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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평창 - 난 그곳에 가고싶다

평창 제1경의 풍류

후세백작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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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디소

나른한 오후
남산의 송학정어래 푸른 청송엔
천년 학이 노닐다 쉬는 자리
해가 질때야 큰산 서산으로 자러 떠난다.

아이들은 나루터 백사장에서 신발 반 접어 기차놀이 하다가
푸른소 깊은 줄 모르고 멱감으며 무더운 여름을 즐기던
그 옛날이 그립습니다.

밤이면 불 도깨비들이 정자각을 훨훨 태우고 놀았으나
심성 곱던 도깨비들은 날이 밝기전에 모두들 반듯하게 제자리에 놓고 돌아 갑니다.

이것이 평창 제 1의 여유였던듯 싶습니다

더디沼 : 평창읍 종부리 나룻터를 더디소라 불렀다

* 달밤에 엄마 잃은 어린 자매가 더디소 모래펄에 앉아 날이 새도록 뱃사공을

기다렸다는 이야기가 전하여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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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인은 연말쯤 수다사지 약 4~50P의 탑의 원형을 찾아서라는 이야기를 발표

하겠읍니다.

지난 2013년에 평창군에 11명의 학자, 박사들이 찾아와 수다사지 활용방안의

세미나를 하였건만 아무것도 변한게 없고 박사님들의 오류만 수두룩히 쌓여서,,

이에 비난이 아니라 그 오류들은 세밀히 기록하여 활용하지 말라는 메세지도

전하겠읍니다.

 

지금 현 오류탑을 학자나 박사들 까지도 하나의 양식으로 인식하는 큰 불찰을

가지기 때문이며, 현재의 수다사지 탑은 재 축조시 잘못 쌓아 올렸기에 이에

본인이 밝히는 案으로 3층으로 다시 쌓아 올려야 좋을 듯 하고 그러기위해서는

문화재청 심의도 득하여야 하지만 이것이 국가 문화재이기에 정부는  동 탑을

다시 수정해야 합니다.

 

그들은 혈세에 의한 세미나비 받고도 탑의 원형을 찾아볼 생각조차 안하였건만

본인은 만약 수다사지 탑이 없어져도 완벽하게 모조품 석조탑을 본인의 손으로

다시 만들 수 있는 기록도 가집니다

연말쯤 게첨하겠읍니다.

  위 사진은 밤에 찍은듯 하지만 예전에 강물은 중간에 노란선 위쪽으로 뾰족한 바위가 2~30cm민 나온듯하고 조금 비가 오면 수위가 올라가 바위가 보이지 않았다. 현재 아래의 선과 예전 강물의 윗선의 차이는 1,2~3m정도이다. 이제 이 바위는 수심 약 1,5m정도로 변한 것이다.

 

  1973년 수해로 제방이 유실되고 시내일원 천변리등이 홍수물에 잠기자 그 원인이 당시 하리 보에 있다고 판단했기에 보를 허물고 대신 남산을 관통하는 수로를 만들고 물의 수위를 낮춘 것이다. 그리고 백사장의 모래도 홍수에 일역한다고 판단하고 더 깊게 파야한다는 이유에 백사장은 골재로 값이 매겨저 평창군 재정에 일익으로 취급되었다. 정책적으로야 잘 했지만 보를 막아 물을 가두는 만유(滿裕)의 넉넉함은 저버린 것이다.

 

  이로서, 언젠가 이야기했듯이 풍수상으로 평창 땅은 떠내려가는 배주(舟) 형인데 이를 가두어 넉넉함을 보이는 호반의 평창을 헐어버리고 더욱 궁휼한 모습을 부채질하여 그 멋을 잃어 버렸다.

당시 수해의 문제는 종부교 건설에 교각의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종부교 구간이 짧아서 다리로 연결되는 인입부제방이 더욱 물길을 막았기 때문이다. 수해 당시 이곳이 범람하며 제방이 나간 것을 많은 사람들은 생생히들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에 수해의 근본대책으로 보를 허문게 안전제일이지만 평창 풍취의 첫번째인 멋을 잃어버린 것이다. 또한 사천강( 평창강)의 대명사인 사천강 뚜꾸뱅이가 살던 검푸른 더디소(沼)도 잃어가게 된 것이다.

서울 경관의 하나는 한강에 있다. 이 한강이 예전의 한강이 아니라 잠실 수중보등 물막이로 가득채운 한강이 있기에 서울은 더욱 풍요롭게 보이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남산 정자각 아레엔 다시 수중보를 만들어서 물을 가두어 만유의 넉넉함을 보인다면 그것이 평창 1경이 될 것이고 평창의 넉넉한 인품을 자아내는 것이다.

 사천강의 대명사

南山亭 아레의 종부 뱃터거리의 백사장과 더디沼를 복원하자

사천강 뚜꾸뱅이가 살게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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