 물론 지금도 간혹 후렴없이 부르기도 하지만,,,)

 

  이들은 이처럼  아리랑에 어떤 이야기 하나를 만들고 철저한 검증도 없는 이야기를 후일 자신이 다시 인용하면 하나의 정론화되는 것으로 간주하는게 그들의 아리랑 이론도 아닌 논리란 점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자행하는 정선인들의 소행 한가지 제시합니다,

 

 

성마령 정상엔 이런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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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성마령 잿말랑(정상마루)에 2011년 정선인들이 세운 성마령비(오른쪽)과 정선아리랑시비(왼쪽)

아래) 정선 아리랑 시비의 내용

출처-평창문화원 포토에서

 

 

 

  성마령(星摩嶺)은 평창군 미탄면 평안리에서 정선읍 용탄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길이는 약 17.7km 구간으로 약 7시간이

소요된다고 하며 정상부 해발고도는 973m이다.

성마령(星摩領)은 과거 평창과 정선을 연결하는 주요도로이었지만 인적이 끊긴지 오래다. 과거 조선시대에 1872년에 제작된 군사지도인듯한 「해동지도」의 평창군편 하단에는 성마령은 大路였고 梨峙通 강릉은 산세가 험한 中路였다고 표기되어 있다.(梨峙通이란 배나무가 있어서 뱃제라 불렀다 한다)

 

  이제는 성마령이 상징적 존재인듯 하지만 가리왕산을 주산으로 발원하여 남북으로 길게 뻗은 고원부는 평창과 정선을 가르고 있으며 평창에선 어느 봄날 봄비가 온 후 다음날 아침 약수리 고목나무 아래에서 보면 송기산 위로 하얗게 드러난 고원의 청옥산을 넘어야 정선땅이고 정선 시내에서 보면 서북에 길게 드리운 병풍같은 산세를 볼 수 있는데 이곳을 넘기에는 성마령과 백파령이 가로막고 있다.

( 여기서 봄날 해발 1,200여m의 청옥산 고원위에서 나물뜯을때 먹구름이 몰려 오는것이 눈이 올까나 비가 올려나 하는 사설 가사의 의미이지 600년전 전오륜 패거리가 노래 부른것이 아니란 본인의 글은 이미 게시하였습니다)

 

 과거 조선시대에 대관령은 中路로 표기되어 있지만 이곳 성마령은 大路였다는 점은 (* 출처- 조선시대 해동지도) 정선과의 교류도 잦았고 또한 정선인들이 관문이었기에 이곳 성마령을 넘나드는 사람도 많았던듯 하지만 지금은 인적이 끊긴지 오래이고 상징적 존재로 남은듯 하다.

 

이러한 성마령 잿말랑(고개 정상부)에 성마령비(오른쪽)과 지난 2011년쯤 정선인들은 정선 아리랑 시비(오른쪽을 세웠다

한다. 아마도 이곳에 정기를 모아보자는 뜻인지는 몰라도 해괴망측한 일은 정기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정선아리랑 비는 성마령의 한쪽 옆도아닌 정상의 옛날 고갯마루길을 가로막고 세워져 있다. 참으로 자기것밖에 모르는 무식한 넘들이다.

역사가 깃든 성마령의 길을 가로막고는 무슨 장난질을 하는고?? 역사도 모르는 무식한들인가. 그러면서 정선아리리만 중요하단 생각은 논리모순의 자가당착이다.

 

 과거 일제강점시에는 풍수사상에 기인하여 정기를 끊고자 혈맥을 찾아 철항을 때려 밖았다면 정선인들은 쪽바리보다도 무색하게 상식이하로 嶺의 정수리의 길을 가로막고 정선 아리랑 시비라는 돌로 내리 눌렀다. 이것은 무지에서 오는 문화 정체성의 훼손을 넘는 파손이란 점이다. 그러고 자기네 아리랑만 잘났다고 떠드는 것인가...

 

  평창군 미탄면 평안리이기에 평창의 영봉으로 평창의 기상인 정기를 찌그러트리겠다는 의도였던가??

본인도 이치에 맞지않는 이야기를 한다고 하면 본인으로서는 그런 무식한 소행엔 같이 무식하게 대하여야 할 것 아닌가 하는 점에 어찌 좋은말로 표현하오리오

이러한 행위는 비단 이곳뿐만이 아니라 가리왕산을 넘는 백파령에도 이러한 시비를 세웠다 하는데, 아무리하여도 평창과 정선의 주 산맥의 정수리에 정선 아리랑의 비석을 세워 내려 짓누른다는것은 쪽바리들의 철항보다 더 야만적인 행위인 것이다.


  이것을 본인 혼자서 개인이 무엇이라 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남이 나에게 욕하면 가만있슬 사람없건만, 명예훼손이라고 금방일라도 씹을듯한 사람들이 이렇게 길을 막고 농락을 하는 패거리들에게는 입을 봉하고 있다니,,,

만약, 행정구역으로 그곳이 평창땅이라면 그네들은 평창군과 협의하에 실행하여야 정상이지 그렇다면 이건 기습침입이란 점이다.

 

왜 그들은 아무도 보지않는 산속깊이 비석을 세웠슬까??

아도도 먼 후일도 아닌 20년만 묵혀도 우리 아리랑비는 옛날에 이곳에도 존재했다는 역사를 만들기 위함인듯 하다.

정선 아리랑의 시원이 600년이라는등 해 보았자 정확한 기록은 1980년대 이후들이다. 1980년대 이전은 추정치를 가지고 기록이라 떠드는데 이 비석 두점도 그러한 시각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것 또한 남이 나를 괴롭히는데도 멍하게 가만히 있는 평창인들에게 부여되는 과제이리라.

 

그러기에 지난번 일부 문화원 위원들이 성마령 답사하고 기념사진 한 컷 찍고 내려오는 것도 좋치만 그보다는 이러한 진상을 파악하고 진정 그곳이 평안리라면 평창의 문화발전을 대변하는 공적인 조직단체로평창문화원과 향토사 전위는 우리의 입장인 부당성의 논리적 성명서를 발표하였으면 더 좋을듯 하며, 평창군은 이에 행정에 입각하여 최고장을 발부하고 철거시행까지 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정선인들의 도발성이란 웃기지도 않습니다.

지난 85년 도원가곡 목판본을 찾았다고 광분했지만 인위적으로 가공한 사건이 드러나 하늘도 웃겠다.

또한 두문동에 칠현이라나 이 사람들이 아리랑이 시조라고 하며 정선역 광장에 칠현비를 큼지막하게 세우자 세우고 하자 일각의 정선인들인 그것은 아니라고 밝힘으로 스스로 걷어차서 그 비는 전씨 문중으로 도망가 지금도 쫒겨가있다.

 

 이러한 정선 아라리의 짝퉁사건은 정선 아리랑의 확립체계에 무리가 따르자 이를 보완코져하는 충성심이 아닐까 생각한다.

정선 아라리의 역사성을 위증을 땜빵하려는 이러한 점은 요즘 본인이 밝히는 정선 아라리는 짝퉁이고 평창아라리가 원음이고 고형으로 지금도 전통성을 유지하며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다.

 

단어적 이해의 보충설명  

해동지도

해동지도를 보면 각 군단위의 그림에 논, 밭, 가구수, 인구수가 적혀있고 각 면이 나열되어 있는데 지도에 곡물현황등이 나타나는것은 전시에 쓰려는 군사용 지도인듯 하다.

전투에 사령관은 임금이 지정해준 자로 이를 "도원수"라 한다.

 

 예를 들어 행주산성의 권율장군이라하면 함경도에서 회유하는 고니시 유키카와(소서행장)의 부대에 서울을 사수하라고 임금은 광주목사 권율을 도원수로 임명했다. 아군 2,600명대 왜구 3만의 싸움에서 권율은 승리하자 소서행장은 본국으로 송환되어 임란의 실패에 재판에 회부되어 35세의 젊은 나이에 사형당하다.두번 사형당한들 어떨소냐.

도원수는 작전및 당시 어려운 상황에 주변에서 군사나 군량미및 부속 물자들을 공출하는 권한도 부여되는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후 논공행상를 따져 상을 주게 된다. 하나의 전투를 위해 이러한 전방위적 전권을 가진 자를 도원수라 한다

 

해동지도에 그려진 도로

  해동지도를 보면 도로는 발간색으로 그려저 있는데 당시에는 미탄서 멧둔제를 내려와 평창강변에서 종부 음지말을 통해 삼방산을 넘어 영월로 가는 도로가 보인다. 물론 자세히 한다면 아마도 천동 도마치골을 넘어 영월 북면으로 들어가는 도로일 것이다.

 

  일전 본인은 평창임란사에서 당시 권두문 군수의 일기로 행적을 보며 왜군은 미탄에서 율치를 거쳐 마차로 빠지며, 일부는 멧둔재를 넘어 평창을 장악하는데 본대는 이곳 상리 양어장에서 종부 음지말을 지나 약수로 직행했슬 것이란 추정에서 그곳으로 길이 있는 점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그리고 일부는 강을 건너 평창을 장각한다)

 

  그 이유는 평창이 그들의 목적지가 아니고 경유지로서,,,또한  왜구의 4번대는 원주의 강원도 감영을 목표로 4번대장 요시 모리나리는 강원도 관찰사의 자리를 내정하고 원주를 치기위해 주변을 한 바퀴돌며 사방에서 원주로 지원하는 양수겹장에 이를 모조리 제거하고 중앙을 침입하겠다는  어라운드 전법인듯 한데, 호구록에 의하면 권군수가 포로가 되고 영월로 호송될때 이미 영월에도 주둔군이 있어 보이며, 영월서 원주로 들어가며 산림쯤에 사람을 죽여 장대에 매달은것이 보이는 기록으로 볼떄 첨병은 벌써 신림까지 와 있었다는 이야기임에 추론으로 본다면 요리 모시나리의 본대는 아마도 평창쪽으로 지나가지 않았슬 수도 있다.

 

노산 호수

또한 객사헌은 중리에 있으며 사신이나 왜래객은 음지말에서 남산 뒤를 넘어 상리 여울을 넘어 들어올 수 있다는 가설도 ,, 이에 준하며 객사헌과 관헌은 모두 노성산 샘물이 용이한 지역이다.

또한 노성선 구릉아래엔 곰의 배꼽형이라하여 명당이라 하지만 그 아래는 비가오면 수심7~80m의 호수를 만들어야 하는 지형인데 카르스트지형이라 물이 스며 샘으로 빠져 나가는 것이다.

 

대로와 중로

 그리고 여기서 대로니 중로라는 도로는 과연 어떠한 도로일까..

도로를 만들면 외세가 침입이 용이하기때문에 과거 조선은 도로를 만들지 않았다는데..이런말은 史家도 아닌 무식한들의 소견없는 이야기이다.구데기 무서워 장 못담그라만은.. 외세에 침입을 당할만큼 당하고도 그런말을 하다니..

 

과거 조선시대는 도로를 전담하는 부서도 없었거니와 그만한 인력도 갖추지 못했던, 즉 비젼을 갖지못한 정치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제법 관계망의 도로는 1930년대쯤 사방공사로 다목적으로 생기는 신작로였다.

 

이전에는 겨우 역마차길 정도면 대로이고 말이 다니며 밟아 자연 길이 된것은 중로정도라 표현하지는 않았슬까 합니다.

 

  가리왕산

가리왕산은 일제가 만든 지명입니다.

물론 우리 주변엔 그런게 많습니다만 그래도 가리왕산은 평창의 산세와 정선으로선 외지로 나가기에 크나큰 장벽을 만드는 마치 죽음의 계곡에 갖힌 형세를 만듭니다.

이러한 가리왕산을 주산으로 시작하여 청옥산, 남병산, 장암산에 이르기까지 연 이은 산맥의 크나큰 힘이 평창과 정선의 발원의 시작이라고도 봅니다.

 

  이러한 가리왕산은 일제 강점이전에는 갈왕산이라 불리었다 합니다.

갈왕산이란 갈왕의 국가가 있었다 하는데 아직 역사적으로 정확한 규명은 이루지 못한 모양이나 태기산의 태기왕과 갈왕산의 갈왕,, 춘천을 맥국, 강릉에서는 예라고 표현을 많이 합니다. 그 이유로 예맥국이라하는 예나라는 아마도 옥저, 동예의 동쪽의 예나라라란 뜻으로 갈왕국은 이 시대가 아닌가 합니다.

 

  일제는 일본과 조선을 한 나라로 합하기위헤 우리의 고대 역사인 고조선과 이하 각 부족국을 훼손하여 역사가 없는 민족으로 장래 희망도 없어 보이게 하기위한 방책으로 갈왕국의 갈왕산도 가리왕산으로 개명한 것이다.

 

  이제 이러한 이유를 알았다면 평창의 영봉, 평창의 기상을 드높이는 갈왕국의 갈왕산도 다시 엣 지명으로 복원시킴이 옳치 않은가 생각합니다. 이 문제는 아마도 평창군과 정선군이 행정적으로 협력하여 조취를 취하여야 할 듯 합니다.

 

이상 많이 쓰고도 여기서 줄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