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기종님, 안녕하세요??
선생님의 평창을 위항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일전 "평창참여"란 카페에 줄탁 詩도 잘 보았습니다.
오늘 제가 묻고자 하는 것은 가산 선생에 관한 것입니다.
가산 선생은 저의 모교인 평창 국교의 4-50년 선배님입니다. 아마 평창국교 출신으로 최고의 천재라 자부할 수
있습니다.
부자도, 사회 역량있는 지도자도 많이 배출하는 사회이비만, 문인으로 시대를 넘는 크리에이티브라는 창조성이야
시대의 선구자이고 문화창달의 기수가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가산 선배님의 모교에 그의 동상건립 문제와, 일제시대에 그의 좀 다른 문제때문에 동상 건립 취하라는
얘기를 알고 싶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 무엇이 문제였는가?, 또한 혹 억울한 분위기가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만약 가산 선생이 오늘
살아 계신다면 좀 슬픈 마음을 느낄 수 있지 않나하는 생각입니다.
가산 선생의 이야기는 모두들 잘 알고 있는 내용이겠지만 저의 해석은 좀 다릅니다.
가산 선생은 평창 초교의 전신인 평창 보통학교 졸업 후 현 경기고, 서울대 문학부를 졸업하고 "노령근해"라는
작품을 발표하며. 일본인 은사의 알선으로 취직하였다가 눈총을 받자 곧 사표를 수리하고, 그나마 실직하게
되자 처가 동네인 함경도 경흥의 작은 학교 선생으로 가게되어 생활의 안정으로 그동안의 문학적 사조를
훌렁 벗어버리고, 자연주의 계열, 순수문학이 싹트고, 평양 대동공업대 재직시에는 생활의 안정속에 순수문학을
꽃피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때 일제 강점기와 또는 카프 문학계열 어느 것이 문제였는지 알고 싶습니다.
<카프>는 프롤 혁명의 공산주의 지향의 문학 운동으로 유진오, 유치진등 다수가 움직이던 한 사조로 4-5년정도
흐르며 1930년대 일제는 강압으로 해산시킨 장르라 배웠는데. 이것이 지금 현 공산주의와 같다는 견해입니까??
그 당시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국가를 탈피하고져 하는 신 사고였을까 하는,,,
그때로서는 지식인들의 생각엔 까즈라. 테프트 밀약으로 남의 나라 나누어 먹는 행위로 자유주의는 못 믿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만약 당시로써는 이런 생각이 당시 지식인들의 의식이지 않았슬까? 하는게 저의 의문 입니다.
그 후로 공산주의 정체성이 확연히 들어 났지만 당시로선 좌와 우의 흔들림의 출발점의 시행착오로 , 또한 일제
강점기 탈출의 한 창구로 보아 줄 수 없지 않나 하는 것과 그 혼탁한 시기에 자유주의, 또는 공산주의가 지금처럼
명확지 않았슬 것이고 또한 1905년에 까즈라, 테프트 밀약으로 그것이 비밀이라 우린의 지식인들이 몰랐다면
미국도 그 후 우리에게 그런 분위기를 띄우지 않았나 하는 느낌으로 <카프> 문학사조에 관한 우리들의 이해관점을
좀 바꿔야 한다는게 저의 소견입니다.
일전 사회적으로 일제 청산, 매국노 규정 등 논란이 있을 때 저는 저의 동창 카페인 "평창 22, 25"에 <최승희와
안익태를 어떻게 보아 줄 것인가?> 라는 글을 게재 하였습니다.
분명 가산 선생의 그러한 부분들이 있다면 , 저로서는 그것은 아무 문제도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일제 강점기 시의 명확한 구분은 있어야 합니다. 물론 잘 아실 것 입니다만, 이완용이 옥새를 훔치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럼 미우라 공사 앞어서 총리 대신 한규설등은 처자 3족이 굶어도 강경하였는데, 이완용은 굶어
죽을까봐 가만이 앉아 있다가 한일 의정서에 이름 올라간 소인배 매국노라 규정은 해야겠지만, 가산선생이 혹
무엇인지 또는 카프에 가담이 화근이라면, 납북되었던 정지용 시인의 시를 우린 이제 노래로도 부를 수 있지
않습니까??
제주 4,3 사태는 요즘은 추모제도 올립니다만 지지난 공화국까지는 이 사건을 정부의 변으로 대한민국 국가 수립
이전의 일이라 하여 4,3 사태의 글을 쓰던 제주 출신의 작가는 일본으로 가고 절필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그후 고원정이라는 제주 출신의 유명 작가왈,,, 이건(4,3 사태)나의 임무는 아니고, 나로서는 쓸 수 없다. 나의 윗
세대에 남겨진 것이라는..,,, 그것의 소설은 고원정 작가의 말은 맞겠지요.
가산 선생은 그 이전의 일이고, 이일들의 설명은 제가 안익태라는 글을 다시 올리면 일제하의 매국노란 규정에
관한 저의 생각을 느끼실 수 있슬 것 입니다.
제가 이 글을 길게 설명하는 것은 이런 부분들을 잘 이해해 주시고 혹 그런 모순이 있다면, 가산선생님의 영어가
되는
부분을 풀어 드리는게 우선 과제라 생각합니다.
또한 영월은 동강과 김삿갓의 문화 기행이 널리 알려져 있는데, 아마 평창보다 관광객의 숫자가 많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동강의 비경만큼 서강도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럼 서강이 알려지지 않는것은 평창인들의 가꾸지 않았슴과
인식력의 부족함이 아닐런지요.
또한 영월은 김삿갓의 고장이라는데. 제가 알기로는 김 삿갓은 양주 태생이지만, 전국 어디에도 풍류를 읊고 다닌
전국이 전부 그가 사랑하는 고향 입니다. 다만 상동 어디메쯤에 무덤이 있슬 뿐,,,
묘 하나 가지고 그이 모든것을 다 팔고 있는데...후세 사람들이 그를 고향으로 모시지 않는것은 그의 고향가기를
속죄양으로 꺼렸슬 것 아닌지.
1980년대 영월 박영국 문화원장님이 상동에 이름없는 묘를 답사하시고, 이의 기록을 찾아내고 이를 사학계에
문의하여 김삿갓의 묘로 인정받았는데....
그때쯤 우리 평창에선 장평 고속도로 확장으로 가산 선생의 묘를 군청에서 이장할 경비 문제로 시름할때 가산
선생님의 따님이 그럼 고향으로 가는 길목, 파주쯤 공원에 임시라도 이장하여 통일 이후에는 평양으로 모시고
간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평양의 그의 부모님들이 고향이고 이효석 선생님은 분명 평창 출생이다.
서양사람들은 내가 어디쯤 군수하면 그 고장에 묻히는게 영광이다. 그러나 좀 속된 표현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개마고원 넘어 산골짝 군수 한번 하면 고향으로 돌아와 그가 죽은 후에도 칠성판에 군수 누구라고 하늘나라에서도
끔직이 자랑한다.
즉 동양인들은 고향으로 회귀성이 있다.
도연명이 마흔 한 살에 시절이 수상하니 나 이제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가면서 詩 한 수 "귀 거래사"를 읊지
않았습니까??
혹 이건 가산 선생님 유족들에게 그분의 가정사로 외람된 얘기이지만 통일 후 평양으로 모시고 간다면, 그리고
지금은 연고가 없는 임진강 상에 북녘을 바라보시고 계실 그의 묘라면 참회를 하고, 그의 고향으로 다시 모실 수
있지 않나 하는 점입니다
가산 선생인의 자녀분 중엔 아마 지금 칠순 넘으신 따님이 이젠 할머니로 그간 아버님의 글을 모아 전집 발간하려고
서울대등 당시의 동문, 후배들에 수소문하여로서 선생의 글을 찾아서 두 번이나 전집을 내시고, 그로인해 당시로선
인지세가 미약하여 출판사도 부도가 되어 재산의 소진으로 몰락되고 지금 노년에 전세방으로 긍긍전전 고생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린 그것도 무시하고 메밀꽃과 가산 선생님 문학의 고장이라고 똥 딱지못한 구린 소리만 한다면, 이도 또한 외람된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분명 영월의 동강과 김삿갓보다 더 좋은 위치를 점하면서도 그들에게 뒤지고 있습니다.
이런 종합적인 재 검토에서 가산 선생님에게 떳떳한 평창인으로 또한 평창국교 후배로서의 예의가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그럼 윗부분의 가산 선생님의 제가 알지 못하는 부분들 혹 알고 계시면 답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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