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강뗏목 <<황새여울의 死線을 넘는 뗏군>>
후세백작
동강 60Km중 정선의 제장마을을 지나서 칠족령과 백룡동굴에서 아래의 진탄나루까지 5km는 평창 구간이다.
강 건너에는 발 붙이고 올라설 틈도 없는 산악지형의 영월 땅이지만 강 반대의 평창쪽엔 백룡동굴과 뗏목의 사연을 가지는 황새여울(된꼬까리). 그리고 조선때부터 전해지는 문희마을 등 이곳은 평창인들의 삶의 터전이었고 문화 공간이었다.
옛날에는 연화진이라 불리던 동강은 칠족령 아래에 백룡동굴을 지나며 구비구비 돌며 자갈여울, 큰여울, 암반여울, 홍두깨여울, 마지막으로 황새여울을 지난 거센. 여울은 무당소를 만들며 내려가 영월에서는 금장강이라 부른다.
아래 사진에서 보기엔 물이 조금 불어서 많은 편이지만 물이 좀 줄어 평상시에는 여울에 황새나 청동오리 등의 철새들이 고기를 잡아먹고 배부른 탓에 바위 위에 앉자 노닐기에 황새여울로 불리어진다.
황새여울은 물살이 가장 센 여울목으로 조선시대에 한양으로 가는 뗏목도 삼키고, 뗏군도 익사시킨 이야기가 전해지는 악명 높은 죽음의 계곡이었다.
똇목은 여덟자 길이의 등걸목을 칡넝쿨이나 가래나무 껍질로 엮어서 뗏목을 만들며 이러한 뗏목은 12단내지 15단까지 길게 (40m) 엮어서 두 사람의 뗏군이 몰로 내려간다.
여기서, 황새여울에서 뗏목이 난파되는 문제를 자세히 관찰하면, 승문이 바위는 위가 편편한 수중바위로 바위 위에 물은 유속이 빠르기에 쯤물이라 한다.
바위 아래는 여울의 낙차가 좀 심하여 폭포처럼 물속으로 떨어져 들어갔다가 솟구쳐 오르는 상하운동의 소용돌이를 몰아치는 깊은 소(沼)로, 강물은 영월쪽으로 굽어지며 거센 여울을 만든다.
따라서 뗏목이 이곳을 통과하기엔 아래 사진에서 보이는 바 뗏목은 좌측(신동쪽) 으로 방향을 꺾으며, 산쪽으로는 황새바위와 안쪽의 승문이 바위 사이를 좁은 "S" 기문처럼 통과해야 한다.
뗏목이 바위에 부딛힐 경우도 있지만 꺾어서 방향을 틀며 내려올때 승문이 바위위로 올라타서 바위 위에 올라타게 되고 뒷부분의 뗏목은 유속에 떠내려오게 되면 두 힘이 다르기에 칡넝쿨은 바위와 뗏목 사이에 끼여 부서지게 된다. 그리고 뗏목은 풀려서 각기 등걸목으로 솟구치는 물에 의해 제각각의 힘으로 한길 넘는 소의 여울에 빠진 사공을 쳐서 사망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가 황새여울에서 사공을 죽이는 비밀이다. 이러기에 승문이 바위 통과시에는 뗏목이 꺾여서 통과하는것이 아니라 방향을 틀때 뗏목이 가응한 방향을 꺾지 않는 점으로 뒷쪽의 뗏군은 후미 방향을 산쪽으로 몰아서 뗏목이 직선으로 내려와 승문이 바위를 통과 해야한다. 노련한 뗏사공은 이미 이러한 지형의 물길을 경험하였고 방법을 터득하였기에 수윌하게 통과하는 것이다.
어느 기록엔 뗏목이 여울을 통과하면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오랫동안 제자리에 멈춘다고 하였는데. 이는 물이 승문이 바위 아래에는 낙차가 큰 여울로 물이 수중으로 떨어쳤다가 솟구쳐 오르는 상하운동에 의해 뗏목은 수중으로 못 내려가기에 물 위에 멈춰서 한참 제자리에 있는다 하는데, 이 점도 같은 이치로 즉 상하운동의 함이 풀리고 내려가려는 방향 이동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동강 백오십리 중 황새여울은 뗏목을 몰기에 가장 험한 물길로 때로는 사공이 죽음의 사선을 넘는 문제가 복병으로, 승문이 바위의 비밀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조선시대 뗏군들의 죽음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황새여울이다.
그러기에 사공들은 황새여울을 통하기에 전에 먼저 백룡동굴 옆마을의 객주집인 "뉘룬주막"에서 그간의 피로도 풀며, 식사를 든든히 하여 힘도 비축하며 휴식을 취한다.
또한 뉘룬주막에는 이곳 황새여울을 건너기에 자신이 없을때, 이곳 여울에 경험 풍부하고 물길을 아는 노련한 현지 뗏군들이 상주해 있다가 대신 건네주기도 한다.
황새여울에서 죽은 사공들은 이틀정도 후에 아래에 사공부부의 위령비가 세워진 안가바위가 있는 진탄나루의 무당소(沼) 아래에서 떠오르면 건졌다 한다.
사공들은 이곳 지형과 물길을 잘 알고서 황새여울에 다다를 때엔 뗏목의 후미를 건너편 영월 산쪽으로 밀어 붙여서 뗏목을 일자형으로 만들어서 승문이 바위를 내려올 것이다. 그들은 뗏목을 꺾으며 황새여울을 통과하지 않는다
아래 사진에 노란선으로 뗏목을 꺾으면 유속에 의해 떠내려가는 후미가 바위에 부딛히거나 물이 조금 많을때는 바위위로 올라타서 밀려 내려오며 뗏목을 묶은 칡넝쿨 끈은 부서진다. 그러기에 빨간선처럼 후미를 산쪽으로 밀어붙여 뗏목이 똑바른 일자로 바위 옆을 통과하는 것이다.
이렇게 황새여울을 빠져 나가면 바로 아래는 한길넘는 여울물이 아래로 떨어졌다 솟구치기에 뗏목이 제자리에 멈춰서 몇 분간 움직이지 않는다. 이는 물이 상하운동이 풀리며 앞으로 나아가려는 힘으로 전환 중이기에 사공은 가장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내 물의 솟구침에 뗏목은 상하의 정지된 힘이 풀려나면 곧바로 진탄나루로 향하게 된다.
목숨을 맏기고 이 험한 황새여울 된꼬까지 떼가 무사히 지났으니 이제 생명과도 바꾼 긴장을 풀고나니 흥이 절로난다.
우리 서방님은 떼를 타고 가셨는데
황새여울 된꼬까리 무사히 지나 가셨나
황새여울 된꼬까리 다 지났으니
만지산 전산옥이야 술상 차려 놓게
<<황새여울에 죽은 뗏군들의 망향정을 만들자>>
사실 황새여울에서 뗏사공들이 많이 빠져 죽게된 사연은 조선시대 사공보다 60년대 영월 탄광의 동바리 목재를 실어나르던 뜨네기 사공들이 많이 빠져 죽었다고 한다. 평창읍내의 공동묘지 한 구석에는 오래되어 아주 작은 묘가 있다. 가끔은 벌초를 하는 묘가 두개 있는데 사연은 무당소에서 익사하였다 하며 무당소가 어디인지도 모른다고 한다.
윗 글에서 무당소는 황새여울 아래의 깊은 沼라 하였고, 자손이 있다는데 묘는 자손의 부친이라 하기에 조선시대가 아닌 60년대로 추정이 가능하다.
이 이야기는 ' 65년도 정선에 탄광이 개발되기 이전에 강원도의 석탄광산은 영월의 "옥동광업소"와 마차에 소리기차가 산에서 내려오는 "마차 광업소" 두 곳뿐이었다.
광산에서는 갱목은으로 간혹 도벌목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영월까지 목재를 뗏목으로 운반하기에도 초자 사공들은 밤으로 몰래 도벌목을 실어 나르다 이곳 황새여울의 지리적 위험을 모르고 죽은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도벌목이란? 평창아리랑에 1930년 진부에서 발풰한 아라리중에 "왕자 축자(王字丑字)로 다 나아간다는 사설에서 보듯, 관세 도장을 찍어야 하는데, 세금없이 비품으로 팔려가는 나무를 도벌목이라 하며 예전에는 아편도 전매사업으로 취급하였다가 금지하자 돈도 다 떨어진 뽕환자들이 밀매되는 뽕값을 마련하기 위해 똇사공 경륜도 없이 무허가 도벌목의 뗏목을 몰다가 빠져 죽었다 한다)
동강에 이곳 황새여울은 이러한 생사의 기막힌 사연이 있는 곳이지만 지금은 너무도 조용하다 못해 공활하게 느껴진다, 사람들은 동강땟목과 황새여울은 알지만 지나가면서도 이곳인지도 모른다. 왜 그럴까??
조금만 돌아 올라가면 백룡동굴도 있고 수 많은 사람이 지나는 길목으로 이곳이 그 유명한 황새여울이요 하는 인상적인 표지판 하나 없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칠족령, 백룡동굴, 문희마을로 이어져 진탄나루까지 동강 60km중 5km만 행정구역상 평창 땅이기에 동강에 수3다가 많은 정선이나 표지판을 설치할 수 없는 곳이다.
평창도 이제라도 늦잠에서 깨어나, 동강뗏목의 애환이 서린 황새여울에서 혼(魂)이 되어버린 이름모를 뗏군들을 위한 망향비와 그 영혼들이 쉴 수 있는 조그만 정자 하나와 윗 사진에서 보는 황새여울의 전망대와 위치 설명도 안내판 하나면 족하다. 그리고 답사객이 쉬어 갈 수 있는 강변 주차공간만 있었으면 좋겠다.
황새여울은 슬픈 역사를 지닌 곳이지만. 동강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이며, 동강 여행중 호박돌의 긴 장강은 이곳뿐으로 여울 소리도 또한 시원하게 들리는 돌 장강에 앉아 휴식할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자연경관을 가진 곳이다.
이곳 강변에 인공의 가식보다는 자연적 아름다음에 어쩜 전망대도 눈에 거슬리지만 그래도 흄관같은 자연 친화적인 전망대를 만들어 황새여울을 보고 사공들이 죽던 물길의 원리도 이해해 보는 간이적 휴식공간을 마련하였으면 좋겠다.
여행의 재미는 스토리텔링화의 어떤 테마를 가지는 이야깃 거리가 있어여 한다.
이곳 돌장광에 앉아 여울물소리 듣는것도 재미겠지만, 전망대를 만들고 올라가 황새여울을 내려다보며 안내판의 설명문처럼 강물의 지형적 요건을 이해하면서 뗏목이 사고나는 이유를 이야기하는 추억도 동강여행의 솔찬 재미가 될 것이다.
또한, 여기에 죽은 뗏사공들의 혼과 넋을 달래고 기리는 조그만 망향정에 망향비등 한 점이라도 세운다면, 그것은 바로 이곳 평창의 몫이고, 또한 동강을 온 답사객들이 동강 답사 키워드에 황새여울과 백룡동굴이 동강의 주제어로 영월, 정선보다는 평창의 동강이고, 평창의 황새여울로 인터넷에 미탄 관광의 변화가 있으리란 점이다,
동강을 오르는 여행객도 여기서 할미꽃 이야기 하나에 정선으로 가기 보다는 역사가 묻어나는 미탄을 지나가게 되는 이정표가 될 수도 있다.
이제 우리는 이곳 평창의 동강에도 조금의 노력은 투자할 때인듯 합니다.
감사합니다. |
동강의 황새여울에서 (평창,,, 어디로 가시는가...)
동강에서 백룡동굴 아래의 된 꼬까리(여울의 지역적 방언)라는 황새여울은 기실 평창이고 반대편은 영월이라 합니다. 정선의 제장마을을 지나서 칠족령과 백룡동굴에서 아래 진탄나루까지 4km는 평창 구간이며 이 구간의 옛 동강이름은 (평창구간)은 연화진이라 하며 강 건너는 영월이지만 발 붙이고 올라설 틈도 없는 산악 지형이지만 강 반쪽의 평창쪽엔 백룡동굴과 조선때 부터 전해지는 문희마을등 이곳은 퍙창인들의 삶의 터전이었고 문화 공간이란 점입니다.
이렇게 아우라지에서 동강이 시작되어 정선 가수리에서 영월로 내려 흐르는 가운데 지나야 하는 칠족령과 문희마을(조선시대의 명칭)과 백룡동굴, 황새여울을 지나 진탄나루는 동강의 포인트가 모두 평창인 것이다.
평창에 옛날 연화진이라 불리던 동강은 칠족령을 지나서 문희 마을앞의 무당소를 돌아 음지 뉘룬 쪽으로 돌면서 자갈여울, 큰 여울, 암반여울, 홍두깨여울, 황새여울로 이어진다.
(오대산의 우통수는 언제나 같은 물을 흘려 보내는 한강의 발원지로 월정사 앞의 금강연을지나 오대천은 수항리 계곡, 장전계곡을 지나 나전에서 조양강과 합류하여 송천과 골지천이 이룬 조양강은 가수리에서 동남천과 만나서 동강을 이룬다. 정선 가수리에서 제장마을까지 정선의 동강은 정선인들은 하며강이라 불렀으며 칠족령의 평창에서 진탄나루까지 4km구간의 평창의 동강을 평창인들은 연화진 이라 이름하였다. 그리고 어라연의 영월의 동강은 금장연이라 한다)
동강은 여기서 구비구비 굽어돌며 많은 여울을 빚어 만들며 평창군 미탄면 마하리 뉘룬마을 아래로 흐르는 여울이다. 이러한 여울이 내려가며 막바지에는 우렁찬 소리를 내며 세차게 흐르는 황새여울을 만들고 있다.황새여울은 서울로 가는 뗏군들의 죽음의 계곡을 넘기위해 만전을 기하고 심호흡해야하는 중요한 주막이 있었다
과거 뗏군들은 이곳 황새여울이 죽음의 계곡이란 점을 잘 알고 있기에 이를 건너기위해 준비를 철저히 하였다. 이 여울들을 건널때엔 여울에서 브레이크도 잡아 뗏 머리 방향을 맞춰야 하기에 가장 큰 힘이 필요로 하기에 뗏목이 무당 소로 내려가면 현 백룡돌굴 주차장 쯤의 객주집에 내려선다.
그간의 피로도 풀며 식사를 든든히 하여 힘도 비축하여야 황새여울을 넘을 수 있기에 휴식도 취하는 객주집이지만 또한 이곳엔 서울 목상을 따라 나선 외지 뗏군들이 자신이 없을때 이곳 여울들을 대신 건네주는 경험 풍부하고 물길을 아는 노련한 현지 뗏군들이 상주해 있다가 대신 건네주기도 한다 (핀치히터)
이곳이 황새여울이며 동강에서 뗏목을 삼켜버리고 뗏군도 죽는 물살이 가장 물살이 센 여울목으로 그 명성도 높은 곳이다. 지금은 물이 조금 불어서 많은 편이나 물이 좀 줄면 여울 바위에 황새나 청동오리등의 철새들이 고기를 식사하고 배부른 탓에 앉자 노닐기에 황새여울로 불리어 진다.
이 여울을 자세히 관찰하면 물이 좀 줄어들었을때는 큰 바위가 승문이 바위로 그곳을 지나 영월 산쪽에서 내려가야 하며 암반여울이나 홍두께 여울은 물속 바위가 일자형태의 징검다리 식이기에 그곳만 잘 통과하면 되지만 황새여울은 굽어돌며 마치 스키장의 깃발의 기문을 통과하듯 굽어돌며 기문을 통과해야 되는 어려움이 있다. 바위에 부딪히고 하는 뗏목 사고 이야기들은 각색이며 이를 자세히 관찰해보면 뗏목이 지나기에 여울의 속성을 알지못하는 부주의에 사고가 발생하는 것이다.
< 황새여울 뗏목 사고의 원인>
위 사진에서 보듯 이곳이 황새여울이다. 뗏목은 자갈여울, 큰 여울, 암반여울, 홍두깨여울을 지나 이곳 황새여울에 당도한다.
이곳은 바위 두개 사이가 중앙 수로이기에 이 기문을 통과하여야 하는데 이곳은 산쪽으로 치우쳐 있으며 물길은 굽어돌고 있다.그리고 물길의 흐름에 의해 일반적으로 뗏목이 중앙을 타고 내려오다 두 바위의 앞쪽 승문이 바위를 꺽어 돌아 여울을 내려가야 된다.
그러나, 이렇게 꺽어 내려가면 어김없이 빠져 죽게된다.
그것은 열 닷량의 뗏목을 몰고 내려가다보면 물길이 좋은 승문이 바위쪽으로 몰고가서 여울을 굽어 내려다가 된다. 이렇게 뗏목이 굽어 내려갈때 후미의 뗏목들은 유속에 밀려 직선으로 조금 내려오게 되어 승문이 바위에 부딪혀 뗏목이 두동강으로 꺾이게 된다. 또한 가물지 않고 정상적인 수량에서는 승문이 바위가 수중 바위가 되며 그우로 유속이 빠르게 흐르는 쯤물에 밀려 바위 위로 걸치게 된다. 이때는 후미의 뗏목들이 내려밀어서 뗏목을 묶은 칡이나 가래나무 껍질 끈이 바위에 긁히며 끊어지게 된다.
이렇게 끈어진 뗏목은 제 각각의 등걸목이 되어 물밑으로 빠져 내려갔다 올라오는 여울을 따라 물밑에 내려갔다가 솟구쳐 올라 오는등, 등걸목이 삼지사방에서 부딛히게 되는데 이때 물에 빠진 사람은 한 길이 넘는 물에 수영을 해야하는데 이러한 등걸목이 여기 저기서 밀고 쳐서 다치고 죽는 것이다. 이렇게 ㄱ등걸목에 치여 다쳐 북은 사람들은 이틀정도 후에 아래 진탄나루 沼에 떠오르면 건졌다 한다.
그러기에 유 경험자들의 노련한 뗏군들은 이미 지형이 숙지되어서 이곳 승문이 바위를 돌면서 내려가지 않는다. 이곳에 다다를 때 후미의 뗏군은 뗏목 후미를 산쪽으로 몰아 붙여서 뗏목을 일자형으로 만들어서 승문이 바위를 내려올 것이다.
결론은 황새여울을 통과하는 수로는 승문이 바위 옆 한부분이며 일단 뗏목을 꺾지 않고, 후미를 조정하여 뗏목이 일직선으로 통과하여야 한다.
( 위 사진에 노란선으로 뗏목을 꺾으면 유속에 의해 떠내려가는 후미가 바위에 부딛히거나 물이 조금 많을때는 바위위로 올라타고 후미는 돌아가게 되어 뗏목이 부서진다. 그러기에 빨간선처럼 후미가 일자로 바위 옆을 통과해야 한다)
이렇게 황새여울을 타고 내려가기엔 뗏목이 멈춰서 몇 분간 움직이지 않는다.
뗏목이 여울물이 휘말려 밑으로 내려가기에 속도는 제로로 뗏목은 순간 정지하였다거 새로운 힘을 얻어 가게 되는 것으로 물이 돌아내려가는 지범으로 된 꼬까리란 이름이 붙여진듯 하다
간신히 황새여울을 타고 내려오면 길게는 30여분 뗏목이 제 자리에 멈춘다 한다. 그것은 여울물이 쏜살처럼 내려오며 물살이 위에서 아래로 굽어 돌기에 그간 여울물에 올라탄 뗏목은 앞으로 나갈 힘을 잃었다. 여울물의 꼬까리의 물살의 말림에 뗏목의 나아가던 관성의 힘도 앓게되고 제자리에서 멈추어 물의 힘의방향과 뗏목이 떠내려가야 할 방향의 힘으로 풀어서 힘의 전환 중이라 아직도 뗏사공은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다.
이렇게 뗏목이 물살의 힘에서 풀려나면 곧바로 진탄나루로 향하게 된다.
목숨을 맏기고 이 험한 황새여울 된꼬까지 떼가 무사히 지났으니 이제 생명과도 바꾼 긴장을 풀고나니 흥이 절로난다.
우리 서방님은 떼를 타고 가셨는데
황새여울 된꼬까리 무사히 지나 가셨나
황새여울 된꼬까리 다 지났으니
만지산 전산옥이야 술상 차려 놓게
< 황새여울에 죽은 뗏군들의 망향정을 만들자>
옛날 구한말의 뗏목은 목상들이 데리고 다니니는 뗏사공이 이곳 황새여울에서는 바위와 물길의 속성을 잘 알기에 목숨을 담보로 건너야 하기에, 마치 큰 배에 접안을 하는 도선사들처럼 물길을 잘 아는 이 고장 출신들의 뗏사공들이 이곳만 대신 몰아주고 요금을 받는 핀치히터격 뗏군들이 뉘룬주막에 있었다.
이곳 뗏길에 가장 많이 빠져 죽게된 것은 정선에 기차가 들어가는 6~70년대 이전에 광산인 영월의 옥동광업소와 마차 광업소, 마차광업소는 석탄을 실어 내리는 하늘을 다니는 검은 소리기차(곤돌라 박스)가 그 시절엔 인상적이었다.
영월에 탄광 경기에 광산의 갱목이 필요했으며. 정상적인 뗏군들보다 뽕꾼들이 도벌목을 실어나르기에 밤 시간이 더 좋을듯 하지만 그래서 뽕군들의 초자들이 이곳 황새여울의 위험을 벗어나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 한다.
(도벌목이란? 평창아리랑에 1930년 진부에서 발풰한 아라리중에 "왕자 축자(王字丑字)로 다 나아간다는 사설에서 보듯, 관세 도장을 찍어야 하는데, 세금없이 비품으로 팔러가는 나무를 도벌목이라 하며 예전에는 마약도 전매사업으로 취급하였다가 금지하자 돈도 다 떨어진 뽕환자들이 밀매되는 뽕값을 마련하기 위해 고수익의 도벌목의 뗏목을 몰았다 한다)
동강 중 이곳 황새여울은 가장 기막힌 사연이 있는 곳이지만 너무도 조용하다못해 공활하게 느껴진다,
왜 그럴까?? 조금만 돌아 올라가면 백룡동굴도 있고 수 많은 사람이 지나는 곳으로 그 유명한 황새여울이요 하는 인상적인 표지판 하나 없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칠족령, 백룡동굴, 문희마을로 이어져 진탄나루까지 4km가 행정구역상 평창 땅이기에 그 수다 많은 정선이나 영월이 표지판 하나도 설치할 수 없기 하기 때문이다.
평창도 이제 잠에서 깨어났다면, 동강뗏목의 애환이 서린 황새여울에서 혼(魂)이 되어버린 이름모를 뗏군들을 위한 망향비와 그들이 쉴 수 있는 조그만 정자 하나와 윗 사진에서보는 황새여울의 전망대와 위치 설명도 안내판 하나면 족하다.
그리고 답사객이 쉬어 갈 수 있는 강변 주차공간만 있었으면 좋겠다.
황새여울은 슬픈 역사를 지닌 곳이지만. 동강중 가장 아름다운 곳이며, 여울 소리도 또한 시원하게 들리는 돌 장강에 앉아 휴식할 수 있는 빼어난 자연경관을 가진 곳이다.
이곳 강변에 인공의 가식보다는 자연적 아름다음에 어쩜 전망대도 눈에 거슬리지만 그래도 흄관같은 자연 친화적인 전망대를 만들어 황새여울을 좀 볼 수 있있으면 좋겠다.
이곳을 보노라면 언제 그런 역사가 있었냐는듯 맑은 여울소리와 긴 돌장강이 맑게 펼쳐져 있다. 그냥 시간을 내어 돌장강에 앉아 놀다 갔으면 하는 감흥이 일어난다.
여행의 재미는 스토리텔링화의 어떤 테마를 가지는 이야깃 거리가 있어여 한다.
이곳 돌장광에 앉아 여울물소리 듣는것도 재미이겠지만, 전망대를 만들고 올라가 황새여울을 내려다보며 안내판의 설명문처럼 강물의 지리적 요건을 간파하면서 뗏목이 사고나는 이유를 이야기하는 추억도 동강여행의 솔찬 재미가 될 것이고, 또한 동강에 매치되는 인간의 역사이기도 하다.
또한, 여기에 죽은 뗏군들의 혼과 넋을 달래고 기리는 조그만 망향정에 망향비등 한 점이라도 세운다면, 그것은 바로 이곳 평창의 몫이고 또한 동강을 온 답사객들이 동강 답사 키워드에 황새여울과 백룡동굴이 주제어로 동강은 영월, 정선보다는 평창의 동강이고 평창의 황새여울로 바르게 변화되리란 점이다, 그러기에 평창은 조금만 투자하여 금방 답사객들의 사진과 글에 의해 동강 제일의 명소로 부상할 것이다.
이것으로도 평창이란 단어의 위상을 높아지기에 무얼해도 평창!! 평창이 최고가 될 것입니다.
동강을 오르는 여행객도 여기서 할미꽃 이야기 하나에 정선으로 가기 보다는 역사가 묻어나는 미탄을 지나가게 되는 이정표가 될 수도 있다.
수석박물관등 자기 것만 배 부르다고 긴 잠을 잘 것입니까?이제 우리는 이곳 평창의 동강에도 조금의 노력은 투자할 때인듯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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