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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평창 - 난 그곳에 가고싶다

평창의 가을축제 "백일홍 축제장을 다녀오면서,,,"

♥ 평창의 가을 서정!!

『평창의 축제, 백일홍 축제장』을 다녀오면서"

 

  高 柱 浩 2018.09.26 11:18

  2018년 이번 추석에 고향을 다녀오면서 종부 강변의 들녘에 보이는 수 천대의 차량 행렬의 인파 속에 성시를 이루는 “평창의 백일홍 축제장”을 바라보면서 그래도 무엇인가 푸근하고 넉넉한 고향의 정감이 살아났다. 그간 평창인들의 노력으로 “ 평창의 백일홍 축제”는 널리 알려지게 되고 많은 관광객이 다녀가며 평창의 가을을 만끽하는 모습이 참으로 흐뭇한 마음을 금치 못했습니다.

 

  본인도 또한 가을의 들녘을 넓게 물들인 백일홍 만발하는 축제장을 그냥 지나치기엔 아쉬움에 잠시 들렸더니 추석 명절임에 불구하고 벌써 군수님, 체육회장님, 그리고 여러 후배님들이 나오셔서 분주한 모습으로 많은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후배님들의 노고에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오랜만에 만난 후배님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이제 백일홍 축제의 성공적인 모습은 일전 본인의 어느 글들에서 이야기처럼 앞으로 백일홍 축제가 더욱 융성한 문화의 꽃으로 자라나고,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키 워드를 좀 더 두텁게 해야 하지 않냐고 하는 이야기했더니 그러지 않아 이 축제에 양사언과 권두문 군수님, 강소사의 역사 이야기를 곁들인 역사, 문화 콘텐츠를 곁들일 것이라는 이야기는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물론 필자는 일전 이러한 내용의 글도 발표한바 그 글에서 연유한듯 합니다만,,,

 

본인은 지난 2년 전 하리에서 발굴된 “청동기 유적”의 역사에 태동하는 초기 석실에서 2,500여년된 고 인골과 반을 뿌뎌서 옆구리에 놓은 고조선식 청동검의 출토에서 전국 어디에도 2,500년 된 유골은 모두 산화되고 평창에만 오직 유일한 고 인골은 이곳 평창 땅이 최적에 명당이고 고조선식 청동검을 높이 들고 이곳에 모인 평창 선인들의 평창역사 여명의 태동을 알리는 신호라는 글을 쓴 적도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가 스토리텔링화되는 백일홍 축제장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어느 지방에 이런 2,5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문화제전이 있습니까? 오직 평창에만 존재하는 고조선 시대의 어떤 국가나 부족의 역동적인 모습으로, 현재 고인골은 부산대 학자님의 연구실에서 D.N.A 조직을 검사중이며 이미 20대 여자로 판명되었습니다. 그리고 당 시대는 모계사회일까 하는 점에 이 석실은 그대로 강원대 박물관에서 보존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사항은 D.N.A 검사로 고인골의 영양 상태. 식생활 등에 기인해 평창의 들녘의 작물 등과 기후등 모든 것을 나타내며 이러한 청동기 시대인을 시뮬레이션 영화로도 제작할 수 있는 점입니다.

 

이로 인하여 과거 평창은 천혜의 자연 속에 드높은 가을하늘 아래 오곡백과가 풍성하게 익어가는 풍요로운 길지라는 점에서 평창의 후손인 우리들은 평창 여명의 태동에 선 청동기 시대의 선인에게 제를 드리며 백일홍 축제의 제전을 시작하고 이로써, 또한 과거 이곳 평창이 물 맑고 산 좋은 평창이라는 점을 예찬하는 일이 얼마나 자랑스러울까 하는 점입니다.

 

하리 출토의 청동기 유적은 평창 역사의 태동을 여는 전령사이다.평창의 조상님은 지하에서도 2,500년 만에 돌아오셔서 다시금 고조선 청동검을 높이 들어 이 땅에 역사를 밝게 비추어 주려 하였지만 못난 후손인 우리 시대인들은 평창 역사의 시원을 알리는 역사 속의 고(古)인골의 평창의 선조 조상님에게 박물관이라는 집 하나 장만하여 드리지 못한다면, 이제 하리 유적에 대한 고고학 연구가 거의 만료되는 시점에서 그의 고향 평창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어디론가 영영 돌아올 수 없는 타 지역의 박물관으로 이사를 가 버릴 것이다.

 

  이것이 우리 스스로가 고향 최고(最古)의 선인(先人)을 저버리는 평창에 제일 슬픈 일이 될 것이고 못난 우리 평창인들의 현주소가 될 것이다. 이제라도 우리는 청동기 시대의 선인을 그들의 생활상에 걸맞은 이미지로 집(박물관) 생활상에 걸맞은 집(박물관)하나 날씬하게 지어드리고 평창의 먼 후손인 우리 스스로가 모시며 또한 이를 이 시대의 역사, 문화 콘텐츠로 십분 활용하여야 할 것이란 생각입니다.

이제는 생활의 여가속에 레져 시대에 각 지방은 저마다 역사 콘텐츠를 걔발하여 관광문화에 삽입하여 공룡 시대 등 다양하지만, 인간의 역사는 아니기에 고조선 시대인은 평창이 유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고조선식 청동검을 높이 쳐들고 모인 이 고장, 2,500여 년 이 고장의 후손인 우리들은 선인들은 시대의 면류관으로 이어져 내려온 것임을 자랑하는 기치를 드높여야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본인은 출토당시 2,500여년을 기다려 다시 세상에 나오는 평창 역사 시원의 고(古)인골에 그가 평창인으로 타지 먼 박물관으로 유랑하지 말고 평창에 집을 지어드리는 박물관을 건립하자는 다수의 이해의 글도 있읍니다만 박물관에서 상영할 시뮬레이션 영화도 백일홍 축제장으로 세트장을 이동하여 가을의 백일홍 들판에서 옛 선인들의 모습을 만나는 것도 좋지 않습니까??

백일홍 축제장에서 어느 후배님 축제위원과의 대화에 이러한 모습의 백일홍 축제의 저변 확대와 상징적 의미 부여의 아이콘 확대라는 견실적 이야기를 하였던바 후배님의 답으로는 앞으로 본 축제에 평창의 역사를 가미하겠다는 내용이 논의되고 있다고 한다.

 

  본인의 게시글을 이해라도 한 듯이 여러 역사적 사실들이 나열되길래 고무적인 일이라 이 또한 반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으로 백일홍 축제에 양사언, 강소사, 권두문 군수님등의 역사적 내용을 연계시킨다 하기에 처음 이러한 내용을 접한다면 너무나 많은 제목에 장황하리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본인의 이해는 그렇치 않습니다. 그러면 이 많은 사실을 어떻게 연계시킬 수 있을까요?

 

조선시대에 평창을 위해 선정을 베푸신 군수님, 양사언과 임진왜란 때 목숨을 두려워 하지 않고 항전한 평창 제1의 기상, 권두문 군수님과 평창시민들, 그리고 우리는 가상적인 춘향이의 절개는 알지만 실제로 우리 역사에는 임진왜란때 본인의 선조님들의 이야기에 고씨 동굴에 자결한 조씨부인과 또한 응암리 굴(평창읍)에서 천인절벽으로 내려 뛰어 지조를 지키기 위해 자결한 강절부 님(본명은 강소사)의 이야기를 알지 못한다.

 

여기에 평창의 그 아름다운 모습의 강절부님의 이야기등 이 모두를 제목에 이입시킨다면 너무나 장황하고 또한 그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에겐 복잡성을 띠기에 우선 타이틀화 보다는 백일홍 축제에 특별전으로 몰(mole)을 마련하여 만화의 장면등로 구성하고 밀납인형으로 만들어 백일홍 축제에 훌륭한 평창 역사를 가미하여 흥미속에 자연스러운 이해와 지식의 습득으로 평창을 이해 시키는 것이다.

 

 

<물론 잘 아시는 역사이지만 그래도 본인이 이해하는 위 3인의 평창역사를 조명해 보이겠습니다>

 

◈ 평창 제1의 기상 (임진왜란 시 권두문 군수와 평창 군민들)

 

  임진왜란 당시 권두문 군수를 위시하여 평창의 군, 관민 모두가 단합하여 죽음을 담보로 왜군에 항전하는 그 모습이 타 군의 당시 모습과는 다른 평창 제 1의 기상으로 후일 평창인들은 이 역사를 영원히 기려야 좋겠습니다.

 

본인이 쉽게 쓴 임진왜란 당시의 평창 전사(平昌 戰史)에 의하면 왜병의 조선 정벌군 9번대 20여만 명 중 1만 4천여 명의 4번대의 대장 “모리 요시나리(森吉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강원 감사 자리를 지명받고 서울로 올라오다가 강원도로 대 회전하여 평강을 넘어 간성까지 진출하여 삼척으로 대 회전하여 백봉령을 넘어 정선을 거쳐 평창, 영월로 이어져 신림에서 강원감영 원주로 진격하는 코스에 강원 감영의 군사들이 진을 치고 주둔한 영원산성(현 치악산)의 전투에서 대파하고 강원감영을 접수하게 된다.

 

여기에서 백봉령을 넘어선 왜군은 정선에 항복문서를 보내니 정선 군수 "정사읍"은 간도 쓸개도 빼 던져버리고 항복문서 앞에 넙죽 엎드려 절을 하고 항복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평창은 항복문서를 가지고 온 조선인 소년의 목을 베고 죽음으로 맞서 싸우자는 항복이 아닌 항전의 기치를 높였다.

 

당시 권두문 군수는 앞으로 유린당할 평창 군민들을 생각하고 君과 백성의 臣으로서 목숨을 바치는 충정의 각오로 임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중과부적의 대군이 몰려오기에 할 수 없이 응암굴로 숨어 들어간다. 관군 약 35명 정도에 왜군은 4번대 14,000여명중 대략 4,000명 정도로( 감원감영의 영원산성(치악산) 전투시 아군은 약 5천여 명에 왜구는 천 명 작은 4천 명을 기록에서 본인의 주관으로 도출한 숫자임에 오류도 있을 수 있기에 이점 양지 바랍니다)

 

 아마 혹독한 대가였는지 모르지만, 우리의 평창인은 죽음을 무릅쓰고 분연히 일어선 기상.... 우리의 역사에 제 몸 하나 편코져 탐관오리들의 사대사상과 아첨꾼들의 짓거리가 난무하지만, 군민의 생존권 보호를 위한 권두문 군수님 충정의 기상과 그에 화합된 평창인들의 단결, 여타 현들의 현감의 마누라가 왜장의 소첩이 됨보다는 우리 선조님들은 죽음을 마다않고 분연히 일어서고 나아가 싸우자는 이것이 우리 평창의 선인들의 큰 자랑거리며 평창 제1의 기상입니다.

 

응암굴 전투에서 포로가된 권두문 군수님은 어서 나의 목을 베라고 적장을 향해 큰소리를 치는등 죽을을 두려워 하지 않은 목민관으로서 진정한 이상의 실천을 보였기에 여기에 무관들과 평창군민의 단합으로 이어졌다. 무과에 급제한 무인 지사함 장군(여기서 장군이라 함은 지방 군수가 내려준 별칭이며 직함은 전봉사였다)과 무관들은 군민들의 목숨을 보호 하고자 왜병애 맞서 싸웠으나 중과부적의 숫자에 밀려 결국 죽음을 맞이하기에 평창군민을 위해 목숨을 바친 늠늠한 그 기상은 시대를 넘어서서 지금도, 먼 미래에 까지도 높이 기려야할 충정으로 평창인들에겐 귀감인 것이다. 이렇듯 우리 평창의 선조님들의 용기와 죽음을 넘어서는 그 기상은 우리 평창의 앞날에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 주는  시대의 표상이고 귀감인 점이다.

 

명종시대평창군수로 선정을 베푸신 양사언 이야기

종때 평창군수(종 4품직) 로 양사언이 부임시에 군민의 인상이 머리는 흐트러지고 옷은 해져서 몸이 다 보이는 등 이러한 모습을 보며 눈물이 핑 돌았다고 그의 인간적인 모습을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당시 본 군이나 여타 전국적인 현상이지만 조선시대의 정치적 쇠약 현상으로 말미암아 군 수입이 군 재정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상소의 내용은 아비죽은 아들과 남편죽은 과부들 뿐이며 고을을 점검해 보면 위태롭고 고달픈 사연을 알 수 있으며 열 집에 아홉 집이 빈 고을인데 무익하게 虛名(허명)만 있으니  부역을 시키지 않는 것이 계책의 한가지입니다 46호의 주민들을 위로하고 각종 명목의 新舊(신구) 공물을 면제하는 것이 계책의 한가지 입니다. 미수한 대여 양곡은 포기하고 10년 동안 산림세을 면제하는 것이 계책의 한가지입니다. 이 세가지 계책을 쓰고도 流民(유민)이 돌아오지 않거나 양곡이 저축되지 않았다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읍니다.

10년간 부역도 공물도 세금도 부담하지 않게 된다면 어찌 한 고을만의 다행이겠습니까. 온 나라의 流民(유민)들이 다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중략)

 

당시 국내의 정새는 인조 반정이후 논공행상의 실패로 이괄의 난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 정묘호란이 발생하여 전국적으로 픽밥해지자 명종시대에는 우리가 잘 아는 의적이라는 임꺽정의 난이 일어나는등 국내정세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금치 못하는 상황에   양사언은 평창군수로 부임하자 군정을 살펴보고 군민의 어려움의 원인을 진단하여 상소하여 평창군민의 세금을 일부 깍아 줌으로서 써 조세의 투명성과 신뢰성을 가지는 선정을 베푼 군수님이었습니다.

 

이러한 선정에 그는 어진 군수로서 군민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으며 군민들은 스스로 군수님을 따르게 되었으며 또한 군민들은 양사언이 계속 평창군수로 재임해 줄 것을 상소한바 양사언은 군수직의 3년 기간을 넘어 평창군수로서 일년을 더 재임하였다 합니다.

 

또한 양사언은 문필가로서 지금도 널리 애송되는 시조로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를 모든 사람들이 다 잘 알고있다.여기에 의문의 하나는 태산은 중국의 산으로 해발 1,700여m의 낮은 산이지만 중국에는 곤륜산백(히말라야)에 높은 산도 많은데 지금도 중국인들은 태산을 가장 신성시 모시는 영산이다. 왜 양사언은 이국의 산을 우리의 시조에 남겼을까 하는 궁금증이다. 양사언은 한 평생 치부를 하지 않았으며 유산을 남긴것도 없는 백성에게 모범스러운 청백리로 그의 본성은 솔직한 마음을 기조로 한다. 이러한 그에게 중국의 산을 모델로 제시할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여기에 이 시조가 평창이 평창의 삼방산이라는 연계의 해석이 요즘 부상되고 있다. 지난해 평창에서는 “양사언“에 대한 세미나가 열렸으나 본인은 그에 관한 리포트를 찾아 보지는 못했지만 우선 평창의 목멱(남산)에 대한 감상적 이해의 미학을 그려 보겠습니다.

 

모든 평창사람은 아침에 눈만 뜨면 저 멀리 동서로 길게 누운 장엄한 삼방산을 보며 살아갑니다. 일반적인 산은 푸른색이지만 저 멀리에 감도는 진 감색의 삼방산은 하늘을 맞닿는 산머리는 초가지붕은 이은 듯 단순한 곡선 몇 개에 산세는 마치 어머니의 치마 주름처럼 봉긋한 유선형으로 흘러내렸다. 삼방산은 우리나라의 수많은 산중에서도 높은 산세에 속하면서도 그 모양새는 둥글고 부드럽고 단순한 완만한 유형의 산세로 어머니의 품 같은 가장 한국적인 이미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자식을 잘 돌보아주는, 언제나 든든하게 보이는 어머니의 형국이다. 우선 개괄적으로 간단히 쓰는 삼방산의 미학에 아마도 과거 평창군수 재임 시 양사언도 이러한 마음은 느꼈으리라 생각합니다.

 

모든 소설이나 詩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양사언의 "태산"이란 시조도 체험률의 소산이라면 그것은 솔직한 양사언이 가 보지도 않은 중국의 태산을 장황하게 그린 것이 아니라 평창의 삼방산을 의중에 담고 그에 높음을 비유한듯한 인상이란 점이다. 양사언은 포천 태생으로 대부분 강원도의 고을에서 군수와 부사에 임하였지만 그 어느 곳에도 삼방산의 아늑한 모양세를 따라 갈 산이 있겠는가??

 

삼방산이 평창사람들에게 마음속의 산이면서도 높은 산이란 점에 주목하고 군민들이 게을러 지지 말고 부지런히 일하자는 계도의 시조로 그를 믿고 따르는 평창인들에게 부지런히 일하자는 계몽적인 생각에서였는지 양사언은 시조 <태산이 높다 하되>에서,, "삼방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라고 쓰고 싶어도 타지방 사람들이 삼방산이 높은지 큰지도 알지 못하기에 태산이라고 바꾼다면 그가 의도하는 높음이 이해될 수 있다. 그러기에 양사언은 이 태산이란 삼방산이라는 그의 마음속 의중을 읽어 봄은 어떨까 생각합니다.

 

또한 양사언은 풍류가객도 아닌데 왜 이런 詩를 썼을까 하는 의문에 답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점입니다.그러기에 양사언의 <태산이 높다하도...>라는 시조는 국민 계도용의 詩임은 분명할 것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이것은 어쩌면 이 시조는 우리의 지난 세대에 삼척동자도 부르던 새마을 노래, 군가들처럼 당 시대에도 평창군민들은 이 시조를 따라 읊으며 모두 부지런하게 일하는 모습을 남겼는지도 모를 일이다.양사언이 채찍으로 군정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 스스로가 우러나오도록 유도할 수 있는 정략가였을 것이란 점으로 본인은 이 시조를 국민계도용 홍보 전략적 차원이란 점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평창에 애정을 품고 산정을 베푸신 군수님의 이야기를 역사관 코너를 마련하여 그림과 만화로 간결한 문장으로 평창역사를 이해하는 행사장의 한 코너에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오르 내리며 점차 확대 해석 한다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가 선정을 베풀게 되는 이유는 고을 백성이 따라 주어야 하는 전제가 깔리기에 이를 채찍으로는 불가능하며 아마도 양사언은 홍보용 전략가 원조인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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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61년(명종16년) 2월에 平昌郡守 楊士彦이  上疏(상소)상소 올림- 명종실록
이 上疏(상소)문은 "明宗實錄"(명종실록) 16년 2월 17일 丁未(정미) 條(조)에 수록된 글로, 양사언이 平昌郡守 부임시 올린 上疏이다

 

 평창문화원 입구에는 국가 예산으로 이러한 비석을 세우고 당사자들이 이름을 자랑껏 세겼는데...

인식률의 보편화이전에 아무 역사적 고증의 사료도 없는 것을 비석부터 때려박는것은 오버센스란 점이고 개인의 도그마적인 관점의 유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런것보다 현안문제로 율곡은 평창이 고향이란점이나 천동리 산 도마치 골에 아들과 나란히 잠든 김삿갓묘에 비석하나 세우는게 역사에 대한 에의이고 도리일것이란 점이다.,

 

현 문화원장님이나 향토시 관장이 역사 전공 출신자가 아니기때문에 이러한 돌발적인 행동을 하였슬까??

과거 영월 문화원장 고, 최일규옹은 농협출신자로 김삿갓묘를 하계에서 인정 받았지만,,, 현 문화원장님은 정통파 역사학자로서 그의 문화원 취임 역사글에서 영월의 역사를 하나하나 열거하였자만 김삿갓 이야기는 빠져있다.

 여기서 그러한 입장을 길게는 쓰지 않지만 진정한 역사가들은 고증된 역사적 진실의 관점에서만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비문은 파 딩겨야 한다.

 평창에 파 딩겨야할 비석은 노산성의 임란 전투비와 판관대의 율곡 잉태지란 비석에 이어 이 양사언 찬가론의 비석까지 평창에 비석중 이 3개는 파 딩겨야 하는 것이다.

(노산 임란 전적비와 판관대 비석을 파 당겨라는 글본인의 이해의 글은 이미 게시하였습니다)

 

(3) 강절부님 이야기.

강 절부 님(강소사) 임진왜란 당시 권두문 평창군수의 부인으로 왜병이 평창에 들어오기전 군수이하 평창군민들과 함께 응암굴로 피신하였는데 이곳에서 군수이하 평창군민들이 적에게 패하고 포로가 되자 강소사는 정절을 지키기 위해 결박하는 왜구를 밀치고 응암굴앞의  천인 절벽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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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절부 님이시여....'"

 

高 柱 浩

 

님은 꽃다운 청춘에....

 

못다핀 꽃 한송이련가??

 

낙화암보다 더 푸른물에

 

한줄기 연꽃으로 피어남을

 

후대인들은 뉘라서 그 꽃의 아름다움을 모르리요.

 

 

님의 연잎은

 

절개산 아래 감아 도는 사천강에서

 

언제라도 다시 맺을 꽃봉우리로

 

우리는기다리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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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사람들은 "강 절부"님을 권 군수의 후실 부인이라 격을 낮추고, 또한 "강소사"란 이름을 부르고 있으나 당시 조선 시대의 후실부인은 지금의 후실이라는 명분과는 사뭇 다른 점이다. 물론 서른두 살의 "강소사" 부인은 젊었다고 색안경 끼고 바라보는 듯 야멸차게 대하는 점도 있겠으나 "권태하"님("권두문" 군수의 13대 직계 종손으로 “수사본부”의 작가님으로 5년점쯤 사망) 밝히는 이야기엔 본부인은수의 고향인 영주에서 노환의 노모를 봉양하느라 따라 움직일 수 없었으며 부임지에서 군수님 뒷바라지는 후실 부인이 담당하셨기에 요즘 개념의 놀이 문화와는 틀린다고 합니다.

 

또한 "강소사"는 본명으로 기실 광해군 시절 경상감사의 상소로 그의 순절의 인품에 "절부(節婦)"라고 추증 정려 하였읍니다. 그러기에 "강소사"라는  이름을 부르는 것보다 추증의 높임말인 “강 절부”님으로 부르는 것도 예의가 아닌가 합니다. 아마도 후실 부인이기에 우리는 아직도 구태사상에 의해 존칭보다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예전에 천동리 지역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강 절부"님의 진혼제도 울렸지만 "강 절부"님은 진주의 논개보다도 더 굳은 지조의 상징으로 한 때는 일본인 관광객이 이곳 응암리 투신 현장엘 많이 다녀갔는데, 우리도 잘 모르는 역사를 많은 일본인이 응암리 굴을  찾아 오기엔 절부님이 천인절벽에 투신하여 지조를 지키자 적장 “모리 요시나리(森吉成)"는 조선에 이런 여인이 있다고 감탄하며 전투를 중지하고 시신을 거두어 화장을 하고 장례를 지내고 전투를 다시 하였다는 일본인 쪽에서 바라보는 미덕이기에 이 기록의 역사가 아마도 일본인의 역사서에 기록된 듯하기에, 이 부분에 역사서를 찾아 보고자 본인과 권태하님의 인터넷 대화에서 권태하 님은 일본의 역사 교수친구에게 일본에서 이 역사 사실의 기록이 있으면 찾아 달라고 부탁하였는데, 이후 권태하 님이 영면하셔서 내용을 알 수 없었습니다.

 

임진왜란이 지난 400년 후에도 그 전쟁을 미화하고, 침략전쟁에서도 상대의 제를 올려 주었다는 전사의 한 부분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이곳을 방문하고 있을까요? 아니... 그보단 왜구들로 인하여 발생하는 한 여인의 슬픈 이야기에 넋을 기리는 그 왜구의 후손들의 참회로 보아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야속하게 그들이 강소사 부인의 넋을 비는 참회장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아직 몰랐겠지요. 이러한 상대의 역사서를 참고로 하여  가장 먼저는 우리의 역사교육의 장으로, 가치구현의 한 장으로 활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정절의 가치관은 시대를 초월하고, 지역을 넘어서는 우리의 생활에서 올바른 가치관의 모럴로서 삶의 귀감이고 후손에 물려줄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꽃으로 자리매김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기록을 찾아서 우리의 역사에 보태어 임진왜란 시 평창 전사에 더욱 정확한 서술뿐만이 아니라 응암리엔 일어판 안내문도 마련하고 앞으로도 일본인 방문객이 한국을 찾아올 때 답사 1번지 코스로 연중 상시 접할 수 있는 문화로 자라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춘향전은 가공의 인물이지만 본인은 조선 3대 정절과 지조의 여인상을 주창합니다.

목숨을 바쳐 지조를 지킨 정절의 조선 3대 여인상에는 강절부님과 영월 고씨 동굴 속 물에 투신한 조씨 부인, 그리고 논개가 있읍니다.(고씨동굴의 내력이 잘 알려지지 않아서 조씨 부인을 모르신다면 본인의 글 ""미완의 의병장 고경명과 고씨동굴과..."라는 글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평창은 앞으로 "강 절부"님의 절개의 고장으로도 당연히 부각되어야 할 당위성을 가지고도 있기에 "강절부"님의 이야기를 알았으면 우리는 이 지역의 후손으로 이제라도 충절의 정려각이라도 세우고 멀리 후손까지도 그 얼을 기림이 옳은 일이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각 개체의 희망적이고, 아름다운 역사를 가진 평창으로서는 백일홍 축제에 이를 십분 활용하여 평창의 문화 발전의 저변을 확대해 나간다면 더욱 알차지 않겠습니까??

 

만추로 가는 평창의 가을 서정!!

백일홍 축제는 평창의 공활한 가을하늘 아래 평창강 저 멀리까지에도 흘러가는 꽃밭을 가꾸어 더욱 벡일홍 만발하는 축제의 장으로 영원하길 바라면서 이 글을 기고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