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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이스 북에서 평창역사

《월정사 팔각탑의 건립시기의 재 정립》

《월정사 팔각탑의 건립시기의 재 정립》
 
월정사 팔각탑에 여러 학자들의 고찰에서 많은 연구의 성과도 있었지만 지금까지의 연구에 본 탑의 건립시기를 11세기 초로 잡는 견해에서 지난 2년전에 조계종에서는 본 탑 기단 아래서 출토된 송나라 숭녕중보의 연대에 의해서 건립 시기를 12세기 이후로 조정 발표하였습니다. 

이로써, 월정사 팔각탑의 건립연대에 대한 새로운 고찰의 정립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의 동 탑의 연구 학자들은 다른 탑과의 편년적 고찰로 탑의 건립시기에 주안점을 두었습니다만 일반인인 필자로서는 건립시기가 왜 중요한지는 이해하기는 곤란합니다. 

월정사 팔각탑은 우리나라 1,200여기 탑중에서 최고 크고 탑파의 양식은 시대를 넘는 모든 양식을 가장 아름답게 구현한 탑으로 한 부분의 탑재의 편년적 고찰로 조성시기를 밝힌다는 점은 어패가 있다.

일반적인 여러 탑은 각 사찰마다 시대적 양식에 따라 조성되었지만 월정사 팔각탑은 한 사찰이나 지방세력의 힘을 넘어서는 점으로 동 탑의 건립에는 역사적 배경과 동기가 부여되었어야 하며, 탑의 조성의 의의와 그 효과까지 전반적인 문제를 다루어야 합니다.

따라서 필자는 동 탑의 배경적 역사, 즉 고려사 속에서 월정사 탑이 조성되는 이유의 타당성과 월정사 사적의 고 문헌속에 그 이해, 탑파 양식에 의한 고찰, 또한 탑의 조형론적 고찰까지 종합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며 앞으로 여러 학자들의 다각적 연구 방향을 제시합니다.

그 하나의 이해로 최충헌의 무신정권에 당시 중앙 불교. 스님들이 암살 모의가 들통나자
600명을 처형하였고 다음 왕은 모조리 쳐 죽였다고 기록하는바
최충헌은 이때부터 재야의 불교를 옹립하여 주며 박사논문에서는 명주군왕 김주원의 아들이 왕건 고려건설에 힘을 보태고 왕순식의 이름을 하사받아 월정사가 부흥하였다는 논지에는 반 합니다.

도선국사와 왕건의 만남에서부터
풍수적 이해와 신라의 왕족 정신. 보천태자로부터 월정사를 이해하였슬 것이란점

또한 성보박물관 세미나에서 탑과 보살상은 하나라고 단정하지만 필자는 조형양식으로 볼때 두개라는 견해이며

고려말 삼국유사에서는 구층탑이라 했고 동 시대의 학자 민지는 13층 탑이라 기록하였는데 이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하는 점과

민지의 기록에는 오천명이 모여 대 법회도 하였다고 기록한바  조선 후기에 강릉읍지에서 인구는 28.000명이며 당시 대화 방림 또한 홍천 내면 정선 일부등 강원도 절반의 땅이었고 강릉서 월정사까지는 이틀 걸어야 하기에 고려 말에 오천명이 월정사에 모여 법회를 했다면 이것은 지방 호족의 세력을 넘어 전국적이란 점으로 무신정권과 몽고의  9차 침입의 병화가 지나가고 다시 재건의 기치들 드는 모습으로 이해합니다

필자는 학자들의 단편적 이론은. 뒤로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월정사를 약 100페이지 분량으로 쓰고 있습니다

완성되면 링크로 올리고. 이제. 재미있는 부분 오대산은 신라의 왕자들 조선에는 이성계 이방원 양녕 충녕대군 세조까지 상원사와 관련한 이야기들

상원사는 헐리고 오대산 사고를 지으려 했는데 사명당이 지금의 자리에 짖는 사연
그외에도 지리산 공비를 빨치산이라 하는데 제 1병단 오대산루트로 남파되며

여러 글들이 있습니다만 지역적 분배로 미탄 평창읍 여행도   함께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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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사진의  숭녕중보는 2005년 문화유산 발굴조사단에서 석탑 주변지역에 대한 발굴조사를 벌여 토층을 조사한 결과 석탑 지표면 아래에서 편년(編年)이 확실한 중국 송대 (宋代)의 동전인 숭녕중보(崇寧重寶, 1102 ~1106)와 성송원보(聖宋元寶)를 발굴해 석탑 조성 연대가 12세기. 이후임이 밝혀졌다.

이로서 지금까지 학계의 건립시기. 특이 이의 박사논문까지도 묻고 다시 월정사의 위상을 정립해야 한다

(숭녕중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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