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고씨굴이라 전해지는 슬픈 역사 이야기>
高 柱 浩
영월의 고씨동굴의 새로운 역사 이야기가 밝혀졌습니다.
지금까지는 백과사전이나 영월 역사에서도 고씨 굴에 관한 역사적 이야기는 자료가 없어서 임진왜란때 고씨 일가가 피난가서 고씨굴이라 불린다 서술되고 있지만, 당시 역사적 사료를 발굴하여 고씨 동굴의 역사는 의를 내세운 의병장의 모습으로 새롭게 조명되어야 합니다. 당시 역사에서는 고씨굴은 3형제의 의병장으로서 나라를 위한 충정의 슬픈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현재 고씨동굴 안내판엔 근거도 없는 고씨만 살았다는 비 역사적, 동화적인 이야기를 꾸미고 있는데, 새로 밝혀진 고종원 3형제의 임진왜란시 의병장으로서의 역사 이야기로 다시 서술하기를 바랍니다.
<인용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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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문화원 2019.08.14. 보도자료 발표
임진의병장 창의비 제막식 및 창의비에 새겨진 고종경 사료 문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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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
역사와 문화의 향기가 가득한 영월문화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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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14일 배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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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월 일 부터 보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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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문화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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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쪽, 첨부 : 약사1부 |
담당 : 영월문화원 사무국장 나명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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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033)374-3434/ 팩스: 033)373-1443/ 이메일: ywcul@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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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ong Wol Culture Cent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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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문화원, 임진의병장 고종경 창의비 제막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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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 시 : 2019. 8. 14(수) 오전10시 2. 장 소 : 영월 고씨동굴 공원 3. 내 용 : 임진의병장 고종경 창의비 제막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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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월문화원(원장 엄흥용)은 광복 74돌을 맞아 14(수) 오전10시, 고씨동굴 공원 일원에서 ‘임진의병장 고종경 창의비’ 제막식을 마련했다.
□ 폭 2.5m, 높이 5m 규모로 건립된 창의비에는 400여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아직도 이곳 진별리에 생생히 살아 숨 쉬고 있고 국권회복을 위해 목숨을 걸고 일제에 항거한 고종경 의병장 형제의 충절이 담겨져 있다.
□ 이를 통해 항일운동의 발상지이자 의병장을 많이 배출한 역사적인 영월 홍보와 일제에 맞서 목숨을 바친 수많은 의병들의 넋을 기리고자 한다.
□ 또한, 항일운동에 대한 깊이 있는 학술적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 향후 의병공원 조성 등 꾸준히 의병 현창사업을 전개해 나갈 계획이다. |
壬辰義兵將髙宗慶倡義碑 |
임진의병장 고종경(髙宗慶)은 1540년(중종 35)을 전후하여 부친 고광후(髙廣後)와 영월 엄씨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젊어서부터 인품이 순후(淳厚)하고 학문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무예(武藝)도 출중하였다. 그는 제주 고씨 고을나(髙乙那)의 후손으로 파조 고인비(髙仁庇)는 고려시대 병부시랑(兵部侍郎) 상장군(上將軍)을 거쳐 충렬왕 때 화전군(花田君)에 봉해져 횡성지역의 명문세족(名門世族)으로 성장하였다. 고조부 고습(髙襲)은 자헌대부 이조판서겸지의금부사 행금성현령(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行金城縣令)으로 추증되었고, 증조부 고사신(髙思信)은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겸판의금부사 계공랑 행전옥서주부(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啓功郞行典獄署主簿)로 추증되었다. 조부는 고항산(髙恒山)으로 참봉이었고, 그의 종조부(從祖父)인 익장공(翼莊公) 고형산(髙荊山)은 중종 때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형조·호조·병조 외 6조판서와 우찬성 등 요직을 차례로 역임한 인물이었다.
영월 화전군파 입성조인 그의 부친 고광후(髙廣後)는 서종형제(庶從兄弟)가 역모에 연루되자 가족과 함께 횡성을 떠나 영월군 김삿갓면 진별리로 이주하였다. 1592년 왜란이 일어나자 고종원(髙宗遠)·고종경(髙宗慶) 형제는 창의격문(倡義檄文)을 짓고 통문(通文)을 돌려 무기와 군량미를 준비하여 ‘영월임진의병(寧越壬辰義兵)’을 창의하였다. 의병들은 학식과 지혜를 겸비하고 문무(文武)가 출중한 고종경을 ‘의병 창의대장(義兵倡義大將)’으로 추대하였다. 이 때 강원도 관찰사 유영길(柳永吉)이 고종경을 불러, 관군 500명을 원주 흥원진(興原陣)으로 인솔하게 하였다. 전쟁을 두려워한 군졸들이 어두운 밤을 틈타 도망하자, 이를 추포하느라 약속한 날짜를 지키지 못했다. 강원도 관찰사는 지휘책임을 물어 고종경을 영월관아로 압송하여 처형하였다.
1592년 8월 17일 왜장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가 영월로 쳐들어와 약탈과 살육을 일삼았다. 고종원은 가족들과 강 건너 노리곡 동굴(고씨굴)에서 피난 중 왜적들에게 포로가 되었다. 부인은 참봉 조빈(曺彬)의 딸로 왜적들에게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고씨굴에서 자결하였다. 8월 19일 고종원·고종길 형제는 평창군수 권두문(權斗文)과 함께 영월 봉서루(鳳棲樓)에 갇혔다. 이후 주천 빙허루(憑虛樓)를 거쳐 원주관아로 끌려가서 감금되었다. 포로가 된 평창군수와 종원·종길 형제는 1592년 9월 2일 천둥과 폭우가 쏟아지는 날 원주관아를 탈출했으나, 동생 종길(宗吉)은 원주 단구역(丹邱驛)에서 왜적들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영월 임진의병의 역사는 400여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아직도 이곳 진별리에 생생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이에 구국(救國)의 일념으로 평생을 살다 간 고종경 의병장 형제의 충절과 항일의병의 역사를 기리기 위해, 오늘 영월군민의 뜻을 모아 빗돌을 세운다.
2019년 8월 15일
영 월 문 화 원
이 글은 고종원의 「기천록(祈天錄)」과 권두문 평창군수의 「호구록(虎口錄)」을 바탕으로 하였다.
세움 : 영월군수 최 명 서
영월군의장 윤 길 로
영월문화원장 엄 흥 용
도움 : 제주 고씨 영월종문회장 고 진 국
빗돌 글 엄흥용, 빗돌 글씨 김태숙, 조각 김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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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虎口錄> 7장 南川 權斗文
萬歷 壬辰 8월 19일
낮에 영월 선비 고종원, 종길 두 형제가 잡혀 왔다. 먼저 내 앞에 와서 눈물을 흘리면서 "공께서 어쩌다 그렇게 되셨소? " 한다.
나는 "평생에 악을 쌓은 게 많아서 부자와 함께 호랑이 굴에 들어왔으며 늙으신 아버지께선 올해 연세가 71세인데, 난리 통에 쫒기어 어디 계신 줄도 모르니 나는 속히 죽원이나 그렇게는 되어지지 않고 적의 칼날이 내 머리로 떨어질때 강녀가 몸으로 나를 덮어 나는 살고 그녀는 죽고 여기에 잡혀 온 후에는 내 아들 주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오늘까지 나를 죽이지 않았으나 내일 어떻게 될지 나도 잘 모르겠소"라고 했다.
고(高) 군이 이르되 "소무나 문산 같은 분이 다 악을 쌓아서 그리된 것이 아니라 다 운명이로소이다" 공의 처지도 저와 비슷합니다.
저도 팔십 노부가 난리에 쫒기어 방금 산곡에 계시고 아우 종경이가 의병을 불러 모으다 비명에 죽고 내 처는 나를 살리려다 암굴에서 죽었으니 처지가 어찌 그리도 흡사합니까??"한다.
나는 말했다. " 영재(令第) 종경이의 죽음을 샐각한다면 슬프기 한이 없고, 지금 생각하면 나의 과실이 적지 않다"하니 고 군의 말이 "내 동생의 죽음은 비록 애매하다고는 하나 본 읍(本邑)에서 구명( 求命)의 첩(牒)이 영문( 營門)에 도착하기 바로 직전에 이미 형이 집행되었다고 하니 이 어찌 운명이라고 아니할 수 있으며, 공의 과실이라고 탓 하겠습니까? 한다.
고종원은 횡성 세족(世族 )으로 영월로 이거해 살다가 왜변이 났다는 말을 듣고 그의 아우 종경이가 고향 마을에 통고해서 병사를 모으니 온 마을이 모두 종경이의 문무재주를 추앙해서 그를 우두머리로 삼아 의병에 참가하니 그의 향병(鄕兵)이 수백 명이라, 장차 홍천과 영춘 사이의 험한 곳을 거점으로 하여 왜군의 진로를 차단할 준비를 하고 있슬 때였는데 도백이(지금의 도지사)가 찾아와 종경이의 의(義)가 가상타고 격려하며, 당시 흥원진(興原陳)이 약하다고 종경이가 모은 영군(營軍) 500명으로 흥원진을 도우라고 지시하고, 이 뜻을 흥원진에 알렸건만 영군이 중도에서 흩어지는 바람에 때를 놓치게 되었다.
흥원진장(興原陳將)이 이를 도 영문(道營門)에게 보고하니 영문에서는 종경이 군율을 범하였다고 체포하여 내가 근무한 평창으로 이송하여 그를 행형(行刑)토록 지시했다.
종경이 처음에는 구국일념으로 모병을 한 공과 의가 있다해도, 영문절제(營門節制)에 부진망진(赴陳亡陳)하여 때를 놓쳤으니 사형을 집행하라는 상부의 명이었다.
그때 마침 나도 관직을 겸하게 되어 군(郡)에 당도해 보니 평창 읍내 많은 사람들이 군청 뜰에 가득 모여 진정과 호소를 하는데 종경이는 가상한 의는 있슬지언정 죽일 죄는 없다고 하며, 영진(營陳)이란 것이 군진(軍陳)과는 달라 오늘 모였다가 내일 흩어진다 해도 종경이 사율(師律) 이 엄하지 못해 그런 것도 아니고 군(軍)의 신망을 잃어서 그런것도 아니며, 종경의 재주와 혈기는 가히 한 구석을 막을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 나라가 위급할 때 죄 없는 의사를 죽인다면 원통하고 아깝다고들 하였다.
그때 마침 한양에서 평창으로 피난을 온 한산군 이축과 前 부사 윤면, 선전관 신경등, 교관 홍재식이 앉아서 말하기를 " 이 사람이 먼저 창의( 倡義)를 했으나 가위(可謂) 쓸만한 인물이니 석방을 하여 국가에 이롭게 함이 옳다" 하니 나도 이 뜻을 위에다 보고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그 후에도 오래도록 상부의 회신이 없어 수령의 도리로 윗 사람의 명을 어기며 오래토록 기다릴 수 없어 애석하긴 했지만 그의 형을 집행하였다.
그러나 사형을 집행한지 얼마 않되어 도백으로부터 종경에 대한 형을 정지하고 무죄 석방하라는 첩문(牒文)이 왔으니 놀랍고 아깝기 짝이 없었다. 내가 "애매하다" 한 점이 바로 이런 뜻이다 .
고 군이 내 아들 주를 보며 한숨 지우며 하는 말이, "충효의 가문에는 기가 반드시 통할 것이니 하늘이 반드시 도울 것이며 왜들도 해하지 못할 것이다""한다.
나도 대꾸하여, " 고 형(高兄)도 역시 이 나라 사직에 은혜가 있고 의병을 도우다가 이루지 못한 한을 안고 죽은 동생의 의가 형제간에 서로 통할 것이니 하늘이 만약 우리 부자를 도우신다면, 고 형 형제분들도 꼭 도우실 것입니다""하고 서로 위로하다 보니 어느새 밤이 깊어갔다.
나의 증조부 익장공(翼蔣公)을 생각하면 삼도(三道)의 감찰사(監察使)로 그 이름이 방방곡곡에 진동하여 왜구들이 스스로 겁을 먹고 접근하지 않아 임금께서도 교지로 지용(智勇)을 겸비한 인물이라고 칭찬하셨는데 이제 그 자손이 오히려 왜노(倭奴)에게 잡혀와서 땀을 흘리니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하며 흐느껴 우는지라. 무슨말로 어떻게 위무를 해야 할줄 몰랐다.
[출처]후세백작의 지평. http://blog.daum.net/kkks1/376
<지난 8,14일 고씨동굴 공원내에 의병장 고종경 창의비를 제막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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