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경찰서 탑의 분석과 그 이해
2021-01-17 03:35 2010. 1. 10. 후세백작
평창의 향토사학자 정원대는 지난 가을「평창의 인문지리」라는 책을 출간하였는데 그 내용중에 ‘노암(魯菴)석탑 ‘편에서 동 탑은 평창경찰서 5층 탑이고, 원래는“동북오층석탑”이라 한다. 그러나 이 글은 단연 오류이고 왜곡도 가진다. 그러기에 픽션(허구)의 기록이 평창역사가 되는 점에대해서는 단호하게 엄정한다.
◀조선고적도보에 기록된 평창의 동북오중(五重)석탑 (조선고적도보는 일인 건축학자 세키노 다다시가 1910년대 이후 한국의 고적을 답사 촬영한 것으로 동북오중석탑은 1912~15년쯤에 평창 사진중엔 최초로 찍은 사진이다)
▶ 현 평창경창서에 있는 5층 석탑
※『조선고적 도보』책인 일본 건축가 세키노 다다시가 1912~30년3대 까지 매년 2~3개월 조선을 방문하여 우리의 문화재 6천 점을 유리건판 사진기로 촬영하며 1915년 부터 30년까지 일본에서 출간한 책이다. 당시로서는 책의 내용을 알지 못하자 한질 15권이 150만원하는데 필자는 인근에 있는 중고 도매상이 이 책이 있기에 70에 사서 한장 한장 뒤져서 평창의 사진들을 찾아 보게 되었다.
요즘은 인터넷에 pdf 찾아볼 수있다.
정원대,, 당신이 이 책의 원본을 본게 아니라 내글만 보고서 뭘 안다고 그리 떠드냐...
일본은 탑이 없다 물론 교토 청수사 입구 양옆에는 두부모 자른 듯한 작은 삼층석탑이 있지만 화산의 나라라 화강암보다 목재가 많아 목조 부처 등이 많다.
따라서 당시 오층이란 용어를 일본자 사용방삭의 표현으로 오중(五重)으로 표기한 것이다. 멀 따지구 잘난체는...
정원대는 <평창인문지리> 책에서 노암석탑은 평창장 여관으로 옮겨지고 이후 평창경찰서로 옮겨진 세키노 다다시의 사진의 평창동북오층석탑이라 한다. 이 부분에 사실과 다른 점의 정확한 고찰부터 한다.
아래 (인용 1)에서 정원대는 가) 오층석탑 사진 후면 山(평창읍 여만리)을 볼때 평창읍 중리 35-3번지 구전으로 전해오는 魯庵 절터로 생각되며라고 서술하였으며 나) 평창여관의 평창여관 주인 오**(1910.4.-1950.7)의 장손 오**(1941.6)은 오층석탑에 관하여 어느 곳에서 왔는지 알 수 없다고 하며라고 2017년에 인터넷 게시글에서 서술하였다
가)항에 지명하는 오층석탑은 세키노 다다시가 찍은 유리건판 사진으로 남은 평창의 동북오중석탑(五重石塔)으로 기명하였으며 정원대는 동 사진의 배경은 여만리 산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맞지 않는 것으로 사실에 위배되며 이에 대한 필자의 일련의 연구는 아래에서 필한다.
나)항에서 평창여관 주인의 子 오**는 평창여관의 오층석탑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른다 하였는데 오층 석탑인지 삼층인지도 문제이지만 정원대는 평창여관의 오층석탑이 노암사 석탑으로 이는 동북오중석탑이라 명명하지만 이 문제는 분명 사실이 아님을 아래에서 고찰한다.
* 경찰서탑이 평창여관에서 이전한 것은 평창읍 하리 거주의 김**옹이 직접 옮기고서 증언하는 것으로 경찰서 탑으로 출처는 평창여관까지는 사실이며 그 사진은 4층탑으로 아래에 게첨한다.
◆ 정원대의 노암석탑설의 부당성에 대한 추론
1) 정원대는 노암석탑이라고 평창의 인문지리 책에서 기굴한 점은 평창역사가 아니라 정원대 주장설로 동 설은 명칭부터 노암석탑이라 하는 점이 아니라 노암석탑과 노암사의 관계에서 노암사가 主라는 점으로 노암사 석탑이라 명하여야 하는 점에서 시작한다.
2) 다만 중리 오**의 증언에 따르면 노암사 탑에서 짝은 사진이 있다하여 검증하였더니 노암사 탑은 빗나가고 두 사람의 인물만 찍혀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 시절 사진기가 귀할때 인물이 제일 중요한 점이라 탑은 악세서리라 배경에서도 빠진듯 하다. 그러나 이 사진에서 유추해 볼때 노암사란 절터는 있있던 점은 사실이나 어떠한 탑인지 몇 층탑인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이로써 정원대의 노암사나 노암석탑은 존재하였음이 증언으로 나타나지만 정확한 사료는 없는데 이 탑을 평창여관으로 탑으로 즉 평창여관으로 옮겼다는 해석의 정원대의 말은 근거가 없으며 오류란 점을 아래에서 서술한다.
3) (인용1)과 (인용2)에서 정원대는 노암석탑이 “고적도보”에 발표된 동북오중석탑이며 또한 동 탑은 평창장여관 탑이고 현 평창경찰서 오층석탑이라 주장하는 점에는 평창여관의 탑은 위애서 논고처럼 평창경찰서 탑이지만 출처는 알 수 없다 한다. 그리고 노암사 탑은 동북오중석탑인지는 판정이 불가하지만 평창경찰서 탑은 단연 동북오중석탑이 아님은 확실하게 판정된다.
4) 현 경찰서 탑은 3개의 탑의 탑재들의 부분별로 모아져 쌓아 올렸다는 필자에 의한 동 탑의 분석적 판별의 게시글은 이미 동 책인 평창의 인문지리 책보다 2년전에 게시하였다. 그리고 동 책의 저자인 정원대에게 필자는 몇 번이 니 동 탑(현 경찰서 탑)이 동북오중석탑이 아니라고 지적하였지만 필자의 이야기는 건성으로 들었는지 아니면 논지가 맞지 않다고 무시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과연 본인의 평창경찰서 탑의 분석적 이해의 글이 무시할만큼 가치없는 이야기입니까, 본 글 맨 아래에 이 글을 인용 첨부 한다.
* 현재의 경찰서 탑에 대하여 2018년 필자는 3개의 탑이 부재가 모아져 4층으로 조성한 탑이라 발표하였다(탑의 부분별 내용의 게시글은 아래에 첨부한다)
(4층 석탑임) 사진출처- 이경식 소장 >
*사진의 4층석탑의 위치는 (구)경찰서인 노인회관 옆 화단에 조성시는 4층 탑으로 현 경찰서로 옮기기에 5층 옥개석을 신규로 마련하는등 정비하였다.정원대는 평창경찰서 탑이 5층의 노암석탑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러한 주장에 근거도 없지만 탑의 원 부재들은 오층탑의 부재는 아니었다.
◆ (추정)노암사 석탑에대한 가능성의 추론
정원대는 (인용1)에서는 노암절터라고 생각된다고 표현하였지만 여기에 어떠한 고증도 없이 (인용2)의 「평창인문지리」 책에서는 노암사 탑도 아닌 노암석탑으로 명칭을 부여하는 등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아무런 근거나 역사적 사료도 없이 평창역사의 규명에 큰 오류를 범하기에 평창역사의 바른 정립을 위해 아래에서 위 3곳의 탑에 대한 명확한 단정을 내린다.
1) 현 경찰서 탑은 평창여관에 옮겨진 탑이었으나 노암석탑은 아니다.
위의 탑의 사진으로도 한 눈에 알 수있다.
그런데 정원대는 평창의 인문지리 책에서 경찰서 탑을 노암석탑이라하며 노암석탑은 "층"이 아닌 "중重"자로 일제는 왜곡했다고 쓰고있다.
참,,, 글 자체적으로 머리가 아둔함을 나타낸다.
현 경찰서 탑은 6,25 전란 후에 평창여관에서 경찰서로 옮겨진 것은 옮긴자의 증언으로 확실한 사료로 증거사진에 의하면 4층석탑으로 원래 4층석탑이란 없고 3, 5, 7 ~ 13층까지 홀수 탑이다(원나라 기술자들이 만든 경천사지 10층 석탑은 제외) 그러기에 (신) 경찰서로 이전시 옥개석, 탑신석, 기단석을 새로 정비하여 5층 석탑을 이루었으나 원래 작은 3층탑 부재들로 5층을 쌓았기에 왜소하고 가늘게 보인다.(탑은 3층 석탑이 15m짜리 거대 탑도 있으나 평군 高는 3,6m이고 현 경찰서 팁이 원래 3층 석탑의 경우 일반탑 크기보다 작은 탑들이었다고 파악된다)
아래 인용되는 본인의 평창경찰서 탑의 해부라는 개시글에 의하면 현 경찰서 탑의 1층 옥개석은 정형탑이라고 일컷는 통일신라 시대 이전의 신라 탑이었고, 2, 3층 탑재의 옥개석은 동일탑 모양이며 4층 옥개석은 2, 3층과는 다른 탑재의 모양으로 2, 3, 4층 옥개석은 고려양식의 탑으로 설명하고 있기에 노암사의 사찰에서 이러한 탑재를 주워다 쌓자면 대부분의 사찰이 조선시대에 폐사지가 되었기에 현 경찰서 탑은 조선시대 이후에 3개 폐사지 탑재들을 이용하여 조성한 양식없는 짬뽕 탑으로 현존 우리나라에 1,200여기 탑파 가운데 이러한 양식은 없으며 기호 수집가. 애장가들이 주워 모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애장가들이란 그 이해를 위해 다다시의 동북오중 석탑편에서 다시 논한다.
2) 평창의 동북오중석탑
동북오중 석탑을 논하는 점은 우선 정원대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정원대
20.12.20 08:42
고맙습니다. 3가지 항목을 질문하겠습니다
3) 석탑의<층과 중> 뜻을 알고 있는지요. . 안상이 만상이 되고 사재산에 흰진흙,물 등이 있다는 등 제가 쓰지도 않은 글이 있어 어떻게 하여야 할지 고민중에 있습니다 . 그리고 장... 교수님하고 서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화해하면서 2021년 지명지 등 도 차원에서 새롭게 연구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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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윗글에 언더라인을 친 글귀에서 안상이 만상으로 쓴 점은 누가 저자 모르게 쓴 글은 아닌듯 하지만 저자가 쓰지 않은 글이 책에 수록되었다면 분명히 찾아서 책임을 추궁해야 될 문제라 생각하며 이러한 현상은 책 출간전에도 몇 번 듣던 이야기이다.
하지만 본인이 이러한 글과 앞전에 10여쪽으로 평창으 인문지리에 여러 오류와 왜곡,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구술의 논술에 키 방향의 문제, 장르적 문제등 아직도 무엇이 잘못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것 같기에 동책이 얼마나 잘못된 책인가 하는 점에 여러가지를 해부했던 글은 동 책은 안상이 만상이된 점등의 오자정도를 다시 수정해서만은 않될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교수하고 서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화해하면서 하는 문장에서 평창군 지명지의 저자 장교수가 뭐라 그럽디까?? 그것은 지명지에 많은 오류가 있다고 정원대가 주장하는 것인데 물론 오류도 있는듯 합니다만 장교수 쪽에서 ㅈ덩원대 인문지리 책에 오류를 논했습니까?? 그러기에 이런 화해를 하자는 것은 아닌듯 합니다. 또한 서로 오류라고 화해를 하자는 것은 웃기는 모양새이다.
◆ 위 인용의 질문 3번)항에 <층과 중>의 뜻을 알고 있는지요란 물음에 답한다.
「평창의 인문지리」에 노암석탑편의 인용부에서는 이러한 엉터리 서술이 있다.
12) 조선고적도보 : 조선 총독부가 한국의 고적조사사업을 진행하고 그 성과를 사진과 도면으로 모아 도쿄에서 펴낸 책 15권으로 구성하고 있다.이 시작은 1909년 한국의 요청에 의해 일본으 사학자 세키노가 조선의 고건축물을 조사한 것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일본이 계획했던 조선침략 과정중의 하나로 한일합방후 문서는 조선총독부로 넘어가게 되었다. 시대별로 건축물을 포함해 유적, 미술품까지 모두 수록하여 한국역사를 사진으로 담은 최초의 책이다.
<인용부>의 출처 ; 정원대.「평창의 인문지리」41~2쪽.
본인은 수항리사지 논문을 쓸때 박경식의 수다사지 3층 석탑의 세미나 리포트에서 수항초교에 장대석을 당간지주 난간석으로 운운하길애 수다사지엔 근본적으로 당간의 위치터도 있슬 수 없는 곳이기에 이를 인용했다는 43년의 고적도보란 기록에 동 책을 찾으려고 무한히 노력하였다. 하지만 교보등이나 중고 사적들에서도 그런 책은 찾을 수 없고 원래의 세케노 다다시의 「조선고적도보」 15권의 책에 사진 4,300매를 일일이 3번씩 검색하였던 적이 있다.
여기서 필자는 동북오중석탑(위치 미상)과 서남오중석탑(유동리 석탑) 그리고 월정사의 본단인 팔불보전과 양 팔이 부러진 석조 보살상등의 사진을 평창에 소개하였다. 이 사진들은 일본인 건축학자 세키노 다다시가 1912년부터 한국에 찾아와 처음 간곳은 대동강 유역에서 낙랑문화를 사진으로 발굴하였으며 당시에 다다시는 신작로의 도로도 없는 조선땅에 이후 일년에 매년 2~3개월씩 약 30년간 찾아와 사진기사를 대동하여 유리건판 사진을 남겼다. 단 그는 건축학자로 사진만 남겼지 역사적 논고는 없었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약 1915년 정도에 금강산 길에서 김홍도의 관동팔경 유람기처럼 평창으로 먼져 들어와 지나가며 평창의 탑 2점의 사진을 각 1매씩 남겼던 것이다.
◆ 석탑에서 중(重)자와 층(層)자의 차이에 답을 한다
일전 동 필자는 저자에게 다다시의 기록에는 평창의 동북오중석탑(五重石塔)으로 기록하였는데 책에서는 다다시의 동북오층(五層石塔)석탑으로 되어있다고 말하니 후일에 이 문제에 답으로 누가 그러는데 오중석탑이라 함은 일제가 조선 말살정책의 표현방법이라 그러더라 하더니 석탑에서 중(重)자와 층(層)자의 차이를 아심니까 하고 되려 본인에게 묻는다.
참으로 어느분인지 그런말을 하는 사람은 지금 현재의 조선인이다. 일본의 조선말살 정책이란 그 시대 산물이라기 보다는 이 시대에 배일감정이 작용하여 옛것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극일보다 오히려 더 손해나는 말씀을 하신것이다.
다다시는 추정 1915년쯤 3년차로 조선으로 건너와 평창과 월정사를 다녀가며 평창의 동북오중석탑을 사진으로 남겼다. 당시로서는 신작로도 없는 중로<中路)정도의 길로 전국을 누비며 사진사를 동반하여 유리건판 사진기로 남긴 사진이다.
평창의 인문지리 책에서는 참고 2006. 김진백 전 평창군 보건의료원장과 현지 답사후 사진을 기록에 담다.라고 기술한 점에 요즘 디카세상에 중리 돌체험관 아래 노암사 추정 절태에 기록으로는 아무것도 없는 벌판에 사진의 기록으로 담다하는데 특별함도 없는 공터 한를 기록으로 담는다는 과시성 기록으로 무언가 자랑말고 이 책에 인용해 보여 주어야 할 것이지 일전 책 선전광고 장인가.. 동 책에 이런 사진을 기록으로 담다라는 허튼말(이곳에 보여주지도 않는 자랑쯤이기에) 이 여러 번 있는데. 이렇게 쓴 책은 이 책 뿐이다.
하지만 다다시는 정말 그 시대에 유리건판 사진기를 메고 풀숲읗 헤치고 다나면서 사진으로 그 역사의 기록에 남긴것이다. 그런 고생 30년을 하고서 그저 조선문화 말살이란 단어가 정말 통할까?? 만약 다다시에게 묻는다면 예스 할까요??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이고 당시가 아니라 지금의 사람들의 일본 감정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다다사만이 아닌 일본 학계는 한국을 눈여겨 보았는데 측량기사 요네다는 석굴암 실측을 하고서 신라의 길이의 한 자의 길이는 30cm가 아닌 29cm라는 사실과 다보탑의 비례관계. 정림사지 오층탑의 의장관계등을 발표하는등 조선 문화 연구에 업적을 남기며 백제 부소산성 실측시 장티푸스 병으로 35세에 사망하였다.
요네다의 한국 문화재 실측도 조선 문화 말살정책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 학자들이 한국학에 몰두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막부의 무신 정권이 전국 통일을 기하였다. 그이전에 일본은 국가가 아니라 부족적으로 해적생활을 하는데 당시 일본은 읿부일처 주의도 아니다, 남자들은 마음대로 집을 터나 방랑과 떠돌이고 여자들이 마치 모게사회같은 문화로 그건 문화도 없는,, 또랑에 빨래하는 여인에게 길가던 나그네가 눈짓 한번하면 그 즉시 집으로 들어가 낯선 나그네를 알현한다, 그러한 겅 모랄의 관념은 지금도 그들의 민족성을 대변하는듯 하며 그러한 역사에 그들에게 문화란 없었다
.
불교권 국가의 국보나 문화재 대부분이 불교문화이다. 우리나라의 문화재도 엥외는 아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와 일본의 차이점은 우리나라는 대부분이 중생대의 대보 화강암 지역으로 석탑, 비석, 석물등의 돌 문화를 가지며 아마 석탑만 문화재로 천 여기에 달할듯 하지만 일본은 화산지역으로 목재가 주종을 이루는 문화재를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일본은 국보 1호가 백제인인 만들었다는 설의 미륵 반가상이며 석탑의 문화가 발달치 못했다. 교토의 천수사 앞마당의 조그만 삼층 석탑은 화강암이 아니고 용암인듯 하며 그 내용물에서는 양식이 없는 두부모 자른듯 하다. 물론 오사카성의 담벽은 화강암이지만 집체만한 돌도 산지에서 캐낸것이 아니라 바위들을 잘라 쌓은 것으로 석수기술이 능치 못한 점도 있는듯 하다.
그러기에 세키노 다다시는 메이지 유신 이후 서구의 학문으로 역사를 바라볼때 일본의 역사 문화 고찰은 별로이지만 조선의 역사는 그 연구가치가 있기에 30여년을 매년 찾아와 당시 신작로도 없는 조선 전 지역을 답사하며 사진으로 남긴것이다.
요네다나 다다시는 한국의 문화역사에 심취해서 그들이 배운 학문의 장을 일본의 역사에서는 펼쳐볼 수 없는 문화기술을 미지의 조선에서 펼쳐보고 싶었던 꿈으로 해석해야지 정원대의 말처럼 삼층(三層)석탑을 일본인들은 삼중 (三重)석탑이라 하는것은 한국말살 정책이라 하는것은 이해 곤란이다.
그것이 아니라 고적도보책은 일본에서 발간한 일본어 책이었으며 그들의 표현기술이었지 일본인이 삼중이라고 쓴다고 문화말살인가? 그런 설명은 발상 자체가 시대적 연구가 없으며 현대의 극일, 반일감정만 내세우는 발로라 하겠다.
조선 식민지의 2대 쏘네 통감은 석굴사 관광시 석굴 불상 2구와 사리탑 다보탑 사자상 1쌍등의 유물을 뜯어갓다고 그의 석굴암 관람을 안내했던 키무라는 「조선에서 늙으며」라는 책에서 이러한 귀중물이 반환되어 완전한 보존상을 얻는 것이 나의 죽을때 까지 소망이다라고 했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원주 법천사지의 현묘탑은 고려의 지광국사의 부도 탑으로 그 조각수법이 특출하게 뻬어나서 일본인에 의해 절취되어 오사카의 개인의 정원 장식용으로 팔려갔었다, 그런데 당시의 1대 총독 테라우치는 본국에 반환명영을 내리고 1915년 국내로 다시 반환되어 경복궁 서문 공원엔 국립 중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가 지금은 대전 문화제 관리소로 이장 하였다 한다. 아마 동 탑을 본 사람들은 그 조각수법이 최고임을 부인하지 않을 것인데 일본 총독은 현지 반환을 실행하였다. 그러면 정원대의 인문지리 책에 인용 12)의 글은 조선총독부가 한국문화 말살정책으로 다다시의 사진에 삼중석탑이라 표현하는 것은 사실에 위배된다.
일본식민이 조선문화 말살정책은 1925년 사이토총독 이후에 전개되는 양상이며 조선 1대 총독은 육군의 무관으로 그는 문화 현장적 보호론자였지 식민사관주의자는 아니었다.
쏘네 통감이고 지광국사 현묘탑이고 개인의 욕심에 의한 문화재 약탈로서 이는 위에 설명한대로 일본은 그 문화가 보잘것없어 문화재에 한국 문화재에 탐욕을 하게 되는 것으로 이에 많은 약탈이 있었지 그것이 식민정책의 시작은 아니었었다.
그러기에 본인에세 삼층과 삼중의 차이를 아십니까 하고 묻는것은 모르고 묻는 실례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게 역사라고 떠드는 사람들은 조선 역사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지금의 반일 감정으로 식민사를 규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정원대는 어디서 한소리 듣고 인용이라면 무조건 옳다고 믿고 본인에게 반격을 하는 것인가?? 동 책으로 본다면 이젠 상대할 수 없는 사람인듯 하다.
3) 동북오중석탑 사진의 배경연구
위의 두사진 즉, 동북오중석탑의 배경이 여만리 뒷산과 일치한다면 동 탑은 노암사 석탑이겠지만 위 사진의 원내 부분이 일치하지 않는다. 필자는 GPS상의 여만리 산의 지형으로는 확인이 어려워 여러 각도와 원내의 오른쪽 반부분등의 수십장의 사진을 확대하여 오중석탑의 배경사진과 동일한 산새 모양을 찾고자 하였으나 확인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아직 타인의 이러한 연구도 없어서 동북오중석탑의 소재지는 미정을 남아 있다.
동북오중 석탑이 노암사 절에 있었다면은 동 탑은 노암사 절터의 폐사지에서 바로 반출되었던 아니면 평창여관 정원으로 옮겨져 당시 위의 설명대로 일본인들의 한국문화 유물을 장식용으로 가꾸는 것에 의해 중개상들이 밀반출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현 경찰서 탑은 이러한 장원 가꾸기의 일본문화에 편승한 한국에서도 정원가꾸기 붐이 일어서 항간의 말대로 천동, 도돈일대의 탑을 주워 모아서 서로 크기가 엇비슷하니 하나의 탑으로 믹스한 것이다.
경찰서 탑이 천동, 도돈일대의 사찰에서 주워왔다는 설에서 현재로서는 천동과 도돈에는 폐 사찰이 없는점으로 이 지역에 원래 없었던 것이라고 보기 힘들어 이 출처에 신빙성을 더할 수 있지만 폐사지에 나딩구는 탑 부재들은 신라나 고려시대에 일로 볼 수는 없고 조선시대에 폐사지가 된 점들이 보편적이기에 그럼 노암사는 조선시대에도 부흥했던 절로 추정되는바 설화나 구전으로 전하지 않는 점으로 볼때 조선시대 사찰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실정이며 어떠한 사찰에서도 이러한 3개 짬뽕탑을 찾아 볼 유래는 없다. 그러기에 현 경찰서 탑은 추정의 노암사 석탑은 아니란 점으로 해석한다.
4) 노람버덩의 노람의 어원은 노암에서 출발한 것인가??
중리 천변을 노람뜰이라 하는 것은 노암사란 단어에서 파생했다고 볼수있다고 정원대는 얘기 하지만 노람버덩이라 불리는 단어의 순수한 뜻은 본인의 게시글 평창의 가을서정 편에서 이미 밝힌바 노람버덩은 蘆(갈대노) 濫(넘칠람)와 나무는 없고 풀만 우거진 곳으을 버덩이라 버덩이라 하는 합성어로 강변을 순수하게 부르던 옛 시절의 정취어린 평창말로 노람버덩이라 하여야 옳은 뜻으로 해석된다. 그래서 노암사 때문에 노람이란 단어가 생겼다는것은 아닌듯 하다
wwwwwww< 인용글 1편> wwwwwwwwwwwwww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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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용 1) 정원대의 인터넷 글 --------------------
평창동북 오층석탑 이야기/정원대
너브산장 17.08.27 01:57
1948년 평창군 평창읍 하리157-8번지 오** (1910.04)운영하는 평창여관(83칸) 정원에 오층석탑이 있었으나 전투경찰순경 김**(당시18세)등이 (구)평창경찰서 평창읍 하리 113번지 앞 화단으로 옮겨 보관하여 오던중 1997년신축공사로 하리 230번지 평창경찰서 소공원에 이전 되었다.
조선고적도보 평창동북 오층석탑 (제6권) 사진(조선총독부소장)
가) 오층석탑 사진 후면 山(평창읍 여만리)을 볼때 평창읍 중리 35-3번지 구전으로 전해오는 魯庵 절터로 생각되며
나) 주민들은 평창읍 조동리 절골(탑상골)이라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증언 김**(1930.9.20)
당시 전투경찰순경으로 평창경찰서 근무하면서 직원들과 같이 평창여관 정원에서 옮겨 왔다고 하며 1년후 6.25동란으로 주변은 탑만 남고 폐허
평창여관 주인 오**(1910.4.-1950.7)의 장손 오**(1941.6)
ㄷ자 형 83칸 여관으로 둥근형 정원에 오층석탑이 있었다고 하며 가옥은 6,25 전쟁으로 화재 당시 오**은 평창군 최초 목탄차을 구입 운영하였다고 하며 오층석탑에 관하여 어느 곳에서 왔는지 알 수 없다고 하며 김**에 의하면은 하층기단이 무거워 옮기지 못하고 본인의 집 화단에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고 당시 상황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참고 조선고적도보 제6권 평창군 평창면 동북오층석탑(2924)(1915-1935)
------< 인용 끝 > --------------------
무슨 글이 이런지??
탑은 옮겼는데 탑 아래 하층이 무거워 옮기지 못하고 본인의 집 화단에 있는 것을 목격하고 라는 서술에 탑 윗부분은 옮기고 아랫부분은 목격하고라는 여기서 목격이란 단어가 알맞지 않는,, 이 책의 모든 논술은 어처구니없는 지경이다..
wwwwwwww< 인용글 2편>wwwwwwwwwwwwww
<인용1이 오류라는 본인의 게시글>
평창경찰서 오층석탑의 설명 平昌歷史 史觀定立 2018. 7. 9.
『조선고적도보』의 동북 5층탑과 평창경찰서 5층탑의 비교이해
후세백작 2018.07.13 21:07
◆『조선고적도보』의 평창 동북오중석탑(東北五重石塔)
위 사진은 일본 건축사학자 세키노 다다시가 1915년 강원 중부권을 다녀가며 원주 흥법사지, 거돈사지, 법천사지와 평창읍의 유동리 동남 오층석탑과 동북 오층석탑, 그리고 월정사 문화유적을 사진으로 남긴것의 하나이다.
사진에서 보면 분명 평창읍내의 오층석탑인데 탑 주변의 무성한 나무나 풀을 보면 폐사지임엔 틀림없다. 또한 탑 뒤의 배경지는 중리 노암사에서 보는 여만리에 두 곳의 비슷한 곳은 있지만 정확하지 못하고 노암사에서 바라보는 남산은 시계가 멀고 또한 각도가 맞는 봉우리도 없다.
그리고 송기산 위 장바우골에 절터에서는 고길리쪽은 큰 산세가 단조로워 이러한 배경은 안나올 것이다. 또한 천동리나 도돈리 일대는 평창의 동북방이 아니기에 제외된다면 다수나 용황등 어디쯤일까는 의문사항이다.
◆ 평창경찰서 오층석탑
본 탑은 윗 글에서 발표하였듯이 아래에는 기단석이 없고 3개 유형의 탑신부가 모아져 올린 비정상의 탑이다. 혹시나 탑에 상식이 없는 사람이 탑은 이런것이구나 하고 잘못 인식할 수 있기에 정확한 설명을 하였다.
여기에 보충 설명을 하면 맨 아래에 새로히 만든 부재는 기단석이 아니라 지대석으로 이해해야 하며 그 위에 조그마한 석재는 탑신 괴임입니다.
이 부분에 수항리사지 탑은 연꽃좌대를 조각하였고 아래에는 기단석에는 연화문을 조식하였다.
그러나 이 두개의 탑은 팔부중상이니 이러한 조각은 갖고있지 않습니다.
경찰서 탑의 4층 옥개석은 상단부는 5층 탑신석이 원래 같은 것으로 제 싸이즈 입니다만 아래 새로 만든3층 탑신석은 가로가 작게 되어 4층 옥개석에 싸이즈가 미달된다.
그러면 4층 옥개석은 15도의 각도가 될 것이며 이런 각도로 올리면 3층 석탑이 되는 것이고 현 4층의 옥개석은 그 크기로 미루어볼때 알 수 없는 3층탑의 중간 2층 옥개석으로 추정됩니다,
◆『조선고적도보』의 동북5층탑과 평창경찰서 5층탑의 비교이해
두 탑은 실제 크기도 틀리겠지만 위 사진으로 볼때 두탑은 도형상으로 옥개석 끝의 전각의 각도가 틀린다.
평창경찰서 탑의 2, 3층 옥개석이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의 탑과 비슷하지만 차이점은 여러부분 중에 우선 전각의 경사와 수직이 차이로 두 탑은 하나의 탑이 아닌 별개의 탑이란 점이다.
탑에서 왜 각도가 틀린가 하는 점은 전의 글에서 발표하였듯이 전각이 경사지게 하면 낙숫물이 아래로 흐르지 않고 바로 떨어지는 것이기에 이 옥개석 하단부엔 빗물받이 홈이 필요없어야 할 것이란 점이며 전각이 직각인 탑은 낙숫물이 옥개석 아래로 타고 흘러서 탑신부 내부로 들어가기에 빗물받이 홈이 치석되어 있다.
그래서 두 가지 방법 모두 똑같은 작용의 다른 조각이란 점입니다.
그리고 두탑 모두 옥개석의 층급은 4개란 점으로 통일신라의 ”정형탑“의 다섯층의 층급이 고려의 3개 층급으로 넘어오는 과도기인 신라말 고려초의 4개신라말에서 4개의 층급시대에 제작된 것임을 보이고 있다.
이상 두 탑의 비교로 보면 두 탑은 하나의 탑이 아니기에 『조선고적도보』의 탑은 노암사의 탑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리에 있던 탑을 평창경찰서로 옮긴 증언자 김**옹의 직접 증언이란 점으로도 확인된다.
그러면 조동리 절골의 탑이란 점에 대하여서는 전 글에서 가설로 발표하였습니다만 경찰서 옮긴 당사자의 증언이었기에 조동리 탑이 경찰서로 옮겼다는 이야기는 아니란 점도 이해할 수 있다.
만약 경찰서 5층탑이 조동리 탑이라 하여도 조동리에서 경찰서로 바로 옮겨진 것은아니라 증언자가 해방 이후시기에 올겼기에 조동리 탑은 혹시 『조선고적도보』실린 5층탑은 아니었슬까 추정도 합니다만 그에 답은 탑 사진의 배경이 똑같아 되는 사항이다.
wwwwwww< 인용글 3편>wwwwwwwwwwwwwww
< 인용 1과 2에 대한 원론적 재 분석 >
2021. 1. 5.
1) 인용 1에서 노암사 절탑의 사료는 없다.
인용 1은 2020년에 평창의 인문지리 책에 수록되었지만 인용2는 2017년에 인터엣에 게시한 글로 필자는 이 글이 오류라고 평창경찰서 탑은 동북오중석탑과는 그 모양이 다름을 두 장의 사진을 나란히 게시하며 경찰서 탑은 3개의 탑의 부재를 쌓아 올린것이라는 글을 같은 인터넷등에 게제 하였으며 동 책의 저자에게 구두로도 몇번이나 이야기하였는데도 2020년 책에서는 경찰서 탑이 동북오중 석탑이라 기재하였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안으로 이는 본인의 글의 논제는 무시되고 증언을 이용하여 주관적 견해의 생각으로 마음대로 재 편성한 오류를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증언 자체를 분석적 확인도 없이 이를 이용하여 주관적 견해로 역사도 아닌 허구를 구하는 것도 아래에서 다시 설명한다.
위 인용 1에서 노암사 탑이 평창여관으로 옮겨져 있었다 하는데 그 정확한 사료는 없는 이야기이고 인용 2에서 오층 석탑에 관하여 어느 곳에서 왔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는 글에서 3층 석탑도 아니고 오층석탑이란 정확성은 사실로 인정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과 경찰서 탑은 3개 짬뽕의 4층 탑이었다.
인용 1에 가) 오층석탑 사진 후면 山(평창읍 여만리)을 볼때 평창읍 중리 35-3번지 구전으로 전해오는 魯庵 절터로 생각되며는 개인의 주관적 판단이다.
증언에서 평창여관 주인 오**(1910.4.-1950.7)의 장손 오**(1941.6)
ㄷ자 형 83칸 여관으로 둥근형 정원에 오층석탑이 있었다고 하며 오층석탑에 관하여 어느 곳에서 왔는지 알 수 없다고 하며
이러한 인용을 통해보면 현 경찰서 탑은 평창장 여관에서 김**가 직접 옮겨서 그 증언은 정확성을 가지고 있지만 평창장 여관에 있던 오층석탑(오층이란 규정은 부정확)이 오**는 증언에서 어디서 가져 왓는지 모른다 하는데 중리 노암사 절터의 탑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위 인용문에서 정원대의 주관으로 본다.
2) 인용 2에서 오류와 편견의 문제
평창의 인문지리 책에서 현 경찰서 5층 탑이 노암석탑이고 노암석탑은 평창의 동북오층석탑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우선 이 부분의 서술이 바른가 부터 해부한다.
------< 인용1> 평창의 인문지리> 책 인용--------------------
노암석탑(魯庵石塔)
위치;평창군 평창읍 옛 노암(魯菴: 고려시대의 석탑추정)
출전;「조선고적도보」12중「석탑명」에“평창동북오층석탑”이기록되어있다.
증언;박봉주(남, 1947생) 평창군 평창읍 중리 극락사 옆
참고;2006년 김진백 전) 평창군 보건의료원장과 현지답사후 사진을 기록에 담다.
답사
1)평창읍 중리 5층 석탑아래 부모님이 벼 농사를 지었는데 논물을 보면서 석탑아래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하였다. 1957년 12살무렵 5층석탑 1기. 봉분 5개 망부석 2기. 대형상석 1개가 있었다 한다.
2)평창 군 농협 지부앞 평창여관 정원에(하리 157-4) 옮겨져 있었는데 화재로 전소되어 석탑을 구)평창경찰서에 근무했던 김ㅇ출(1930)이 당시 환경미화정비사업 등으로 평창읍 하리 113번지 화단에 옮겨 보관하여 오다가 1997년 신축등으로 현 평창경찰서 위치에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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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조선고적도보 : 조선 총독부가 한국의 고적조사사업을 진행하고 그 성과를 사진과 도면으로 모아 도쿄에서 펴낸 책 15권으로 구성하고 있다.이 시작은 1909년 한국의 요청에 의해 일본으 사학자 세키노가 조선의 고건축물을 조사한 것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일본이 계획했던 조선침략 과정중의 하나로 한일합방후 문서는 조선총독부로 넘어가게 되었다. 시대별로 건축물을 포함해 유적, 미술품까지 모두 수록하여 한국역사를 사진으로 담은 최초의 책이다.
<인용부>의 출처 ; 정원대.「평창의 인문지리」4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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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출판사와 출판연도가 없어서 다음 연구자가 동 책에서 인용할때 정확한 출처의 문헌 출처상 문제를 가진다.
위 인용문에서 노암석탑, 또한 동북오중석탑에 대한 필자의 이해를 논고하기 전에 우선 위 인용글의 논술적 오류등을 약식으로 서술한다.
위치에서 평창군 평창읍 옛 노암이라 서술하였는데 이것이 위치인가 하는 문제로 옛 노암을 어떻게 찾는가 하는 문제로 현 번지수라도 기명해야 이해가 된다는 것은 상식이다. 이러한 상식을 위반하여 서술하고 있다.
노암이라고 고려시대의 석탑추정이라면 여기서 석탑이름이 노암사 석탑도 아니고 “노암석탑”이라면이 이 이름을 동 책에서 처음 사용하는 단어로 동 책의 저자 마음대로 작명을 한 것이다. 저자 마음대로 붙인 이름으로 그것은 향토사가의 몫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며, 일반적으로 사원지(폐사지)의 탑들은 폐사지를 정확히 모르면 대부분 동 탑의 위치인 지명의 리를 따서 중리탑 하는 식으로 표기되어 있는 바 그 출처들을 밝히고 있다.
그러기에 가칭 중리탑 혹은 가칭 노암사 탑으로 표기하여야 하는데 노암석탑이라고 석탑이름이 바로 노암석탑이라 하는것에 탑 자체가 노암석탑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출전에서 출전이란 용어의 의미는 이해범위가 부적합 하며「석탑명」에 괄호는 없어야 하며, “ ”을 사용하여야 한다.
참고와 답사는 그 내용이 바꿔야 옳은 것인바 참고는 답사의 내용이고 답사는 위 증언에 붙여써야 합리적일 것이다.
답사2)에서 구) 평창경찰서에 근무했던 하는 표현은 바르지 못하다.
또한 당시 환경미화정비사업 등으로 평창읍 하리 113번지 화단에 옮겨 보관하여 오다가 1997년 신축등으로 현 평창경찰서 위치에 옮겨졌다.라는 문구에서 1997년 무엇을 신축했는지 목적어가 빠지는 현상으로 이 글은 문장적 결함으로 이해하기 힘들게 설명되어 있다. 이러한 논술적 미비점은 동 책 모든 역사 기술에서 다반사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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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필자의 바른 역사는 무시되고 그런 인터냇 글은 책의 권위애 밀린다는 생각이었슬까?? 평창군민신문에 동 책의 발간의 기사가 실리자 본인은 너지시 문제가 있다고 댓글을 조금 달으니 상당히 불쾌했지만 어디 본인을 평창역사에 의형제라 하면서 동 책에 본인의 밝히는 여러 고찰의 논지는 그저 대수롭지 않게 이용하면서 위 2인용 글에서 2006년 평창 의료원장과 현지 답사후 사진을 기록에 담다고 하는데 요즘 디카세상에 이런 말이 통용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재도 재고해 보아야 한다.
세키노 다다시는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유추적으로 보면 1912년 사진기사를 대동하여 동 탑을 유리건판 사진으로 남겼을때는 사진도 희기한 시대에 사진 기록을 남겻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지만 동 책에서는 길위의 역사책이 17번이나 인용되며 그 인용부는 하나도 달리지 않고 책 제목만 인용되어 무슨 내용인지 일반적 사항을 위배하고 있으며 응암글도 김진백이 공동 답사하여 사진 기록으로 남기다라고 표현하는바 아마 여러 독자들이 이기록을 읽을때 필자와 같은 불쾌감을 느러낼 것 같기도 하다.
아주 노골적으로 여러 이야기를 표현할까요?? 불쾌하다면 뉘처럼 소라도 걸수도 있지만 필자는 평창역사를 오류를 넘어 다른것이라고 아무 연관도 없는 동북오중석탑이라 함에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을 넘어서 대의의 정의를 위함에 더욱 불쾌하기에 소(訴)정도는 충분히 감내하며 이 글을 쓴다.
동 책에서 노암석탑편의 하나만 오류고 왜곡되었다는 충분히 덮고 이해할 수도 있으나 동책 전부의 논술의 부정확한 서술과 역사조명의 방법이 상당이 이상한 부분에 치우쳤기에...
그 하나의 예로 평창의 권두문 편에서는 임진왜란때의 군수로서 평창에 왜군이 언제 쳐들어와 평창 군민 모두를 이끌고 응암굴에 숨었다가 항전하였다는 권 군수의 보편적 이야기도 아닌 권 군수는 탈출시 입탄을 거쳐 갔다하는바 이 점에 특별한 역사적 사유도 없는데 왜 그 부분만 조명하는지 알 수 없듯이 동 책에 조명하는 역사는 모두 그런식으로 조명되어 평창역사의 메인부분도 아니고 목적도 없어 이해하기 이상한 글로 편집되어 있다.
정원대는 두 탑이 똑같은 하나의 탑이라고 책에서 서술하고 있는데 이런 오류는 무엇이 문제인가 하면 길위에 역사란 책은 신주처럼 의미없이 인용하지만 본인의 글은 제일 많이 읽는 것으로, 여러모로 볼때 정말 토씨하나까지도 읽는 것이지만 자기의 주장을 위해 어떤 편견을 가지는 듯하다.
그리고 인문지리 책에 조선고적도보에 대한 인용부를 보면 그 설명은 잘못된것을 스크랩하여 올리며 동탑의 사진은 찾아보지도 못한 모양으로 담음 백과사전류 검색에 의존한듯 하다(그곳엔 사진은 싣지 않는다)
그러한 가장 큰 이유의 하나는 인문지리 책에서는 동북오층석탑이라고 쓰고 있지만 다다시의 고적도보에서는 동북오중석탑(五重石塔)이라 쓰고 있기 때문이다.
책이 출간되지 이점이 오류라 하니 그럼 오층의 層자가아닌 重자냐 하더니
다음엔 어디에 문의했는지 일본인이 중자를 쓰는것은 한국 비하적 정책이라 하더니 그 다음엔 층자와 중자의 의미를 알고 그런냐고 나에게 묻는다.
wwwwwwwwwwwwwwwwwwwwwwwwwwwwwwwwwwww
2) 동 탑이 노암석탑인가 하는 점의 해부
평창경찰서 탑은 과거 평창장 여관의 화단에서 옮겨진 것이 확인되었다. 다음으로 중리 현 수석체험관 아래에 노암사란 절이 있었으며 그곳에 탑을 평창장 여관으로 옮겼다고 증언화고 있다.
동 책의 저자는 현 중리 거주의 오씨네 문중에서 과가에 평창장 여관은 오씨네가 경영하였으며 그때에 노암사 탑을 옮겼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동 탑에서 찍은 사진이 있다하여 확인하였으나 둘이서 찍었는데 유감스럽게도 탑은 비껴가서 찍히지 않았다 한다. 아마 일제시대에 귀한 사진에 인물이 우선이고 배경의 탑은 중시하지 않은듯한 모야이다.
아마리 오씨네 문중의 증언이지만 이러한 증언만으로 노암사 절의 탑이 평창장 여관으로 옮겨지고 바로 그 탑이 현 경찰서 탑이라 하는것은 역사적 사료로서 정확하지 못한 무리가 따른다.
이 점을 논고하기전에 우선 평창경찰서 탑을 재 구성해보자.
평창경찰서 탑은 인문지리 책에서는 5층탑이라 하지만 월래 구 경찰서 화단에서 찍은 아진엔 아래에서처럼 4층 탑이다
정원대는 그가늬 증언을 가지고 평창경찰서탑은 노암석탑(魯菴石塔)중리 노람뜰의 노암사 석탑이 이전된 것이라 하며 동탑을 동북오층석탑이라 하였다.
1915년쯤 평창을 경유한 세시노 다다시의 유리건판 사진 한장이 남기록으로 남은 동북오중층석탑이라 한다
.
( 물론 평창 역사서에는 역사의 근간인 기화리 쌍굴의 구석기시대나 하리 고조선 검에 빛나는 청동기 시대. 후평리, 유동리등의 철기시대의 역사에 보편적 역사 이야기의 서술은 한 점도 찾아보려 노력들 하지 않고 요즘도 인터넷의 나의 글들에서 카피하려는,,어떤 글들은 사전에 지웠고 빈 껍데기만 남겨 놓음니 클릭이 수 없이도 되더만,, 남의 글 벳겨다가 자기 글이랍시고 하는데 노력들 하셔서 정당하게 하식 바랍니다)
4층이나 5층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동 4층탑과 현 경찰서 탑은 동잁압이다. 그것은 맨 아래의 초층(1층) 옥개석은 두툼하며 초가지붕형으로 이 모양새는 통일신라시대의 “정형양식”의 형식부다 상위시대인 신라시대의 탑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2, 3층의 옥개석 전각은 일자현으로 양 끝이 반전되어 올라간 형태로 이러한 모습은 고려시대의 일반탑의 양식이다. 또한 4층 옥개석은 반전되어 올라가지 않은 탑으로 그 모양이 다른 탑의 부재임으로 동일탑이란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 평창경찰서 탑은 3개의 탑의 잔해들을 모아다 꿰어맞춰 4층 석탑을 만들 수 있었다
대형탑은 높이가 15m 크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평창 주변의 강릉, 홍천등지의 탑은 보편적으로 3,6m정도이나 경찰서 탑의 부재는 그보다 작은 2,5m정도의 삼층 석탑의 부재들이 옥개석 맨 아래 층급이 각 탑신석 부연과 크기가 엇비슷하여 4층탑을 만들은 바 원래 탑은 3, 5, 7~13층 까지 홀수탑이며 경천사지 탑은 왜래 탑의 영향인 10층 탑이다.
이러기에 현 신청사 경찰서로 다시 옮겨질때 동 탑은 정비된 바 3,4층 탑신석과 5층 옥게석을 만들었는데 에 현 5층 옥개석이 4층에 있을때는 부피가 가늘어 조형상의 왜소한 점이 보이거니와 이러한 맥락에서 4층 탑신석을 다시 만들고 4층에 있던 탑신석을 5층으로 올려 그 싸이즈를 맞추었슴을 볼 수 있다.
동 탑이 노암사 탑이라고 정원대는 기술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탑 1,200여기중 이렇게 짬봉하여 사찰에 탑으로 사용한 탑은 단 하나도 없는듯 하다. 그러기에 이런한 세군데 폐사지에서 탑을 모으는 것은 탑의 애호가나 이를 넘어서서 수집하여 기증, 판매하는 점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평창장 여관 화단에 있던 탑은 암마 한 두점이 아니라고 가정을 한다면(이러한 가정엔 이미 3곳의 폐사지에 부서진 탑을 한 장소로 모았던 것인데 이러한 내용을 가진 애호가는 평창장 여관으로 보는 것으로) 당시 평창장 여관 화단엔 두어개 탑이 모아진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평창여관 화단에서) 이미 수작(秀作)의 탑은 이미 일제 관헌의 눈에 들어 없어졌다고 가정을 하면 그것은 동북오중석탑일수도 있으며 평창 경찰서 탑은 화단에 마지막 남은 짜투리 탑이란 것이다.
이 장에서 본론으로 현 중리 거주의 오씨네 문중의 증언이 있지만 과연 노암사의 탑이 평창경찰서 탑인가 하는 문제에 그 정확한 증명이 어려운 점은 증언에 의하듯 노암사에 탑이 평창장 여관으로 이전되었다는 점은 부인화지 않는다. 그러나 그 탑이 경찰서 탑인가에 대한 정확한 사료적 증명은 있어야 한다.
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
증언에 의해 노암사 탑은 평창장 여관으로 옮겨진 탑이라 한다. 이는 정원대의 주장일뿐이고. 문제는 이 탑이 노암사 탑인가 하는 정확성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창장여관에서 경찰서로 옮긴 탑은 사실이다. 그러면 평창장 여관에 잇던 탑은 노암석탑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것은 어느 사찰에 3개 탑 부재를 주워다 탑을 짜 맞출까 하는 점이다. 울나라 현존 1,200여기의 탑에 그러한 예는 없다.
또한 평창경찰서 탑은 초층 옥개석은 신라시대의 것이고 2, 3층 옥개석과 4층 옥개석은 모양이 다른 고려시대 탑으로 3개탑의 3층 석탑의 부재가 합해져 조성된 탑이라고 그 해석까지 하였다.
그러나 정원대는 자칭 향토사학자라면서 촌노들의 증언을 분별과 검증과 믿으며 평창경찰서 탑이 노암사 절의 탑이라고 하였으며 또한 이 탑은 다다시가 남긴 고적도보에 있는 평창의 동북오중석탑이라고 다시 책으로 주장하기에 필자로서는 부득이 본인의 역사글이 평창에서는 책으로 출간하면 권위있다는 보편적 논지에 의해 도전을 받기에 이를 해명하는 것으로 아예 노암석탑이 왜 경찰서 탑이 되었는가 하는 증언의 불확정성과 왜 오층탑인가 하는 논리구성의 오류는 무엇인가 까지 정확하게 추론하여 다시금 평창경ㅊ찰서 탑은 짝다리 똥탑이라는 소명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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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20
요즘 이 글에 자주 검색되는데 추가를 올립니다.
◆ 노암 뜰은 없고 노람버덩은 蘆(갈대노) 濫(넘칠람)이다.
◀ 노암사지 5층 석탑 ▶ <탑 조선기록> 일제떄 기록
평창지명 책(정원대)에서 중리에 노암사가 있어 노암 뜰(魯)로 이는 노암사에서 파생된 단어라 설명하고 있다.
위 사진은 1912~1915년경 세키노 다다시가찍은 평창 최초의 사진으로 당시 일본 출간기록에는 동북 오중석탑으로 노암석탑이며 오른쪽 사진은 지난해 장서각 의 <탑 조선기록>에서 발굴한 기록이다.
정원대의 인문지리 책에서는 이 사진을 못 보고 평창경랄서탑을 노암석탑이라고 했으며 여기서 탑 주변은 숲과 자목이 무성한데 노암뜰이라 한다.
하지만 우리 어린 시절 "70년대엔 노람강변에 소풍도 가고, 천렵도 가는 등 노람강변은 평창사람들에게 정겨운 장소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노람강변이나 또는 노람버덩이라고 자주 불렀는데, 이러한 노람강변의 단어적 순수한 뜻은 본인의 예전 게시글 평창의 "가을서정" 편에서 이미 밝힌 바 노람버덩은 蘆(갈대노) 濫(넘칠람)와 나무는 없고 풀만 우거진 곳을 버덩이라 하는 합성어로 갈대가 우거진 강변의 뜻으로 옛 시절의 정취 어린 평창 말로 노람 버덩이라 하여야 옳은 뜻으로 해석된다. 그래서 노암사 때문에 노람이란 단어가 생겼다는 것은 아니고, 갈대 숲이 우거진 강변 버덩을 이야기 한다고 본인은 주장합니다.
( 노암사 석탑은 장서각에 있는 조선 고적에 관한 문건 3개에 표시되 있는바 지난해 여름에 발견하여 이를 추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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