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대의 "평창의 인문지리 책"에서 진부역 위치의 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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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원대의 <평창의 인문지리 > 책에서 진부역은 거문리 거켜리에 거역홀점 가지고 진부역이라 한다.
정원대의 진부역이 거커리란 점은 김진백의 「길위의 역사」 책의 기록의 카피이다.
참고 주의 사항은 <평창의 인문지리 >책이나 「길위의 역사」역사책은 사관적 기술이 아니고 2/3이상이 모두 오류, 오 논증이기에 유의 바랍니다. 무엇이 오류들인가에 대하여는 본 블러그를 검색바랍니다
진부역도 동 책에서 오류했으면 깨꿋이 승복해야지 자칭 향토사가라 하는 사람이 정말 평창역사에 무엇을 조명했는가하는 점은 없는듯 하고 "평창의 인문지리"란 책은 폄훼, 오류, 왜곡을 넘어서 날조까지 하여 평창역사에 똥칠을 하고 있다.
과거엔 평창의 지명지가 틀렸다고 군청가서 도에서 온 공문에 지명지 오류 20건 정도를 대강 써 주고 왔다고 하며, 동 책을 폐간이고, 법적으로 해야 한다고 대쪽같이 따지던 사람이 인문지리책 한 권에서 무수히 오류를 범하고 있으면서 이 오류를 커버하기 위해서인지 수정판을 낸다 하더니 증보판에서도 더 많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즉 자신이 기록하고도 오류인 점도 모르는데 필자가 아무래도 평창역사의 앞길을 위해서 무수히 많이 밝혀야 될성 싶다. 물론 밝힐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몇 번 이 점은 평창에서는 후세백작이 잡아주어야 한다고까지 언질을 받은 바도 있다.
동 책은 평창군 예산에 의해 출간되어는데 군 당국은 예산만 뿌리면 그만인지 어디다 배부했는지 또는 잘 되었는지 하는 심사의 모더링도 없다. 또한 동 책수자는 강원대 한문 선생인데 평창역사 한줄이라도 아시는 사람입니까?? 무엇을 감수하겠다는 것인지??
필자는 지금까지 묻혀진 평창역사를 수 없이 새로 발굴하여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우리가 알고있는 평창역사의 태반이 오류라고 새로히 정립하고 있는바 정원대의 평창의 인문지리와 증보판은 어느 책이든 발생되는 일반인 오류를 넘어서 만화책을 그리고 있다. 그러기에 평창역사를 저해하는 책에 대해서도 당연히 바른 역사로 지적할 수 밖에 없다. 이 점이 필요하다면 조목조목 기록하여 비평해 줄 것이다.
동 책에서 폄훼란... "동비토론"이란 단원이 나온다. 동비토론은 강릉 민보군측이 작성한 전투일지로 그 제목은 강릉 민보군측이 평창쪽에 모인 동학군을 공비로 쳐 죽인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첵에서 평창의 동학란에 인용은 할 수 있지만 "동비토론"이란 책의 제목 자체가 평창역사의 단원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정원대는 강릉 민보군측으로 평창 동학도들을 쳐 죽이겠다는 입장인가 묻는다.
또한 판관대 단원에서는 율곡 형제를 여섯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정원대 스스로 하는 말 중에 강릉대 교수 2명이 판관대에서 세미나 할때 평창의 두사람은 마이크를 잡고 이렇게 엉성하냐무지한 구박을 주었다 한다. 이 소리는 저쪽의 박 교수쪽에서도 들려왔다.
그러던 사람이 지난해엔 필자와 같이 판관대에서 세미나를 하였다. 세미나 당시에도 문제는 책 한권이라도 제대로 읽었으며 무록관이 무엇인지 알았으며, 율곡은 7남매라는 점도 알았슬텐데. 아니 필자의 세미나 원고만 읽었어도 평창의 인문지리란 책에서 여섯명이라고 오류질 하지 않았슬 것이다.
역사교수들의 세미나는 잘못이라고 구박주면서 정작 정원대의 똑같은 판관대 세미나에서는 무엇을 잘 했는가??
정원대의 세미나 리포트를 보면 고지도보고 해설하는 것뿐 본론적인 입장은 없다. 당시 본인도 참여했는데 그 기록을 보시오,, 시인 이은상이 봉산서재 저격하고 가히 박사넘들 추종을 불허할 만큼 학술적이고 평창적 대의를 가졌다고 자평한다.
본인의 리포트만이라도 잘 보았어도 율곡의 현제를 6남매로 오류질 하지 않는다. 7형제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율곡남매 분재기( 건대 박물관 소장)에 율곡형제들 수결(싸인)까지 필자는 기록하고 있다. 정원대는 이러고도 자칭 향토사가라 하니..
동 책에서 진부역, 방림역에서도 단정적으로 서술하는데 이는 오류이고 그외 많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평창경찰서 탑으로 평창군지에 4층탑 사진에 현 오층 탑으로 정비 한 탑과 증언과 동북오중석탑, 이는 오류를 넘어서서 왜곡 이상으로 역사 날조라 보는 것이다.
본인이 명예훼손을 했다면 누구처럼 언제든지 하시오.
필자는 인간사를 넘어서 역사의 장에 얼굴을 가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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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의 진부역 고찰>
◆ <이해>
1) 풍악록에서는 성야를 지나 오대천을 건너 저물녘 진부역(珍富驛)에 머무니 푸른 나무가 하늘에 연이어 있고 새들의 울음소리가 서로 들렸다. 또 8, 9리를 가니 청심대(淸心臺)가 있었으며 매우 넓게 펼쳐져 있어 올라 둘러보고...
2) 김종정의 동정일록에서는 역 앞에는 송림이 많았는데 울창하여 볼 만 했다.
3) 이병운의 동정일록에서는 월정가(月汀街)에 도착해 정오에 말을 먹였다. 이곳은 오대산 월정사까지 20리라고 했다. 10리를 가서 진부창을 지나고, 10리를 가서 거억흘점(去億屹店)을 지났다. 물가에는 돌부리가 우뚝 솟아 대를 이루고 청심대라고 하였다. 20리를 가서 모노령을 지나고, 30리를 가서 태화관을 지났으며, 10리를 가서 사초가에서 투숙했다.
◆ 기록에 의한 진부역의 이해
월정사 입구에서 진부창은 10리(3,8km), 진부창에서 거역홀점이 10리라 했는데 조선선비들의 기행에서 거리 표시는 기행자의 주관에 의한 것이 아니거 당시 보안도 길에 명시된 도로 표지 안내도인듯 한데 아직 찾지는 못하였다. 어떤 유람기에서는 도로를 벗어나라고 하는 표현도 있다. 여기서 도로라 함은 보안도가 관할하는 것이기에 이 도로에 거리까지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정원대의 인문지리 책에서는 진부역을 거커리(거문리 입구)에 역이라고 표시된 지도를 인용하였는데, 이곳은 윗 문장에 각 역간의 거리 사이의 거리표시에 위배됨을 보이며, 정원대가 추정하는 거커리는 청심대 부락의 거역홀점이 아닌가 추정사료된다.
또한 역제, 역참에 있어서 강원도의 57개 역은 춘주(춘천)의 보안도에서 관장하며, 보안도는 종 6품이 관장하며 인력은 9천명 종사 하였다(당시 강원도 전체 인구는 30만정도)으로 도로에 대한 투자는 만만치 안은 점을 볼 수 있는데, 당시 보안도의 강원도 역로에서 한성-강릉- 평해의 제 3로로서 현 평창의 구간에는 운교역- 방림역- 대화역- 청심태참- 진부역-횡계역으로 이어지며 방림역, 대회역, 진부역이 중요한 도로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 역들은 관동대로 (당시는 京江도로) 길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1872년 강릉부 지도에 진부에 역 표기를 가지고 이를 마평리라 보기도 하는데 정원대는 하는 거라고는 자칭 고지도 전문가라 하는데, 붓으로 그리는 고지도에 스케일 비율을 맞추었던가.또한 거커리는 본문들에 언급된 거리상이나 지형고찰상 맞지 않는다. 그리고 정원대가 지목하는 번지의 거문리중 거커리는 청심대 바로 아래에 위치해 있기에 정원대는 학문적 조명을 하지 못하고 단순한 자기 주관만 피력하고 있다.
한가지 더 우스운 것은 인락원이라 하는 것은 단순히 숙박만을 위한 客舍중심의 취락을 院 취락이라 한다( 평창의 원으로는 인락원, 지상원(祉祥院), 천천원(泉川院)등이 있다.)
또한, 이곳에 마방이 있는데 마방이란 말 먹이도 주는 주점으로 가령 역은 관급이기에 개인 선비들의 말에게 먹이를 주는것은 위법이기에 마방이 발달하는 것으로 아직 정원대는 이정도도 이해 못하며 무엇을 쓰겠다고 이 장에서도 오류질을 하는가?
역이란 마방만 있어 말만 타는 곳이 아니다. 정원대는 마방 표시를 보고 진부역이라 해서는 않된다. 驛이란 말을 필요로 하는 서울과 지방간의 국가의 중요한 통신, 교통의 수단을 역제(驛制)라하며 숙박에 관한 院制가 함께 하는 것이다.
단순히 숙박만을 위한 客舍중심의 취락을 院 취락이라 한다( 평창의 원으로는 인락원, 지상원(祉祥院) (군의 서쪽 15리)와 천천원(泉川院) (군의 동쪽 25리에 있다.)
역제란 말이 5~6필이 있으며, 일전 게시글 방림역 보정에서 보듯이 역은 역무에 종사하는 역원이 40여명, 노15, 비10여명 상주한다. 이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역원 취락도 자연 형성된다.
방림역,대화역, 진부역이 가까운 30여리에 있는것은 말을 타는 관리들을 위함만이 아니라 걸어서 다니는 백성을 위한 역제로 역 주변에는 사제 역원, 주막등이 많았다. 신리의 신촌주막, 모노치의 곡건주막등이 그러하다.
그러기에 정원대는 역은 단순히 지금의 터미널식으로 마방만을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역원제란 역원취락으로 넓은 터를 필요로 하였으며, 역간 구간 거리가 30여리 정도는 보도 행정으로 보행자를 위한 것이다.
또한 위 문장중에 일반적 서술로 진부역은 성오평을 지나 월정 삼거리도 지나서 오대천을 건너서 있다고 기록했으며. 진부역에서 말을 먹이고 30여리를 가사 모노치가 있다 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진부역에서 8~9리를 가서 청심대가 있다고 하였다( 1리는 390m 정도로 조선시대는 3번정도 약 380m까지 길이가 변동되었다)
「동정일록」에서는 진부역 앞에는 송림이 울창하여 볼만했다고 기록하였다.
풍악록에서는 진부역(珍富驛)에 머무니 푸른 나무가 하늘에 연이어 있고 새들의 울음소리가 서로 들렸다.
또한 어느 선비의 기행에서는 진부에 들에는 울창한 소나무는 처음 보는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곳 일대를 대 송정이라 하였으며 현재도 송정이란 지명은 사용하고 있다.
바로 이 지점이 진부역으로 위치가 어디인지 고찰을 함이 진부역 고찰의 과제이다
◆ 거역홀점에 대한 기록
동정일록(東征日錄) /면재(俛齋) 이병운(李秉運)
10리를 가서 고개 위에 도착했고, 5리를 가서 횡계관(橫溪館)을 지났으며, 30리를 가서 월정가(月汀街)에 도착해 정오에 말을 먹였다. 이곳은 오대산(五臺山) 월정사(月汀寺)까지 20리라고 했다. 10리를 가서 진부창(珍富倉)을 지나고, 10리를 가서 거억흘점(去億屹店)을 지났다. 물가에는 돌부리가 우뚝 솟아 대를 이루고 청심대(淸心臺)라고 하였다. 20리를 가서 모노령(毛老嶺)을 지나고, 30리를 가서 태화관(大華館)을 지났으며, 10리를 가서 사초가(沙草街)에서 투숙했다.
(이해)
거역홀점(去億屹店)의 店은 우리나라 지명에서 간혹 나타난다. 조선시대의 驛, 院制에서 客館을 뜻한다. 율곡 이이선생이 쓴 선비행장에선 조운에 관계하여 서강에서( ㅁ마포 수운의 전함사가 있는 곳) 배에서 내려 水店에서 신사임당이 돌아가신 편지를 받았다 한다. 이러한 민간민간 여행자를 위한 店幕이 생기며 국영의 원은 피폐되었다.
역사(驛舍)는 주로 공사방, 통인방, 객방, 책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마방이라함은 말의 꼴도 마련한 사설 주점을 뜻한다.
고지도에 거커리에 마방이 표기되어 있는 바 정원대는 이곳을 진부역이라 주장을 하는 바 역이란 점은 보행자들의 숙박시설인 원제( 보행자의 숙박시설)와 함께 있으며 역원취락을 형성하는 바 이러한 사관적 견지도 없이 함부러 주장하지 맛길 당부한다.
◆ 모노령(毛老嶺)
모노치의 뜻 연구.
모란[毛老院];‘모로원, 몰원, 모란, 물원, 모롱’으로도 나타난다. ‘院’의 이름 ‘모로원’이 줄어서 ‘모란’이 된 것이다. ‘모로원’의 ‘모로’는 중세어로 ‘메’․‘산’․‘모퉁이(隅)’을 뜻하였으니 ‘모로院’은 ‘산에 있는 院’ 또는 ‘모퉁이(隅)에 있는 院’이라는 말로 이해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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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비들의 유람기로 보는 진부역 고찰]
◆ 풍악록(楓嶽錄) 금강산 유람기
이현영(李顯英)
유람일시- 1629년 4월 2일–윤4월 4일
4/27일 : 구산역-제민원-황계역-오대천-진부역-청심대-대화역(1박)
4/28일 : 방림역-모노현-평창군 아전집(1박)
4/29일 : 거슬현-사천천-주천현(1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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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일.
<횡계역 표현기록>
앞 뒤 20여리에 걸쳐 나무 숲 색이 짙푸른 가운데서 나오니, 산 아지랑이는 점점 흩어지고 계곡의 바람은 싸늘해 상쾌하기가 9월의 가을 같았다. 서쪽으로 큰 시내를 건너 황계역(黃溪驛)에 이르렀다. 역은 산등성이에 있었는데 4월에 얼음이 비로소 녹았으며 8월에도 눈이 날렸다.
<진부역 표현기록>
또 27,8리를 가서 독산원(禿山院)에서부터 성야(省野)를 지나 오대산을 바라보니 운무가 아득하여 비바람을 막고 있었으니 하늘과 땅이 비밀리에 감추어 둔 신령스러운 신선의 집이 아니겠는가. 사람 사람마다 능히 엿볼 수 있는 것은 아니리라. 바로 오대천(五臺川)을 건넜는데, ~~
저물녘 진부역(珍富驛)에 머무니 푸른 나무가 하늘에 연이어 있고 새들의 울음소리가 서로 들렸다. 또 8, 9리를 가니 청심대(淸心臺)가 있었으며 매우 넓게 펼쳐져 있어 올라 둘러보고 곧 대화역에 이르러 묵었다.
< 방림역 표현기록>
28일. 새벽에 출발해 숲 그늘에 들어서니 가지마다 앵무새 울음소리요, 골짜기 마다 냇물 흐르는 소리였다. 30여리를 가서 방림역(芳林驛)에 도착하니 역에는 상수리나무가 즐비했다. 다시 고개 하나를 넘고, 시내 하나를 건너니 (* 역주- 뱃재와 주진 강) 물은 푸르고 모래는 수정 같았으며 사람 그림자는 가로로 비끼어 자연스럽게 그림 가운데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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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일록(東征日錄) 금강산유람록
* 운계 김종정 (1722-1787)
* 유람일시 : 1759년 3월 16일~5월 8일
29일 : 원주-오원역-안흥역-독치-회치-운교역
30일 : 운교역-대화역-진부창
4월 1일 : 진부창-횡계역-구산역-부자서원-강릉
3월 29일. 독치(禿峙)와 회치(檜峙)를 넘어 운교역(雲交驛)에서 숙박했다. (*역주- 독치와 회치- 전재와 문재)
30일. 대화역(大和驛)에서 점심을 해먹고 진부창(眞富倉)에서 숙박했다.
오원역 이후로는 대개 어지러운 협곡이었다. 산도 물도 층층이 겹쳐있고 문득 트였다가 문득 막혀서, 말을 두고 남여를 탔고, 남여를 타다가 다시 말을 탔다. 지나는 역창(譯倉)이 모두 황량한 골짜기와 외로운 마을에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시름이 생기게 하니, 타향에서의 감회를 금할 수 없었다. 집은 대개 나무를 깎아 지붕을 덮었는데, 길고 짧은 것이 가지런하지 않았으며,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역 앞에는 송림이 많았는데 울창하여 볼 만 했다.
4월 초1일. 횡계역(橫溪驛)에서 점심을 해먹었다. 횡계역은 대관령의 정상에 자리했는데, 오히려 말을 달릴 수 있을 정도로 그다지 험준하지는 않았다. 고개를 넘어 아래로 가니 수백 굽이 꺾여서 구불구불하고,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는 것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끝이 없었다. 아래로 동쪽 바다를 보니 마치 발아래에 있는 것 같았다. 경포는 맑은 것이 한조각 거울과 같고, 여러 산들은 한 곳에 빽빽하게 모여 지척이 1천리인 듯 했다. 어지러운 나무들이 길을 끼고 늘어 서 있고, 낙엽이 가끔 정강이까지 빠졌다. 영서지역에는 꽃이 이미 떨어졌는데 영동지역에는 눈이 아직 한 자 남짓 하였으니, 산천의 사뭇 서로 다른 풍기(風氣)를 징험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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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일록(東征日錄) 금강산유람록
면재(俛齋) 이병운(李秉運)
유람일시- 1796년 2월 8일~3월 21일
17일 : 반정점-횡계관-월정가-진부창-거억흘점-모노령-태화관(大華館)-사초가(沙草街)
18일 : 사초가-주진-평창읍-안현(鞍峴)-약수-마지-아치현(峨峙峴)-주천창
10리를 가서 고개 위에 도착했고, 5리를 가서 횡계관(橫溪館)을 지났으며, 30리를 가서 월정가(月汀街)에 도착해 정오에 말을 먹였다. 이곳은 오대산 월정사까지 20리라고 했다. 10리를 가서 진부창을 지나고, 10리를 가서 거억흘점(去億屹店)을 지났다. 물가에는 돌부리가 우뚝 솟아 대를 이루고 청심대라고 하였다. 20리를 가서 모노령(毛老嶺)을 지나고, 30리를 가서 태화관을 지났으며, 10리를 가서 사초가에서 투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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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기행(東遊紀行) 금강산유람록
진택(震澤) 신광하(申光河)
1778년 8월 20일~10월 17일
2일 : 강릉-대관령-횡계역
일 : 횡계역-진부역(珍富驛)-모노령(毛老嶺)-태화창(太和倉)
4일 : 태화창-운교역(雲橋驛)-원주
9월2일. 아침에 비가 잠깐 그쳤다. 마침내 출발해 30리를 가서 대관령을 넘었다. 대관령 위에 쌓인 눈이 거의 3척이었다. 고개 등성에서 점심을 먹고 20리를 가서 횡계역(橫溪驛)에서 묵었다.
초3일. 횡계역에서 출발해 40리를 가서 정오에 진부역(珍富驛)에서 말을 먹이고, 30리를 가서 모노령(毛老嶺)을 넘고, 20리를 넘어 태화창(太和倉)에서 묵었다.
초4일. 태화창에서 고개를 넘어 50리를 가서 정오에 운교역(雲橋驛)에서 말을 먹였다.
이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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