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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의 기상

역사의 두 가지 길

 

역사의 두 가지 길 

 

   역사는 사실이란 단어로 어떠한 관형구도 필요없는 사실 그 자체가 역사이다.

그러면 사실의 역사와 진실의 역사는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사실은 있는 그대로의 팩트이지만,  진실이란 단어는 자신이 가장 믿고자 하는 신녕의 의지를 포함하는 단어이다.

진실이란 단어의 이해를 위해서 이해하기가 쉬운 정치적 용어를 예로 들면, 정치에는 흔히 좌파와 우파의 상반되는 용어가 있다.

우파든 좌파에 어느 진영을 선택하든 그 자체는  잘못은 없으며, 사실이든 허구이든 관계없이 자신이 믿고자 하는 자신의 신념이  진실이다. 즉 진실이란 자신이 믿고자 하는 신념의 개념적 용어이지 팩트(사실)의 용어는 아니란 점이다.

 

하나의 역사에서는 이러한 사실의 역사와 진실게임의 두 가지 역사가 존재한다.

이 글에서의 논고는 기실 두어 달 전 쯤 TV에 방영된 평창의 임진왜란사로서, 현재의 평창의 임란사는 바른 역사인지 이는 역사가 사실인지, 왜곡된 부분이 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전해지는 스토리로는 군민의 충정과 애국심의 발로로서 긍지를 심어주고 자주정신을 드높여 각성하고자 하는 진실의 역사문화이다.

 

그런데 TV에 방영전 편집과정에 평창의 한 사람이 자칭 향토사학자라며 방송사에 두번의 전화로 노산성 전투는 거짓이라고 방영을 삭제시킨 점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물론 그 점이 사실의 역사라면 방송 중지는 고무적인 사건일테지만, 역사의 조명에서 그것만이 능사는 아니란 점이다.

 

 가령 한 국가를 예로 본다면, 한 국가는 땅의 지리적 공간과 역사의 시간적 기록만을 가지는 것이기에,  그 국가를 이해하자면 그 국가의 민족 역사를 보아야 스타일을 알 수 있듯이, 우리의 역사문화의 대종은 산과 사찰이지만,  서양에서 관광의 기조는 왕조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캐스틀(城)의  역사 여행이으로  서양은 궁전이나 성당등 역사가 관광의 모토가 된다. 이러기에 레져 관광의 역사는 좀  레져관광에 이야기를 아름답게 꾸미고자 미학적 수식이 따라 붙는 것이다.

 

이러한 재미를 더하는 관광용 진실의 역사는 평창 주변의 여러 곳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데, 가령 영월의 김삿갓 묘는 사실인가 하는 문제와 정선아리랑이 아리랑의 발상지 시원이라 하며 이러한 허구도 성마령 옛길 복판에 정선아리랑이 아리랑의 시원으로 이 길을 하여 평창- →서울- →세계로 퍼져나갔다고 돈키호테의  소리를 하기도 하는데, 조선시대의 성마령 길이 현재는 폐쇄된게 아니라 산길로 존재하는데도  정선 무식쟁이들이 길을 막고 비석을 세웠다.

또한 강릉의 오죽헌에는 율곡의 외가라고 동상도 세우고 율곡이 태어난 곳이라 떠들지만, 오죽헌은 신사임당의 외조부가 최응헌에게 데릴사위로 들어간 곳이 오죽헌이다. 그리고 율곡이 오죽헌이나 출생하였다는 그록도 없다.

 

하지만, 이들 역사가 이야기를 보태서 재미와 여러 긍정적인 요소를 자아내게 하여  영월, 정선, 강릉에서는 현재 대표적 문화로 자리잡고 있으며, 이로써 현대 레져 관광의 도시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여기서 만약 건조무미한 역사사실로만 조명한다면  학습이나 레져관광의 문화를 창출할 수 있었을까 하는 문제에서, 때로는 역사는 고장의 얼과 화합의 긍지를 살리기위해서 아름다움을 보태고 포장하는 진실의 역사로 바꿈되기도 한다.

 

오죽헌은 율곡의 외가로 둔갑다고 7남매의 가정을 꾸린 신사임당은 자기 집한채 장만도 못하고 외가나 언니네 집, 친정 파주를 오갔다고 하는 역사는 사실이 아니다.

필자는 율곡과 신사임당의 생애사에 대하여 책팔아 먹기 좋게 쓴 학자들, 지금까지 신사임당의 생애사 모두는 거부하고 필자는 바른 이해가 되는 역사를 게제하였습니다 < 논문- 율곡의 고향, 판관대>

또한 김삿갓에 대한 백일장에 장원급제를 하였다면서 왜곡시키는 역사들,,, 그는 과거를 공부하러 서울을 갔고 하는 이야기들에 대한 충분한 사유를 밝히기도 하였으며, 민요를 가지고 정선 아리랑, 평창 아리랑 하고 구분하는 우스게들,,평창아라리는 아직도 후렴이 없으며 정선 아라리도 평창아라리와 같은 후렴이 없었으며 원주까지 아리랑이 아니라 어르랑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이러한 민초들의 민요는 바로 영서 아리랑이고 영동의 강릉권에서는 오독떼기라 한다.

평창의 아라리가 후렴이 없어 재미를 덜 한다고 촌스럽게 이해하겠지만 옛 선인들은 왜 후렴을 안불렀을까요?

정선 축협 3층에만 올라가 정선 아라리 세미나 하는자들은 모구 해바라기성 아리랑이다. 지금까지 아리랑 학자들은 정선 아라리가 아라리 발상지이라고 성마령 옛길을 가로막고 비석을 세우는 무례함을 보이고 있다.

아리랑이 선율을 아름답다고 하건만,, 영서지방 아라리는 가락 이전에 사설의 가사에 그 주안점이 있다. 이러한 평창아리랑을 포함한 영서 아라리의 제 이론적 성격과 역사에 대한 글은 다음으로 미룹니다.

 

이렇게 보면 오죽헌이나 정선 아라리. 김삿갓 론에 역사적인 사실을 넘어서 재미있는 이야깃 거리로 재 탄생한다. 이것이 지방을 아름답께 가꾸는 문화의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평창에서는 위의 이율곡과 신사임당. 영서 아라리의 본고장으로 천동리에 김삿갓 묘(추정분)의 역사 등에 관련이 있는 고장으로 이들은 도외시되고, 평창의 임란사에 역사가 있다.

 

우리가 알고있는 임진왜란은 "정명가도"라 하지만 도용토미는 그런 이야기는 없었고, 강원도를 김회. 춘천, 강릉, 삼척을 돌아 백봉령을 넘어 강원도를 대회전하며 원주 강원감영을 접수한 모리 야스나라의 4번대가 감영으로 가는 길에 평창에서의 임란 평창전사에서 왕세자를 잡으로 함경도로 올라갔다, 대관령을 넘어 왔다, 노산성 전투를 하였다 하는 많은 역사서들의 문제는 다음으로 합니다.

( 필자의 지난해 『평창 역사의 이해』 책에서는 평창아리랑과 평창의 임란사, 천동리에 김삿갓에 관한 역사글은 제외되었습니다만 추후 필자의 이해로 서술합니다. 임란사를 위해서는 연려실기술이나 선조 24년 실록, 그리고 일본의 기록을 보기위해 아마존까지도 검색하였습니다. 이 부분에서 노산성의 山城의 이해로 이 산성은 5천년전 중국 요하문명에서 나타나는 고조선 산성의 특징인 치(雉)를 달기에 맥국시대나 고구려 계통의 석성의 치이고 서쪽의 높은 성은 아마도 고려말의 읍치관아 성을 쌓은 것이로 조선때 김광복 군수가 쌓은것으로 추정하는등 제세하게 기록할 것입니다)

 

이제 본론으로...

 

지난 겨울 언제 TV에 평창임진란사가 방영되었다.

여기에 정원대는 노산성에서 전투한 적이 없다고 방송국에 두번 전화를 하여 TV자막에 노산을 비추더니 바로 응암굴로 넘어갔다고 한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역사를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필자는 호구록의 시간대에 의한 이러한 글을 게시한적이 있지만 정원대는 글도 없기에 필자로서는 정원대가 노산성 전투가 없었다는 주장은 어떠한 근거인지는 모른다. .

 

하지만 바른 역사를 찾고자 하는 면에서는 좋은 모습이지만, 노산성에서 임진란 전투는  전투는 없었기에  일반인에게 방영은 거짓이기에  노산성 전투 방영은 금하지는 취지는 위에 언급한 평창역사문화를 이용한 화합과 긍지를 가지는 군민 화합의 목적을 달성할 고자 하는 어젠다는 무엇이 있는가?

 

평창도 이러한 진실의 역사문화로 평창 문화의 발전을 기하여야 살기 좋은 고장에 일역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그것의 대표적인 역사로는 "평창의 임진왜란사"이다.

따라서 역사는 과거의 기록이 새로운 유적, 유물의 발굴과 과학에 힘입에 새로운 역사로 변하며, 또 한편으로는 역사를 아름다운 문화사나 고장의 화합과 단결을 위하는 시대사적인 얽힘을 가지는 진실의 역사를 수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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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정직한 사관의 소유자라면 자신이 쓴 <평창의 인문지리> 3종에 기록한 평창역사와 김진백 저, 정원대 공동답사의 <길위에 역사>책은 거의 대부분이 왜곡이 오류이며, 오논술이다.<평창 인문지리> 책은  <길위에 역사> 을 17번이나 인용하는 바 <길위에 역사> 책부터 이러한 문제를 다분히 가지고 있다.

평창군 예산이 억대가 넘게 낭비되었지만,  이 책들은 평창의 역사서로서는 폐간 하여야 한다.

역사의 조명에서는 일반적으로 오논술이 있슬 수 있고, 이로서 정오표를 붙이기도 하지만 동 책들은 절반이상의  역사가 오류이고, 오논술인바 정오표로서는 가능치 않은 점이다.

 

일전의 <평창지명지>는 한문의 오류가 많다고 감수자에게도 핀잔주었다며 몇 삼년동인 수사니, 폐간을 주장하더니, 평창 역사를  무수히  왜곡시키는 3권의 책들에대해서 한마디 변명도 없는가 묻는다. 정작 이 책들에 대해서는 함구하시는가?  

필자는 이 책들을 문제삼는 것이 불쾌하다고 탓하기 이전에 동 책들은 더 크고 더 많은 범위의 평창의 역사문화 긍지를 얼마만큼 훼손시키는가 문제의 심각성을 간파하고 이에 대책을 세우기 바랍니다. 

 

※ 『길위의 역사』책의 분석 비평에 앞서서

<『길위의 역사』 평창문화원, 김진백 저, 정원대 공동답사. 2009>

 

동 책은 총론에서는 상고시대의 동부여에서 삼한으로 이어지는 개괄적인 역사에서 부터 책을 시작하지만 삼조선들의 서술은 한줄로 이어지는 역사도 아니고 고조선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마,진, 변한의 서술하고 있다.

평창의 상고시대 서술에서 예맥을 조명하며 평창은 예, 맥이 아니고 외부에서 피난온 역사로 단정하였다. 하지만 역사의 서술에 개인의 주관을 이입하여 단정하는 것은 금물이다. 이러한 단정은 언제라도 새로운 조명이 밝혀지면 당연 오류가 되는 것이기에 역사기술에 사관적 입장을 취하지 못하고 있다.

 

예,맥은 민족으로서는 고조선을 예맥조선으로 지칭하기도 하며, 또한 깅원도 일대를 예맥이라 하는 점은 고조선 이후의 열국시대의 부족국가로서 국명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길위의 역사』 책에서 횡성과 평창은 예맥이 아니다라면 다는 쪽에서 전쟁에 피해서 평창지역에 왔다고 해도 그들도 모두 열국시대의 후 삼한의 고조선인으로 예, 맥인이다.

그런데 평창의 인문지리 책에서는 길위의 역사채을 내용도 없는 제목만 17번 인용하는 대단한 책으로 묘사하였다.

앞으로 평창 예산 그만들 낭비 하시오. 역사는 거짓과 위선으로는 통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강원도의 예 맥의 부족국가의 시원인 필자는 예, 맥에 대하여 산서성 지역에서 부터 중국 25사에 나오는 예맥, 춘천 중도 유적지의 맥국까지 예, 맥의 역사를 기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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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역사는 현제 강단사학으로 강단사학이라함은 재야사학에서 현 교육부, 역사편찬위원회. 중앙 민족학 연구원 등의 주류사학을 지칭하는 단어로 강단 사학은 일제때 일인들의 조선사만을 고수하는 친일 황국사관으로 그들은 고조선도 부정하고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도 반도(한반도)사관으로 조선반도로 축소 왜곡하지만 고조선부터 삼국시대 모두 고려까지 우리의 역사는 중국 연안과 반도까지의 지역의 역사이다.

다만 예맥에 대하여 학자들은 단재의 조선 상고사 한 페이지도 가르치지 않는 자들이기에 열국시대의 역사는 미비하지만 앞으로 논합니다.

 

강단사학자들 백제의 사베성이고 웅진이고 곰백날 부여이고 공주에서 찾아봐라..

 신라가 7년간 나전쟁 (신라와 당나라) 경주와 당나라 수도 장안(현 시안)은 구글어스 직선거리로 4천5백리로 일곱차례 전투에 모두 신라가 이겼는데 현대전에 탱크롤 몰고가도 가능한 거리인가?

 우리가 배운 모든 이야기... 김유신이 경주에서 싸웠는가? 의지왕 묘나 당나라에 끌려간 흑치상치는 낙양에서 묘가 출토되었다.

 필자의 <평창역사의 이해> 책에서 사천강 어원은 사비성의 사천현으로 사천현 평야지대에 사천강이 흐른다.

 

필자는 고조선에서 조선시대 주자성리학이 우리의 잘못된 사상관념과 근성을 만들고 패망의 원인은 주자성리학이고 서인이란 점과 매국노는 고종과 민비이지 이완용이가 나라를 팔다고 일본이 이완용을 믿을 것인가?

 세계사적인 시각에서 그레이트 게임의 막다른 구멍의 청일, 러일전쟁으로 인한 국제 관계론의 시각에서 이미 조선은 식민지화가 되는 국제 관계론이나  요즘 우리나라는 마지막 선거라는 칼럼도 있는데 어저께 일론 머스크도 이번 태통령 선거가 마지막 선거가 될 수 있다는 점, 이는 바이든의 민주당의 패륜때문이다. 이렇게 쓰면 우리의 좌똥구리들 빨끈할텐데 그러면 내일 이 글을 쓰도록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