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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昌歷史 史觀定立

새로 써야하는 평창의 상고사 (석기, 청동기 시대와 철기시대의 유적)

새로 써야하는 평창의 상고사 (석기, 청동기 시대와 철기시대의 유적)

 후세백작

 

  평창 역사에서 시원이라 할 수 있는 평창의 상고사에 대해서 관내의 사료집 책자들에는 30여개의 고인돌과 임하리의 선돌, 그리고 주진강등에서 일부 선사 유물의 채집등에 관한 단편적인 기록을 서술하고 있으나,  2,010년대 이후에 고고학계에 의해 새로 밝혀지는 평창의 상고시대(석기시대, 청동기및 철기시대)의 역사 유구와 유적 발굴에 의해 평창의 상고사는 당연히 수정되어야 하는바, 이러한 작업은 역사학회나 관의 주도하에 공적인 입장으로 발표하여야 하는 과제이며 그에 따라 평창의 역사서들에  새로 개정된 일관된 역사가 수록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평창은 세미나는 자주하고 있으나 세미나에는 향토적 색채에 대한 외부 학자들이 논지에 오류가 좀 심한듯하며  딱히 이러한 상고사의 새로운 정랍의 역사 서술이 아직 없고 당분간 이런 평창 시원의 상고사는 외면당하고 있지만 외부에서는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기 현상들을 필자는 그냥 보고 간과할 수 없기에 여러 고고학회에서 밝힌  평창 역사유적의 연구서등을 모아 평창 석기시대와 청동기 시대, 철기시대의 유적과 유물들에 의한 평창 상고사를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역사의 개정에 있어서 무엇이 걱정인가 하면 이러한 지금까지의 연구 전체를 체게적으로 조망해 보지 못고고 부분적으로 단순 사실 하나씩 평창역사 사료에 오른다면 이 또한 혼란을 빚고 이해는 어려워 질 것이란 점입니다.

그 비근한 예시를 하나 들면 아래의 인용부에서보면 고고학회 레포트에서 평창 상고사의 전체를 망라하는데 약 6만년전(탄소 연대 측정치)의 구석기 중기의 기화리 쌍굴 유적 발굴은 연세대학교 박물관해서 하였기에 고고학계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몰랏기에 인용하지 못하고 평창의 구석기 역사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고고학계에서도 이러한 경우가 발생되는데 앞으로 수정되어야 하는 평창의 역사 서술에 어느 부분만 알고서 그것이 전부인양 주관적 해석의 오류를 충분히 범할 수 있기에 그간 새롭게 발굴 연구한 고고학게의 평창역사 발굴 전체를 망라해 기술하는 것이다.

 

--------<인용부>-----------------

* 평창군  평창읍 하리 240-4 유적 

  강원 고고 연구원,   평창 하리 240-4번지 유적

 

1. 평창의 자연, 지리적 환경

1)  지리적 지형

평창군은 한반도의 주산맥인 태백산맥의 서남편 오대산에서 분기하여 차령산맥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그 산세는 북으로 오대산(1,563m), 계방산(1,577m)황병산(1,407m)으로 둘려 있으며 태백산맥의 준령인 옥녀봉(1,146m), 발왕산(1,458m), 가리왕산(1,562m)등이 솟아 있다. 서편으로는 태기산(1,261m), 백덕산(1,350m)의 고산이 횡성군과 홍천군에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남으로는 상대적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영월과 맞닿고 있다.

평창군은 산악이 중첩한 산간지역에 1,000m 넘는 고봉들이 곳곳에 솟아 있으며, 해발 700m이상의 고위도 평탄면을 이루고 있다.

 

2) 평창군 수계

 대부분 북쪽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내리는데, 주요 하천은 평창을 가로질러 남류하는 평창강과 동강의 지류인 오대천이 있다. 평창강은 계방산과 흥정산에서 발원하여 봉평과 대화면을 양쪽으로 가르며 방림의 동편과 평창읍을 휘어감으며 영월에서 동강과 합류하는 서강을 이룬다.

 오대천은 한강의 최장 발원지인 오대산의 우통수에서 발원하여 남편으로 흘러 하진부와 정선을 지나며 동강에 합류한다.

 동강과 서강은 영월에서 합수하여  영춘, 단양, 청풍, 충주의 남한강으로 흐른다.

(* 한강의 발원지는 국가 기록원은 우통수에서 태백의 검룡소로 수정하였으나 이에는  필자 본인이 밝히는 논고에는 오류가 있음을 지적하며 언제나 한강의 발원지는 우통수가 변함없다고 기고하고 있습니다.

 

3)평창군의 지질

평창군의 지질은 화성암 퇴적암, 변성암이 모두 분포하고 있다.

변성암은 평창군지역에서 보이는 가장 오래된 암석으로 북편 오대산과 계방산의 고산지에서 분포하고 방림 일원의 산지 지형으로 고생대 이전의 선캄브리아기의 화강암이 지각변동에 따른 강한 압력과 열을 받아 편마암으로 변성되었다.

평창지역의 퇴적암은 편마암 다음으로 가장 오래된 암석으로 평창군 남편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퇴적암은 퇴적된 물질에 따라 사암, 셰일, 역암, 석회암등으로 구분하며 퇴적된 시기에 따라 지층으로 구분한다.

 

평창지역에서 가장 넓게 분포하는 퇴적층은 석회암층으로 영월층군의 대석회암층군으로 분류된다. 다음으로 고생대 후기에 퇴적된 것으로 보이는 여량층군이 평창의 동편에 주로 분포한다. 여랑층군이 확인된 지역은 가리왕산을 중심으로 북동-남서로 뻩어있는 산지형태로 녹색 사암및 슬레이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평창지역에서 확인되는 화강암은 대보화강암으로 중생대 쥬라기에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동평으로 강릉지역, 서편으로  원주지역까지 넓게 분포한다. 평창지역의 대보화강암이 노출된 시기는 태백산맥이 융기된 시기로 보인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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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평창군. 강원문화재 연구소. 2004. 「문화유적분포지도-평창군」강원문화재 연구소 학술총서 18책

 

2. 역사적 환경

삼국시대의 평창은 고구려의 내성군에 속한 욱오현, 우오현으로 불리었다.

 평창군은 처음에는 춘천의 우수州에 속하였다가 통일신하 시대에는 백오현으로 이름이 바꿔서 내생군(명주)에 속하게 되었다.

후삼국 시대에 궁예는 양길의 부장으로 영월을 침략시키고, 이와함께 주천과 함께 평창을 점령하였다.

 

평창군은 고려 태조 23년(940년)에 평창현으로 아름이 바뀌고 원주에 속현이 되었으나, 그 후 성종 14년(995년)에 전국을 10도로 나누었슬때 그 북편을 삭방도에, 남편은 중원도에 편입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태조 원년(1382년)에 태조의 고조부인 목조의 비 효공왕후의 고향이라 하여 군으로 승격되었고, 2년뒤 강원 관찰사 관할이 되며 지군사가 수령으로 임명되었으며 태조 4년(1395년)에는 강릉의 관할 하에 있었다.

 

영조 36년(1780년)에 군내면, 동면, 미탄면, 남면, 북면 등의 5개면과 22개 ㄹ로 개편되었으며, 정조 13년(1789년)에는 5개면 25개리로 분화되었다. 조선초기에 진관체제 하에서는 원주도 또는 원주진관에 속해 있었다. (필자는 원주도가 원춘도아닌가 합니다)

 

1895년 5월 충주부  평창군이 되었다가 1896년 13도제가 실시되면서 강원도에 편입되었다. 1906년 강릉으로부터 대화, 봉평, 진부 등 3면이 편입되고, 산동면이 정선으로 이관되었으며, 1914년 군내, 남, 북면 등 3면이 통합하여 평창면으로 부르고, 1931년 정선군으로부터 도암면이 편입되었다.

 

1934년 대화면의 일부인 방림, 운교, 계촌리가 분리되어 방림면이 되고, 1973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도암면 봉산리, 호명리 일부는 진부면으로, 진부면 장평리는 봉평면으로 편입되었으며, 1979년 평창면은 평창읍으로 승격되었다

.

1983년 2월 행정구역 조정에 의하여 봉평면 백옥포리, 장평리. 진부면의 속사리. 노동리. 용전리. 이목정리. 도사리. 대화면의 신리 일부를 통합하여 용평면을 설치하였고, 1989년 도암면 호명리가 진부면으로 편입되어 현재 평창군은 평창읍과 미탄면, 방리면, 대화면, 용평면, 봉평면, 진부면, 대관령면의 1읍 7개면과 계촌, 면온, 수항, 유천의 4개 출장소롤 이루어지고 있다.

 

3, 고고학적 환경

평창군은 고고학적으로 볼때 평창군은 지표조사를 통해 구석기 시대에서부터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물이 수습된 바 있으며 최근 평창읍 천동리, 마지리, 유동리, 종부리, 응암리, 주진리 등지에서 발국조사가 이뤄져 선사시대에서부터 역사시대의 자료가 축적되고 있다.

평창읍 도돈리 평창강 북쪽에서 구석기시대 찍게, 찌르게, 긁게등이 보고되고 있으며 유동리. 주진리, 후평리 등지에서 신석기 시대의 유물이 확인된 바 있다.

 

(* 찍게, 찌르게, 밀게 등의 타제석기의 구석기 시대 평창의 유적으로는  미탄면 기회리의 쌍굴 유적은 구석기말 시대의 6만년 전의 석기인들의 유물로 연대 박물관이 조사한 것으로 아마도 고고 연구원 쪽에서는 이 부분을 모르고 누락된듯 합니다.

기화리 쌍굴유적의 중요성은 찍게, 밀게등 구석기 시대의 타제석기 발굴과 약 20여종의 동물의 뼈가 출토되여 구석기 시대의 생활상의 한 단면을 볼 수 있기에 중요한 자료이다

* 평창군 미탄면 기화리 쌍굴유적 http://blog.daum.net/kkks1/1576) 

   

평창에서 확인된 청동기시대 유적은 평창읍 상리, 하리, 주진리, 유동리. 다수리, 향동리, 후평리임하리, 대상리, 대하리, 응암리, 약수리, 도돈리, 천포리(*주-아마 천동리의 오기인듯 함), 여만리, 종부리등 평창읍 모든 전 지역과 진부면, 대화면, 용평면 일부 지역에서도 공렬토기등의 무문토기류와 석기류, 지석묘등이 확인된 바 있다.

 

평창군에서 실시된 발굴조사


1) 2008년 평창강 수계 수해 복구 사업구간인 평창읍 용황리, 후평리, 천동리, 응암리 유적의 발굴조사 결과 신석기 시대, 조선시대의 생활유구가 발견된 바 있다.

* (재)예맥문화재 연구원. 2010. 「평창 평창읍 평창강 수계 수헤복구 공사부지내 유적 발굴조사 보고서」

 

2) 2009년 천동리 220번지 주택 신축공사에서 발굴 조사 결과 청동기 시데 주거지 1동과 철기시대 주거지 1동이 발굴되었다.

* (재) 강원문화재 연구소. 2011. 「펑창 천동라 220번지 주택 신축 부지내 유적 발굴조사 보고서」

 

3) 2009년 31호선 국도 영월-방람(2) 도로구간 내 평창읍 천동리, 마지리 일원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청동기 시대 주거지 16동, 주구묘와 석관묘 각 1기, 철기시대 주거지 12동, 조선시대 주거지 11동이 확인되었다.

*(재)강원 고고문화 연구원. 2012. 「평창 천동리, 마지리 취락」

 

4) 2010~11년의 평창, 대화 통합 상수도 시설공사부지내 유적인 후평리 유물산포지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신석기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생활유구및 매장유구등 총 122기에 이르는 다양한 유구와 유물을 확인하였다.

*(재) 중부 고고학 연구소. 2013. 「평창 후평리 유적」

 

5) 2011년 국도 31호선내 영월-방림(1) 도로건설구간 내 종부리 유적 밝ㄹ 조사로 결과 청동기 시대 ㅈ주겆 9동, 철기시대 주거지 4동, 청동기 시대 주구 목곽묘 1기, 삼국시대 석실묘 1기등이 조사되었다.*(재) 강원 고고문화 연구원. 2013.「평창 종부리 유적-국도 31호선 영월 -방림(1)간 도로공사 구간내 (유동리. 종부리) 유적 발굴 조사 보고서 」


6) 2011년 국도 31호선 영월-방림(2) 도로건설구간 내 약수리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결과 창동기 주거지 21동, 철기시대 주거지 3동 등이 조사되었다.

*(재)강원고고문화연구원. 2013. 「평창 약수리 유적-국도 31호선 영월-방람(2) 도로공사 유동리 구간내 유적발굴조사 보고서」

 

7) 2014년 후평리, 주진리, 방람리에 대한 조사 결과 후평리 구간에서는 철기시대 주거자 15동 조선시대 주거지 1동, 석조유구 1기. 굴립주유기8기,  밭 유구 2개층이 확인되었으며, 방림구간에서는 철기시대 주거지 1동, 석조유구가 1기, 수혈 유구가 3기 확인 되었고, 주진리 구간에서는 청동기 시대 주거지 2동과 수혈유구 1기 야외 노가 1기 확인되었다.

*(재)강원고고문화 연구원. 2017. 「평창 후평리, 주진리 유적-국도 31호 영월-방람(1) 도로공사 후평리. 주진리, 방림구간 내 유적 발굴 조사서」

 

이상에서 고고학적 조사내용을 통해 볼 때 평창지역에서는 평창강을 따라 선사에서 역사시대까지 오랜 시기동안 인간이 거주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평창읍 하리 유물 산포지"

*주:  강원대학교 박물관. 1986, 「평창지역 선사유적과 그 문화 」.「강원사학」제 2집

        강원문화재 연구소. 2004. 「문화유적분포지도-평창군」

 

 

--------<이상 인용 끝>--------------

 

  위의 평창읍 유물산포지 지도를 보면 일전에 이야기한 평창읍은 관계수로의 농수용 보가 10개 이상이라는 것과 동일하게 물이 산을 따라 굽어돌며 만드는 충적지 모두가 문화 유물 산포지란 점이다. 이로 인하여 강원 산간의 평창은 인근 정선과 인제등지와 같이 한강의 상류천으로 고대인들이 생활은 물의 용수나 수렵등이 용이하기에 영월, 영춘, 단양등지보다 선사 문화 유적이 많은 지역이라 할 수 있다.

 

  평창사람들에게 평창 청동기, 역사 박물관이 있으면 어떨까 하고 묻는다면 아마도 그 첫번째 답은 박물관을 무엇으로 다 채울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질 것이다. 박물관은 국보, 보물로만 채우는개 아니라 그 역사문화 유적물을 보관하는 곳이다. 역사문화 유적 왜 필요한가 하는 점의 이해는 다음장으로 넘기고 평창에 박물관이 필요한 이유는 위의 평창군에서 실시된 발굴조사 기화리 쌍굴에서 출토된 유물들만 가지고도 박물관 하나는 족히 넘는 것이다.

 

  이러한 평창 고대 선인들의 삶과 얼이 비춰지는 역사유물들이 평창에 박물관이란 보관장소 하나가 없어서 강릉 박물관과 춘천박물관등지로 삼지 사방 흩어지고 타지에서 전세살이를 하고 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지금까지는 영월- 방림간 국도로 들어가는 부분에서 발굴 조사가 이루어 졌지만 앞으로는 위 지도의 유물 산포지에 신축을 할때 유물이 발굴될 수 있는 면적은 지금까지의 몇 백배 공간을 가지고 있기에 앞으로 발굴될 역사 유물이 더 많을 것이란 점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평창의 유물산포지에서 건설공사시 앞으로 발굴될 수 있는 유물이 몇 십배 더 많을 것이지만 모두 전세살이로 보내고 우리는 이땅에 눌러앉아 떵떵거릴 것인가?? 자기 조상에겐 술잔을 작헌하고 지방을 사르며 잘 되게 해달라고 제사지니며 이 고을의 선인들의 역사 유물은 다 헤잡아 타지로 보내고 이땅의 역사를 무엇으로 말 할 수 있슬까,,  그 잘난 호국영령이라고 연일 묵념을 하지만, 그 점이 우리의 문화의 폭을 가진 점이 아니라 문화가 아닌 무(武)의 호국의 충정을 기리는 것이지, 문화의 얼을 보전하고 살리자는 취지는 못되는 것이다.

 

  이런 투덜거림은 뒤로학고 여기서 본다면 평창의 역사의 궤를 담아 평창의 정체성을 나타내고 평창의 기상을 알리는 이러한 평창 시원의 청동기 박물관을 짓기에 돌 체험관의  공사 예산이 백억 규모라는 등의 사례로 본다면 예산이 없어서 그 잘난 박물관 하나 짓지 못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인듯 하다.

 

평창에서 참으로 딱한 점은 돌 체험관이란 미명하에 백 억이니 백 오십억 들였다 하는 풍문에 수석박물관은 박물이나 돌 체험의 범위를 넘어서서 기증자, 또한 평창 자치단체 장들의 얼굴 마스크 릴리프(부조)를 브론즈(주석의 청동)으로도 모자라 다시 만들어 걸었한다. 이것은 박물, 체험의 범위를 벗어나는 국가 예산으로 개인의 우상화란 점이다. 정말 부호의 가산을 다 털어 국보까지도 몇 점 소장하게 되는 간송 미술관의 전형필이 그 스스로 그런 자신의 얼굴의 릴리프를 만들어 미술관 내에 걸었던가?? 세계 어디를 가도 국립이나 공립의 문화 유적관에서 그러한 예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이것은 스스로의 거울에 기증 몇 점 했다고 과시하는 우상이란 점이다. 아러한 체험관에 기증 몇점한 박물에 부조를 만들어 얼굴을 내미는 정말 이질적인 것으로 이곳을 다녀가는 외래 방문객에 의해 전국적으로 인터넷에서 손가락질 받을 일이다. 만약 이러한 우가 발생한다면 이 일로 인해서 몇 사람의 욕심때문에 평창은 즉 평창 전체의 인상에 악영향을 초래할 수 있는 지탄의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군수들 부조도 공연, 관람장 내에 왜 붙는가 하는 점에 공적이 있으면 영월처럼 집 보다 더 큰 바위라도 공연, 관람장 밖에 세우는게 상식일듯 하다.

 

 그럼 다음장에서 위의 평창군에서 발굴 조사된 평창 석기. 청동기 역사의 장으로 그 하나 하나의 장에서 출토된 유물의 도판을 중심으로 평창의 역사를 다시 보기로 합니다.

 하리 청동기 유적의 출토유물의 사진들과 매장자에 대한 고인골, 청동검 연구에서 밝혀진 레포트 이야기들과 후평리 유적의 발굴 유물등의 사진을 게시 할 것이며 그에 앞서서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문화의 함수 관계는 있는가?? 있으면 무엇인가 하는 사색의 창과 하리 고조선식 청동검 매장자에서 이 매장자는 20대 여성을 밝혀진바 고인골 검사결과 그는 영양상태가 좋치 않았다 하는데 그럼 과연 그는 청동검을 찬 제사장의 위치에 있었던, 아니면 피장자는 20대 여자로 영양이 좋치 않았다 하는데 그는 과연 역량을 가진 지도자였슬까 하는 물음등도 추론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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