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대의 「평창의 인문지리」책에 <평창경찰서탑> 분석적 비평
2021. 7. 6.
필자는 많은 글들은 평창역사중에 잘못되고, 오류가 되어 문화까지도 바르지 못하게 창출되는 여러 역사 이야기들을 다시금 바르게 조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거도 아닌 지난해엔 평창역사를 저해하는 책이 발간되어 부득히 이에 대하여서도 바르게 소명하고자 합니다.
사사로운 감정을 넘어서 대의와 정의로서 평창역사 구현에 정원대의 책 「평창의 인문지리」의 내용은 오류와 왜곡이 너무나 심하여 평창역사를 저해하기애 동 책의 오류들을 지적하여 바른 역사를 소명합니다. 이 점에 모든 분들께서 여러 이해를 바라며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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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책은 평창군 예산으로 발간된 책인데 지난해 가을 초판본 인문지리 책이 발간되자 바로 책의 저자는 동 책에 오류가 있다며 수정판을 하여야 한다며 다시금 군에 예산을 지원받아 정오표가 있는 수정본이 아니라 증보판으로 책을 재판 발행하였다. 떠러서 초판본의 오류와 결여사항 일부는 지적하였듯이 증보판의 오류들도 지적하여 바른 역사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지적은 다음에 분명히 할 것이며 이 장에서는 동 책의 항목의 하나인 노암석탑편에 분석적 이해를 합니다
저자는 노암석탑과 평창경찰서탑, 그리고 동북오중석탑, 유동 가나안 농군학교에 찹을 등장시키지만
분명한 것은 이 4개의 탑이 전부 다른 탑이란 사실이기에 본 논고는 노암석탑 제목부터 의심이 가는 사안이란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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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암 석탑 (魯庵 石塔)
본 탑을 고려시대의 탑으로 추정한다라고 기록하였지만 필자는 이미 두 세번 동탑에 대하여 논고하였듯이 동 탑의 초층 옥개석과 탑신석은 콩일신라시대 “정형탑”이라는 양식 이전의 탑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노암석탑의 한문이 魯庵인데 이 기록은 어디에도 없고 다만 구전으로 전할뿐인데 여기에 魯山이란 지명이 원 신라시대에도 불리웠는가 하는 문제도 가지고 있다. 왜냐면 신라시대엔 뜻이 아닌 이두의 음만 따서 사용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선 중리 노암사에 아무 사료도 없는 노암사 사원지가 있던 곳의 옛 지명은 노람버덩이다. 노람은 갈대 노(蘆), 넘칠 람(濫)의 의미를 가지지는 않을까 하는 점도 분석해 보아야 할 것이다.
<평창경찰서탑의 재논고>
현재 평창경찰서 서편화단에 있는 오층석탑은 원래 3개의 탑의 부재들을 모아 4층탑을 만들은 탑으로 구) 2층 청사의 평창경찰서에서 현재의 신청사로 이전시 까지 탑은 4층으로 되어있다가 신 처아 이전시 5층 옥개석을 추가로 조출하여 동탑은 운래 주워모은 짜깁기 탑에 다시 추기되어 5층이 되었다.
노암사에 탑은 있었다는 분명한 증언은 있지만 우리나라 탑 1,200여기중에 어느 사찰에서 주워 모은 탑을 가지고 있는 사찰은 하나도 없다.
동 탑이 원래 일제시대 평창장 여관에 있었던 점까지는 증언을 통해 확인되는데 그 당시 여관 화단에 탑을 맞춰 새운점에 대해서는 마지막으로 동 시대의 역사를 통해서 인식할 수 밖에 없기에 이러한 추정은 맨 아래에서 기고합니다.
그리고 현재의 평창경찰서 탑은 3층탑 사이즈 부재들을 모아서 5층탑을 만들었기에 가늘고 왜소한 느낌의 모양새를 가지기에 한국석탑의 美의 정취를 완연하게 자아내지 못하는 짬뽕탑으로 동 탑은 장식용으로나 가능하지 문화재 가치로서나 평창역사에 중요한 위치도 점하지 못하는 탑입니다( 혹 맨아래 1층 탑신석과 옥개석은 우리나라 초기탑의 역사를 가지는 것이라면 매우 중요한 사료가 될 수도 있다)
◆ 우리나라에 1,200여기 탑이 있는데 어느 사찰이든 탑을 경찰서탑처럼 3개 사찰의 돌을 주워서 쌓아올린 탑은 없다. 그러기에 동 탑을 평창장 여관에서부터 현 경찰서까지 이동은 사실로들 알고있다. 하지만 여기에 정원대의 <평창의 인문지리>책이나 그 증보판에서 노암석탑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오류를 넘어 실수이다.
이것이 노암석탑이라는 학술적 평가도 없고 개인의 단독으로 이런 규정을 한다면 그는 과연 올바른 향토학자일까?? 그뿐만이 아니다. 동 책에서는 노암석탑, 동북오중석탑, 유동 농군학교의 탑에 대한 해석이 모두 오류이기에 아래에서 하나하나 재 정비 합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사항들이 모두 사실이 아니라는 본인의 논고가 부당하다면 어느 분이든 평창역사의 소명이란 대 명제아래 언제든지 논쟁에 응할 수 있습니다.
증보판의 노암석탑 항목의 두쪽에서 얼마나 많은 왜곡을 자행하는가? 그래서 남은건 노암석탑 제목 하나뿐일텐데 제목 자체도 노람인가 의 문제에 노암석탑이란 명확한 사료의 증명과 경찰서 탑이 노암석탑이라 규정하는 점에 증거는 어디에 있는가 하기에 동 책의 저자 정원대는 노암 석탑이란 한 단어에도 이 두 가지 의문을 해동시에 해결해야 한다.
◆ 증보판에서도 초판본에서처럼 노암석탑이 동북오중석탑이라고 똑같이 수록하였기에 이에 다시금 현 경찰서 탑이 동북오중석탑이 아니란 점을 해부하여 비평합니다.
이러한 비평을 하지 않는다면 모두들 그 글이 잘 쓴거라고 믿어 평창역사에 심각한 훼손을 가져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 평창의 동북오중석탑(東北五重石塔)이란??
일본 건축학자 세키노 다다시가 사진기사를 동반하여 우리나라를 들어와 유리건판 사진기로 문화재를 찾아다니며 촬영였다. 1910년대부터 일년에 약 3개월씩 방문하며 조선의 문화재를 사진으로 촬영하였던바 처음으로 대동강유역에서 낙랑문화를 발굴하는등 15년여를 들어오며 문화재 사진 6,500여점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중 1915년판 세 번째 책인 고려시대 편에서 평창의 동북오중석탑, 서남오중석탑(유동리 5층석탑)을 찍어 실었다.현재로서는 동북오중석탑은 분실되고 폐사원지 위치도 알 수 없으며 조동리 탑골은 동 사진의 뒷배경의 산들이 아니라 종형산이고 현 수석 체험관 옆에 폐사원지 노암사에 석탑이었다면 사진속의 탑 뒤의 배경의 산의 각도들이 뒷 배경이 들어맞지 않아 필자는 박물관 아래 들어서 5m쯤당 사진 약 백여장을 찍어 노암사에 존재했던 탑이 동북오중 석탑 아닌가 하는 분석을 하였으나 아래 여만리 사진이 가장 맞을 듯 하지만 확대해보면 위배되는 산등성의 각도가 있어 아직 찾지를 못해 동북오중석탑의 위치를 알 수 없다.
아래에 링크된 주소에 초판본의 잘못됨을 밝히는 글로 경찰서 탑에대한 오류를 찾아 바른 논고를 하였기에 여기서 중복은 피하며 서술합니다
https://blog.daum.net/kkks1/1805
평창경찰서 탑의 분석과 그 이해
◆ 평창의 동북오중석탑이 알려지는 유래
다다시의 “조선고적도보” 책속에 평창의 서남오중석탑(유동리 5층 탑), 동북오중석탑, 월정사 칠불보전(적광전으로 중창), 양팔이 부러진 석조여래좌상, 오대산 사고, 상원사의 사진은 있는데 15권에 6,500여매 사진이 있는데, 필자는 수항리사지에 당간지주와 분실된 3구 석불의 사진을 찾아 보려고 동 책을 2~3번이나 한 장씩 넘기다 평창의 사진들을 발췌하였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유알하게 본인의 블로그에만 동북오중석탑, 서남오중석탑이 게시돼어 있지 평창의 동북오층 석탑이란 단어는 고적도보속에 사진 한장으로 묻혀있고 오직 필자의 게시글에만 있다. 그리고 수항리사지 석불 3구에 대해 혹시 월정사 탑 아래 석조보살상 아닌가 추정하기에 필자는 조선고적도보으 사지을 제시하고 부러진 팔이 보살상 무릎에 그냥 잇으며 김종근 옹의 석불 3구 증언이전인 1915년쯤 사진이라고 증명할때 정원대는 동북오중석탑을 알게 되었고 따라서 본인의 글에서 동북오중석탑은 각주로 인용하며 여기에 살을 붙여 탑신이 없는 옥개석만 층으로 올릴때 일본에서는 층자가 아니라 중자로 쓴다고 명시했다. 이점도 하단에서 다시 논고한다.
https://blog.daum.net/kkks1/1582
『조선고적도보』로 보는 평창읍 유동리 5층 석탑과 동북 5층 석탑
아직도 동북오중 석탑에 관한 글은 필자의 글이 보았슬 것이며 구두상으로도 이미 이야기 하였기에 이러한 점을 잘 알았슬 것으로 보이나 정원대는 노암석탑을 동북오중 석탑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정원대의 특징에 하나는 필자의 이야기시에는 자기 의견을 같이 이야기하여 내 얘기는 묻혀버리고 촌논들의 맞지 않는 증언도 매일 이야기한다. 아마도 이 부분은 자기가 그만큼 노력한다는 표시로 받아들이긴 하지만 맞는 증언이라야 한다.
그 점에 하나는 이미 논고햇듯이 국구사우 편에서 300m 이상 떨어진 다른 동네에 느릅나무가 있다라고 증언하는 예를 볼 수 있다
-----<인 용 부>----------------------
<평창의 인문지리 책 발췌인용>
◈ 「평창의 인문지리」 초판본 일부 발췌 인용
출전 “조선고적도보” 중 석탑명에 평창동북오중석탑이 기록되어 있다.
증언 박봉주 (남, 1947생, 평창군 평찬읍 중리 극락사 옆)
참고 2006에 김진백과 현지답사후 사진을 기록에 담다.
답사1 1957년 12살경 논물을 보면서 5층석탑아래서 휴식을 하기도 하였다.
답사2 평창여관(하리 157-4번지) 정원에 옮겨져 있었는데 여관이 화재로 전소되어 평창읍 하리 113번지로 옮겼다가 현 평창경찰서 위치에 옮겼다.
◈ 「평창의 인문지리」 증보판 일부 발췌 인용
출전 “조선고적도보”중 석탑명에 평창동북오중석탑으로 기록되어 있다.“
“층수의 표현에서 일본의 경우엔 옥개석 사이에 탑신이 있으면 층탑이라 안하고 중탑(重塔)이라 한다”
답사1 1차답사(1979,10)
경찰서 화단에 있는 탑은 석질과 양식이 다른 3기분의 탑재를 수습하여 탑으로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기단부는 없었으며 5층 옥신석은 한 개의 돌로 이루어졌다. 3층 옥신과 4층 옥신은 시멘트 사용하였다.
참고자료 박희도 장로의 증언.
1967년 3월경 일신중학교 정문옆 연못 중앙에 5층 석탑이 있는 것을 목격하였으며 1970년 유동리 가나안 농군학교 솔밭에서 5층 석탑을 보았는데 경찰서 탑과는 다르다고 증언하고 있다.
증언에서. ‘72년 홍수에 본 석탑이 유실된 것으로 추정(탑재로 옥개석 1기만 남아있음)
------------------( 인용 끝)---------------
※ 위 두 책 초판본과 증보판에 대하여 본문을 인용하여 분석적 비평을 한다.
1) 초판 평창의 인문지리 책에 박봉주의 증언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2) ' 79년이 경찰서를 답사했다는데 당시 정원대는 경찰이었고 어디에 근무를 하던간에 평창경찰서가 본청인데 그럼 내 집에 문화재가 있다고 집을 답사헸다고 쓸 수 있는가?? 그리고 동 책에서도 구 경찰서 탑이라하며 4층석탑의 사진이 있는데 오층 옥신석은 한기의 돌로 이루어 졌다고 쓰고 있다고 책 자체내에서 논술은 자신이 올린 4층탑 사진에 위배된다.
옥개석( 옥신석)은 각 층마다 하나인데 한 기의 돌로 이루어지다니 아마도 현 경찰서 탑에 5층을 새로 조출한 문제를 이야기 하는듯 하고 이는 오층 옥개석과 상륜뷰의 보개+복발이 하나의 돌로 깎았다는 표현이을 가지고 5층 옥개석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다고 표현한 듯 보이는데 그러면 이런 서술은 서술력 부족 현상을 드러낸다.
그리고 옥개석(옥신석)은 각 층마다 하나인데 탑신석이나 옥개석은 탑 조형의 양식에서 탑신부이고 노반과 복발 찰주, 보개, 보주는 상륜부로 구분하는 바 탑신부와 상륜부가 일석으로 조출된 것은 탑 조형양식의 논리에 위배되기에 상식적인 탑은 아니고, 이점에서도 경찰서탑은 양식에 어긋나는 똥탑인 것이다.
3) 증언에서 ‘67년 일신공민 학교 연못 중앙에 있는 5층 탑을 보았다.
‘70년 유동 가나안 농군학교에서 솔밭에서 5층 석탑을 보았는데 그것은 현 경찰서 탑괴는 다르다고 증언한다.
여기서 일신학교에 5층탑을 보았다고 증언하는데 일전 아래의 사진을 제시하였더니 재차 증언을 받았는지 당시에 망루는 못 보았다고 했다.
67년쯤인가 일신학교가 개교하기 이전에 파출소옆(현 이데아 커피숖자리)의 망루는 강선생님의 개인주택으로 불하되기에 철거된듯 하며 파출소 망루는 일층으로 방송나팔을 올려 놓은 것으로 필자로서는 서너살때 기억임.
위 사진에서 경찰서 탑은 4층탑이었는데 증언자는 일신중학에서 5층탑을 보았다는것은 왜곡으로서 위증임. 또한 유동 가나안 농군학교의 탑은 경찰서 탑과는 다르다고 하는데 그런 증언이 어디 있습니까?? 경찰서에 그 탑은 있는데 그 탑과 똑탙은 탑이 어디 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 문장은 일신학교라 지목했던 탑과 다르다는 것이라면 저자의 표현 부족이리라.
4) 5층 옥신석은 한 개의 돌로 이루어졌다라고 서술한 부분에 말대로하면 옥개석은 하나이니 당연히 한개로 될 수밖에 ,, 물론 큰 탑은 면 분할이 이루어지지만,, 이 점도 무엇을 설명하고자 하는지 아래에서 논고한다,
현재 평창경찰서 탑의 5층 옥개석은 상륜부의 노반과 복발을 합한 모양의 형태와 하나로 이루어져 있는바 이를 두고 한 말로서 아직 탑의 명칭조차도 분별하지 못하고 있다.
하나의 탑을 조출하기엔 하단부의 지대석과 각 층으로 탑신석과 옥개석으로 조합한 탑신부와 상륜부는 네모 박스형의 노반위에 둥근 복발 반 원형을 얻은 모양위로 찰주공을 심고 보주를 다섯개나 아홉개 꿰어서 그 위에 보개를 조식하여 올려 놓은 것을 탖의 상륜부라 하며 이러한 상륜부는 흔히들 찰주공없이 연꽃으로 감싼 보주로 조식하여 약식 처리 하기도 한다.
그러기에 탑신석과 옥개석이 통석으로 붙여 만드는 경우는 있으나 현 경찰서 탑은 1997년 이후에 신청사로 이전하며 사고가 난 부분을 조각하여 채운 것으로 탑으로 이는 탑의 조형론 양식에도 어긋난다. 이를 두고 즉, 5층 옥개석과 노반+ 복발이 하나로 이루어잠을 보고 탑신석이 하나라고 지칭한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는 기록할만한 중요한 점도 아니다..
5) 증보판 출전에서 일본의 경우에는 옥개사이에 탑신이 있으면 층탑이라 안하고 중탑이라 한다라는 본문에서 아예 탑의 이야기로부터 출발하여 서술합니다. 왜냐면 세키노 다다시의 조선고적 도보 연감은 일본에서 출간된 것이고 당시에 일본인들은 한국 문화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조선고적도보 >책 원문에는 동북오중 석탑이라고 층자대신 무거을 重를 쓰고 있다고 지적했더니 일본인들은 조선 문화 탄압에 일환이라고 답을 하기에 이에 답으로 묵사발을 만들었더니 또 옥개석 사이에 탑신이 잇으면 중탑이라 한다는 참으로 해괴한 이야기에 , 그럼 그 출처는 어디인가 명시했어여 한다. 출처가 있건 없건 좀 긴 문장이 될 수도 있지만 탑에 대한 이해를 설명하면 정원대의 이러한 서술은 정원대의 이러한 이야기는 불필요한 점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탑의 이해>
탑은 부처님을 뜻하는 것으로 인도에 스투파에서 출발하여 소승불교애서는 버마 태국의 파고다 탑, 그리고 중국과 한국에서는 탑으로 불리워지는데 기실 중국엔 50m의 높은 8각탑, 유리전탑 10여개 정도가 잇지만 우리나라엔 현재에 1,200여기의 탑이 전하고 있는 바 탑은 한국의 예술품이고 문화유산인 것이다. 일본은 화산의 나라로 화강암의 존재보다는 목재가 잘 자라는 나라로 목조각이 많다. 오사카 성에 담에 넓적한 화강암 두개나 해자에 축벽등 화강암이 있지만 일본의 사찰에서 탑을 찾아보긴 힘들다.
일본의 사찰 몇 군데중에 교토의 청수사도 아름드리 목재로 지은 절이지만 앞 마당에 두 기의 탑이 있는데 이것은 화강암도 아닌 검정색 화산석으로 2,5m 정도의 작은 3층 석탑인데 참으로 단순하다 아래 기단석 두 개는 두부모 오려낸듯 반듯한 사각형이고 위에 탑신부도 직선과 사선만으로 해결이 다 된 탑으로 에도막부의 무신정권하에 발전된 일본은 그 속에 문화 자체가 없기 때문이 이러한 현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탑은 한국의 특유의 발전된 문화이지 일본에서 탑은 발달하지 못했다.
그런데 정원대는 동 책에서 일본에선 탑신석을 뺀 옥개석만 쌓아올린 탑은 重塔이라 한다는 문장은 어디서 인용했든, 돌발적 생각이든간에 오류라는 점이다.
탑의 조성방법엔 바닥의 지대석, 기단석 ( 월정사 팔각구층 탑이나 수항리 사지 탑은 2단의 가단석이다)
그리고 탑신부에 각 층별로 탑신석과 옥개석을 조출하여 올린다. 그런데 쉬운말로 지붕돌만 있고 아래에 공간이 없는 집이 있는가?? 탑신부엔 감실을 만들어 사리등을 봉안하고 상륜부는 책상처럼 네모박스의 노반과 그 위에 반 둥근 복발 그리고 찰주를 고 보개, 보주등을 올리는데 약식으로 연화 봉우리등으로 생략하는 것이다. 여기서 한국의 탑은 3층에서 13층 까지 홀수로만 조성되기에 경찰서 탑은 4층이라 신청사 이전시 5층 옥개석과 복발을 한기의 통석으로 만들어 올린 것이다.( 단 경천사지 탑은 10층 탑인데 이는 원나라 기술자가 쌓아 올린 것이다)
<일본 식민지하의 문화론>
각주편에 동북오중석탑을 오층석탑으로 기재했기에 고적도보 원문에는 오중석탑으로 나왔다고 밝히니 그것은 일본의 조선 말살정책에 일환이라 한다. 그래서 다시 멜을 보냈다.
그 내용은 일제 초기에 원주 법천사지의 지광국사( 수다사에 주석함)의 현묘탑(승탑)이 일본 오사카에 부자에게 당시돈 3,140원에 밀반출되고 그 소문이 나나 육군대장 출신의 테라우찌 초대총독은 국유지의 국가의 재산을 밀 반출하였으니 감옥에 보내려 하자 다시 원금을 돌려주고 탑을 조선에 반환하였다.
당시에 3,140원이면 아마 기십억은,,, 수항리 사지 탑으 '69~70년쯤 밀반출될시 100만원에 팔았다 하는데 당시 가치로는 30마지기 논을,,
여기서 테라우찌는 국유재산이라 한점은 조선을 합병하고 조선에 왕은 일왕이 하기에 오대산 사고본은 이왕직 도서관으로 반출되어 다시 동경제대에 기증하는데 이를 우리의 말로 표현하면 일본 학자들이 한국을 연구하여 일본땅임을 강조하라는 의도였기에 관동대지진떼 사고본은 모두 불타지만 그중에 46책은 학자들이 대출한 것으로 살아나 환수되었다.
이렇게 당시에 일본 학자들도 한국학에 관심을 가졌지만 문화재 약탈은 관의 주도뿐 아니라 일반인에게서도 극심했던 것이다. 세케노 다다시도 조산고적 도보 사진첩을 만들기에 15년간 일년 2~3개월씩 조선에 들어와 길도 없는곳을 헤치고 다니며 고생한 것은 후일 일본 역사를 관장하기 위한 연습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일본은 조선과 같은 문치국가의 문화역사는 없다. 각 골짜기의 토후 세력들이 해적이 되어 남의 것 약탈하는 뜻으로 왜구라 그러는 것이다.
좀 더 쉬운 이해로 우리는 K팝이 유행인데 그러면 J팝은 없는가 하는 물음에 한국과 일본은 모두 미국식 근대주의 국가를 지향하였는데 한국은 그 내용면에서 과거 조선시대의 문치국가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수운 이해의 하나로 손님이 자신의 집에 방문했슬때엔 평소보다 다른 손님 접대용 음식을 마련하고 잠자리도 손님을 위해 마련해 두었던 이부자리를 펴 주는등 진심을 나타내지만 일본은 있는 그대로 생활에 아침에 일어나서도 미국식의 토스토 한 조각에 우유 한 컵 먹는 식사를 손님에게도 동일하게 제공한다. 이렇게 일본은 그들의생활 내면에서도 미국식이기에 드라마 한편을 미국인이 본다면 자기네 문화라 볼게 없지만 한국 드라마는 생소하고 가치관을 가지기에 인기몰이를 하는 것이다.
이렇듯 일제 식민 초기에 일본에서는 한국문화재에 탐닉에 열을 올리고 약탈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다시의 <조선고적도보> 자료 책은 일본에서 조선 문화재를 한눈에 보고 손으로 찍으면 건달배들이 약탈해 가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이러한 연유로 평창의 동북오중석탑도 수탈당한 것이라 봅니다.
이때에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만 여기다가 정원대가 이야기하는 조선문화 말살정책은 1919년 민족정신에 의한 3,1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이로부터 조선 탄압 정책을 펼치게 된 것이라고 메일을 보내니 이젠 증보판에서 또 탑신석이 없는 탑은 하는 문장에 탑신석이 없으면 지붕만 있고 방은 없다는 것과 이치가 같은 이야기인데 위에서 탑은 부처님의 전신이라고 했는데 그런 옥개석만 쌓은 탑은 부처님 멸시라는 것인가?? 참으로 이해 불가의 이야기이다.
여기서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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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탑 노암석탑편을 정리하면 정원대의 인문지리 책엔 제목으로 노암 석탑이 등장하고 현 경찰서탑과 동북오중석탑, 유동리 가나안 농군학교의 한기 남은 석탑 이렇게 4개의 탑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증언 자체로도 농군학교탑은 경찰서 탑이 아니라 하는데 증언에 오를 이유가 없는 것이며. 그럼 나머지 3개의 탑에대한 확실한 고리도 없고 위에서 밝히는 바 한 단원도 아니다.
더군다나 2007년 답사시 사진으로 남겼다 하는데 동 탑은 문화재 가치도 없는데 기 기록은 무엇인가 하는가 하는 점이다.
김진백 정원대의 길위에 역사란 책은 자기 책에서 무수히 많이 출전되는바 가령 국구사우 편에서 보면 1872년 지방지도, 평창군 오면지도와 김진백, 정원대 ,<길위의 역사>2019년의 두편이 삽입된바 국구사우가 길위의 역사책에만 존재하는가, 아마도 장정룡교수의 글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러기에 동책은 무슨 영구가 잇는가 확인도 필요하지만 동책은 50권 출판하고 수 없이 길위에 역사란 책을 소개하고 있다.
그럼 왜 50권만 출판했는가 하는 이유에 대한 추정은 분명 증보판 비평에서 서술할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책에 이전 자신의 책을 무수히 많이 캡쳐하는 책은 아직 본적이 없다. 그러기에 그에 대한 소감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들의 책 아닌가 의문스럽다.
평창의 역사의 훼손, 굴절하는 평창의 인문지리 증보편에 비평은 다음으로 하여 평창역사를 다시금 소명하겠습니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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