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패이스 북에서 평창역사

《장가간다와 시집간다의 원래의 뜻》

《장가간다와 시집간다의 원래의 뜻》

현재 장가간다 하면 신랑이 결혼하는 것이고 시집간다하면 신부가 결혼 하는 것으로 통합니다. 그러면 장가간다에 간다는 빼고 장가또는 시집이라고 말하디 어려운데 여기에~간다..~가다. ~간다. ~가냐등 꼭 접미어가 붙어야 뜻이 통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장가(丈家)란 뜻은 고려때 까지는 남자가 결혼한다란 뜻도 있지만 장인의 집을 말함이다그래서 장가간다란 점은 결혼하고 남자가 여자 집에 사는 것을 말하고 ( 이는 데릴사위나 남녀 귀가혼이 아니라 남자가 장인, 장모를 모시고 사는 풍습으로 재산권은 여성이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점이 모게사회이다)   이와 반대로 시집간다란 결혼 후 여자가 시집으로 와서 사는 것을 말하였다,

조선때 세종은 한성부윤으로부터 요즘 여자들은 친영을 안합니다라고 듣자 김종서에게 친영이 뭐요하고 물었다그러자 김종서는 요즘 여자들은 시집을 안간다는 이야기예요하고 말하자 세종은 왈.. 아니 요즘처럼 시집을 안가다니, 아니 무슨 요망스런 말인가 하고 다그쳐 물으니..
 
김종서는 부연 설명으로 결혼을 하면 남자가 여자 집에 와서 사는풍습으로 이를 남자가 장가간다고 합니다.  이에 놀란 세종은 왜 남자가 여자 집에가 살아야 하는가?남자 집에 살아야 하지 않켔는가 했더니 김종서는 이르되 고려 때에서부터 내려오는 풍습입니다그런데 남자가 신부를 데리고 와서 살기에는 남자 집안의 경제적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그것은 조상시대에는 모든 재산을 여자가 관리하는 모계 가정을 이룬다는 뜻이다.
(우리 민족도 고대에는 기마민족이었다고구려 벽화에 말을 타고 말 머리에 가리기 때문 뒤로 돌아 활을 쏘는 모습은 10년을 연습해야 된다는 아주 용맹스러운 모습이다. 우리민족은 기마민족은 아니지만 이러한 기마민족은 모계 사회이고 이들과 융화된 고대사회는  전쟁등으로 또한 옛 강원도는 예맥족은 곰과 호랑이를 토템으로 하는 모계사회였다.)

<신부기 남자 집으로 시집온 최초의 사례>
이에 세종은 그러면 장가가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시집으로 시집와 살아야 하기에 왕족이 먼저 여자가 시댁으로 시집가는 시범을 보여야 한다고 했다. (조선은 유교국가로 가부장제의 나라였기에 세종은 여자가 아닌 남자 권의의 시대로 시집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친영”(신부가 남자 집으로 오는 것)에 대하여 세종실록 세종 12년(1,430) 12월 22(무자)에 친영의 예를 행하는 것에 대하여 김종서에게 이르다 라고 기록하며왕족인 조카( 방원의 손주)를 시범으로 시집보낸다. 이것이 우리나라 가장 처음으로 남자가 장인집으로 장가를 가지않고 신부가 남자 집으로 시집을 온 최초의 사례이다.


하나의 제도가 문화로 정착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겠으며오늘날엔 남자가 장가를 가지 않고 여자가 시집을 온다는 조선의 유교적 국가의 가부장제도의 문화를 만들었다. 
하지만 조선은 공자의 유교국가이고 중종때는 주희의 성리학도 들어와 명나라가 망하고 조선이 소중화즉 송시열을 공자 이후의 송자라고 하듯이 이러한 주자 성리학자들은 양반노비사농공상의 중인천민 남녀등 신분적인 계급적 사회를 만들며 여자들은 모두 이름이 없는 것은 남녀에는 상하 계급의 존재란 뜻이다따라서 필자는 조선 중기 주자성리학 사회에서 볼때 유교적 가부장 사회이기에  필요에 의한 데릴사위제는 있었지만 남녀귀가혼이란 역사적 기록은  찾지 못했다. 따라서 필자는 심사임당 한 세미나에서 주장하는 남녀귀가혼이란 정확한 사례를 예시로 기록하여지 학자로서 평창을 모함하는 글로서 간주된다.

https://blog.kakaocdn.net/dn/W2D7x/btsHwOxcKMZ/kKXDKmkUXU4flC53kxpGR1/tfile.pdf     <  "율곡의 고향 판관대" P377~388>

이 글은 실록에서 발췌하여 필자의 책인 (평창 역사의 이해)에 신사임당과 율곡의 고향 판관대 편에서 학자들의 남녀 귀가혼이란 설을 반박하는 예시로 쓴 글로 신사임당의 봉평에서의  4년 설은 20년 설에 포함되는 것인지아닌지에 계산적 이해가 곤란하며. 10년 설도 그 출처가 없는데 20년 설도 역사가 아니라 편견적인 이야기일 뿐으로 해석된다고 실록의 역사를 통해서 학자들의 이론을 반박하였던 역사소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