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정사를 돌아 본 나의 문화산책
이번 추석에 월정사를 다녀 보았다.
그간 나의 월정사 중창의 허구란 문화사적 이야기를 10여편 쓰면서 처음으로 방문하였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나의 에상의 글대로 그간 월정사 중창이 가져온 것은 가람배치의 너무나 복잡한 미로들 같은
공간감 때문에 천년 숲길을 걸어 올라갈때의 기분같은 그 옛날 고즈넉한 분위기의 절간이란 느낌은 묻혀버리고 도시적인,
복잡한 거리의 사찰이란 느낌을 받았고, 8각9층 탑은 주변 석물들이 그들의 주체인 동 탑에 비례하여 부피가 커지는 통에
상대적으로 메인 석물이 시계가 가려지고 작아보이는 등 안정적이지 못한 경향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가람배치에 있어서 이젠 세월이 과한 탓인지 산사에도 커피숖 바람이 불어서,,,
스님들도 네명이 샾에 앉아 그 비싼 에스프레소를 한잔씩... 또 벤취에 앉아있는 스님은 우리네처럼 스마트폰을 열심히..
글쎄요, 탄허스님이 살아계셨으면 무어라 한 마디 할까요??
아니요. 아무 말씀도 안하실것 같은데요. 왜냐면 그 스님 성품이 원래 그런지라...
그것을 신자도 아닌 후세가 어떻게 아냐구요??
먼 엣날에 오대산 국립공원 파동이 지나가고 아마 공보실에 볼인인듯, 서너번 우리집앞 신작로에 검은 세단 마크 화이브가
먼지를 일으키며 정차하곤 스님 몇 분이 다방으로 들어간다. 나도 따라 얼릉 다방 한쪽 구석에서 탄허스님은 어떤 분인가
주시한다.
그때, 약간 후리후리한 월정사 주지승 장만허 선사가 커피 주시오 하니, 그 옆의 탄허스님은 칡차요 하고는 아무말도
않는다. 그래도 그렇지 항간에서 커피는 이제200냥짜리 후식이 아니라 된장찌게보다 더 비싼데, 시주벌어 커피를??
이번 여행에 나는 8각9층 석탑을 한 바퀴 둘러 보았는데, 남동쪽(들어가는 입구 쪽)의 탑신이 정확하게 수직이 아니란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근자에 기울은 것이 아니라, 아마도 45년 전인 1970년 해체, 보수 공사시 똑바로 올려놓지 못한
것처럼 보여진다. 물론 팔각의 석물이라 360도 어느 방향에서나 수직 맞추기란 힘들듯도 하지만,,,
그러나 이러한 문제보다 실망감은 그동안 새로 조성한 가드레일, 모조 보살상, 석등등의 비정상의 측면이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8각9층 석탑은 옛 그대로인데 그 외의 부수적인 조각들이 너무 커져서 상대적으로 중앙의 메인 탑이 위축되고
작게 보여지는 착시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것은 난간석도 문화재로 취급되며 문화재는 문화재 2급 기사 자격증만 첨부하여 문화재청의 문화재 전문위원들의
심의를 통과하면 일반 건축물의 10배 이상의 값을 받을 수 있기에 문화양식은 의미도 모르고 크기에 비례하여 공사대금이
기하급수적으로 부풀려지는 현상 때문일 것이다.
일전 몇 편의 동 석탑에 대한 나의 글 중에 석탑 난간석이 2중기단이라 사진을 찍으면 맨 아래 층 옥개석도 가려지는 등
전체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없는 폐단을 지적하였고, 또한 그 난간석은 해인사 뒷마당의 탑의 난간석을 그대로 모방한
사각기둥이다 라고 질책하였다.
아래의 두 개의 사진에서 보면 현재의 2중 난간석의 탑은 탑신의 아래의 2중 기단석이 난간석에 가려져 있는데,오른쪽의
옛날의 철제 난간석은 탑신 전체를 한 번에 전체를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일전, 동 월정사 탑이 8각9층이 아닌 13층석탑이란 주장의 글 속에서 동 탑의 이미지화 하기에 2중 난간석은
시각적으로 복잡한 문제를 초래하기에 철재 난간석의 사진을 텍스트로 채택하였듯이 현 2중 난간석은 탑신을 가리는
영향의 문제가 있다는 해석이다.
http://blog.daum.net/kkks1/710
그리고 일반적으로 궁궐이나 왕릉, 또한 교각까지도 모양 좋게 만든 석물에서는 난간석이 모두 팔각기둥에 연꽃무늬를
형상화하는데, 동 탑은 팔각탑이면서도 기계화되고 간편한 듯한 사각기둥의 언밸런스도 동 탑의 모양새를 구기는 것이다.
해인사 뒤뜰의 탑의 난간석을 그대로 모방하려면 전문가들의 심의가 왜 필요한가?? 그러니 문화재 전문위원들이 심의할때
낮잠 잤다는 말인가??
또한, 동 탑의 앞에 공양을 드리는 석왕보살이라 일컫는 석조보살상은 높은 좌대 때문에 탑이 너무도 가려지는 현상에
그리고 그 조각 수법의 엉성함 중에서도 가장 무리하게 보이는 것은 고개를 숙이고 낮잠을 자는 듯한 형상이란 점이다.
일전 나의 글에서 보면 공양을 드리는 탑은 석가모니로서 보살은 그 대상체 탑의 전체를 바라보는 의미를 가져야 하는데
그래서 성보 박물관에 이전된 원작의 보살상은 이마를 쳐들고 동 탑의 전체를 바라보는 구성으로 동그랗고 짧은 얼굴로
천박한 듯 조각하는 기법으로 서민적 특징을 부여하며, 엷은 미소를 자아내고 있다.
왜 이런 게 호된 비평을 하는가 하면 이 문화재는 불가, 그들의 것만도 아닌 역사 속의 우리 모두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이 보살상의 얼굴의 특징은 길쭉하고 세련된 모습의 신라계 얼굴보다는 둥그렇고 표주박스런 백제계 조각상과 흡사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와도 틀린 특징을 가지며 이는 조각기술이 약함이 아니라 서민적 분위기를 자아냄인 것이다.
마치 원주 부론의 법천사의 "지광국사 현묘탐"의 부도에 옥개석 경사면 중앙에 조그마한 불상의 얼굴같은,,)
그럼 마지막으로 일전 글에서 지적했던 석등의 문제를 살펴보자.
그 글속에 인용하기를 석가모니는 부자의 수 많은 등보다 가난하여도 모두 하나씩 하는게 바람직하다고 말씀하셨기에
옛 불국사도 대웅전이나 어느 사찰들의 대적광전 앞 중앙에 한 기의 석등만 보였는데, 이젠 돈 잔치인가??
요즘 어는 절에는 장장 여섯 기가 한 눈에 보인다라고 썼으며, 월정사의 적광전엔 양옆의 두기가 조성되어 있다.
그러나, 그 크기가 너무 압도적이라 적광전도, 8각9층탑도 상대적으로 왜소하게 보임은 물론이거니와 이 석등은 용의
오브제를 사용하여 조각하였는데 이 용을 360도 구부려 마치 술병 속에 뱀을 넣은 듯 흉스럽게 이미지를 표출하고 있다.
우리가 인체 조각에서 누드를 대상으로 하는 것은 살갗을 보고자 함이 아니라 그 속에 근육이 있고 그의 지탱은 뼈이기에
뼈의 물리적, 역학적 포즈를 맞춰야 자연스런 이미지를 형상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석등의 용등은 구부려 접었기에 뼈가 부러진 기형으로 표출되지 그것이 데포름(변형-사물의 흐름과 특징을
자연스럽게 변형하여 표출하는 기법)은 아닌 것이다.
이 조각의 용이라면 용이 구부러지며 안으로 들어가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연스런 물리력이 적용되며 다시 외곽으로
나오며 돌아가야 제맛이고 인상적인 실제의 조각이란 점이다.
지금까지 월정사 중창의 모든 부분에서 이라한 점들이 부실하다는 느낌이다.
일전의 사진으로만 판독하고 지금까지 쓴 월정사 문화양식을 직접 보아도 그 글에 하나도 다름없는, 잘못 조성하였다는
인상을 받았다.
아마도 석수장이가 돈만 보고 돌을 쫄때 스님들은 무얼 했슬까?? 그들도 낮잠만 잤단 말일까??
이렇게 월정사 중창에 대한 나의 인상을 낮잠론으로 끝내긴 아쉽다.
더욱 웃기는 것 한가지 보탠다면 첫 인상에 탑의 가드레일 안쪽의 바닥엔 흙과 조그만 돌멩이에 풀이 듬성듬성 나있는
너무나 무성의한 점을 볼 수 있다.
조상 묘나 자기네 앞 마당은 잔디를 심으며 이곳에 잔디의 색상이 안 맞는다면 배사토라도 아니면 콩자갈이라도 깨끗한
성의가 부족한 점을 볼 수 있다.
다음 글로 쓸 월정사와 유대관계가 있는듯이 보이는 수항사지 절터의 탑엔 바닥이 맨흙으로 어지럽혀 있었는데 근자의
사진을 보면 문화재 예산을 들인것 같지도 않는 자갈이라도 조금 깔은 듯하건만 그나마 손길의 정성이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데, 월정사의 8각9층 석탑은 마치 맨 바닥의 어수선함으로 인해 마치 방치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느꼈다.
이러한 성의가 빠진듯, 게으른듯한 인상에 대고 미학적 결여를 이야기한들 무슨 소용이 있슬까 의심한다.
하지만 이제라도 이해가 간다면 잘못된 양식의 난간석도 걷어 치우고, 석조 보살상도 친근한 조각 폼으로. 석등도 다시금
조형의 논리에 부합하는 아름다움으로 태어나야 한다.
그래야 정상의 문화이고 먼 후손에게도 자신있게 물려줄 문화유산이지. 잘못을 덮어버리고 모른 체 한다면 지금의 조성양식은
관람자도 무식하게 만드는 것의 가식과 위선적인 행위로 불교 문화사에 얼룩을 만드는 일일 것이다.
그것은 신라 정형탑도 통털어 우리나라 1,200여기의 탑파중에 가장 아름다운 美를 창출한 동 탑, 8각9층 석탑의 불교
우주관의 이상을 저버리는 행위일 것이다.
월정사 문화의 중앙에 자리잡은 8각9층 석탑은 제작당시 양식 있는 석공들의 노력으로 그것은 석공이라기 보다 불교론에
정통하여 이상적 우주관의 표출하고자 하는 석수 스님들의 하나의 이상적 불교관을 잘 표현한 것이기에 천 년을 지나는
오늘에 보아도 장중하면서도 우아하며 리듬있는 장엄한 맛을 자아내고 있다.
먼 후일 이 시대를 돌이켜 본다면 당 시대는 문화사에 몰지각하고 양식이 떨어진 사회로 낙오된다면 동 시대가 비웃음을
당할 것이기에 본인은 무종교인이지만 그러한 시대적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 않기에 이 글을 쓰는 것이디,
오늘 당장 본인의 견해대로 시정될일 없다손 치더라도 먼 후일 나의 글은 그래도 최소한의 양심과 이성을 지녔다고 평가될
것이다.
또 한편의 생각으로는 역사적 문헌속에 13층 탑이란 70년 해체, 수리 복원당시 감독인 정영호 역사학자나, 당시 기록관인
홍사준 문화재 위원은 그들의 레포트에서 13층이란 기록은 2중의 위, 아래 기단까지 잘못 헤아린 기록이라고 못 밖아 버렸다.
그것이 어떠한 논리의 이치에 부합되지 못하기에 잘못이라고 판단하고 그러한 기록을 남긴디면 몰라도, 자기의 역사 논리는
맞고 남의 기록은 잘못이라 규정한다면 그도 편견이고 아집이라 생각한다.
이 문제는 나의 예전 글속에 조선불교통사를 인용하고 또한 탑의 조성 기법에 관한 나의 새로운 논리로 탑파의 제작원리와
그 이해를 상세히 밝힌 바 있다.
물론 나의 주관적 논리이지만 그것에 하자가 있는지?? 관심있는 학자들은 나의 이론을 토대로 연구를 바라는 바이다.
여기엔 고등 수학자도 필요하며 이 세상에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지의 공식같은 함수관계도 규명하여야 할 것이다.
( 각 층의 면석의 비례관계)
이러한 점은 나의 능력 이상이기에 관심있는 수학자들의 숙제로 남기며 이제, 나로서는 최종적인 글만 남기고 있다.
그것은 위에 지명한 두 사학자가 동탑은 고려 전기시대에 조성한 8각탑이란 고구려탑 양식이며, 북방형이란 표현과
또한 사람들은 동탑을 일반적으로 고려 전기의 양식이며 요나라, 원나라의 영향이라 하는데, 고려말기를 간섭한 원나라는
논리에 부합시킬 수도 없는 시간대인데 이렇게 마구잡이 글들에 이의를 제기하며, 동탑의 역사적 배경, 조성의 경제적
여건의 기반세력과 그 시대의 정치상황과 불교론 등, 이 모든것이 그들의 주장에 부합되지 못하기에 탑파 양식의 시기적
단순계산만이 아닌 동 탑의 사상적, 불교사적,역사적, 문화사적, 지리적, 정치적 모든 환경을 적나라하게 펼쳐 보일 것이다.
통일신라의 한 시대가 끝났다고 문화는 절단되고 다음 시대의 문화가 마치, 전근가면 명함의 타이틀이 바뀌듯 바로
찍어내듯이 바뀔 수 있는 것인가??
역사가들은 탑파의 부분적 양식만 가지고 그 시기를 부여하는데 그 양식의 현존 알고 있는 자료만 취급하며 그 생성,
소멸의 시기가 정확히 뚜렸한 것도 아닌데, 그 양식이 아직 출토되지 않거나 정립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그 추정 연대
위에 다른 것의 시작 연대를 계산한다면,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양식의 초기 문화의 연대값을 모른다면 그 시기의 형성에
다분히 문제가 있게 마련이다.
이러기에 하나의 유물로 그 시대를 잡는 발판을 마련한다면 그것은 오차 값이 있슬 텐데 역사학자들은 하나의 양식에
다른 하나를 계산한다면 자칫, 시간 단위의 타성에 젖은 매너리즘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기에 나로서는 그들의 주장인 고구려 계통도, 북방형도 또한 이방이라는 괄시도 동의 할 수 없기에 새로운 이론을
제시 할 것이다. 그래서 동 탑이 선진문화의 수입과 동시 통일 신라의 4각3층 석탑, 일명 정형탑이라는 탑을 넘어서는
최고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미학을 서술할 것이다.
통일신라의 4각3층 석탑의 명칭을 정형탑이라 붙이는데..정형이란 무엇일까??
꼭 그것만이 이상적 가치의 기본이란 뜻인가?? 이러한 고정관념들은 아마 우리들의 고지식한 한 단면이란 점이다.
과연 그 탑만이 정형이라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FM이란 말로 스탠다드의 기준 탑이란 말인것인데.. 그 스탠다드는
무슨 잣대로 규정했단 말인가?? 그렇게 고정관념에서 바로 보면 월정사탑은 이방이 되는 것은 아닐까??
이제 마지막으로 나의 월정사 8각9층 석탑 이해의 마무리 편에서 동 탑의 불교사적 배경에 신라에서 고려로 넘어오는
역사속에 월정사 홈피의 두타승 "신의"는 구산선문 중 강릉의 구정면의 굴산사지의 사굴산파의 범일국사의 제자였으며,
그는 수항리의 두타사에서도 거처 하였으며, 이 두타사엔 원주 부론의 법천사지에 부도가 있는(지광국사 현묘탑)
지광국사 "혜린"도 거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혜린은 고려 문종의 왕사로 나아가 국사가 되었으며 지금은 폐사지인 법천사지엔 국보 101호의 '지광국사 현묘탑'과
국보 59호인 현묘탑비가 있다.
정말 한문 그대로 현묘한 부도로서 페르시아의 아라베스크 문양까지 조각되어잇는 빼어난 조각작품이라 이를 일제
강점기에 왜넘들이 분해하여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적발되어 1915년에 반환되어 지금은 경복궁 서편의 고궁박물관 옆
공원에 자리하고 있다.
작금의 학자들은 석조 조형물의 부분 양식이나 장식분의 모양 분류에 따른 고증만 하였지만 월정사 홈피에도 짤막하게
동 탑은 송나라 양식을 따른 것이란 단어만 기록되어 있는데, 아직 어느 책이나 공식 기록에서 이렇게 송나라의 영향이라고
기록하는 곳은 없는데 월정사 홈피는 이례적인듯 하다.
하지만 일반 사학게의 논리에 나로서는 이 부분들의 불교사적인 사굴산파가 고구려 양식을 어떻게 계승 했슬까 하는 의문에
대하여 이에 반증들의 당위성을 쓰고자 한다.
사학 전공도 아닌 나로서는 문헌의 고증도 어렵지만 지금까지 대각국사, 보조국사, 범일국사, 각종 탑의 양식의 변천 등
다양하게 찾아보고 있다.
나에겐 "신라 천년사"란 옥편보다 더 두꺼운 책이 있었건만 분실되었는지 아쉬움도 있고, 송나라 문화를 찾고자 그간 많은
서적을 뒤져 찾아보았건만 울 나라 사람들은 정치만 신경쓰는지, 그래서 사학자들도 정치만 가르치려 하는지 송나라하면
왕안석과 신법당 이야기만 자세하지, 중원에 200년간 자그마한 나라였지만 중국 최고의 경제력 기반과 그로 인한 문화의
발달등 중국의 로마인 송나라에 대한 기록은 고교생 참고서에도 취급되지 않는, 아마도 우리 사학계에선 영문도 모르는듯
하다.
그런데 어느 문고판 같은 책 "중국 오천년사" 책 중편 한권에 송나라 문화가 조금 담겨있다.
고려 초에 선진문명인 송나라 문화의 유입과 범일국사 현묘탑의 조각수법 등 다양한 이해로 월정사 8각9층 석탑의 나의
이해를 피력하겠다.
그리고 다음장에선 지광국사 혜린이 거처한 진부면 수항사(두타사)의 탑과 지광국사의 현묘탑, 월정사 8각9층탑의 연관의
고리는 있슬까?? 지금 옥개석 2층만 남겨진 수항사지 탑은 몇층이었슬까?
일전 평창군청에 근무하시는 "도리천"님의 사진을 보고 나는 면석이 빠진 옥개석의 탑이라면 13층 탑이라야 한다고 했는데
그 블로그엔 얼마전 수항사지의 탑에 다시 사진이 올라왔다.
그곳엔 예전에 보지 못했던 사각의 돌이 탑 옆에 놓여져 있는데 4귀가 나온것은 탑신석의 우주인 것이다.
그러면 지금 두개의 옥개석은 다시 주워 올렸지만 두 옥개석의 제 위치가 아닌듯한 문제가 많은 것이다.
이 탑에 관한 올바른 추리를 할 것입니다.
이 사진은 어느 블로그에 월정사의 또 다른 탑이 존재했었다.
아래의 현 8각탑의 옥개석 아래 3단 받침 중 중앙 받침이 좀 더 크고 라운드되어 있는 것을 주시하여 위의 폐 옥개석
사진엔 받침 3개 크기가 동일하다 하였는데, 이는 폐 옥개석받침도 중앙 것이 크고 라운드형으로, 옥개석 좌,우의
가장자리에서 보면 직각이 아닌 45도 쯤으로 깍여 돌이간 것이 보인다.
아마도 1970년 동 탑을 해체하고 개,보수 공사시에 맨 아래서부터 1,2,5,9층의 석탑이 파손이 심하여 새로 제작하여
바꿨다는 기록과 그것인지는 지금 월정사에서 확인할 수 있슬 것이다.
그런데 폐 옥개석이 크기가 거의 비슷한점은 나의 이론대로 3층 석탑은 기울기값(옥개석의 체감율 감소값)이
대부분 13도이내로 현저하지만 월정사 탑은 다층탑이라 그 값이 7도 이내이기에 위와 아래의 옥개석 크기값 폭이
좀 작기 때문에 우선 볼때 그 공사시 폐사한 옥개석인듯 하다.
그렇다면, 이 옥개석이 옛날 탑의 원형이라면 나의 의문중의 하나인 9층 옥개석의 찰주구멍이 과연 천년전에 처음
조각 당시 것이었는지?? 아니면 아직은 가상이지만 13층 탑이 무너지고 9층에 다시 구멍을 뚫어 찰주를 끼웠었는지??
이 옥개석을 뒤집으면 풍화가 적어 쉽게 육안으로도 그 구멍이 동탑 조각때의 구멍과 같은 것인지 이질감나는 것인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간 월정사의 새번의 화재로 인해 모든 기록이 소멸된 지금, 이 찰주구멍의 확인으로 동 탑의 원작시 9층이었는가
아니면 13층의 판단의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아니면 현존 탑의 9층 옥개석은 70년 보수공사시 새로 조각한 것이기에
의미가 없고 8층에 것을 확인해야 가능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 초에 이능화 선사가 집필햇고 육당 최남선이 감수한 조선통사에 동 탑이 13층 탑이란 문헌의 오류유무를
판단하기에 앞서 이러한 대작의 탑을 조성함에13층의 추구함이 하나의 조형물에서 가장 완벽한 또한 이상적인 불교관을
정립하였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13의 숫자의 의미는 다음 원론에서 해석할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아래의 사진은 경복궁내"지광국사의 현묘탑"이다
폰카라 선명하질 못해서 아래에 어느 블로그에 복사금지를 무단으로...
(우리는 유료도 아니면서 금지까지??)
위 사징에 옥개석 전각의 중앙에 조각된 조그마한 불상이지만 이 얼굴의 이미지는
월정사 8각9층탑의 석조보살상과 흡사하게에,,,
다음 언제 줌으로 확대해 찍어 비교한번 해 보이겠습니다.
----------------------------------- 이상, 월정사 답사의 소견을 마칩니다 -----------
* 산야...
동창생중엔 산야만 내글 끝까지 읽어줘 고맙다.
읽지도 못하는 팅구넘들,,, 빈정거리고 주접만 ..
자쓱들,, 그러다 망우리 가면 양지가 아닌 음지 밖에 더 가겠냐...
산야,,, 그런데 우리는 말이다, 종전 나이 60에서 이젠 자기공명과 레이져의 발달로 암은 거의 박살나 가고있으니
이제 평균수명은 90살이 되어 30년이 보너스로 더 주어진다 한다.
앞으로는 혈당의 아연 결핍이 해결되고, 게놈이 인간 손 아래 떨어지면 인간 최대의 수명은 150실 까지 바라본다는데
우리가 앞으로 30년 더 사는 시간대에 그런날이 올 수 있슬수도..
그 나이를 씨알에스는 이길 수 있을까??
씨알에스가 효력을 작용하지 못한다면 그건 남, 녀의 구분이 아니라 그냥 중성의 인생....
난 그때까지 살고 싶지는 않다.
그런다고 막상 지금 죽는다면 배가 아파 못 죽겠다.
보너스 30년은 타 먹고 죽어야 할게 아닌감??
공짜라면 자다가도 번득 뛰쳐나가는 우리들,,
인간 최대의 보너스를 못 타먹으면 얼마나 서운하겠는가??
산야....
몹쓸 부위도 떼어버리는게 인체엔 큰 충격이다.
잘 하고 건강하시게나...
그리고 응암 그 동네, 응암굴 전사 이야기가 나의 글과 다른 이야기들 있었다면 알궈주길,,,
굳드바이.
평창중,고 22,25동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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