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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 이효석

Re: 메밀꽃 필 무렵에 봉평사람들은??

 

Re: 메밀꽃 필 무렵에 봉평사람들은??


                                                                                                         

                                                                                                              후세백작      09.03.04 09:15

가산 이효석 선생님에 관한 글을 잘 보았습니다.

그러니 가산 선생의 아버님은 진부면에 근무하다 서울로 올라가서 교편을  잡으셨고, 2년 만에

다시 진부면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이때 가산 선생은 진부 출생으로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갔다가 4살 때 봉평으로  이사해서  6살 때

평창에 하숙하면서 평창초교를 다녔으니 사실은 봉평엔 2년 살았군요.

봉평은 돈도 되지 않는 메밀꽃으로 산하를 아름답게 단장하고, 가장 시골스런 정취를 자아낸 고장

이지만, 기실 가산 선생에겐 무얼 보답했습니까??

 

가산 선생의 장녀가 동문, 후배를 찾아다니며 원고를 수집하고, 출판사를 인수하여 두 번의 전집을

만들며 재산을 소진하였는데, 이후 영동고속도로 확정시 이장비가 만만치 않아 파주 공원묘원으로

임시 이장하였다.<80년대 강원일보 기사>

 

후일 통일이 되면 고향 (선친의 고향) 평양으로 다시 옮기려는 의도였는데, 기실 가산의 아버님

이시후 씨는 가산 선생이 평양에서 돌아가게 되자 그의 시신을 그의 출생의 고향인 진부로 묘를

정했던 것인데, 영동고속도로 확장에 의해 그의 묘가 이장해야 할 때, 군은 예산 탓이라면 봉평

사람들은  이 부분에서 엇을 했는가??

 

가산 학관을 내려와 흥전천의 조그만 다리를 건너 충주집으로 가는 가산의 공원에 생가와 소가

같이 있다면 얼마나 더 보기 조을까? 마치 서정주 선생은 생가 건너편에 묘소가 있옆엔 문학관

이 있어 하나의 미당 선생의 세계를 그려보는 느낌인 것이다.

 

가산 선생의 문학적 세계는 봉평에서 평창 보통 공립학교(현 평창초교)를 다니면서부터 이루어

것이다.

가산 선생의 향토적 냄새는  평창초교 시절 하숙을 하며 봉평의 생가까지 주말이나 방이면100

여리를 산길과 개울을 건너 걸어야 했고, 늦은 밤에 집에 당도하는 봉평의 이미지와 유년 시절의

억과 경험이 그의 문학관에 향토적이고 낭만적인 서정성을 나타내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죽은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 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온통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듯이 흐믓한 달빛에 숨

지경이다. 붉은 대궁의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우리나라 문학이 이만한 서정성의 아름다움이 또 있슬련가??

대부분의 문학에 性의 아름다움을 표출하듯이 " 메밀꽃 필 무렵"에선 허생원의 애틋한 사으로

정천 개울건너에  물레방아를 은밀한 사랑의 장소로 만들었다.

이것이 작가 본인의 마음을 드러낸 한 단면일 것이다.

 

옛 부터 평창 땅은 메밀을 많이 심어 왔다.

하지만 메밀꽃은 다른 유희적인 꽃들이 다 지고난 다음 늦 여름에 피어 천대받는 서러움 에서도

소작 농부들은 메밀을 자기의 생가 뒷산 화전 밭뙈기에 심어 메밀 꽃이 떨어진 이를 갈아서

과 국수로 연명하는, 부자들은 먹지도 않지만 소작농에겐 꽃이 아니라 경는 곡식으로 사랑받

가난한 농부의 양식이었던 것이다.

 

화려하게 만발하던 꽃도 떨어지지 않는다면 꽃의 아름다움도 없을 것이다.

늦 여름 자락에 건부성이처럼 연약한 대공을 받침으로 피어나는 메밀꽃은 가을과 겨울을 리는

욱 처연한 이별인지는 모르나,  순백의 하얀 꽃들은 가난한 농부들의 순박한 음을 알아 주는듯한

느낌이다.

 

달밤에 산길을 걸으며 고백했던 허생원의 비밀스런 사랑의 이야기도, 달빛에 소금뿌린 듯분위

아니었으면 그런 고백이 가능하였슬까??

고단한 장돌뱅이가 하루 일과를 마치고, 달빛깔린 산길을 걸으며 소금 뿌린 듯한 순백메밀

며 내일 장으로 향하는 귀향의 허생원에겐 수십 년 숨겨온 어느해  여름의 물레방앗간에서의

사랑억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묘한 분위기였으리라.

 

또한, 달빛에 소금을 뿌린듯한 메밀꽃은 늦여름의 찌는 듯한 한낮의 더위엔 아랑곳없이 으론

벌써 가을이 온 듯한 느낌과 가을이 지면 겨울로 들어서는 이별의 휜 눈이 덮인 산하를 하는

것이다. 지난여름의 달콤한 사랑도 겨울은 먼 꿈속에서 그리워하는 이별의 애틋한 기다림이 담겨

을 듯하다.

 

헷세의 "차륜 밑에서"의 성의 암울한 표출이나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에서 고원에서 부족들의

하녀와의 하룻밤 탐욕의 삽화 등의 문학의 한 삽화가 아닌 한마디로는 전부 표현할 수 없겠지

가산 이효석 선생님의 문학관은 낭만주의로서 ,오히려 그 보다는 이즘(ism=사조)를 넘어서서 순수

학으로서 인간의 애욕과 자연, 적 윤리의 모럴에 연 속에 인간의 문제를 미적으로 다루는 

초적 본능의 사랑을 향토적, 서민적 삶 속에표출하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작품인것이다.

 

서양엔 "채털이 부인의 사랑"이란 작품이 性의 영역의 한계를 높이는, 인간 본성의 아름다움을 표현

다면, 이효석의 " 메밀꽃 필 무렵"은 자연과 인간의 조화 속에 性과 사랑이 박하고 애틋한 그리움의

간미를 대상으로 탐구하였던 것이다.

가 이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있는가??

 

일전 봉평인들의 가산 선생의 문학 세미나에서 어느 강사가 "내선일체"란 용어로 가산 선생모교

평창초교에 동상 건립문제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럼 이는 봉평인들 스스로 누워 침 뱉기 식이다. 자못 이에 봉평 문인들의 메세지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봉평은 가산 선생님의 이미지에 추태일 뿐이다.

 

나는 봉평을 가다 보면 다른 꽃들은 살지도 않을 척박한 땅에 제가 좋아 온산을 하얗게  너울을

드는 메밀꽃을 잊을 수 없다. 물론 봉평사람들의 노고의 덕분이리라.

그리고 나는 봉평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도 많았다.

 

80년대에 영월문화원장인 향토사학자 박영국 님의 덕분으로 김삿갓 묘를 확인하여 지금 영월의

명소로 만들었는데, 그때 가산 선생님의 묘는 영동 고속도로 확장으로 이장하게 되었는데, 군에

는 예산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골이지는 옆으로 비껴 이장하여 준다 하니 그분의 후손들이 파주 공

묘원으로 임시 이장하고 후일에 통일이되면 선친들이 계시는 평양으로 다시 재 이장하기 위함이라

그때의 강원일보 기사가 있었다.

 

가산 선생의 장녀는 두 번의 가산문학 전집 출간으로  이런 이장의 여력이 없었던 듯. 출판사를 내어

문집 출판으로 가산을 소진하고 지금은 천호동쯤에  전세살이를 긍긍하시며 병원비 걱정이 많으

다 한다.

그러나 가산 선생은 평양에서 작고하고 그분의 고향으로 묘를 정하였는데, 우리 평창군과 봉평인

 무관심으로 타향으로 이장하는 우를 부르는 것이다.

동 시간대에 영월과 평창의 생각의 차이점이 엄청난 차이의 효과를 부르는 것이다.

 

또한 봉평은 자랑스런 역사를 지니고도 이를 캐치하지 못하는가??

봉산서재와 판관대를 보라.

율곡의 아버님은 판관 수운으로 기실 그 직책은 팔도의 조세, 즉 세수로 걷은 쌀을 수로로 한양으로

운송하는 직책에, 그는 팔도를 출장 다니니 한양에 집이 있슬 필요도 없거니와 강릉의 처가와의

중간인 평인 것이다.

 

이것을 장인과의 약속으로 하고 신 사임당이 결혼을 한것이다.

당시의 봉편은 강릉땅이었으며, 1902년에 평창으로 이관하였으니 사임당이 봉평 살 때 평창 산다는

표현은 않 되었기에 그런 기록이 없으며 이와 아울러 봉평의 팔석정은 양사언이 3일을 놀다 갔다

하지만, 그것은 외지 평창으로 근무 이탈은 아니다,

 

그래서 봉평에 18년 거주하면서 율곡은 스승이 없고 모친 신 사임당이 가르친 것이다. 그렇다

전에 백옥포리에 청소년 수련관 건립시에 율곡수련관이라 명명하여도 좋았슬 것이다.

최소한 신 사임당이 젊은 시절 봉평의 산야에서 호연한 뜻을 기렸다는 자랑이라도 하여야 한다.

 

봉평은 구절스레 가산선생을 책하는 일이랑 삼가고, 윗글이 봉평에 하고 싶은 나의 이야기로 

의미를 추구해 더욱 아름다운 봉평을 희망한다.

 

 

         

 * 위 사진의 조각품이 가산공원에서 지금은 홀대받는다는데.....

이 조각이 이미테이션<모조품>이 아니라면 이 조각의 조각가는 춘천공고의 김의웅 선생일

것이다.

이 조각상이 본 자리에서 파내어 화장실 돌아 치워졌다는데... 보는 눈들은 있는 모양이다.

 

이 여인상이 일반적인 매너리즘에 빠진  것은 아니고 비 균형 같은 모습에 홀대받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것은 돌 조각의 돌의 무게를 받치기 위해 데포름 한  것이고, 이것은 김의웅

선생이 추구하는 예술세계의 씨리즈 작품의 표출인 것이다.

그의 작품세계는 생략하고. 문학가의 세계에 다른 작가의 세계 (김의웅의 세계)가 드리

워 진점이 얼룩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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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追 而 >

 

윗글에서 봉평이 가산 선생의 문학이 내선일체라고 말한 까닭은??

아마 2007년인가에 가산 탄신 100주년이어서 그의 일환의 사업으로 가산의 모교인 평창초교에 동상

건립문제를 놓고  봉평문학에서 자기네끼리 발의하고 문학 심포지엄을 개최하여 젊은 문학도 40명

모인 자리에서 어느 교수가 이효석의 문학은 내선동조란 것을 발표하여 모교인 평창초교에 동상건립 안을

저해 하였던 일이 있으며 이것을 초대하지도 않았던 평창의 엄기종님이 참석하여 그 광경을 전것입니다.

 

가산선배님의 후배들인 우리 평창초교 동문들은 누가 모교에다 동상 세워 달라는 일도 없었는데, 봉

사람들은 가산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 일환으로 모교에 동상건립을 발의하고 자기네끼리 가산 선생을 害하는

웃지 못할 해프닝을 벌리며 양심을 팔아 버린 사건이다.

 

이효석 문학이 내선동조로 친일이라면 봉평 메밀꽃 축제에서 이효석과 메밀꽃 문학관을 싹 도려내야 될 일

아닌가 합니다.

봉평사람들은 봉평 메밀꽃 축제를 전국에서 가장 긴 10일간하여 행사를 하며 이런 이중 논리를 말하

우를 범하는가 합니다.

 

분명한 것은 내선동조는 일전 역사편찬위원회의 친일파 매국노 규정에도 해당하지 않는 것으로 가산선생이

경성제대를 졸업후 무직시절에 일본어로 "녹색탑" 이란 단편을 발표하여 선배 유진오, 유치진으로 부터

야단을 듣고 반성하였던 점에 이 소설 "녹색탑"에 의해 내선동조라 합니다.

 

일제시대에 여러부분에 가끔 내선 동조란 말이 거론되는데 그중 하나인 것으로 그것은 분명 친일 매국노는

아니란 규정이 있는데 봉평은 이러한 이유로 가산선생님과 제 얼굴에 침을 뱉은 사건입니다.

봉평의 "메밀리아"님의 블로그와 다른 문학도들과 봉평 사람들중에 이 글에 이의가 있으면 언제든지 댓글을

달아 논쟁을 부탁드립니다.

                                                                                                             --- 후세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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