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군 지명지」를 읽으며..
후세백작
본인은 평창역사의 오 기록과 잘못 이해에 대한 역사 정립의 수많은 글에서 전 글에서 어느 박사팀의 600여 페이지 분량의 「증편 평창 구비문학」의 기록성이 평창의 정체성을 와해시킬 수 있는 오류란 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그간 오류의 대명사로 회자되던 노산성과 임란때의 권두문 군수, 그리고 노산성이 평창의 진산으로 진산사상에 이야기로 이해하는 노산성에서의 잘못들,, 국사(국행) 성황사, 카르스트 지형에 진산사상에 포용되는 옹달샘이 마르는 이유에까지 모든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역사는 역사가들의 잘못된 상식이나 오류에 의해서 빗나가게 되는 실수가 잦으며 평창 향토사란 곳에서 기록중엔 권두문 군수가 왜병에 체포되어 주천의 빙허루까지 압송된바 그곳에서 탈출했다는 사실이 아닌 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부분도 후일엔 평창 향토사학이란 권위에 눌려서 하나의 설로 둔갑이 될 여지도 걎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기에 역사의 오류는 지방 향토사가님들이 책임이 큰 것인 듯 합니다.
그러기에 이번 "지명지를 읽으며"라는 글에서는 그간 지명지는 오류가 많다는 이야기들이 무성하였지만, 지난번엔 평창과 무관하신 분이 지명지의 오류를 거론하기에 정말 우리 스스로가 먼저 파악하고 이해하여 어떠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라는 점으로 간략하게나마 이 글을 게시합니다.
-----------------------------------------------------------
<원문을 부분별 인용하여 오류 및 문제점등을 제시합니다>
「평창군 지명지」 평창문화원 2016, 6, 30
P23
* 강원도의 남단--아마 옛날에는 강원도의 남단이라 했던듯 하지만, 이 시대에는 영월, 평창, 정선을 영서지방이라 부르기에 서남단으로 표기해야 알맞을 듯 합니다.
* 본래 고구려의 우오현(于烏峴)이라고 했으나 광걔토왕 장수왕을 거치며 고구려의 영토에 흡수되면서 내생군(奈生郡) 안의 욱오현(郁烏縣)으로 바뀌었다.
문장이 참 이상합니다만, 이는 삼국시대에 들어 고구려(또는 신라라고도 함)의 욱오현(郁烏縣) 또는 울오현(鬱烏縣), 우오현(于烏縣)이었다가 뒤에 신라의 영역이 되었다. 신라의 삼국통일 후 757년(경덕왕 16)에 백오현(白烏縣)으로 개칭하여 내성군(奈城郡, 영월)의 영현이 되었다.
*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해 강원도 지역을 통치할 때 평창은 후고구려의 영토에 포함되어 있었다.
궁예가 후 고구려로서 "마진'이라는 국가를 건국해 통치할 때 울오(鬱烏;궁예가 양길의 부하로 평창을 점령하는 시기(894년 당시)에 평창을 부르던 명칭이다)아마 지금까지 평창역사 기록에는 울오란 단어가 빠진듯 합니다만, 궁예가 양길의 세력 지역들을 얻으면서 강원도를 휩쓸며 강릉까지 진출할 때 평창을 수중에 넣으며 이때의 기록서에는 울오라 지명 기록을 가지고 있다.
P24
*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했으며.
지군사는 고려 시대, 지방 행정 구역인 군의 행정을 맡아보는 으뜸 벼슬이다,
지군사로 승격했으며의 전자의 글은 조선 시대의 초기 평창의 명칭은 고려때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는 현이었으나라는 문장에 걸리는 말로 현감이 지군사로 승격했다는 말임에 이 문장은 평창현r감이 지군사라는 군의 수장으로 승격했다는 뜻으로 군수로 승격했다고 합니까? 일반적으로 군수로 임명이나 승진되었다고 표현해야 옳은 일입니다.
그러기에 지군사란 단어가 고상한듯 타 지역에서도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하고있는데, 이는 오류이며 처음 쓴 사람은 지군사란 생소한 용어를 고상한듯 채탹하였는데 아마도 이를 계속 카피하며 번진듯 합니다.
* 1998년 면온, 수항, 유천출장소가 폐지되고에서
이 글은 본문대로 한다면 한 번 읽으며 이해는 면온도 출장소이고, 수항도 출장소라는 이해는 어렵기에 면온출장소, 수항출장소, 유천출장소가 각기 고유명사로 써야 좋을듯하지만 번거로움에 면온, 수항, 유천의 3개의 출장소가 폐지되고 라고 써야 쉽게 이해되는 것이다.
p25
*성마령(星磨嶺)에서 "磨"자는 摩자와 뜻이 같은 갈마자 이지만 각기 쓰임새가 틀리기에 摩자를 써야 한다,
*미탄면(味呑縣) 으로 표기하였는데. 현재로서는 한문으로는 美灘面으로 사용 중입니다.
미탄명의 한문 글자의 변천과정이 있습니다만, 이 글에서 옛글을 인용하며 정확한 출처도 없고 시대 구분도 없이 오늘과 과거거 질서정연하게 서술되지 않고 이책 모두에 마구잡이로 섞어서 한번 읽음으로써 문단별로 이해에 혼돈을 가져오기 십상이다.
*용연진:군의 북쪽 9리에 있다. 근원이 강릉 영서 와공산 부근에서 나온다, 남진: 군의 바로 남쪽 1리에 있는데 바로 용전진의 하류이다. 마지진: 군의 서쪽 17리에 있다. 즉, 남진의 하류이다. 연화진: 군의 동쪽 50리에 있다. 근원이 강릉부 오대산에서 나온다, 용연 이하는 모두 나루터이다.
여기서 용연진:군의 북쪽 9리에 있다.에서 용연진; 군의로 철자 띄어쓰기가 안되어있다.
(아허 아래의 고딕체 원문은 모두 띄어쓰기가 안된 원문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용연은 지금의 서강으로 강릉 와공산 부근에서 나온다. 또한 연화강은 강릉부 오대산 부근에서 나온다고 기록함에 이 글의 출처가 없어 지금으로선 서강이 강릉이 아니기에 문제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 기록당시에는 평창이 아닌 강릉대 도호부 관할지역이었습니다. 이 기록 당시에는 강릉이라고 표기하는게 옳았으나 현재로서 이를 이해하고 읽으려면 1906년 행정개편이 강릉에서 평창으로 이전되었기에 이에대한 설명도 보충되었어야 합니다.
이러한 해설이 없이 옛 고서의 기록만 카피하였기에 우리는 옛 역사를 지난 세대의 글들을 통해 이해할 수 있기에는 옛 기록의 기록성의 출처를 기록하지만, 이 책에서는 기록자는 아마도 그러한 점이 중요치 않다고 무시하고 오늘의 일과 옛 기록을 혼합하여 이상하게 전개하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용연;이하는 모두 나루터이다 라는 글에서 용연; 이하는 하는글은 서술 문장의 글로서는 않맞고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함인지는 한참을 생각해봐야 알 수 있기에 글의 표현기법이 매끄럽지 못한점을 느낀다. 가령 이 글은 평창에는 조선시대의 여러 기록중 동국여지승람이나 여서지도에는 4곳의 나루를 표시한바 용연진, 연화진, 남진, 마지진등으로 서술하였다면 이해가 쉬울듯하며,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용연;이하는 모두 나루터이다라는 라는 이상한 문구의 단서를 넣을 필요도 없다.
*[토산]이라는 항목이 있다. 아마도 지역의 토산품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과거 언제인지도 표기가 안된 기록들이 지금도 이 지역의 토산품을 대표하는 것인지 그것도 아닌 옛것이라면 언제를 말함인지, 또한 현재의 토산품이라면 이 기록은 미비하는 것이란 점이다.
현재의 기록이라면 미탄에서 조동까지 천연슬레이트라는 변성암의 돌기와나 수입종이긴 하지만 상리 송어 양식장의 송어는 국내애서는 최초로 양식되는 토산품 등이 빠진 점이다.
그러기에 여러 토산품이 빠졌다면, 이 부분도 어느 기록서를 인용한다는 표기도 없으며 또한 무엇 때문에 과거의 토산품만 서술하였는지 본인으로서는 이해가 불가한 점이다.
*[학교] 향교;군의 서쪽 2리에 있다.
*[역원] 약수역;군 서쪽 10리에 있다. 평안역:군의 동쪽 30리에 있다. 지상원;군의 서쪽 15리에 있다. 천천원;군의 동쪽 25리에 있다.
*[사묘], [고적], [인물], [열녀], [제영]
이 모든 항목에 설명은 위에 지적과 같은 어느 기준 시점이라는 확인의 단서를 제시하지 못 하옇고, 이 지명지에 기준 싯점 명시도 없었기에 이 글들은 그 내용들이 현재도 흘러서 이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명지란 옛 기록을 위한 역사서 편찬만은 아니기에 현재의 기록은 어디에 있는지 묻고 싶다.
또한 현재는 역원이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위 게시글에서 그런 종결적인 의미의 매듭도 지어줘야 자체적으로 완성되는 문장이란 생각이다.
*[사묘] 중에서 문묘는 향교에 있다.에서 문묘는 향교내에 위치해있다라고 고친다면 더욱 설명적이다.
또 하나, 이 책이 지명지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명의 기록성과 이해라면 옛 기록만 인용하고 현재의 통용되는 이해는 없기에 이 책이 역사 고증인지 아니면 지명의 발생 이유의 변천과 오늘의 지명의 이해가 목적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는 책이다.
역사와 지명의 상관관계에 대한 취지문부터 없다.
p26~7
[제영]
제영이란 제목에 따라 시를 읊거나 또는 읊은 시가(詩歌)를 말한다. 그러기에 평창을 주제로 한 시들로서란 설명이 포함되는 글이었으면 좋을 듯 하며 p26~7에 게시된 평창의 제영시 일곱편은 좋으나 그 시들이 제목이 없고 앞줄가사로 제목처럼 달어서 쓰며, 띄어쓰기와 각 시마다 줄 바꿔쓰기를 하지않은 상태라 제목같은 가사를 이중적 반복해 읽는 듯, 번잡함을 나타내고 있다.
이를 구획정리한 문단형식으로 나타내었으면 더 쉬이 읽을 수 있다는 소견입니다.
p28
*[성지]에서 우물이 하나이다
이다와 있다는 차이가 있기에 우물이 하나 있다라고 고쳐 써야 올음.
*연촌진;바로 주천강이다.
" ;"의 띄어쓰기가 전부 안된점으로 미루어보아 한, 두 개라면 오기라 할 수 있지만 모두 그렇게 띄어쓰기 없이 붙여쓰기로 표시함은 이해 잘못의 오류로 보아야 한다.
윗글에서 용연 이하는 모두 나루터이다.라고 명기했으면서도 연촌진(나루)가 어찌 바로 주천강인가 하는 점에 서강이라야 옳을 듯 하며 또한 나루가 강이란 서술은 잘못이란 점이다.
p29
*「신증동국여지승람」에 20개였으며, 에서부터~「조선환여승람」에는 무려 39개가 기록되어있다
물론 아래에서 39개의 물종을 보면 하고 명시하지만 여기서 숫자의 "개"는 "종"으로 바꿔 써야 문장이 알맞은듯하다.
*평창군의 공물 종류를 보면
이러한 평창군의 농산품이 공물인가 하는 점은 재고해 보아야 함.
p31
*월정사;오대산에 있으며 사고를 수호하던 곳이다.
월정사는 6~700년부터 전해오는 사찰이고 오대산 사고는 선조가 강원 감찰사를 총 감독으로 사명당에게 지을 것을 명하여 지은 것이다. 그러므로 사고를 위한 월정사란 이미지보다는 월정사에 포함되는 사고로 이 문장은 사고는 월정사에서 관장하여 수호하게 되었다고 쓰였어야 한다.
* 지난 갑자년에
언제때 갑자년인지 불명확하다.
*이내 사각(史閣)을 수호하던 곳이라서
이는 사고본을 수호하던 사각이라서로 고쳐써야 한다
* 이 책은 지명지로서 한글에 의해 기록한 점이 좀 어색합니다만 이 책이 이야기되는 평가중에는 한문에 오류가 많다는 지적이다. 예전에 이름 붙은 지명을 살펴보면 지리적 형태나 이에 따르는 풍수적 용어, 음양적 용어, 마을의 특이한 현상등이 지명으로 붙여짐을 볼 수 있습니다.
지명을 한글로만 할 수 없는 이유는 그 예로서 "미탄"이란 지명은 한문으로는 과거에서 지금까지 서너번 바뀌었습니다.
아마도 처음의 미탄이란 뜻을 잘 모르는 다음 기록자들은 다른 한문이라도 뜻이 좋은 한문을 써서 기록한듯 하지만 지금에서 보면 이러한 기록들을 변천 과정으로밖에는 기록할 수 없기에 지명에는 한문이 필수적임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책에 한문적 오류는 방림의 중대갈봉으로 이 책에서는 한문 기록도 없이 단순히 한글로만 산봉우리가 중의 머리와 같다고 해서 "중 대갈봉'이라고 한다.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만 일제가 조선을 집어 먹으면 僧頭峰이 중 대갈봉으로 바뀌는 역사에 지명을 일제가 주술적이고 저주적으로 바꾼 지명이라 합니다만 또 다른 이유는 이 산엔 중댕가리(토속 방언)라는 나물이 많다고 하여 이런 연유에서 불렸다고도 합니다만 스님들이 보시면 과연 좋아할 일은 아닌 듯 합니다.
이미 어는 지역에선 이 책을 인용하여 구석 뙈기 마을이라고 멘트한 점에 문제가 야기되고 있다고도 합니다. 한 마을의 표현에 구석 뙈기라 한다면 아마도 그렇게 불리워졌슬 사실도 없슬뿐더러 이를 듣는 마을 주민들에게 반감의 싹을 만드는것이란 점입니다.
그러기에 이 책은 오류를 빨리 바로잡아 문제의 소지를 일으키지 말아야 할 듯 합니다만 많은부분이 그러하다면 새로운 정정의 책을 출간하여야 할듯 합니다.
여기에 또한 옛 역사서들을 편집하여 서술함에 역사적 지식도 수반해야 함에 그 예를 하나 들어본다면, 이에 하나의 대표적 사례로 이 책 중간부에 조그만 금줄을 돌린 사진 한장을 서낭당이라 한다, 그러나 성황사(서낭당)은 나무와 돌 무더기 두 종류이며 사당이나 제실은 성황신이나 삼신등을 모신 부속체 입니다.
조선 시대 역사에서 민족에게 깊게 뿌리박힌 서낭단의 의미의 역사를 빼어 놓고는 역사의 정립이 어렵다고 볼 수있다.
성황제는 조선의 이념이 불교에서 유교 국가로 넘어옴에 신앙의 대상으로 자리 잡았던 것이고 성황산, 토지신, 여역신(유행성 질병)등에 대한 염원과 국태민안이라는 이상향을 구현하겠다는 의지를 소원하는 것으로 각 부락에서도 전염병, 가뭄, 수해등에대한 불안적 요소에서 소원을 비는 행사로 거듭되었으며 정월 대보름의 서낭제는 대동계의 단결과 마을의 화합을 위함이고 정월 대보름에 행하여지던 윷놀이. 망우리 돌리기등 여러 행사놀이는 지금도 민속놀이 행사로 재현되는등 정월 대보름제는 우리 민족에게 가장 큰 놀이마당을 가졌던 문화이며 그 민속전통은 그 아름다운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각 마을에 서낭단등을 기록하는 사관은 요즘 종교인들의 판단이 아닌 그 시대에 행했던 역사적 사실로 이해하고 객관화되는 판단의 기록이 요망되는 것이다.
<인용 끝>
----------------------------------------------------
이상 원문 p23~p31까지의 오류와 또한 비록 본인의 주관이지만 문맥을 통하게 하는 투영성있는 문장으로 짚어 보았다.
또 하나 이상한 점은 옛 기록에 5개면의 가구와 인구수등 이러한 많은 자료의 수록은 좋으나 이 책은 과거 역사 기준의 책이 아니라 지명지 책으로 과거의 기록과 현재로 이어지는 기록이 공존하여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삼국시대나 조선시대의 역사책이 아니라 현재를 기준으로서 과거에서 지금까지의 이해로 본다면 현재의 데이터 기록이 더욱 중요한 것이라 하겠다.
이 책의 뒤로는 가장 만은 오류에 의해서 현재의 시대착오를 일으키는 문제는 임진왜란시 노산성에서 전투를 하였다는 기록이며 이에 충혼제까지 드리는 착오입니다.
권두문 평창군수의 임란일지인 「호구록」 에 의한 서술이라고 기재하는 내용이 호구록에는 그렇게 기록하지 않았에 오류입니다. 과거 기록의 복제에 여기 저기서 카피하여 각 항목에 일관성이 없어 인구수가 나오고 작물이 나오는등 이후에 평창의 최초의 이름, 우오니 하는 설명이 뒤애 중복되는듯 참으로 혼란스럽다. 이러한 사례들은 이 역사를 집필하는 사관이 호구록을 읽은 것은 아니고 어는 잘못된 문서를 카피하였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옛 과거기록만 역사가 아닙니다. 오늘의 기록과 옛 기록도 오늘의 시대조류에서 조명해야 하는 것이지만 무조건 카피나 또는 현장 답사의 현장성없는 글은 오류를 범하기 쉽상이란 점입니다.
항간의 무성한 이야기로 본 책에 어느 기록에 사관의 주관에 의해 이 사당은 비 지정 문화에서 지정 문화재가 되었으면 하는 희망사항을 표현하였다 하는데, 그 사당은 이미 30년전에 철거되었다 합니다. 이는 결국 30년 이전의 기록문서만 카피한것이지 현장확인의 현장성이 없어 오류를 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만 이것이 정확한지 풍문인지 정확히 확인후 다시 게제하겠습니다.
본 책은 지명지이다. 이 땅에 산과 강, 전답, 마을등의 지명을 밝히는 것으로, 지명지란 넓게는 평창군과 그 속에 존재하는 각 부락, 마을들에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형적, 또는 민속적 양식의 특수성과 역사 속에 기인하는 지명의 발달과 변천과 유래에 이야기가 현재에 이르끼까지 총망라하여야 하는 책일 것입니다.
각 마을의 정체성과 전통성을 이해하고 뜻과 멋이 어우러지는 옛 자취의 아름다움을 문화발전으로 인식하고 앞으로 잘 활용하여 미래를 준비하자는 취지라면 이 책에선 옛 역사가 개괄적으로 인용되는 것은 지명을 이해하기에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각 지명을 이해하기 위한 보조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함에 문란성을 내포하며, 이 또한 과거 기록만 치중하는것에 현재로 이어지는 작금의 이야기나 통계들이 없기에 미래를 도전하려는 의식의 준비를 담지 못한듯 합니다.
과거 기록의 복제에 여기 저기서 카피하여 각 항목에 일관성이 없어 인구수가 나오고 작물이 나오는등 이후에 평창의 최초의 이름, 우오니 하는 설명이 뒤애 중복되는듯 참으로 혼란스럽다.
아마도, 이러한 점은 혹, 본인의 섣부른 판단일지는 모르겠으나 이 책도 유존하는 평창의 역사서로 먼 후일까지 전해질 것이기에, 이 책의 오류나 올바른 문장으로 재정비하여야 바른 이해의 정상의 책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본책, 「평창군 지명지」는 역사의 장에서 분명 비 정상이라는 멘트가 붙어서 오류의 확산을 방비해야 되는 책이라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한 시대의 시대상황에 의한 역사를 기록함에 사관적 정립이 부실하다는 판단에서 오히려 이 책도 평창역사의 정체성의 훼손을 가져올 수 있기에 이에 시정이나 정정이 있어야 좋을 듯 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560여 페이지의 책이라 각 장 모두를 점검하기는 곤란하여 처음의 p23~p31까지의 글을 확인해 보며 위 시정내용을 개진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 평창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작가 이효석의 유해가 고향 평창으로 돌아온다/봉평의병 제언 (0) | 2021.11.17 |
---|---|
정원대의 "평창의 인문지리 책"에서 진부역 위치의 보정 (0) | 2021.09.29 |
정원대의「평창의 인문지리」책에 <평창경찰서탑> 분석적 비평 (0) | 2021.07.22 |
평창 돌 체험관의 사색 (0) | 2020.09.13 |
후세백작의 역사관은 과거도 오늘도 아닌 미래 지향이다. (0) | 2018.07.19 |
<조각보 이야기> 전시회 (0) | 2018.02.26 |
평창의 2018 동계올림픽의 모뉴먼트적 기념 조형물에서... (0) | 2018.02.05 |
<평창의 거리에 태극기를 휘날리자> (0) | 2018.0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