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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의고향 백옥포

율곡 이이선생의 평창에서의 詩(1)

율곡 이이선생의 평창에서의 詩(1)

판관대- 율곡의 고향마을 가꾸기 논문 추가사항

( 지난해 12월 봉평의 판관대에서 실시한 "율곡의 고향마을 가꾸기" 세미나에 필자의 논문에 추가 수정안 입니다

(국역 이이 율곡전서) 징검다리를 건너 시골집에 묵으면서 형제(兄弟)를 그리다.

<징검다리를 건너 시골집에 묵으면서 형제(兄弟)를 그리다>

(번역문)

모래톱 위에 말을 멈춰두고,
밭도랑 사이로 오솔길을 찾으니,
외로운 마을은 고목에 의지해 있고,
가느다란 냇물은 황만으로 흘러가네.
채소밭엔 비가 흠뻑 내렸는데,
안개는 산과 지붕에서 막 걷히네.
이별의 시름 이젠 더욱 짙어지니,
내 얼굴의 주름살 펼 길이 없구려.

過越溪棧, 宿邨舍, 有懷兄弟

歇馬滄洲上, 尋蹊畎澮閒。
孤村依老樹, 細澗下荒灣。
雨足連畦菜, 嵐收繞屋山。
別愁今轉極, 無境解吾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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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관대 추정 위치 앞의 실개천인 흥전천 전경


*역주- 위 시는 율곡이 징검다리를 건너 형제를 그리며 시골집에 머물다라는 시에서 어린시절 형제를 그릴 수 있는 곳은 봉평의 판관대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농토로 변해버린 판관대 집터는 을미의병 대장 유인석이 봉평 유림에게 보내는 편지에 의하면 1906까지는 실존해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또한 판관대 앞으로 흐르는 흥전천에는 두번 건너야 하는데 징검다리와 또 하나는 조그만 배로 건넜다고 전해집니다.

 

율곡의 많은 詩는 사실을 그려 보이는 서정시로서 위 詩에 황만이란 특별한 지명은 황해 바다의 灣으로 흘러간다는 뜻이 아니면 詩的음율의 의미를 내재한듯 하며, 이 詩의 제목에서 보면 "시골집에 묵으며 형제를 그리다"라는 주제어인바 율곡에게 시골집이 있다면 그는 오죽헌의 외가가 아닌 자신의 본집으로 이는 봉평 판관대로서 시골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령, 이 詩에 시골집을 오죽헌이라고 가정해볼때 위배되는 사항으로는 율곡의 오죽헌시는 임영이나 이러한 고유명사의 지명이 들어가는바 그체적 지명이 좀 나타나지만 당시에는 이곳 판관대도 강릉땅이었으나 동네 사람들이 별반 없어서 아마 지명도 미약했던듯 합니다.

 

위 詩에서 이곳이 오죽헌이라면 말(馬)을 집 앞마당에 메어 두었슬터인데. 실개천의 징검다리 건너면서 모래톱에 세워두었다는 임시적 행위의 표현으로 시적 형상화를 시킨 가능성을 보이며 또한 오죽헌은 내(川)을 건너갈 지형이 아니고 오죽헌 동편 2km에 선교장을 건너는 늪은 배다리라 하는데 이 시기 중종때에 선교장이나 경포대 아래의 방해정은 없었으며 이후 시기에 건축된것이기에 배다리 건너는 마을이 없는 관게로 물을 건널 필요도 없던 것이다.

 

따라서 율곡의 시에 나타난 징검다리를 건너 시골집과 회상속에 형제를 그려 본다면 어린시절의 추억의 장소는 오직 봉평(현 용평면 소재)의 판관대밖에는 없다.

봉평에서 장평으로 나가기엔 일제때 마전치 산 아래 비탈을 깍아 만든 신작로에 이존했으나 그 이전의 조선시대에 봉평을 다니기엔 흥정천이 판관대 아래에서 굽어 흐르기에 개천을 두번 건너야 한다.

 

이효석의 단편 "메밀곷 필무렵"속에 동이가 달밤에 흥정천을 건너 대화장으로 가던 바로 그곳으로 첫번째 개천을 건너는곳에는 진도라는 작은 나루가 있으며 가뭄시엔 그냥 건너갈수 잇으며 이곳을 돌아 판관대 뜰아래엔 징검다리나 이후에는 섶다리가 있었으며 현재에 그곳은 자연적인 뚝이 4~5m로 높아 나무 계단을 사용한 낡은 계단이 있어 이곳이 흥전천을 건너는 길목임을 알 수 있다.

 

또한 흥정천은 상류천으로 모래톱이 존재할 수 있는 점은 그곳엔 큰 바위들이 몇개 있어 바위 아래는 모래톱이 발달하였고 이곳에 말를 메어둔 점은 아마도 판관대앞 들판은 채마밭이나 이후 사람이 살지 않았다면 풀 숲이 우거지기에 말에게 물도 먹이고 하룻밤 쉬기 편한 장소로 모래톱을 안성맞춤인듯 하기에 위 시에서 모래톱에 말을 두고 하는 문장은 자세히 분석하면 아주 적확한 위치 표현이란 점을 알 수있다. 또한 이로서 이곳이 판관대 주변이엇던 점도 암시하고도 있다.

 

말(馬)은 역마로 방림역-대화역- 진부역등 역간의 구간은 대략 30여리 사이로 있었으며 당시 영부도로(후일 관동대로)에 방림역의 경우 말이 6마리. 이를 관장하는 사람들은 최대 30명까지 있었으며 마패는 말 다섯마리 그림까지 있었으며 마패를 보여주면 말을 필요시 마패의 말의 숫자대로 가져쓸 수 있었으며 암행어사의 경우 일반적으로 마패는 말 세개의 그림이지만 실제로는 말 부족 현상에 말 두필까지만 사용하였다 한다.

또한 파발마도 같이 운용되었던바 강릉의 선비나 전령들이 타고다녀서 효율이 떨어졌기에 당시에 왕은 모두 조사하여 올려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하는바 말은 고위직 아니면 타기 어려웟던듯 하지만, 아마도 율곡은 3~4마리의 마패를 차고 다녔슬듯 합니다.

율곡은 임영의 외조모를 뵈러 강릉에 가기에 날이 어둡자 옛 고향 시골집에 찾아가 하루 묵고가며 어린시절 형제들과 놀던 추억들을 회상한듯 합니다.

율곡 이이선생은 수많은 시를 남겼으며 그 시들을 보면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과 많은 묘비명까지도 기록하는등 바쁜 나날에 아마도 과거를 회상하는 시간도 갖지 못한등 모든 시들이 현재의 일들에 표현이지만 이 시만큼은 과거 회상의 유일한 시로서 율곡 스스로 시골집의 기억의 기록은 아마도 위 시가 유일할듯 합니다.

필자는 율곡선생이 고향에 대한 자신의 기록을 찾기에 무수한 노력을 기한바 여기 한편의 詩를 찾아 올립니다.

이로서 위 시는 율곡 당사자가 판관대를 시골집이라 지칭한 것입니다.

 

 

◆ (국역 이이 율곡전서) 평창 환취루에서 주수 김성경에게 주다(平昌環翠樓贈主守金成卿)

(번역문)

냇물 소리와 나무 그림자 석양 무렵에 맑은데,
비스듬히 빈 누각에 기대니 서늘한 기운 생겨나네.
사방 산은 구름에 젖어 사람 소리 드문데,
실바람만 가끔 불어 합문 앞 풍경 울리네

川聲、樹影晚來淸, 迥倚虛樓爽氣生。
雲濕四山人語少, 細風時韻閤前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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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주- 환취루는 평창 객사앞의 정자로 공무상으로 평창을 찾는 관리들이 객사에서 머물때 그 앞에 편히 쉬도록 정자를 마련한 것으로 과거 농고일때에 농기계 창고등의 위치로 파악해 볼 수 있습니다.

김성경은 중종때 평창군수 였으며, 율곡의 환취루 詩나 대화도중은 율곡 이이선생이 마흔쯤 병조판서로 재직시 황장송의 문제로 평창을 다녀갔을때 쓴 詩로 사료됩니다.

당시 대화는 강릉도호부 관할지로 행정적 어려움에 율곡은 대화를 정선으로 편입시키려는 이야기도 나눈 점을 보아 병조판서시의 시 아닌가 추론합니다.

 

여기에서 지난해 출간된 정원대의 평창의 인문지리라는 책에서는 신 사임당의 자녀는 여섯명이라고 하는바 그것은 오류이며 필자의 게시글에 대비되기에 이 오류를 지적 합니다.율곡의 바로 아래 여동생 (이름 미상)은 율곡남매 분재기( 건국대 박물관 소장)에 따르면 이원수,신사임당의 상속에 삼녀 이씨( 고, 홍천우의 처)는 논 12두락과 밭, 노비15명이 배분되었다고 명시 되어 있다.

 

필자는 평창에 자칭 향토사학자라 하는 정원대는 본인을 따라 판관대에서 율곡세미나도 하였건만 세미나 발표시에도 이원수공이 종 5품 판운수운을 하였는바 과거에 합격했는지 알 수 없다고 하였는데 율곡의 기본적인 책 한권만 읽어도 오촌 당숙 이기 현ㅇ제가 여의정이고 또 한사람은 당상관이라 빽 작용이 있었다고 말하지만 제의 논문에는 율곡전서에서 보면 율곡은 이기의 차(작은 소)를 올려 탄핵을 주도했다고 하였으며 당시 수운판관은 무록관으로 급료를 받지 않고 양반의 명예직이란 점으로 무슨 낮작으로 세미나에 끼였는지도,,

 

이 글이 명예훼손이라면 뉘 처럼 訴를 하시오

일전에 사건에 필자는 광진에서 조서후 마막 인사에 젋은 조사관왈 감사합니다도 아닌 존경스럽습니다라고 마지막 인사를 받았다고도 잘 알고 있슬바인데 그때엔 모든것을 명료하게 밝혀주리라.

 

또하나의 책을 쓴다고 시내에 소문이... 하지만 당신은 역사 오류 이전에 논술에 큰 결함을 가지고 있는바 좀더 노력해서 기승전결의 6하원칙이 맞는 글로 노력한다면 일품의 역사책을 남길 수 있다고 봅니다.

역사를 개똥같이 자유분망한 詩처럼 마음대로 규격도 없이 막 쓴다면 그것은 당신의 인품이 시와 역사를 같이하지 못하는 2중의 넉넉한 인품이 아니라 점이다.

평창의 지명지 책이 잘못되어 법적으로 책임까지 수천번 뇌까리더니 그것은 필자의 글에 의하면 모두 오류라 볼 수 없는것이지만 당신의 책 400페이지 모두 틀렸다고 서너번 말했듯이 앞으로 이 일은 큰 문제가 야기 될것같다는 소문도 함께 합니다

.

또 하나의 문제는이러한 책을 발간했으면 좀 평창의 역사를 이해하시는 분들에게 주어서 지도편달을 바란다는 인사가 현명한데 정원대는 필자에게는 책 발간했다고 자랑도 못하고 숨기고 있다. 그러면서 촌노들 앞에가서는 자칭 향토사가라고 힘주어 말한다. 언젠가 소개를 했더니 한 자리에서 더니 자칭 향토사가라고 20번이나 .. 글쎄 돈키호테나 그러는줄 알았는데...아니 정객들이 표받을 찾아 다니지 향토사가라면서 그런 편향적 인기를 누리는가..

하나 묻겠는데 향토사가라면 지금까지 평창에 무슨 공헌을 했소?? 아무것도 없는듯 하기에 묻는 것이입니다.

이러한 여러 오류들에서 필자는 이것이 필자의 글에 저해되기에 앞으로도 필자의 모든 글에 위배되는 오류들은 그때마다 지적하여 바른 쪽을 선택하도록 할 것입니다.

왜냐면 인문지리 책이 천주교를 통해 어느 교인에게 배부되었는데 그를 읽은 사람이 나의 글이 틀린것 아니냐고 문의하기에 인문지리책은 평창역사 전반에 오류를 하고 있기에 앞으로도 필자의 역사 기고에 많은 저해가 되기에 역사의 소명에 문제를 가지는바 해당 글에서 그 오류들을 지적 하겠습니다.

이것은 필자가 동 책의 저자를 해하자는 의미는 아니며 필자는 지금까지 천여개의 평창 글에 정선 아리랑, 영월의 김삿갓, 이 글 (2)번으로 오죽헌의 율곡의 제반사항등 잘못된 역사를 모두 관여하는바 평창의 인문지리 책 비평도 역사 소명의 일환인 것입니다.

 

◆ 대화도중(大和道中) (국역 이이 율곡전서)

(번역문)

천리길 가뜩이나 행색이 피곤한데, 산 길에 왠 돌이 이렇게 많은고.
여윈 말이라 재촉해도 가지 않는데, 지는 해는 벌써 높은 나무에 걸렸네.
앞 산은 차츰 어두워가고, 지나는 곳엔 범의 발자국도 많아라.
숲을 지나 외진 마을에 다다르니, 실끝 같은 저녁 연기가 푸르구나.
늙은 할아비는 숨찬 말로, 울타리 밖에서 어떤 객이냐 묻고,
늙은 할미는 아미를 안고 나와서, 문을 가로막고 투숙을 허락하지 않네.
말에서 내려 쌓인 쑥대에 기대고, 매우 피곤해 잠깐 눈을 붙였다.
관솔불 등걸불은 피고 있지만, 옷깃이 썰렁 한기가 들어.
따스한 방을 빌려달라 조용히 타이르니, 주인 늙은이 이맛살을 찌푸린다.
앞으로 불러와 잔술을 권했으나, 서서 마시며 기뻐하는 안색 없고.
혀를 차며 봉창 가리켜 말하기를, 내 어찌 방이 아까와 그러겠소.
아이들이 흙 평상에 자게, 맨 다리 내놓는 걸 차마 못보기 때문이오.
들어가 아내에게 의논해 보리다 하더니, 한 참 뒤에야 나와서 승낙을 한다.
염치를 무릅쓰고 몸 구부려 들어가는데, 머리를 들다가 집 천정을 들이받았네.
한밤중에 선 잠을 깨서 보니, 아이들이 벽 뒤에서 떠들썩한다.
춥다면서 옷 하나를 서로 다투며, 객을 원망하는 욕설이 거침 없어라.
한숨을 쉬며 탄식하노니, 이 어찌 풍속이 본래 나빠서이랴.
언제나 식량 걱정 없는 세상 되어, 가는 곳마다 인심이 순박해질고.

千里行色困, 山路何多石?
羸馬策不進, 斜陽掛喬木。
前山漸欲暝, 所經多虎迹。
穿林抵孤邨, 一縷炊煙碧。
老翁喘且語, 隔籬問何客,
老婦抱兒出, 遮門不許宿。
下馬倚積蒿, 倦極交雙目。
松明與榾柮, 【缺】禁生寒粟。
緩頰借溫房, 主翁眉閒蹙。
呼前酌巵酒, 立飮無欣色。
彈舌指瓮牖, 此室吾豈惜?
兒輩依土牀, 不忍露赤脚。
請入謀諸婦, 良久乃肯諾。
强顏【缺】躬入, 擧頭頭打屋。
夜半假寐罷, 衆兒喧後壁。
呼寒爭一衣, 怨客恣罵辱。
喟然却興歎, 此豈民風惡?
何時不贏糧, 到處人心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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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 선생은 한평생 그가 다니고 겪는 일에 대하여 詩로서 남겼습니다.

때로는 일상의 문득 생각도 제목없는 시로 남기는바 율곡선생은 이러한,,, 밤이 되어서 범의 소리도 들리는데 하룻밤 묵기 위한 애틋한 사연을 시로 남기지 않을 수는 없었슬듯 합니다.

율곡의 부친 이원수공은 대화 주막의 재미있는 설화를 가지고 있다면 율곡선생은 당시 시중의 일상을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는 詩를 남겼습니다. 그래서 율곡 父子는 대화에 각별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 본 논문에 수정/ 추가 사항은 2부에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