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의병 6》
※ 평창의 정미의병
정미의병은 1907년 고종퇴위와 정미 7조약에 군대해산등에 항전하는 의병입니다. 평창의 정미의병은 김덕제 의진에 의해 대화. 평창에서 일어나지만 우선 봉평 의병을 이야기를 합니다.
<봉평 의병장 최돈호>
1905년 원주에서 거의한 원용팔 의진에 평창의병장 이진용. 조맹선도 가담하였으며. 원용팔 의병이 해산되자 평창과 인제에서 해산군의 2차 의병이 일어납니다.
최돈호 의병부대는 봉평사람 150 명으로 구성되고 평창. 강릉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 1908년 5월26일,,,, 의병 최돈호등 80여 명이 강릉군 옥계면 천남리 부근에서 강릉경찰서 및 수비대와 교전하여 의병 19명이 전사함
* 1908년 6월16일.,,의병130여명이 강릉군 정착동에서 강릉수비대 토벌대와 교전하여 15명이 전사함
* 그해 11월 민긍호 부대와 합류하며 강릉시내 교전에서 최돈호는 사살되었다.
독립운동사 자료집. 폭도사 펀에서 최돈호 부대를 적도라 하지만 그 기록은 없으며 무뢰한 화적이 부화뇌동하여 소란을 피우는 행동도 기록한바 자칫 최돈호 부대를 잘못 오인할 수 있기에 필자는 강릉문화원의 항일 전사 기록을 찾아 최돈호 부대를 바르게 보충 기록하는 것입니다.
화적이 의병으로 둔갑하여 양인을 괴롭히는 예로는... 이강년 부대가 일제의 포위망을 피해 봉평 추향에 주둔하면서 봉평의 충재 오인영과 태은 추성구 선생의 안부를 묻자 정병화란 자가 의병이라 자칭하고 무고한 사람을 학살하는데 오인영.추성구 선생도 매를 맞고 병석에 누웠다 한다. 이러한 예로 볼 때 화적, 산적과 최돈호 부대는 구분해야 한다.
또한, 일각의 기록에서 최돈호는 북평면 봉평리로 기록되었기에 정선의병이라고 한다. 하지만 조선 말의 행정 편제로는 1906년에 강릉대도호부에서 대화. 진부는 평창군으로, 도암은 정선군으로 이관되며 당시 방림은 대화면 방림리였고 봉평은 진부면 봉평리 였습니다.
예전 저의 글에서도 이 문제를 논 했습니다.
정선군 봉평리라고한 점에 문제는 봉평리가 1906년 강릉에서 평창으로 이관됨에 행정자료가 신속히 수정되지 못해서 당시 취조하는 일제 고등계 형사의 오류인듯 합니다.
이어서 다음편에선 한말의병의 전개상황으로 보는 봉평의병을 이야기합니다.
《평창 의병 7》
※한말의병 속의 평창의병
전 글에서 북평면 봉평리라는 기록에 의해 최돈호 의병장은 정선군으로 기록하지만 원용팔 의병의 해산군이 2차로 평창과 인제에서 봉기했다고 기록핲니다.
당시 재판기록의 하나엔 일인 고등계 형사는 왜 평창을 정선이라 그러는가? 열등의식을 갖고있는가 하는기록도 있습니다만... 최돈호 의병부대는 물론 봉평사람들로 구성된 의병일테지만 이 기록에 더 확증적 사안을 찾아 기록하겠습니다.
그러면 을사. 을미. 정미의병에 평창에서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일까요? 이 점에 대해 한말 의병상황을 개괄적으로 이해해 봅니다. 한말 의병은 전국적으로 봉기하여 의병 사상자는 10만으로 추정하며 일본군 수비대는 일만 명 사상자가 발생하는데 그중 강원도 의병은 수비대 2천명을 사살하는등 강원도는 가장 치열한 의병활동이 전개되었으며 그 중심지는 강원 남부와 제천의 호좌의병 입니다.
이들은 유림의 화서학파로 위정 척사론으로 이는 개화란 점의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하지만 당시 시대상황에 왕조 이외에는 모두다 배척하는 척화주의로 당시에 국론을 주도하였으며 유림의 의병에 농민들도 국난극복을 위해 적극 가담을 하였다.
한말 강원도 의병은 50여개로 영진의 고정 주둔지보다는 감시를 피해 소규모 단위부대로 구성되어 산간을 넘나들며 활약하였다. 따라서 평창은 강원 남부의 의병 활동의 한 복판에 있었으며 봉평은 아래 지도에서 볼 때 관동대로에서 멀리 벗어난 지역 (관동대로는 대화 신리에서 모노치 재를 넘어 진부의 길임)으로 단위기관 시설이 없는 자연취락 구조로 단발령 시기에 유림들의 은신처가 되었으며. 봉평에서 일제 수비대와 충돌은 없었기에 이 고장 의병들은 외지로 나가서 활동하게 된 것입니다.
◀진부면 봉평리 측지지도(1911년 측도) . 행정단위의 각 기관들이 없는 자연부락 상태입니다. 따라서 이전인 1907년에 봉평에는 일본인이 없기에 내 고장이 아니라 나라를 구하고자 의병들은 밖으로 나가 싸운 것이다.
▶봉평면 측지지도(1915년 측도) , 이 지도에서는 면사무소와 파출소가 보입니다. 그러나 전선과 우편국은 없습니다
범례 ; ㅇ는 면사무소. X는 파출소. ■는 가옥표시 . ㅛ는 논
※ 대화의 정미의병
1907년 일본과 정미 7조약에 의해 국권이 기울어지자 원주진위대의 특무정교(상사급) 민긍호는 김덕제와 함께 무기 1,800정을 탈취하며 봉기하여 병사를 이끌고 평창에서 분산하여 민긍호는 충북, 경기 방향으로 김덕제는 강릉. 양양 방향으로 의병 활약을 합니다.
김덕제 부대는 8월 14일 평창을 점령해 8월 3일에는 대화에서 체송인등 3명, 5일에 평창에서 우편 취급인 2명을 살해하며 민중항쟁에 큰 힘을 주었다.
또 하나의 지방사 이야기로는 대화 면사무소 옆 체육공원이 사형장 터라고 전해 내려온다. 이 이야기와 같은 기록은 '97년 대화면지의 기록에서도 볼 수 있다.
물론 당시 면지는 오류가 심하여 '22년에 발간된 대화면지에서는 역사물 자체가 생략되었습니다만 그래도 주목할 점은 대화에서 우편 체송원을 살해하는 의병부대의 활동이 지방인들의 항쟁에 큰 힘이되어 11월 23일에 지방민들은 의병으로 5명정도 되는 일인을 가해하려 하자 그들은 남산으로 도주하였다. 이후 일본 수비대가 들어와 집강 (면장급)등 12명을 체포하여 시해하고 시체는 화장하였다. 이는 당시 의병들은 대화인들 자체적으로 의병이 되어 상투위는 휜 수건을 쓰고 바지 저고리에 초혜(가죽신)을 신었다.
이 역사에 대해서는 당시 집강의 후손분 공만석(하안미 거주)의 증언이 있은바 이제라도 증언을 통하여 보완하여 대화인의 의병의 모습을 사관적 기록을 정립하여야 한다. 대화에도 일제 앞잡이가 있어 역사가 많이 뭍혀지고 후일 친일파라 소문이나자 자취를 감추었다 한다.
하지만 아직 두 세분의 증언을 통해 가능하면 순국자 12인의 명단까지 확보하여 땀띠공원 한 켠이라도 12인의 총이나 누각에 비를 만들어 그날의 역사를 기록하여 고장을 위해 목숨을 받친 이 땅의 선열을 기려야 하며, 내 강토를 지키겠다는 대화인 의병의 기상을 먼 후대까지 전승하며 대화 역사를 확충하여야 할 것이다.
◀1911. 상대화 ▶1915 대화면
《평창의병 종결편》
평창에서의 동학과 한말의병에 관해서 간단하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동학은 이제 한 지역의 탐관오리에 대한 항거를 넘어서서 보국안민과 애민애족의 정신을 함양하며 동학혁명으로 매년5월 11일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하였습니다. 동학은 척사논리등으로 외세에 대항한 것이 아니기에 의병이 아니라 혁명으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강원 남부에서 일어난 2차동학은 외세에 항거하였습니다.
동학의 마지막 격전지는 홍천과 평창의 후평리와 봉평의 사리평 전투입니다. 이로서 평창은 구한말 큰 역사인 동학의 종결지가 됩니다. 또한 한말의 전. 중. 말기의병에 강원도는 그 중심무대었으며. 평창의 의병은 그 복판에 놓여 있습니다.
지방화 시대에 평창은 우리가 주인이기에 출처가 광범위한 역사 속에서 평창의 기록은 전부 발췌하여 하나의 평창 의병사로 재 구성해여야 하는 역사의 소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세대인 유교주의 낀세대가 지나가고 젋은이들의 개방화 물결속에서는 이 역사들이 단절되기에 역사의 정립이란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또한 기념식장에서 애국가를 제창하고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을 하지만 정작 이 땅의 순국선열들은 조명되지도 못했습니다.
사형을 선고받은 황순팔 평창 의병장의 비문하나 있습니까? 국가 기념일로 정한 동학혁명에 전국적으로도 평창은 기념을 하지 않습니다. 이제라도 평창은 평창의병의 사관적 정립과 나아가서 모뉴먼트인 의병비를 조성하여 조국과 자유수호를 위한 평창 선열들을 기리며 이 땅의 기상을 드높여야 합니다.
이러한 점은 개인의 노력을 넘어서기에 평창군과 역사 유관단체들의 의향은 어떠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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