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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 이효석

Re: 봉평인들은 가산 선생님을 어찌 하려는가??

 

             [ 나는 가산 이효석 선배님을 이렇게 생각한다 ]

                                                                                                  

                                                                                                       후세백작 09.02.15 10:40

윗장의 과거사 정리에 이어서 오늘은 가산 선생을 우린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스스로 자문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우선 과거사 정리의 단체란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만약 한 예를 다면, 5,16

혁명은 누구나 잘 알고 있고, 그에 지금도 찬, 반의 의견이 엇갈리는 듯하다.

 

지금 논하고자 하는 것은 5,16을 예로 들어 5,16 이후에서 바라보는 잣대가 아닌 혁의 모습으로

상기해 보면, 당시 분열되어지는 조국의 혼탁한 정세를 그냥 보고 있슬 없었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한 것이다.

 

만약 거사가 실패로 끝난다면 모두들 죽음을 면치 못할진대, 그 혼란한 시기에 일신의 영도모코

함은 아닐 것이었다. 이렇듯, 모든 역사는 이후의 잣대로 보아서는 아니 된다.  당시의 여건과 저변

이해와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 과연 과거사 규정 단체에 의한 역사 단죄만이 올바른 역사 판단일까??

또 그들은 매국노만 가려서는 과거사 정리일 수도 없다. 물론 을사오적등  분명한 가름있어야

하지또 한 손엔, 조국 광복의 공로자들을 발굴하고 그들을 대우해 주어야 한다.

 

평창엔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 중에 이필주 옹의 독립유공자 가족이 살고 계시다. 이필옹이 옥사

여동생인 어느 선배 어머님이 독립훈장 수혜자로 3,1절 기념식에 TV 화면에 맨 앞에 모습이 보인다.

또한, 우리가 평창초교 시절 현관에 의 독립운동가 이승노 옹<이종우 동창의 조부님>의 초상화도

모셔져 있었다.

 

하지만 이분들을 평창 사회가 얼마나 알고 대우해 주었을까??

나의 고등학교 시절까진 3,1절 행사에도 이런 독립유공자의 후손들이 한번도 안 보였다.

과거사 위원회란 이 양쪽을 전부 도모하여야 하고 독립정신을 이 사회에 유용한 정신으로 계승시킴이

좋지 않을련가??

 

또한 과거 일제 강점기하의 여러 형태를 하나의 잣대로 볼 수는 없지만. 그 규정을 함에는 위의 5,16의

인용 예처럼, 그 이전의 시간대로 생각을 거슬려 올려야 한다.

윗장에서 논한 것처럼 우리의 일제 강점기 하에서는 2차 대전의 독일전에 프랑스와는 판이한 성격을

고 있다.

 

과거사 위의 어느 분이 100분 토론에서 프랑스의 전범 재판을 이야기 하던데, 우린 그런 델로 우리의

사를 규정한다면 혹시나 크나큰 과오를 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전쟁은 국가가 먹고 먹히는 존재론의 시간대이다. 하나 일제 강점기란, 이미 강제 허위조약의

와 그 이후의 국가가 존재하지 못하는 강점기 아래의 세대들도 있다.

 

물론 을사보호라는 거짓 조약의 체결시기엔 우리의 선각자분들의 죽음을 무릅쓴 항거도 있었다.

그분은 강점기 이전세대로 당시 제국 열강들의 세계 식민지화를 잘 알고 있었다.

우린 헤이그 밀사를 보낸 만국평화회의는 열강들의 점령지 분활 약속이란 것 아니었던가?

( 나의 가슴속에 가장 강렬한 분은 이상설, 최재형이며 ....)



 

36년의 일제 강점기엔 세계를 볼 수 있었던 우리의 선열들이 많이 계셨지만, 이후 강점기 하에 태어나

본 강요의 주입식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에서 일본 사상성의 탈피란 쉽지 않았슬 것이다.

또한 입지전적으로 자기의 능력을 발휘하기란 용이치 못했슬 것이다.

 

즉, 나라 없이 태어난 세대에 어린 학생들 일제의 한국 말살 정책의 주입식 교육에서 그리 쉽게 탈피할

있었슬까 하는 문제인 것이다.

그들의 꿈과 희망은 무엇이었슬까??  또한 이를 잘못이라고 사회적, 제도적 교육도 없이 무조건 콩

콩이 아닌 팥 나기를 바라는 처사가 아니겠는가??

즉, 일제 강점기 하에서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민족교육의 함양도 없이 무조건 애국만 바라는 콩 심지도

않고 콩나기를 바라는 뜻이 아닌가??

 

가산 선생은 이 시기에 평창 보통공립학교( 평창초교 전신)을 다니며 어려서부터 일어와 일제 문화를

배우며,성제대 졸업후엔 처녀작 ( 노령근해)의 발표와 실직의 궁핍한 생활 속에 일본 은사의 천거로 잠시

취직하였고, 이때 “녹색탑”이라는 일어로 쓴 소설이 조선 총독부의 내선일체에 동조하지 않았냐 하는,

<봉평 문인 대회의 어느 연사의 표현인용 > 하는 소설을 발표 후, 아마 유진오를 비롯, 유치진 등 많은

선배 동문들의 충고가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그는 직장에 사표를 쓰고 처가인 경흥에서 교편을 잡으며 경제적 안정속에 문학적 변신을

가져온다. 이후, 평양에서의 그의 생활상을 보노라면, 대조적으로 그의 마음속엔 가장 한국적 생활의

열망과 그 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수행과정의 승화가 그의 문학작품을 빛내게 하는 것이

아닌가?? 여기엔 모두들 이의가 없슬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일제하의 잔존 상태들의 무엇을 청산해야 할 것인가??

매국노는 말할 것도 없을뿐더러, 조선인과 국가에 큰 피해의 영향을 주지 않은 사례들의 큰 가지의

착오가 아니라면, 가산 선생의 이러한 부분들은 종아리의 찰과상 같은 아의 오류로 우린 이것을

랑으로 봐 주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저는 종교인은 아닙니다만, 사랑이란 인류를 행복하게 만드는 최고의 사유적 행동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가산선생을 反하는 일전 봉평의 어느 강사분처럼 우리가 모든 역사의 버플을 단정함에는 그의

발생할 것입니다.

그 첫째는 윗장의 글을 이해하면 우리의 역사가 일제 강점기엔 토막으로 잘려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광역의 해석으로 바라 봐야 하지 않겠는가??

일전의  어느 글에 예를 다시 인용해 보면---

서기 일년에 대 로마제국엔 게르만 민족의 헤르만이란 용병을 로마제국의 작위까지 수여하고, 그를

믿으로 그에게 게르만 병사를 주어 부족단위의 게르만(독일지역)을 침략하는 출정의 선봉에 세우

미엔 로마의 3개 군단이 따라가다,

헤르만의 반동과 게르만 부족의 단합으로 로마 3개 군단을 초토화시키고, 이 단합이 지금의 독일 민족과

영토로 이어지는 분깃점을 만들었는데, 그를 로마제국에 봉사하는 이단자로만 처리할 수 있슬까??

 

모든 일은 그것이 무르 익을 때의 충족함에서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윗장의 무용가 최승희도 그러할 것이고, 우리 가산 선생도 그러하다.

가산 선생의 일본어 소설도 그 아픔의 참회로 인하여 더욱 빛나는 자연주의의 보다 순수 문학의 장르

척하였던 것이다.

 

이것을 후대의 우리가 사랑으로 보아주지 않는다면, 우린 거울을 잃은 者이다. 

거울을 잘 닦아야 스의 모습을 훤하게 드러낼 수 있는데. 거울을 잃은 자는 자신를 잃는 자 아닌가?

자신을 잃은 자의 거울 속엔 래에 무엇이 보이겠는가??

 

분명 가산 선생의 문학에 反하는 봉평의 문인대회에서의 그 연사분은 봉평마을에 그런 함이 한번

지 알고 싶다. 봉평 장에선 무엇이라 말할른지 모르겠다. 

혹 양서류두 개의 혀 같은 두 개의 말로 표현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다. 이 부분의 다시 한번 재고의

생각이나 냉철한 판단이 있으면 좋을 듯하다.

 

혹, 가산선생의 모교에 동상하나 못 세울 위인의 가산 선생을 봉평은 팔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편린의

조각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면, 봉평은 지금 가산 선생님의 추모행사들을 접고 메밀만 갈아 팔아야 하지 않켔는가??

분명한 것은 봉평이 잘못이든, 그 연사의 아류이든 둘 중에 하나는 옳은 것이 아니라면, 이 또한 이런

배반적인 만들고 있는 것이다.

쬐금 안다고 아집을 표출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그 동상 하나 없어도 그만이지만,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평창을 저해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가산문학의 알림은 가산 선생의 따님의 분투가 있었기에 오늘에 가산문학이 전하여지는 것이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고 유진오 선생(고대 총장 역임)의 집에 기거하였지만, 선생이란 당시의 적은

봉급에 다섯 형제와 같이 하기엔...그래서 고아로 나오게 되며, 그 고생 끝에 아버님의 소설을 수소문하여

출판사까지 차리고 두 차례 문집을 간하고, 당시 출판업계의 전례대로 부도를 내며, 지금호동 어느

전세살이에 그것도 병원비가 부담이된다는데, 또한 80년 초 가산선생의 묘를 파주로 이장할 때 통일 후

고향 평양으로 모신다는 유족들의 의향에서 파주까지 모셨다.

 

그분의 선친의 고향이 평양이지 가산 선생의 고향은 어디인가?? 

그럼 봉평은 가산 선생님을 위해서 무엇을 선양했는가??

가산 선생의 맑고 순수한 문학처럼 밝고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메밀꽃의 고장평은 올해에도  메밀꽃

제기간은 아마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열흘간 축제를 하고있다.

산야를 돈도 안되는 메밀로 물들이고, 아름답게 가꾸는 마을, 또한 순수히 여행객을 는 메밀꽃의 웃음,

이 얼마나 아름다움인가??

물론 좋은 일이지만, 그 내실의 거울은 안 닦은 것 같다.

거울이 흐리면 무엇을 바라수 있단 말인가??

이제라도 정말 맑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봉평을 만들었으면 이 일엔 우리 군민 모두의 화합과 미래로 향하는

혜안이 있어야 할것 같다.

                                                                                             ----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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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자료>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될 4,776명의 명단/문학 [41명]
곽종원 김기진 김동인 김동환 김문집 김사영 김성민 김안서 김영일 김용제 김종한
노천명 모윤숙
박영희

박팔양 방인근 백철 서정주 오룡순 유진오 윤두헌 윤해영 이광수 이무영 이석훈 이원수 이윤기 이찬

임학수 장덕조 장혁주 정비석 정인섭 정인택 조연현 조용만 조우식 주요한 채만식 최재서 최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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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자료는 일전 과거사 규정 단체에서  친일 매국노 규정한 명단에도  이효석은 없다.

봉평 문인 어느 강사는 이효석의 소설 녹색탑이 친일 내선 동조라는데 이는 혼자만 주장하는 

反 평창인이런가 한다?? 왜냐면 그런 점은 위의 글대로 종아리 상처의 아픔쯤으로---

후대인은 민족의 비극 속에서 아픔의 사랑으로 보아도 된다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시인 남태식 님의 시>

 

죽은자들은 산 자들의 짐이다.

살아서 흘린 피

살아서 남긴 욕

살아서 피운 꽃 모두 짐이다.

 

어찌 보면 반 민족행위 처벌법도 공소 시효가 지났다.

우리가 원류의 매국노를 규정함엔 모두들 이의가 없겠지만, 누가 저 여인을 돌로 칠 수 있다고

자신 하는가?? 물어본다.

변절도 한 민족의, 한 시대의 비극이 그들에게 추문 될 수도 없는 것이다.

한 시대의 민족적 비극을 고뇌하면서 살다간 민족의 양심이었다 생각한다.

 

봉평 문인대회의 강사에게 묻노니...

그대는 가산 선생을 녹색탑의 자료로 친일에... 라는, 이는 모교에<평창 초교> 동상 건립의 저지 자료로

의도한 경향으로 보인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강연이 주효하다면, 지금의 봉평이 이효석의 메밀을 파는 작태는 반민족적 행위라

스스로 누워 침을 뱉는 모습이 가련하다. 

분명 이에 답은 있어야 봉평인들의 폄하에 누명을 벗으리라.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의 천부께서도 너의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 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 하시리라.”(마태복음 6장 14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