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의병 3》
전 글 평창에서의 동학농민군 2차 항일 운동은 반봉건적 사회의 개혁에 의의를 가지는 혁명이지만, 한말 의병은 주자학 진영의 위정척사론을 이념으로 하는 유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충의정신으로 외세의 침입에 대해 유생들이 실천적이고 자발적으로 일어난 구국 항쟁의 민족주의 운동입니다.
한말의병은 후일 독립군으로 이어지며 양반과 농민이 합세하여 나라를 구하려는 구국일념으로 민족이란 카테고리를 형성하게 되었다.
한말의병은 당시 외세의 영향에 따라 시기적으로 전기의병. 중기 의병. 후기의병으로 구분됩니다.
1) 전기의병의 을미의병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항거하여 전국적으로 봉기가 일어납니다. 그 중 호좌(제천 지방)의병은 의암 유인석을 대장으로하는 화서학파의 의병이다.
화서학파란 퇴계 이황 선생의 주리론을 잇는 학통으로 화서 이항로의 척사론에서 출발하며 성재 김평묵. 중암 유중교. 의암 유인석으로 이어지는 한말의 유교 학풍입니다.
여기에 평창에서의 을미의병으로는 강릉의 민용호 의병장 아래 평창.영월.정선지방의 포수들로 구성된 의병들이 영동 9군 창의소를 설치하고 강릉부 경무관 고준서을 처단히면서 기세를 높였다.
또한, 제천 호좌창의진 휘하 이필희 의병장 부대는 주천 거주시 평창군수를 처단하였다
당시 평창군수는 아전 출신의 엄문환으로 평창의 동학항쟁당시 평창 동학도 18명을 죽게 하여 군수가 되었기에 탐괸오리로 처단하였다
* 중기의병은 다음 글로 합니다.
* 포수란 각 마을에서 공동으로 사냥시 총을 쏘던 사람들입니다.
* 의병의 무기로는 화승총입니다.
화승총은 장약을 비벼 말아고 그 속에 철환을 넣으며, 당시 성냥도 없던 시대에 불을 장약에붙여 사격하며 사거리는 20m이다. 따라서 비가 오면 총을 못쏘고 적에 대패하게 된다. 일본 병은 38총으로 사거리 300m이며, 참고로 임진왜란때 조촘의 사거리는 50m이다.
《평창의병4》
한말 중기의병으로 을미의병 10년 후인 1905년 을사조약시의 의병으로 을사의병이라고도 합니다.
을미의병 당시는 제천 봉양에서 유인석의 호좌의병이 중심이 되었지만 을사의병에서는 원주의 원용팔 의진이 효시로 전국에서 민족적 의병이 전개됩니다.
원용팔 의진은 주천에서 70명의 의병으로 창의합니다. 그리고 의병을 모집하려 영월. 정선. 봉평. 홍천을 거쳐 원주로 진격합니다. 봉평에서 주둔시 영월이나 정선 보다 두 배로 많은 아홉 분이 참모 종사로 가담하며 의병도 가장 많이 참여 합니다. 그러나 원용팔 의진에서도 봉평 의병은 잘 조명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봉평은 당시 유림의 문향이란 점은 다음 글로 합니다. ㅜ또한 평창의병 연재의 마감에서는 봉평의 역사, 문화론 즉 봉평 레져문화의 나아갈 방향등을 피력해 보겠습니다.
본 페북에서는 자세하게 필하지는 못하지만 이러한 역사가 뭍어나는 레져 문화에 축으로 스토리텔링화에는 봉평은 물론 진부, 대화, 평창, 미탄까지 여러편씩 필자의 견해로 현 평창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합니다.
다음 글에서는 평창의 정미의병과 3.1운동을 서술하며 이러한 평창의병의 현재 우리가 지향하여야 할 방향들을 제시하며 그 다음 편에서 문향 봉평의. 나아갈 여러 방향등을 제시하겠습니다.
《평창의병 5》
※평창의 을사의병
을사의병은 을미의병 10년 후에 을사늑약에 대하여 일어난 중기 의병으로 원용팔 의진은 원주에서 출발하여 주천, 영월. 정선, 봉평. 홍천을 거치며 많은 의병을 모집하여서 원주로 진격시 정보의 누출로 원용팔 의병장이 체포되자 부대는 해산되었으며, 이러한 원용팔 의병 운동은 곧바로 전국적으로 을사의병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기폭제가 됩니다.
원용팔 의병부대는 주천에서 70명 의병으로 창의하고 영월. 정선을 지나며 그 세가 200여 명의 부대가 되었고, 봉평에서는 참모종사에 9명과 많은 의병이 가담합니다.
영월이나 정선에서는 참모종사로 가담은 3~4명에 비해 봉평은 두 배 이상의 숫자를 나타내는 바 앞의 글에서 <문향 봉평>이란 단어 수식을 한 것 입니다.
이 점의 이해에 다른 도표로는 회서학회의 자료에서 유림의병의 수는 75명으로 집계되는데 그 절반은 춘천 남면 유인석 의병장의 고향에 기계 유씨 가문의 의병들 입니다. (의암댐의 명칭은 이곳이 고향인 의암 유인석 의병장의 호에서 지명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화서의병이 많은 지역은 봉평으로 9명의 참모종사로 이는 타 지역 군단위 보다도 두배 이상의 수치를 나타내기에 을사의병에서 봉평은 의병의 고장이며 그 원동력은 봉평 유림에 있습니다. 또한, 을사의병이 해산되자 봉평사람 150명에 봉평의병장 최돈호의 의병부대가 태동되고 전투를 하다가 최돈호는 전사합니다.
봉서 신범선생의 봉호재. 조사정의 서당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여러 학문들에게는 강론을 하였으며. 이러한 학풍은 태은 추성구 선생의 포촌여숙. 우제 이기주 선생의 우은당등 여러 서당으로 이어집니다.
봉평 의병의 바탕에는 유림학풍에 교육의 영항때문으로 봉평사람들은 모두가 극난극복의 구국의 의병 활동을 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필자는 봉평을 <문향 봉평> 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 입니다
봉평에도 의병장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150여명의 봉평인들로 구성된 의병부대도 있습니다. 이 글과 정미의병. 평창의병 총체적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고, 이러한 전반적인 역사배경을 이해하여 역사가 뭍어나는 스토리텔링화란 관점에서 "봉평 문화 제언"을 피력하겠습니다.
(※ 멘트: 원용팔 의병장은 서울 평리원으로 압송되어 일본 순사는 회유책으로 말하길 "다시 의병을 안한다면 풀어주겠다 "고 하자 원 의병장은 내가 나가면 서울 4대문 을 빠져 나가기도 전에 다시 의병을 할것이오. 그리고 다시 투옥 다음해 봄 경성감옥에서 옥중순국을 합니다. 곧은 절개와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충정입니다)
그리고 한말의병 중 가장 용맹스러운 의병은 평창인 나시운 의병입니다. 이 이야기는 후일에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지난해 평창군의 억대 예산으로 몇 편의 사서를 출간하였는데 동 책에서는 을사의병인지 줄도 모르고 추성구 선생은 원용팔 의병의 참모종사란 점만 계속 쓰고 있는데 이것이 지금까지의 평창의병 기록 딱 한 줄 입니다.
또한 동 책은 약 30여 항목이 오류이며, 오 논술이 되었기에 이 점으로 평창역사를 이야기 하는 점은 주의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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